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 김처선의 사랑, 그리고 운명
아! 어찌 한 사람의 운명을 이리도 잔혹하게 짓 밟으시나이까 하늘이시여
태어나자마자 생모와 이별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위하여 스스로 남성을 거세하여
내시가 되었던 사람.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남자이기를 포기하면서 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그토록 사랑했던, 아니 영원히 사랑하는 여인이 왕과 합방하는 첫날밤을
창 밖에서 지켜야 하는 얄궂은 운명.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그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약을
들고 가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은 드디어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얽힌 사연 때문에 愛憎애증
으로 교차했던 生母생모에게 사약을 먹여야 하는 극악한 신의 저주의 굿판에 던져지는 주인공
이 되었던 사람. 아! 아! 자기 목숨보다 더 귀중히 지켰던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 임금 연산을
위하여 그만큼 충언을 아끼지 않았건만 그의 화살과 칼을 받고 죽음을 맞고도 모자라 四肢
사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호랑이 밥으로 던져졌으니 …
1. 천한 내시가 임금에게 덤벼들다
연산군에게 할머니가 되는 인수대비의 상사가 났을 때 왕은 거상 입기가 성가시어서 삼 년 간
달수를 날짜로 대신하여 이십 칠일 만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자기만이 그리할 뿐 아니라 삼년
상을 일체로 금하였다.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던 환관김처선
(金處善)은 연산군이 즉위한 뒤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던 중 1505년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연산군에 의해 직접 다리와 혀가 잘리고 죽음을 당하였다.
비록 삼 년 상을 제 멋대로 폐하였다고는 하지만 다른 때 같으면 여전히 대비의 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처용놀이를 하며 기생들과 음란하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충직한 처선이
참지 못하고 편전 뜰 아래 나아가 서서
보며"늙은 것이 소리도 크다."
"전하, 늙은 놈이 여섯 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 통해 전하처럼 음란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가뿐 숨을 몰아 가지고
어디 있습니까. 또······"
죄악을 글 읽듯 하려는 것을 보고 와락 나는 분을 걷잡지 못하여 벽에 걸린 활을 떼어 큰
소리로 직간하고 있는 내시를 겨누었다.
활시위에 살을 먹이자마자 쏘았다. 그의 갈빗대가 맞았다. 그러자 그는 잠깐 입술을 악물었
다가
"조정대신도 장난하듯 살륙하시더니 저 같은 천한 늙은 것이야······"또 한 살을 가슴에 맞은 그는 마당에 자빠져서
아픔을 참는 모양을 들여다보면서"일어나 걸어라!"
그는 왕을 올려다보며"마마는 다리 없이도 걸으십니까?”
부드득 갈며 그의 배를 가르고 환도 끝으로 창자를 꺼냈다. 그래도 시원치 못하든지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호권(虎圈) 속에 있는 호랑이의 밥을 만들게 하고 김처선이란 곧 처(處)자
까지 통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여름 절기의 하나인 處暑(처서)의 처가 김처선의 처와
같다고 하여 처서를 바꾸어 조서로 고치도록 하였다.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이지만
천한 내시가 임금에게 덤빌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부끄럽고 통분한 마음
깨끗한 청량수에 씻어도 지워지지 않으리
이런 시를 남긴 연산군도 김처선의 죽음을 무릅쓰는 직언 즉 바른 소리 앞에는 질렸던 것이
틀림없다. 인면수심의 연산군이 스스로 잔학함을 인정하고 있고 또 부끄러웠음을 고백하고
있음을 보건대 바른 말이 날카로운 칼 보다 더 아프게 사람을 찌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君平曰 (군평왈)
口舌者(구설자)는 禍患之門(화환지문)이요 滅身之斧也(멸신지부야)라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이요 몸을 파멸시키는 도끼이다
충성스런 신하들의 바른 말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연산군은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 글을
새긴 패를 가슴에 차고 다니게 하였다.
2. 칼의 노래 입술의 노래
관운장(關雲長)의 청룡도(靑龍刀)와 조자룡(趙子龍)의 날낸 창(槍)이
우주를 흔들면서 사해(四海)의 횡행(橫行)할졔 소향무적(所向無敵)이언마는
더러운 피를 무쳐시되 엇지 한 문사(文士)의 필단(筆端)이며
변사(辯士)의 설단(舌端)으란 도창검극(刀槍劒戟) 아니쓰고 피업시 죽이오니
무섭고 무셔울손 필설(筆舌)인가 하노라
김영(金鍈) 청육(靑六) 746
1)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는가
자신이 바친 독약 사발을 들이키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린 원자 연산군을 위기에서 지켜내었던 김처선은 그 연산군이 즉위한 뒤에 포악한
임군으로 돌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하다가 못내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당시의
허다한 문신, 장수, 선비들조차 못하는 연산군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연산군에 의해 직접 다리와
혀가 잘리고 죽음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양자인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도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도 없앴다.
