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온갖 법이 본래에 공(空)하여 불생(不生)이라고 관하지만, (무생법인의) 정위(正位)에 들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觀諸法不生,而不入正位,是菩薩行。
보살도의 사람은 온갖 법이 본래에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서 본래에 무생(無生)임을 이미 증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생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空)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공과 무생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제가 방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생겨나지 않음[不生]에 머무르지 않지만 끊임없이 생겨남[生生不已]의 가운데에 머뭅니다. ‘불입정위(不入正位)’에서의 ‘정위’는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입니다. 만약 무생법인에 머무른다면 그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자비보시도 행하지지 않아서 성문도에 가깝습니다.
유마거사는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하기를 모든 보살은 병 속에서 이와 같이 자기의 마음을 조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병은 크나큰 병으로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병 속에 있습니다. 불경에서는 온갖 중생이 저마다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바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나큰 꿈[大夢]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크나큰 병입니다.
비록 12연기를 관하지만, 온갖 사견(邪見)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觀十二緣起,而入諸邪見,是菩薩行。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12인연을 관하여 다 이해했지만 사견(邪見)들에 들어갑니다. 즉, 온갖 마구니 외도법을 다 할 줄 압니다.
비록 중생을 (자비심으로) 감싸 안고 있지만, 애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攝一切眾生,而不愛著,是菩薩行。
‘섭(攝)’은 포함하다, 포용하다는 뜻입니다. 보살은 자비로워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모든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이런 사랑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며 탐애(貪愛)의 심리에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해탈 속에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기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다함에 의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樂遠離,而不依身心盡,是菩薩行。
보살은 성문이나 연각과 마찬가지로 멀리 떠나기를 즐겨할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제자의 하나로서, 공(空)을 해설하는 데 제일이었고 아란야(阿蘭若) 행자였습니다. 즉, 출리도(出離道)를 닦는 것인데, 3계를 싫어하는 출리심(出離心)이 있는 것입니다. 소승나한의 육체는 수명이 다하면 떠나버리고 생각도 공해집니다. 저는 대아라한이 열반하였을 때의 네 구절의 말을 대단히 즐겨 감상합니다. ‘나의 윤회의 생존은 이것으로 다했고, 청정한 행동이 완성되었으며,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어내었고, 다시는 내세의 생존을 받지 않는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 그러나 보살은 멀리 떠나기를 즐겨하지만 몸과 마음의 다함에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경 앞부분의 제자품 중에서 부처님은 제자들더러 유마거사에게 가서 문병하라고 할 때에 첫 번째는 사리자(舍利子)였습니다. 유마거사는 그와 ‘연좌(宴坐)’를 토론한 적이 있는데,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들의 하나의 중점적인 관념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닦고 증득하기를 추구하면서, 여러분이 정좌를 배우든 정(定)을 배우든 참선을 배우든 밀교를 배우든, 정(定)을 얻지 못하는 첫 번째 원인이 바로 몸과 마음의 작용을 멀리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법문을 배우든 간에 신체의 감각을 제거해버리지 못하면, 즉 신체의 장애를 제거하지 못하면 망념생각이 청정해질 수 없습니다.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면 단견(斷見)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을 모두 멀리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법문조차도 증득할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은 초보적인 불법입니다. 성공(性空)이란, 유식의 도리에서 말하면 제6의식의 염(念)이 비워져버려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습니다. 보리도 차제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때가 공성에 증득하여 들어가는 입문입니다.
