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작가 박범신/박란희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작가 박범신/박란희
“단칸방에서 홀로 글쓰는 남편을 위해 추운 겨울 수돗가에서 밤을 지샜던 아내에게…”
작가 박범신 씨가 산문집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깊은강)를 펴냈다. 이 책은 가족·문학·인생에 대한 작가의 자전적인 에세이다. 그는 서문에서 “세상의 모든 젊은 아들딸과 모든 고단한 아내들과 모든 짐꾼 같은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4월 11일,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에서 작가를 만났다. 그가 밝히는 가족 & 문학 이야기.
모든 기득권을 버려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작가 박범신 씨에게서는 굴레가 느껴지지 않았다. 80년대 잘나가는 베스트작가이던 그는 1993년 신문 연재소설을 돌연 중단, 절필선언을 했다. 이후 3년여의 공백 끝에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다시 집필활동을 시작한 지 5년.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이자 작가, KBS에서 제1라디오 '박범신의 이야기 세상'의 진행자로 다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빠른 속도와 경쟁을 나름의 속도로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느리지만 분명 올바른, 자신만의 속도와 관점으로 작가 박범신씨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에.
여자친구 정원, 세 아이 병수·아름·병일
'작가의 아내는 임신중에도 매일 점심 굶으며 보따리 행상 생활했다'
작가는 '나와 같이 사는 여자친구 정원에게 그리고 나의 세 아이 병수, 아름, 병일에게 이 책을 주고 싶다'고 당당히 책 앞쪽에 밝히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4부로 나뉜 이 책에서 작가는, 봄은 딸에게, 여름은 아들에게, 가을은 아내에게, 겨울은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태어나면 아이를 안 낳고 싶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요즘 세상 살기가 정말 어렵잖아요. 경쟁도 심하고 사람 사이에서 상처도 많이 받고요. 기쁨이나 충만함은 적고 고통이나 갈등은 많지요. 어버이가 된다는 것은 자식이 그 모든 것을 겪는 걸 지켜봐야 하잖아요. 가족들 또한 경쟁 일변도이다 보니 먹고사는 데에 힘들면 '사랑의 집단'이기보다는 '짐꾼 같은 얼굴'을 하게 되잖아요. 아내는 아이 돌보느라, 남편은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처자식 벌어 먹이느라, 각자가 서로에게 짐을 지운 채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짐꾼에서 벗어나야겠다, (가족들도) 독립된 인격체로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많은 짐을 아내에게 지워준 작가였기에, 그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제3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녀에게'에서 작가 박범신 씨는 20년 동안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내비치고 있다.
“아내는 저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산 사람이에요. 저는 문학 때문에 가족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젊은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았죠. 작가의 아내 역할 하기가 참 힘들거든요. 너무 예민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있으니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작가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제도권 내에서 남편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굉장히 안 맞아요. 어떤 때는 결혼을 안 했더라면 세속적인 출세는 못했지만, 쓰고 싶은 작품 쓰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제 경우에는 아내가 참고 격려해줘서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익산시에서 꽤 소문난 부잣집 셋째 딸과 직장도 없고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궁핍한 외아들인 작가지망생과의 결혼은 시작부터 고생이었다. 신혼 방에 장롱이 들어가지 않아 장롱 앉을 자리만 바닥을 파고 내려 앉혀놓은 후 장롱을 들여놓았고, 웨딩드레스 대신 재활용이 가능한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결혼식을 치렀다.
“72년에 결혼했는데, 73년에 곧 직장(당시 강경여중 임시 국어교사)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한동안 취직을 못했어요. 그리고 문영여중에서 국어선생을 했는데, 아내는 큰애를 가졌을 때 1년 내내 굶었대요. 당시만 해도 절대빈곤의 시대니까 점심 굶는 것도 절약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임신한 몸으로 뒷구멍 빼돌려 나온 양복지를 보따리에 갖고 가서 파는 행상을 했대요.”
