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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학기 마태복음 제7강
마태 5:11-16(5:14,15)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4,15)
지난주 봄 수양회 때, 남산센타와 같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보니 말씀공부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2주전 6강을 공부했기에 지난주에 7강, 이번 주에 8강을 공부해야 했는데 지난주 8강을 먼저 공부했고 오늘 7강을 배웁니다. 그래서 6강 내용을 다시 기억해야 오늘 말씀 공부와 연결되리라 생각합니다.
6강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셨고, 제자들이 누리는 여덟 가지 행복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사람됨’의 문제 즉 인격의 문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로 복 되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고, 우리가 바로 복 받은 사람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던 중 예수님이 가르치신 여덟 가지 행복을 제 삶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 때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사람들로부터 욕먹고 박해받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욕먹고 박해받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은 영광스럽고 보람됩니다. 세상에서 예수님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양면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양면을 다 받아들일 각오를 함으로써 세상에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리라 (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지키기 위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려하고, 의에 주리고 마음 청결한 사람이 되려하며,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화평케 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하면 사람들이 칭찬하고 존경합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욕하고 박해합니다. 거짓이나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다 퍼붓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려하고, 의에 주리고 마음 청결한 사람이 되려하며,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화평케 하려 하는데, 도대체 왜들 그럴까요? 물론 그렇게 산다고 하면서도 그와는 거꾸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욕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답게 산다고 해서 욕먹지 않거나 박해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 주 목요일, 예린이가 보는 학습만화 중 <불멸의 이순신>을 읽다가 이런 일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란 점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예수님 믿는 분이 아니고 팔복대로 살려하던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려 할 때 칭찬 받기보다 욕 먹고, 모함을 많이 당했습니다. 무관시험 합격 후, 그가 하위직 병사의 인사담당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병조 정랑 서익이란 사람이 이순신을 불러 문중 사람의 승진을 청탁했는데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가 서익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순신은 얼마 후, 한성에서 충청도로 좌천되었습니다. 또 수군만호라는 직책으로 승진했을 때에는 마침 경차관으로 나온 서익의 모함을 받아 파직당합니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근무할 때는 수비 병력이 턱 없이 부족함을 알고 직속상관인 이 일에게 병력증강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무시당했습니다.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적은 병력으로 적을 통쾌하게 물리쳤으나, 병력증강 요청을 묵살한 책임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이 일은 모든 책임을 이순신에게 몰아 참형시키려 했습니다. 이순신은 모진 고문을 받고 간신히 참형을 면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선조 임금과 원균의 시기를 받기도 하고, 대소신료들의 모함을 받기도 하며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나라를 구하려 하고 임금께 충성하려 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려 하면 칭찬 받고 존경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박해와 모함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들이 의롭게 살려는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일말의 시기심 때문이요, 또 자기들의 이익이나 안위에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 생활 할 때, 신자들을 가장 괴롭히던 사람들은 불신자나 불교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본래 교회 다니다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자극 받고 회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시기심이 일어나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또 졸병이 교회에 가면 그동안의 허드렛일은 자신이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 불편하고 괘씸해서 그렇게 갈구는 것입니다. 현경목자는 조교들이 빈번히 늦게 출근하는 가운데서 항상 정시 출근하고, 직원들조차 책임감 없이 일하는 풍토에서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보려는 노력에 조금도 호의를 베풀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용하고 또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편을 겪는다면 그것을 참을 수 없어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자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맡겨놓고 돈벌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돈을 써가면서 아이들 맡겨놓고 대학생들을 돕거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친정과 시집 양쪽에서 욕 먹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술 많이 마시고 골 아파서 결근하는 것은 이해해 주어도, 교회 행사나 전도하는 일로 조퇴하거나 휴가를 얻으려 하면 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회식하고 술 마시고 노래방 가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즐거움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분위기 망치고 화합 깬다고 핍박합니다.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은 먼저 물질과 쾌락을 구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때문에 욕먹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중심이 생활인데, 신자들은 그 중심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두기 때문에 욕먹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도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핍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은 잠깐이고 영원한 하늘 나라가 있다고 믿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에 욕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먹지 않으려면 세상 사람들처럼 먼저 물질과 쾌락을 구하고, 사명보다도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고,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그로 말미암아 욕먹고, 박해받고, 모함 당하고, 오해로 인한 온갖 비난을 다 들어야 합니다. 