본경의 첫 부분에서 부처님은 사리불더러 가서 병문안하라고 했지만 사리불은 감히 가지 못했습니다. ‘연좌’라는 이 몸과 마음의 문제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지람을 당하고 욕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연좌라 할까요? 우리의 모든 수정(修定)법문은, 대승이든 소승이든 부정관이든 백골관 등등이든 정좌는 일반적으로 ‘연좌’라고 부릅니다. 진정한 연좌는 용수보살이 대지도론에서 말했듯이 ‘몸에도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3계에도 의지하지 않아, 몸과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연좌(宴坐)이다[不依身, 不依心, 不依於三界, 於三界中, 不得身心, 是爲宴坐].’인데, 유마경의 도리와 마찬가지로서 대승불법입니다. 우리들은 반성해야겠습니다. 고대의 경교(經敎) 연구방법대로 하지 않고 실제적인 연구방법으로부터 토론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성을 증득할 수 없는 원인은 모든 것이 다 의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염리심이 일어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보통심리입니다. 수증공부가 정말로 몸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는 공(空)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경계까지도 놓아버리는 데 도달해야 비로소 연좌하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으며, 비로소 진정으로 부처님을 배우는 입문이요 비로소 기본적인 성취입니다.
경문의 이 한 구절인 ‘비록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기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다함에 의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雖樂遠離, 而不依身心盡, 是菩薩行].’, 성문도는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공(空)에 치우친 것으로서 궁극[究竟]이 아닙니다. 궁극은 몸과 마음의 다함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멀리 떠나 어디로 갈까요? 당신이 비록 정(定)이 있고 일반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출신(出神)할 수 있어서 신식(神識)이 육체를 떠날 수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멀리 떠남은 궁극적인 도가 아닙니다. 설사 출양신(出陽神)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할지라도 불도(佛道)가 아닙니다. 양신(陽神)은 도가의 명칭입니다. 불가와 도가의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면서 그런 공부가 있습니다. 많은 학우들과 외부 사람들도 저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너무나 많이 물어서 저는 대답하기도 귀찮습니다.
이제 지금 어떤 청년은 영혼(靈魂) 놀이 같은 것을 하고 있어서 출신(出神)의 길을 걸어갑니다. 정좌하고 있으면 자기가 자기의 신체를 떠난 것처럼 느끼는데, 이런 것은 출음신(出陰神)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의 출음신은 육신의 기맥이 통해야 합니다. 기맥이 통하면 정말로 확실히 병 없이 건강할 수 있으며 음식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입정(入定)할 때에 마음이 신체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능엄경에서 이러한 경계를 형용하기를 ‘나는 새가 새장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아주 편안하고 가뿐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신체의 장애 때문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리들의 여기 모두들의 머리위에서 돌 수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들 몸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감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또렷이 볼 수 있고 또렷이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들을 만질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꿈꾸는 것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정좌할 때에 혼미하여 꿈꾸는 것 같아서 뭔가를 보고서 그것이 출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엄중한 일입니다. 그것은 정신분열이니 잘못하지 말기 바랍니다.
무엇이 양신일까요? 색신(色身) 전체를 전환 변화하여 기맥이 통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 4대의 본성을 얘기해야겠는데, 무엇이 4대의 본성일까요? 지수화풍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호흡소리를 들으면 풍대에 의지하여 닦기 시작하는 것인데, 닦아서 최후에 도달하면 ‘자성 본체의 기능 중에는 풍성(風性)의 유동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본능을 갖추고 있으며 그 본체는 원래 공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성 본체의 진공 기능이야말로 풍성의 유동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性風眞空, 性空眞風]’의 경계로서 마지막에는 공(空)합니다. 방향과 처소가 없으며 고정된 위치가 없습니다. 그 체성 자체가 공합니다. 화대가 일어나는 것은 ‘자성 본체의 기능 중에는 화성인 빛과 열의 본능이 갖추어져 있으면서 그 본체는 원래 공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성 본체의 진공 기능이라야 화성인 빛과 열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자성 본체는 원래부터 청정하고 우주 사이에 충만하여 두루 있으면서, 세간에 두루 있어서 모두 똑같은 화성이 존재하면서 일정한 처소가 없다[性火眞空, 性空眞火, 淸淨本然, 周偏法界, 寧有方所]’입니다. 이것은 능엄경의 원문인데, 마치 전기처럼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허공 속에 전기가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손에서 전기를 접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찰하자마자 전기가 발생합니다. 바로 그런 도리입니다. 4대의 본성에 의지하여 신체가 통하면 마음과 물질이 하나로 합합니다[心物合一]. 그런 다음 이 몸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정좌하고 있어도 또 다른 신체를 하나 내어[出]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며, 두 신체가 동시에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 개, 네 개로 모두 분신(分身)하여 나갈 수 있는데, 그것이 양신입니다. 어느 때에 그 경지까지 닦을 수 있을까요? 천천히 해 봅시다! 도를 닦아 즉신성취(卽身成就)하고 싶다면 다방면의 법문이 필요합니다. 현교와 밀법을 모조리 융회하여 진정으로 몸과 마음을 던져서 증득을 추구해야 됩니다.
