栗隱 金佇先生 行狀
栗隱先生의 忠節을 追慕하는 詩題를 위한 行狀을 後孫이 쓰기에는 그 客觀性이 缺如될까 몹시 저어되더니 마침 朝鮮 初期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學者로 알려진 尹別洞(諱 祥)선생이 남긴 율은 선생의 行狀이 있기에 이를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삼가 살피건대 公의 姓은 金 諱는 愻, 字는 忠國 栗隱은 號이고 盆城人(金海古號)이다.
高麗 忠烈王 30년(1034)10월 4일 長興府 碧溪里에서 태어났으며 7세에 이미 算術에 能通하였고 10세에는 글짓기를 좋아하였으며 12,3세에 聖賢의 뜻을 思慕하여 修身의 學問에 專心하였다.
15세에 丹山의 禹倬 易東先生을 찾아 배움을 請하니 선생이 그 그릇의 깊음을 알고 중히 여겼으며 四書三經을 배움에 정성을 다해 탐구하였고 性理學問을 밝게 講論하니 선생은 公의 才藝를 朝廷에 알리었다.
19세인 忠肅王9년(1322)文科에 及第하여 通仕郞이 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며 松都 保定門 밖으로 移居 하였다. 忠肅王15년(1328)부터 固城 順天 靈光 등지의 敎授를 지내고 南原 監務 刑曹正郞 겸 校理修撰 禮曺正郞 知製敎 吏曹正郞 知製敎 겸 都總府副總管 成均館司藝直 겸 集賢殿知製敎 長興府小尹 順天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351년에 卽位한 恭愍王이 元의 지배를 벗어나 高麗國權回復을 위한 背元改革政治를 단행하자 元나라는 恭愍王을 廢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격분한 公은 使臣을 따라 元 朝廷에 나아가 그 부당성을 강하게 諫하면서 끝내 굽히지 않다가 南荒으로 流配되었다가 一年 만에 本國으로 돌아왔다. 王은 龍床에서 내려와 공을 맞이하였고 친히 御酒를 내렸으며 本名인 佇를 愻으로, 字를 忠國으로 下賜하였으니 愻은 恭敬과 義理를 그리고 忠國은 나라사랑의 愛國을 의미함이었다.
恭愍王5년(1356)特命으로 門下侍中이 되었고 이듬해 德寧과 慶昌府尹 五部儒學敎授 成均館司成 兼 政堂文學 寶文閣知製敎에 올랐다.
恭愍王10년(1361)紅巾賊이 侵入하니 高麗軍은 都城을 지키지 못하고 公은 甫州(醴泉) 福州(安東) 尙州 사이로 내려오는 御駕를 扈從하면서 醴泉과 緣을 맺었다. 御駕가 還都한 후 恭愍王14년(1365)禮部尙書 검知中樞府事 政堂文學으로 있으면서 石灘 李存吾와 더불어 辛旽을 排斥하는 疏狀을 올렸다가 珍島로 流配되었다.
그 후 放免된 公은 恭愍王17년(1368)成均館大司成 藝文館大提學 工曹參判 겸 修文殿 知製敎 同知中樞院事 겸 成均館大司成 工曹 刑曹 吏曹 禮曺 典曺 겸 修文殿學士를 두루 거쳤다. 恭愍王 23년(1374)洪倫 崔萬生이 변을 일으켜 王을 弑害하니 公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輓狀을 바치고 痛哭하였다.
巍巍聖德繼先王 五百年來世道昌
早增太學招賢者 晩築氷城退賊羌
이듬해 1375년 朔寧으로부터 내려와 殷豊 巳洞 일명 뱀골 陽地 바른 곳에 집을 짓고 栗隱居士라 自號하고 陶靖節을 追慕하여 採薇歌에 당시의 심경을 남겼다.
終朝採採吾安適, 今見國事淚滿巾
이 때 부터 뱀골이 밤실로 되어 하리 栗谷으로 洞名이 정해졋다.
公이 75세인 禑王4년(1378)大護軍忝政을 除授받았으나 이듬해인 1379년 벼슬을 그만두고 殷豊栗谷으로 내려오면서 氷城이 가까워지자 착잡한 심정을 다음의 싯글(詩) 담았다.
昔年大駕南遷兮 咫尺氷城路不迷
滿壑기聲松自者 暮天落日鳥空啼
이듬해 1380년 朝廷에서는 公을 豊城君에 封했다. 公은 北窓圖와 採菊圖를 栗林의 北쪽과 東쪽에 걸고 마음을 의지하며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싯글(詩)에 담아 冶隱 吉再에게 보내며 스스로의 근황을 알렸다.
殷山盤水卜幽居 夕月朝雲志節餘
同學故人如問我 栗林深處臥看書
公은 이때 殷豊巳洞마을에 定着의 意志를 굳히고 禑王11년(1385)南下亭을 짓고 學士庫를 세워 南下誌를 지어 자손에게 이르기를 “ 이 책이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後世에 증빙의 사료가 될 것이니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깊이 간수하여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라”면서 新羅開國公(諱 金庾信)이래의 家乘을 닦았다.
한편 이 무렵 대륙에서는 元나라가 쇠약해지고 새로 일어난 明나라와 高麗 사이에 鐵嶺衛 귀속 문제를 가지고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1387년 明나라는 高麗에 대해 철령 이북을 원래 元나라에 속하였던 땅이니 이것을 요동에 귀속시킨다고 정식으로 통보해왔다. 이에 격분한 최영(崔瑩)은 중신회의를 열어 명나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그 세력이 커지기 전에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철령에서부터 요동까지 70여 개의 병참기지를 설치하도록 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에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민족의 숙원인 고구려 옛 강토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뜻을 품고 있던 이태조(李成桂)는 실지 회복을 위한 이 민족의 마지막 기회를 버리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1388)요동정벌군의 창끝을 개경으로 돌려 우왕과 최영을 비롯하여 이색 등 고려의 충신들을 몰아내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군사와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미 85세의 국가원로인 栗隱公은 기울어져 가는 조정의 정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비감해 하던 어느 날 울분을 달래고 폐왕 禑를 위로할 겸 전 부령 鄭得厚와 함께 여주 우왕의 유배소를 찾았다. 이 때 왕은 쓸쓸하게 눈물을 흘렸다. 공은 李成桂를 제거하고 고려왕조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鄭得厚와 더불어 팔관일 전야에 이성계의 집 담장을 넘었으나 미리 기다리고 있던 순군들에게 붙들리어 갖은 악형 끝에 9일 만에 殉國하였다.
이때 公의 나이 86세였으니 절세의 충절과 문무의 겸비가 아니고서는 안 될 殺身成仁의 수범이요 義의 실천이었다. 이것이 고려 최후의 우왕복위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