그는 '가난이 주는 감동'이란 글에서 젊은 시절 아내와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무척 감동적이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하나를 발표, 원고료를 받아 아내의 면 잠옷을 선물한 일. 결혼하고 5년 후였을 것이다. 아내는 그때까지 결혼 때 해온 나일론 잠옷 한 벌밖에 없었다. 나한테 말을 하진 않았지만 어쩌다 친정에 가서 자기 동생들이 새로 나온 면 잠옷을 몇 벌씩 두고 입는 걸 보고, 그렇게 그것이 부러웠던가 보았다. 아내는 내 면 잠옷 선물을 가슴에 끌어안고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까지도 아내가 면 잠옷 하나를 선물받았을 때처럼 폭발적으로 감격하여 우는 걸 본 일이 없다. 면 잠옷 한 벌을 가지고 뭘 그리 우느냐고 아내를 달래다가 끝내 그까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일이 엊그제 같다.”(p. 67∼68)
“아내는 친구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라며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방식으로 돌봄을 받아오다 보면 푹 삭은, 뭐랄까 같이 늙어가는 좋은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고 작가는 말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작가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할 일이 생겼다.
“아내는 5∼6년 동안 판소리, 북춤, 사물놀이 등에 푹 빠져 있어요. 그런데 너무 속상해해요. 늦게 시작해서 하고 싶은 걸 원하는 대로 못하나 봐요.”
원고료 수입 전혀 없는 3년 동안 지켜봐 준 고마운 가족들
“세 자녀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는가”를 묻자 작가는 “비교적 좋은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큰아들 병수 군은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해 영화사 연출부 PD로, 딸 아름 양은 연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에 편입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막내 병일 군은 현재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사실 40대 중반까지는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절필 이후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제 곁에 있더라고요. 전 이때까지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한번 안 떼본 사람이거든요. 불현듯 그들이 절 사랑하는 걸 느꼈어요.”
작가가 가족들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것은 바로 93년 절필 선언 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가족들을 불러서 '내가 20년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제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지만 아빠의 수익을 반납한다, 그러니 도와달라'고 얘기했어요. 절필선언이란 게 작가에게는 자기 죽음의 선언이요,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는 책임을 중지하는 것이었는데 3년 동안(지금도) 충분히 이해를 해주더라고요. 사실 가장이 실직 당하면 가족이 깨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게 바로 가족이 잘못된 계약적 관행에 놓여 있기 때문이에요. 돈이라는 과실을 나눠먹는 더러운 계약적 관계, 즉 자본주의의 나쁜 속성이 가족관계 안에 침윤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죠.”
작가는 한때 생산적인 의미의 '가족 해체'를 얘기한 적이 있다. 집을 팔아서 아이들은 각자 원룸을 얻어 독립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그는 그대로 다섯 가구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가족이 소모적으로 엉겨 있기보다 각자 독립된 인격체로 서야만 참된 결속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찬성했던 딸은 한 6개월 정도 고시원에 나가서 살기도 했죠. 아내는 처음에는 좋다고 하더니 '여보. 그런데 무섭다'라고 얘기하더군요. 아들과 아내의 반대로 결국 실행은 안 됐어요.”
작가 박범신 씨는 결혼은 잔인한 것이라며 '생생한 자아의 무덤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명지대 교수인 그는 학생들 주례를 설 때면 항상 두 사람에게 물어본단다. “결혼하고도 남편은 남편세계, 아내는 아내세계를 잘 발현하도록 노력할 수 있느냐”라고.
최근 높아지는 이혼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작가에게 물었다.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이미 부부관계의 진정성이 깨졌는데 뭐 하려고 같이 생활합니까?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은 문화적 깊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죠. 결혼을 잘못 받아들이는 사회·문화적 구조 때문인데,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바뀌면 어느 지점에서는 이혼율이 줄지 않겠나 싶어요.
지금은 과도기이기 때문에 깨질 것은 깨져나가는 게 좋아요. 다만 '사랑'이라는 것은 시간의 세계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게 '별'이 되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시간이 요구된다는 거죠. 얼핏 듣기에는 자기 모순적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급한 이혼은 반대합니다.”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 문학]
'창작의 고통으로 두 차례나 자살기도 했지만, 절필선언 후 자유로워졌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작가는 올해로 데뷔 29년째를 맞는다.