저는 늘 말하기를, 불법에서 이론을 말하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만 수행증득은 과학적인 법문으로서, 반드시 실제 증득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제 어떤 학우가 저에게 묻기를, 그는 이미 2, 30년을 수행여서 지금은 늘 생각[念]이 없음에 도달하고 자기의 호흡도 정지해버리는데,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하기를 그가 복권에 일등으로 당첨되었는데도 안타깝게도 또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생각[念]이 비워졌다면 호흡도 자연히 정지합니다. 호흡이 오고가는 것은 생멸법입니다. 4대의 왕래는 모두 생멸입니다. 기(氣)가 멈추고 맥(脈)이 정지해야[氣住脈停] 비로소 정(定)의 경계입니다. 그때에 왜 또 기(氣)를 하나 구하는 겁니까? 그는 말하기를 ‘교리에 근거하면 마음과 호흡이 서로 의지해야[心息相依] 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초보입문입니다. 비록 도달했지만 이 몸을 내던져버리면 곧 정(定)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흥! 그는 수십 년을 닦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처님을 배우면서 왜 교리를 연구해서 알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왕왕 갈림길로 걸어 들어갑니다.
자신이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기를 즐겨하여 비록 높은 경지까지 닦아서 양신의 경계를 초월했다 할지라도 소승의 과(果)이지, 보리대도를 증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법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의하십시오, 비록 멀리 떠나기를 즐길지라도 ‘이불의신심진(而不依身心盡)’, 이 육체, 이 색신을 결코 버리지 않고, 이 작용을 일으키는 이 마음도 버리지 않아서, 단멸도 아니요 항상도 아닙니다[非斷非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천안통(天眼通)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은 그가 눈을 감고서 힘을 써서 어떤 것을 볼 때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고혈압을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천안통은 정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정(定)의 상태에 들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부모가 낳아준 육안으로 시방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이 육체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대승불법입니다. ‘진(盡)’은 범어를 번역한 것인데, 만약 정통 중국어로 쓴다면 여기서의 진(盡)자도 위에다가 놓아서 ‘부진신심이락어원리(不盡身心而樂於遠離)’,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고 멀리 떠나기를 즐기다가 됩니다. 구마라집법사는 불교문학의 태두(泰斗)로서 남북조 시대의 문필로 번역했는데,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중국문학과 인도문학을 하나로 합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중문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불경을 보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불경은 모두 백화(白話)입니다. 문언(文言)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당시의 백화로서 설사 후세에 읽더라도 아마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유마거사는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대승보살이 수지하는 도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매 요점마다에서 한 문제를 제시하고, 매 문제마다 우리들이 불법을 수지하는 관념을 깨뜨려버립니다. 범부는 이 환상의 몸과 마음을 진실하다고 여깁니다. 성문은 이것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계정혜로부터 입문하여 수지하고 이 환상의 생존을 멀리하는 것을 도과(道果)로 여깁니다. 대승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몸과 마음을 멀리 떠나도 여전히 도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도과는 멀리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이 몸과 마음에서 보리에 증득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門)인데, 이게 바로 보살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