연산군에게 대들었던 천한 내시, 김처선이야 말로 불의를 보고도 입을 닫았던 당시의 벼슬
아치나 사대부 중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남아대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수양성(誰陽城) 월휘중(月暉中)에 누구누구 남자ㅣ런고
추상(秋霜)은 만춘(滿春)이요 열일(烈日)은 제운(霽雲)이로다
암으나 영웅(英雄)을 묻거든 이 긔러라 하리라
해일 422
정사는 뒷전이요 늘 장녹수와 흥청망청 놀고 있는 걸 보다 못한 내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찌 주색을 탐하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색을 탐
하는 일을 그만 하옵소서" 라고 주청을 하니 화가 난 연산군이 그를 감옥에 가두고 장100대를
때렸다. 김처선. 그는 그렇지만 임금의 불의를 보고는 일신의 영달과 임금의 총애를 바라보고
입술을 닫고만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왕과 내시의 관계가 아닌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여인의 일점 혈육에 대한 피보다 진한 애정과
연민으로 영민한 임금이 되어 만조백관이 우러르는 그런 왕도를 걷기를 염원하였던 김처선의
뜨거운 충심은 급기야는 왕도를 버리고 한없이 망가져 가는 임금 연산군을 향하여 온몸을
던져 죽음으로 그 비행을 멈출 것을 간원한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충심을 살펴볼 겨를이 없는 연산군은 드디어 그에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을 극악무도한 복수의 칼을 휘두르고 만다. 화살을 쏘아도 입술을 닫지 않는 그의 피맺힌
절규와 눈빛을 바라보며 미쳐버린 연산군은 칼을 뽑아 다리를 자르고 입술을 짓이기고
그러고도 모자라 그의 시체를 호랑이 우리에 던져 넣게 한다.
사방 강력한 적으로 둘러싸인 어린 연산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가진 고초와 위험을 이겨
내고 최후까지 싸워 연산군을 마침내 왕좌의 위에 오르게 했었던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상
치고는 도저히 이럴 수 없는 불행의 극을 다한 두 사람의 인연의 종막을 맞이하게 만든 운명의
저주를 5백 년이 지나서 우리는 지금 떨면서 보고 있는 것이다.
유방이 죽자 여태후는 유방의 사랑을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유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음)에 감금한 다음
척부인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재갈을 물려 방아를 찧게하는 벌을 내린다.
유방이 살았을 적에는 질투심이 타올랐지만 억제 할 수밖에 없었던 여후는 이제 것 잡을 수
없는 잔인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척부인(戚夫人)을 잡아놓고 그녀의 옷을 벗기고 힘이 센
내시들로 하여금 두 다리를 잡아당기게 한 다음, 남편 유방과 관계를 가졌던 음부(陰部)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죄수들에게 척부인을 욕보이게 던져놓았으며, 강제로 독약을
먹여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고 코를 발라 뒤집고 귀에는 유황을 붓고 두 눈까지 뽑아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발을 차례로 잘라 반죽음시킨 다음 '돼지우리' (<사기>「여태후본기」
에는 '측중(厠中) 이라 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를 분통(糞桶)이라고도 풀이함) 에 던져 넣어
사육하게 했다.
당시에는 마치 제주도의 옛날 화장실 모양으로 "돼지우리 + 화장실"로 되어있었기에 여기에
그녀를 집어넣어서 똥과 오줌을 받아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하게 했다는데 참으로 사람의 목숨
이란 그토록 질긴 것인가? 그러고도 죽지 못하였던 척부인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련함을 넘어
서서 오히려 모진 목숨 때문에 질리고 만다.
그리고, 수시로 측근들을 불러다가 그것을 보여주면서 복수심을 달랬다고 하니 여태후는 진정
악녀의 화신이 아닐 수 없다.
"보아라! 저기에 사람돼지가 있구나. 먹이로 똥과 오줌을 주어라! “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아가서 8장 6절 중)
연산군이 김처선에게 내린 처단과 그 일족에게 가한 폭압적 처형이 물론 일개 여자의 질투심
에서 발호한 복수와 비교하기는 좀 무엇 하지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어찌 이리도 잔혹할 수
있는가?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의 죄를 추달하는 중에 세조는 이개에게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음성
으로 권한다.