결국 욕먹지 않고 박해받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가 아니면 욕먹고 박해받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가 하는 두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먹고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12a)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장학금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못 생겨도, 인간성이 더러워도, 공부만 잘 하면 수석입니다. 어제 민권목자와 대화하다보니 은행에서는 실적 좋은 사람이 상을 주로 받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상 탑니까? 천국은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기술 가르치는 곳도 아닙니다. 돈 많다고 자랑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권세 크다고 뻐길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 나라에서는 믿음 있는 사람이 상 받습니다. 세상에서 상장이라고는 구경 한번 해 본 적 없는 사람도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이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믿음은 그가 욕먹고 박해받을 때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욕먹고 박해받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 그 나라에서 상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먹고 핍박받는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 한 번 먹지 않고 박해 한 번 받지 않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욕도 많이 먹고 박해도 많이 받았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면 믿음이 떨어지고 타락했다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메시지는 뒷골목에서 압제받으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큰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직자들이나 정치가들은 그를 이단이라 정죄했고 별의별 죄목을 다 붙여 고소했습니다. 웨슬리는 그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에 의해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웨슬레가 말 타고 가면서 생각해 보니 지난 3일 동안 한 번도 그에게 벽돌이나 계란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말에서 내려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타락한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본 한 사나이가 웨슬레를 알아보고는 “저 감리교 목사를 이번에는 내가 손 좀 봐 줘야지.” 하면서 벽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벽돌은 엎드려 있는 웨슬레를 살짝 빗나갔습니다. 그러자 웨슬레는 “오 하나님, 제가 아직도 하나님 안에 있군요.”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먹고 박해받은 게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가 그렇게 좋으면 호적 파서 나가!” “싫다는데 왜 자꾸 성경공부 하자고 따라 다녀요?” 하는 말을 들어본 게 얼마나 되었습니까? 우리도 “오, 하나님 제가 타락한 것은 아닙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근래의 ‘안티 크리스천’의 분위기 가운데서 욕먹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믿음마저 잃는 게 아닐까 두려워집니다.
사도 바울도 전염병 같은 자다(행 24:5), 미쳤다(행 26:24)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먹기를 탐하는 자다(마태 11:19), 마귀 들린 사람이다(마가 3:30)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보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욕먹고 박해받고, 오해받고, 모함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욕먹지 않고 핍박받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각오를 새로이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존경 받고 싶은 마음과 명예심이 커지고, 이제는 안정되야 한다 생각 합니다. 더 이상 욕먹기 싫고, 핍박이나 모함 받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이런 일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2.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12-16)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욕먹고 핍박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먹고 박해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먼저 13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또 14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먼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데 꼭 필요한 조미료입니다. 갈비를 설탕 찍어먹으라고 하면 몇 대나 먹을 수 있을까요? 생선을 소금뿌리지 않고 그냥 구우면 먹지 못하고 토해버리지 않을까요? 소금 없는 김치는 또 어떻겠습니까? 커피는 몰라도 대부분의 음식은 소금이 없으면 맛이 나지 않아 먹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이 살맛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또 부패를 방지하는 구실을 합니다. 김치가 오래 동안 보관될 수 있는 것도 그 재료가 되는 채소를 소금으로 절였기 때문이요, 생선도 소금으로 간을 해야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채소나 생선은 부패합니다. ‘부패했다’는 것은 본래의 기능과 맛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셨을 때의 기능과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소금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는 많은 인구가 도시로 집중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사치와 방탕,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처처에 투견 투우 투계가 성행했고, 곰과 개의 싸움판이 벌어지고, 강도 폭행 도적질 등의 범죄가 만연하고, 감옥은 온갖 죄수들로 차고 넘쳤다고 합니다. 이럴 때 존 웨슬레가 양성한 신자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 신자답게 살므로써 영국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썩어 가는 영국의 소금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어떤 분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들을 전부 불러다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빚문서를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또 어떤 분은 첩을 내보냈고, 술과 노름을 끊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담뱃대까지 꺾어버렸습니다. 어떤 부인은 부리던 여종의 노비 문서를 태워버리고 종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갈 데가 없다고 하소연하자 여종을 딸 삼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다 말하려면 끝이 없는데, 이런 이들이 소금이 되어 봉건주의와 양반정치로 인해 부패한 한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켰습니다.
