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창세기 26장 12-14절.
제목 : 순종.
지난 성탄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주님께서는 100퍼센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그것도 가장 초라하고 조용하게 오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고 따르던 이들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대속물로 오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남을 위해 살고 남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도 죄는 고사하고, 흠과 티가 없으신 그분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의 계획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도 없는 그것을 단 한 번만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직후에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한 약속으로 오신 분으로서 그야말로 순종의 최고의 극치를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의거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새롭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부요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순종의 증거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지 거의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받았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15장에는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2장에 이르기까지 자식은 이삭 한 명 밖에 더 이상의 자녀를 주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 주신 이삭도 그냥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번제로, 즉 칼을 짤라 불에 태워 버치라는 요구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40년 정도의 기간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아브라함은 한 번의 생각도 없이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이르게 됩니다. 저번주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적인 순종으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의 인물로 이삭의 순종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삭은 그야말로 이생에서 가장 모범적인 순종의 모델인 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그대로 지켜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온 것부터, 이복의 형인 이스마엘을 낳아 13년이라는 고독의 시간을 보낸 것과 천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들으면서 신앙이 점점 성장해 나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던 모든 경험들을 함께 경험한 그로서는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에 아버지와 단둘이 그것도 양 같은 제물은 준비하지 않은 채로 번제에 쓸 나무만 자기가 지고 가는 그 모습까지도 이삭은 한마디의 질문인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는 잘문에서도 아버지의 대답인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모리아 상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또한 번제단을 다 준비한 후 아들 이삭을 결박하려고 했을 때에도 이삭은 아무런 저항없이 아버지가 하라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별다른 교회나 회당은 없어 그냥 가정에서 부모님의 믿음을 보고 자라는 그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당시 가장 가까이서 본 분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였습니다. 또한 이때까지 수없이 하나님의 체험과 함께하심을 듣고 또한 부모님과 함께 체험까지 많았던 이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리아산에서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에도 아무런 거부감이나 반항 없이 그대로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순종의 모습을 보고 자란 이삭 역시 아브라함이 죽자, 이제부터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만 많인 경험하고 알았던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하나님으로 체험하고 살았던 모습들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창세기 26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렇게 믿고 따랐던 부모님마저 없는 그랄 땅에서 농사일을 한 이삭은 그 해에 흉년이 들자마자, 이때가지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까맣게 잊은버린 채로 아버지 이브라함처럼 애굽 땅으로 가려고 마음먹는 장면이 1-2절에서 나옵니다. 잠시 자기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삭은 하나님의 이 말씀 때문에 그대로 그랄에 거하기로 작정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장 2절의 말씀으로 비록 현재의 자신의 삶은 흉년으로 인하여 못 살 것 같은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껏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신을 인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오늘 본문 12절에 다음해에 백 배의 결실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장은 우리들이 마치 죽을 것만 같은 한치 앞어 보이지 않는 안개와 같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언제인지는 확실지는 않지만 우리 앞에 놓인 안개가 마치 햇빛을 보면 점점 사라져가는 것처럼 사라지게 만들며, 그 후에는 고린도후사 8장 9절의 말씀이 바로 당신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극한 어려움에도 붙잡은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확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순종했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 나온 것처럼 우리들도 지금은 한치 앞도 불간도 못할 정도의 칠흙같은 어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면 언젠가는 광명의 나날들이 우리들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기가지 순종하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함을 받았고, 이삭은 극한 어려움에도 떠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순종했든지 이듬해에 백 배의 축북을 받은 것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다면 그런 축복이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축복된 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