“자고급금(自古及今) 두고 보면 충신열사 자손있나, 왕자비간(王子比干) 이름나도 이름은 전
하였으되 자손이 끊어졌고 백이숙제 두고 봐도 수양산 깊은 곳에 채미하고 죽었으니 그 무엇이
쓸대 있나, 이윤같이 어진이도 하사비군(何事非君) 섬겼으며 너는 어이 고집만 하느냐, 단종이
내 조카(足下)인데 삼촌되고 못할 소냐, 사직을 두고 보면 불사이군 하랐으나 족하위(位)를
삼촌이 하니 두 임금이 어이 되며, 한 자손 한 혈육에 분간이 별로 없다. 일월같은 너의 충성
나도 역시 아는 바라, 충신 이름 일반이니 부디 한번 항복하라.”
이런 세조의 당근질에도 일점 흔들림 없이 비록 평소 문약해 보이고 소심해 보였던 선비타입의
이개였지만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힘이 없이 꿋꿋이 사형의 형벌을 받기를
택하는 그 높은 의기 앞에서 똑 같이 죽음으로 연산군의 불의를 지적하고 연산의 폭압에 항거
하였던 김처선의 모습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들의 입술은 그 무엇으로도 닫게 할 수 없음을 명확
하게 보게 된다.
2) 설검순창(舌劍脣槍)과 설망우검(舌芒于劍).
고구려 봉상왕 5년 (296년)
“대왕마마,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仁)이 아니요,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忠)이 아니나이다. 신이 국상에 빈자리로 인해 등용된 이상 신하된 도리로 말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니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들으려 함이겠나이까.”그러자 봉상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가 혀를 내밀어 보거라.”어명이었으므로 창조리는 혀를 내밀어 보았다. “옛말에 이르기를 설검순창이라 하였다. 네 마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네 혀가 사람을 해치는
칼이니 이를 잘라버리도록 할 것이다.”설검순창(舌劍脣槍). 이는 '혀의 칼과 입술의 창'이란 뜻으로 입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조심하라'는 경고다.
“ 이봐라. 게 누구 없느냐.” 봉상왕은 소리쳐 주위를 지키는 군사를 불러 명하였다. “ 국상의 혀를 베도록 하라.”그러나 국상 창조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 대왕마마,고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설망우검이라고도 했나이다. 따라서 신의 혀가 잘리고
벙어리가 된다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나이다. “설망우검(舌芒于劍). 이는 '혀는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비록 자신의 혀가 칼에 의해서 베인다 하더라도 결코
하늘의 뜻은 베일 수가 없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봉상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때의 기록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 국상은 어찌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 하느냐. 다시는 그런 말로 나를 현혹시키려 하지 말지어다.”
이웃 초아님께서 어제가 처서라는 인사말을 보내와서 부랴부랴 오늘 이 글을 올립니다.
김처선의 충절 때문에 절기의 하나인 처서가 애먼 불똥을 맞고 고난을 받는 우수꽝스런 얘기가
담겨 있기에 다음 날 올리려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3. ‘그 놈의 헌법’
이 말을 조금 달리 써보면 ‘그 노 무 현 법’ 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노무현이 만이 아니다. 500여 년 전에 이미 연산군이라는 폭군이 할머니
인수 대비를 머리로 들이 받으면서 뱉기도 한 말이다. 꼭 노는 꼴이 어쩌면 둘이 이렇게도
많이 닮아있는가.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워 죽이고 픈 언론 가슴 한복판에다 대못을
아니 커다란 공이를 땅땅 쳐 박아 놓고 떠나겠다는 심뽀를 보면 암만 잘 봐 줄려고 해도
연산군을 옴팡 닮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산군은 자기의 어머니 윤씨가 궁중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사약까지 받게 된 것은 엄귀인
(嚴貴人) 정귀인이 성종께 참소한 탓이라고 하여, 어느 날 내전에 들어가서 두 귀인을
불러다가 뜰 아래에 세우고 다짜고짜로 몸소 철여의(鐵如意)를 쥐고 내려가서 대번에 머리를
쳐서 바수고 온 마당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마루 위와 뜰 위에 섰던 왕비 신씨(愼氏) 이하
여러 궁인들은 이런 끔찍스러운 일을 보고 기가 막히고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채 한참
동안 모두 섰던 곳에 못박힌 듯이 서서 고개를 돌리거나 혹은 눈만 가릴 뿐이었다.