신혼시절 강경읍 채산동에서 방 두 칸짜리 기와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며, 신혼의 단꿈에 젖을 새도 없이 책상도 없는 방에 엎드려 소설을 쓰던 그였다. 사과를 깎아다 준다, 파지를 주워 정리한다, 소설을 쓰는 그에게 내조를 한다고 애를 쓰던 아내에게 “제발 모든 걸 내버려 둬”라며 짜증을 부리던 그였다. 그럴 때면 아내는 마당 귀퉁이에 있는 수돗가에 나와 11월의 찬 밤바람을 맞으며 밤마다 별을 보면서 지새기도 했다는데…. 결국 자신의 원래 응모작이 아닌, 아내가 소원이라며 내보라던 책상 서랍 속의 묵은 원고가 운명적 소설이 되었고 그는 이른바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문학을 가리켜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말했다. 데뷔하던 1973년 봄, 생활은 열악했지만 작가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세상과 맞서 싸우는 하나의 빛나는 무기였으며, 동시에 구원의 '썩지 않는 새 동아줄'과도 같았다.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등이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작가는, 이후 10여 년간 '불의 나라', '물의 나라' 등 신문연재를 해가며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하지만 죽으나 사나 홀로, 평생 고독할 수밖에 없는 작가행위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스물 몇 살, 어느 늦가을 저녁에 그는 면도날로 자신의 동맥을 잘랐고, 서른 몇 살, 어느 늦봄, 깊은 저녁에도 내가 사랑하는 그는 역시 자신의 동맥을 자르고 안양천변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미친 피가 더러운 안양천변으로 흘러들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그의 이야기Ⅰ, p. 244∼245)
1990년대가 되면서 작가 박범신 씨는 본질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문학은 무엇이고, 어떤 제단에 바쳐야 되는 것일까, 삶은 또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동안 써온 소설은 과연 어떤 위로를 독자들에게 주었는가. 해답은 떠오르지 않고 나날이 자기 학대와 자기 모멸에 빠져들었다. 93년 12월의 새벽, 밤새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변변히 원고 한 장 채우지 못했던 그를 보며 새벽에 잠옷바람으로 건너온 아내는 양팔을 벌려 그를 안아주었다. 성긴 머리칼과 충혈된 눈과 솟은 광대뼈와 번뇌로 더욱 마른 아래턱을 아내의 가슴속에 파묻었다.
“소설 그만 써. 당신 그러다가 죽겠어.”
그 한마디에 그는 뜨겁게 울기 시작했다. 울고 또 울었다. 아내의 잠옷이 흥건히 젖을 만큼 울고 났을 때, 그는 마음이 홀연 고요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원고를 다시 펴 '연재를 중단하며…'라고 썼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작가는 한 장의 글도 쓰지 않고 용인 근처의 산골에 박혀 서툰 농사꾼으로 혼자 살았다.
“3년이 지나니까 쓰지 않으면 안 되겠더군요. 밭에서 일할 때도 입으로 소설을 중얼거렸어요. 손으로 못 쓰니까. 지금도 우물이 고여 있을 때 써요. 행복하고 자유로운 작가가 되었죠. 세속적인 기득권은 모두 반납했지만, 절필은 저한테 참 좋은 전기(轉機)가 되었어요.”
1997년 작가는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데뷔 5년차 '청년작가'란다. 예전에 비해 책도 잘 안 팔리고 소설도 덜 쓰지만 문학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면 문학을 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고단한 짐이에요. 하지만 이승의 맹세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젊은 날 사랑했던 연인이 어느 날 똥배가 나오고 얼굴에 주근깨가 끼고 눈가에 잔주름이 많이 생겼다고 해서 헤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죽을 때까지 이승의 맹세는 지켜 가야죠.”
30년 기념으로 시집 한 권 펴내고파
내년이면 전업작가 생활 30년을 맞는 작가는 “그동안 틈틈이 써온 시가 40∼50편쯤 되는데, 시집을 한 권 냈으면 좋겠다”고 작은 바람을 밝혔다.
“70년대 저는 문학이 제 삶을 세우는 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학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창이나 칼이 아니라 호미나 삽이 제 문학입니다.”
지난밤 전북 익산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새벽 4시에야 서울에 올라와 얼굴이 푸석푸석하다는 작가는,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첫댓글 작가는 참 좋은 아내를 만났고 작가 역시 이승에서의 약속을 지킨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이 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 가는 것 같아 안타갑습니다.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란 책을 읽어 보았지요. 정말 산문집이었으며 가슴을 아리게 하는 글을 읽을 때는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