경희문 센타의 이효구 목자는 사업을 하면서도 접대를 하지 않았고,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냈습니다. 남산센타의 반 베드로 목자란 분은 회사에 들어가 회계 업무를 보면서 가짜로 영수증을 만들어 회사 돈을 조금씩 빼내 쓰곤하던 관례를 배격했습니다.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고 욕도 좀 먹었지만 회사가 조금 깨끗해졌고, 깨끗해지니까 도리어 편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합니다. 크리스천 교수들이 모여 운영하는 한동대에서는 무감독 시험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커닝 만연한 대학가에 소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경목자가 정시 출근하고 자기 업무에 충실하면 경기대학교에서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전 신문에 대통령 수석 비서관들의 재산이 발표되었는데, 모두가 돈이 엄청나게 많은 데다 그 중에는 열 한 살에 자기 돈으로 땅을 샀다는 사람, 자기가 농사짓지 않으면서도 농사짓는 것처럼 가짜 서류를 꾸민 사람, 땅 투기를 위해 위장 전입한 사람 등등이 있다는 사실들이 또다시 신문에 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살맛이 나지 않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런데 국민일보에서 그와는 다른 기사를 읽었습니다. 스물 여섯 살 처녀가 100명의 독거노인을 모시고 34명의 초중고생들을 돌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4년째 매일 독거노인들의 점심상을 차려주고, 일요일 저녁에는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 30여명에게 저녁 도시락을 배달해 줍니다. 또 가난한 집안 아이들에게 빈곤을 대물림해 주지 않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4년째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대학에 붙기만 하면 등록금을 대준다고 약속했는데, 올해는 그만 세 명이 합격해버려서 등록금 천만 원을 마련하느라고 혼났다고 합니다. 이 공부방의 아이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밝다고 합니다. 그 처녀는 100명의 노인들과 34명의 학생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강부자 비서관들’의 얘기를 읽다가 이런 일을 읽으면 살맛이 나고 마음이 밝아집니다. 사람들이 종종 우리 목자들의 얼굴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밝고 환한 것을 보고 성경을 공부하거나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빛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맛을 내고 빛을 비출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맛을 내고 빛을 비추려면 먼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욕먹고 박해받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여덟 가지의 복을 누릴만한 내면성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희생해야 합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녹아야 합니다. 또 촛불이 빛을 내려면 그 몸이 녹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려면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무런 고난도 없이, 하나도 손해보지 않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런 삶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소금이 소금이고, 빛이 빛인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은 장소가 달라지고 환경이 바뀐다고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빛이 방안에 들어간다 해서 어둠이 되지 않습니다. 빛은 여전히 빛이고 도리어 방안에 있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소금도 그러합니다. 소금은 부뚜막에 있을 때나 상위에 있을 때나 여전히 짭니다. 만일 소금을 국에 넣었을 때는 짜고 김치에 넣었을 때는 달다면, 어떻게 소금을 믿고 간을 하겠습니까? 신자는 빛처럼 소금처럼, 그렇게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노벨 수상작가 까뮤가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변함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욕하고 박해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욕먹지 않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려하면 서운해하고 실망합니다. 자기들이 욕하고 박해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야릇하지만 그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먹고 핍박받으면서도 변함 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려하고, 의에 주리고 마음 청결한 사람이 되려하며,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화평케 하려 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감동하고 마음을 열고,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세상에 대해 영향력도 없고 내놓을 만한 열매도 없는데 무슨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냐 생각하며 믿음 지키는 일을 무의미하고 부질없게 여깁니다. 그러나 14,15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고대의 유럽이나 중근동의 동네들은 대부분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 위에 세워져서 누구나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밤이 되면 그들이 켜는 등불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그 마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산 위의 동네는 그렇게 여행객들의 어둠을 밝혀주었고 그들을 인도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산 위의 동네들이 여행객을 위해 등불을 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빛이 드러나고 여행객들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욕먹고 박해받고 또 외롭고 힘들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가 반드시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등불을 켜면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변함 없이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말 아래 감추어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드러내셔서 온 세상을 비치게 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희망을 찾고 방향을 잡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의 작은 빛이라도 더욱 소중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함 없이 믿음을 지키고 살 때, 세상에 대해서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숨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빛으로 드러내시고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을지라도 결코 부질없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런 비전을 주셨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우리가 욕먹고 박해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고, 하늘 나라의 상을 위해 살며, 그 믿음이 변치 않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을 여호와의 산이요, 산 위의 동네로 삼아주셔서, 만방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러 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이 믿음과 비전을 주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먹는 슬픔과 박해받는 아픔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맺는 말 :
이번 주, 캠퍼스 축제가 끝났습니다. 이 즈음되면 대학 생활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신입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재수를 생각하고 휴학이나 편입을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앞으로 어떻게 대학생활 할지 앞날이 캄캄하다며 방황하고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합니다. 그들이 대학생활 할 맛을 잃고, 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맛을 내주는 소금이 되고 길을 밝혀주는 빛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함없이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캠퍼스에서 맛을 내는 소금이 되고, 방황하는 지성인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주부터 새벽기도를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는 맛을 알게 하시고, 새벽마다 샛별처럼 떠오르는 말씀의 빛을 우리 안에 소유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맛을 내는 소금이요 길을 밝혀주는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