연산군의 조모인 인수대비가 그 때 마침 침중한 병환 중에 이 일이 난 것을 알고 억지로 병석
에서 일어나 앉아 연산군을 불러다 앉히고 부왕(父王)의 후궁을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
냐고 준절히 책망하였다.
"무어요? 법이요? "
하면서 대비의 가슴을 머리로 받아서 대비는 일시 기가 질리고 숨이 막혔었다.
연산군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아니하여 정귀인의 소생인 安陽君(안양군)과 鳳安君(봉안군)
을 絶島(절도)로 귀양 보내었다가 뒤미처 사약을 내리어 죽이고 또 폐비사건에 참섭하였던
사람을 모두 大逆罪(대역죄)로 몰아 참혹한 벌을 내리는 등 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무덤을 헤치고 시체를 파내어 뼈를 바수거나 목을 자르거나 혹 성한 시신
경우 통으로 강물에 띄우게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잡아다가 모두 목을 베게 하고 그들의
죄를 동성팔촌(同姓八寸)에게까지 연좌(緣坐)시키었다.
열거한 諺文匿名書(언문 익명서)가 서울 저자에 나붙으며 이것이 바로 연산군에게 입문되니,
연산군은 죄인의 餘黨(여당)의 소위라고 결론짓고 평일에 밉게 본 언문 아는 신하들을 옥에
내리어 형벌을 가하는 한편 언문 같은 쉬운 글이 있는 것이 병폐라고 억지 논리를 펴서 세종
대왕 때 설치한 諺文廳(언문청)을 파하고 여염 여자와 궐내 나인까지라도 언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렇게 보면 꼭 노무현이가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하여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한다면서
다음 정권에서 빼지 못하도록 대못을 쾅쾅 박고 있는 처사나 연산군이 언문청을 폐지하여
바른 소리가 전국에 퍼지지 못하도록 연산군이 언문청을 폐지하는 조치나 매우 상통하고
있어서 노무현의 말로가 어찌될까 몹시 흥미롭다.
연산군의 말로야 이미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4.. 운명을 넘어서려는 안간힘
우리 역사에서 김처선이란 환관만큼 인간적으로 끝 모를 불행과 저주받은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일생을 마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의 출생연대는 미상 (?∼1505 연산군 11)으로 조선 초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全義).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였다. 1455년(단종 3)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어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
로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성종으로부터는 전어(傳語)에 공이 있고, 의술
을 알아 대비의 신병 치료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여 가자(加資)되고 상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김처선의 삶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생로병사와는 판이한 생애를 살았는데 그는 출생과정
부터가 영 판 다르다.
천만리 머나먼 길해 고은 님 여희옵고
내마음 둘대업셔 냇가의 안자시니
져 물도 내안 갓하여 우러 밤길 녜놋다
왕방연 (王邦衍)
계유정난 즉 사육신 사건이 있은 후 세조 3년 (1457년) 금부도사로 있던 왕방연이 어린 단종
을 귀양 장소에 호송하고 돌아오면서 괴롭고 애타는 심사를 읊은 시조이다.
김처선 또한 단종과의 얽힌 인연으로 출생부터 엄청난 불행을 맞는데 사람의 목숨이란 때론
정말 질기기도 하다.
20년 만에 고향 아버지의 집을 찾아 11명의 아들과 외딸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路中(노중)에서
야곱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도 아들 요셉 외에는 자식이 없었던 라헬이 배가 부른 몸으로 멀고
도 험한 길을 나섰던 탓인지 臨産(임산) 하여 심한 고통을 겪다가 難産(난산) 끝에 아들을 낳고
죽어 베들레헴 길가에 묻는 슬픈 얘기가 구약 성경 창세기 35장에 짧게 나온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야곱의 열 두 번 째 아들 베냐민이다.
김처선의 출생은 물론 베냐민의 태어남과는 많이 다른 환경이지만 비록 그를 낳던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고는 해도 훨씬 더 불행한 여건 속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김처선은 출생부터 義(의)와 不幸(불행)과 苦難(고난)이라는 운명적 가면을 쓰고 출발한다.
계유정난 이후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의 충직한 내금위무사였던 처선의 아버지
김자명은 세조 암살시도를 하려다 오랜 벗이었던 내시 조치겸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삭
의 처선의 어머니 한씨는 도주 중에 처선을 출산한다. 계속 도망 길에 오른 생모와 생이별을
한 갓난 처선을 쇠귀노파와 신딸 월화가 거두어준다. 처선은 월화를 친어머니로 여기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도봉산에서 독사에 물린 소화를 구해준 인연으로 반상의 구별 없이 글도 배우고 풀각시놀이
도 같이 하며 두 사람만의 추억을 쌓으며 성장한다. 수염이 자랄무렵 소화에게 가슴 설레는
느낌을 받던 처선은 연정을 고백하려 하지만 이미 소화에게는 연모하는 정인 박덕후가
있었기에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쥔 채 괴로워한다.
후궁으로 간택되어 정인과 헤어지게 된 소화는 상사병으로 앓아 누워 사경을 헤매는데 이를
보다 못한 처선은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하여 소화의 후궁간택을 막고자 궁궐의 실권자
내시부 수장 아버지의 원수 조치겸의 양아들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처선은 스스로 성기를
자르고 내시가 되어 궁중 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날 처선은 성종 임금님과 합궁할 후궁을 침전으로 데려오라는 명을 받는데 그 후궁이
소화임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여인이 군왕과 합궁하는 장면을
장지문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운명을 원망한다.
병약하던 중전이 죽고 소화가 두 번째 중전으로 간택되어 원자(연산군)를 출산한 뒤, 대비전
과 고부갈등이 심해지고 세간에서 낮에는 요순 같은 어진 임금이지만 밤이 되면 주지육림에
빠졌던 걸주 같은 패퇴한 임금이라는 주요순 야걸주(晝堯舜夜桀紂)라고 주변에서 쑤군댔던
성종 임금이 처선을 앞세워 야밤 궐밖 미행을 통해 기방출입이 잦아져 중전과 점차 멀어지게
된다. 홀로 밤을 새울 중전을 생각하면서 처선의 마음은 착잡하다.
처선은 시시때때로 후궁들과 대비전의 모함에 위기에 처하는 중전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중전이 옛정인 박덕후를 만나게 되고 어우동까지 연루된 함정에 빠지면서
결국 둘째 왕자를 출산한 며칠 후 아직 부풀은 젖가슴을 채 여미지도 못한 중전은 폐비가
되어 궁궐을 쫓겨나는 불운의 신세가 된다
이어지는 폐비의 왕자들에 대한 독살기도에 처선은 양내관에게 배운 약 처방술로 원자 융은
살리지만, 둘째 왕자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되어 죽는다. 왕자의 죽음을 알리는 처선의 눈물 앞에서 폐비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울음을 토하며
까물어치는데 처선은 그 자리에서 왕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군다.
얼마 뒤 왕실과 조정에서 원자를 폐위시키려는 논의가 무성해지자 처선은 백방을 다해 막아
보려 애쓰며 천신만고 끝에 어린 시절 벗으로 지냈던 명나라 사신 귀남의 도움으로 원자의
폐위를 막아내고 드디어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던 날, 처선은 폐비를 찾아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만...왕실과 조정에서는 세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생모에 대한 일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으로 폐비에 대한 사사가 결정된다.어명을 받은 처선은 사약을 들고 폐비를 찾는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여인, 자신의 남성을 잘라
내면서 까지 행복하길 빌었던 여인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운명 앞에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폐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처선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다.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폐비가 자신의 품 안에서 한 줄금 피를 입가로 흘리며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후 처선은
삶의 의욕을 잃는다. 병을 핑계로 궁궐에 나가지 않고 하늘을 원망하며 술로 세월을 달래던
그러던 어느 날 7살의 세자가 처선의 병을 걱정하여 위로 차 찾아온다. 처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폐비와의 약조를 지키고자 마음을 다잡게 된다.처선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린 일과 원자 폐위음모에 양아버지 조치겸과 생모 한상궁 등이
깊이 연루되어있음을 알게 되어 기회를 노리던 중 내시부의 개혁파 엄내관과 연합하여
결국 양아버지 조치겸을 내시부에서 쫓아낸다. 내시부수장에 오른 김처선의 추상같은 의기
와 자애로운 마음은 성종과 왕실은 물론 조정대신들과 사림파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최고
품계인 자헌 대부에 이른다.그러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한 뒤, 또 다시 생모 한상궁에게 사약을 바쳐 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고..또 자신의 온 몸으로 원자폐위의 위험에 처하였던 연산군을 지켜
내었던 김처선은 바로 그 연산의 폭정에 맞서 충언을 고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비록 중종 반정 후 그의 의기를 기린다면서 1506년(중종 1)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한들
호랑이 잇빨에 찢어져 흔적도 남지 않은 그의 유체를 눕힐 수도 없었으니 이 어찌 처절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출처: 중년의 사랑 그리고 행복 원문보기 글쓴이: e 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