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무렵이다. 한양의 서소문 밖 약현이라는 동네에 서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달성 서씨로 집안이 쟁쟁 하였다. 아버지 서고는 충주 목사를 지냈고, 증조부인 서거정은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종 1품 좌찬성 까지 지냈으며, 시문에도 능하여 [필원잡기]와
[동문선]을 저술하였다.
서해는 고성이씨를 맞아 혼례를 치렀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였다. 서해의 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스물 셋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그의 아버지 서고도 중국의 사절단으로
갖다 오다 세상을 떠났다. 서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서성과 집안의 모든 일을
눈먼 고성이씨가 도맡아야 했다. 친정에서 돈을 조금 빌려다 청주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 했는데, 서성이 선조 19년 29세의 나이로 별시문에
급제를 하였다. 서성의 동네는 약초를 많이 재배하는 약현이었다.
서성의 호가 약봉이었는데, 그가 유명해지고, 어머니의 음식 솜씨도 유명해져서, 어머니가 빚어
팔던 청주는 약주가 되고, 찰밥은 약과 유밀과는 약과가 되었다.
약봉 서성도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정묘재란때 왕을 모시고 피난을 갔을 만큼 왕을 가까이서
모시었다. 벼슬도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 까지 올라, 증조부 서거정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렸다.
그와 더불어 서성의 어머니가 빚어 팔던 청주가 약주의 대명사가 되었고, 서서의 7대손인
실학자 서유구가 [임원 경제지]에서, 서유구의 형수가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에서 술에
관련된 자료를 기록 해두었다..............^^...............!
그러면 약현이라는 동네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대동여지도를 펼쳐 보자...!
한양을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의 서울중구 중림동 쯤에 약현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작은
동네를 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표시 해두었을까..김정호가 이 약현 출신이다. 저거 동네니까.
표시를 해두었나 보다... 그러면 최신 한국표준도로지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혹 자세한
지도가 있으면 함 찾아 봐라.. 중림동..중림동..중림동... 일단 중림동은 찾았다. 근데 약현이라는
동네는 없다. 한참을 찾다가 ..지하철 2호선 충정로 역에서 한국경제신문사 방향으로 보니까.
[약현성당]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게다가 [약현성당] 밑에 푸른색 글씨로 (사252)라고 인쇄가
되어 있네...쩝..!...무슨 성당이길래 사적지로 지정했을까?....인터넷 검색에서 [약현성당]이라고
입력한뒤.. 엔터를 쳤는데,...[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어쩌구.,,,저쩌구.,...]....
2002년 1월 6일 아침 마누라와 혜영이를 [우리절]에 보내고...아침은 "하루 한캔".,동원참치에다
대충 비벼 먹고..서울로 가는 9009번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1호선을 타고 시청에서 내려
다시 2호선을 갈아 타고 충정로 역까지 갔는데....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런짓 하지 마라..
답사를 마치고 지도를 확인하는 순간..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일단 남대문이나 서울역에서 시작 하는 것이 좋지 싶다...........................
남대문에서 서소문 공원쪽으로 천천히 걸어 가라 2명이상 가라..혼자 가면 너무 멀어 심심하다.
서소문 공원 직전에서 거지왕 김춘삼이와 떼거지들이 살던 [염천교]가 나온다. ......^^.....!
염천교를 건너는 순간 빌딩숲 사이로 자그마한 동산위에 살포시 내려 앉은 [약현성당]이
방긋 방긋 웃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대문에서 약현성당 까지 걸어간 길이
[칠패길]이다. 그리고 서울역에서도 서소문 공원쪽으로 청파로를 벚삼아 걸어 가면 [약현성당]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남대문쪽이 더 정겹다.
물론 걷기 싫은 사람들은 충정로역에서 내려 성요셉아파트 단지와 중앙시장의 좁은 사잇길 언덕을
내려와 돌아서면 [약현성당]의 정문에 들어 설수 있다.
일주문은 초행길이라 충정로역에서 내려 [춘향이 고개]라 불리는 성요셉 아파트 단지 앞 고개로
넘어 갔다. 50여년 전만 해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는 험한 길이었다 한다...
[약현성당]은 1891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892년에 준공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국내에서 생산된 적별돌로 지은 건물인데, 후대 한국교회 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건물의 길이가 32m, 너비 12m 종탑의 높이가 22m나 거대한 건물이다.
고종 28년 명동본당 주임 두쎄 신부가 현위치의 성당 대지를 약현에 사는 서상인에게서 마련 하였다 한다.
아마 19세기 말까지도 서성의 후손인 달성 서씨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교회 건축에 대해 잘모르고, 안내판에는 "순수한 고딕양식이 아니지만...어쩌구..저쩌구..." 라고
적혀 있는데,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아뭏튼 성당 여기 저기를 둘러 보고, 사진도 몇판 찍고
돌아서는데, 성당의 관리인 쯤 되는 사람이 낯선 이방인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쳐다 보는데,..
답사지에서 처음 느끼는 이상 야릇한 기분이었다.
[약현성당]을 나와 다시 한번 춘향이 고개를 넘어 보고, 약초 재배지와 약주의 흔적을 찾아 보기
위해 이곳 저곳을 뒤져 봤지만, 약현이라는 지명이 사람들의 기억속 지워져 버려...찾을 길이 막막하다.
대충 염천교쪽에서 약현성당으로 올라 오는 길과 아현동쪽으로 넘어가는 춘향기 고개가 아마..
약현이었고, 이곳에서 서성의 어머니인 고성 이씨가 약주를 처음 만들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1시10분을 가리키고 있네, 2시에 종묘와 창경궁 답사 약속이 있는데,;...서둘러..
남대문 쪽으로 걸었다. ..왜..? 걸었는지..참..!..염천교를 지나 무심코 뒤돌아 섰는데,
야...!..이거.......서울의 빌딩 숲사이로 내비친 햇살에 [약현성당]에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는데,
...너무나 소박하고, 아담한 교회로 느껴 지는게,...그 옆에 있는 서소문 교회 건물은 성당보다
함찬 뒤에 지어 졌는데도,,,,투박스럽고,,,요란스러워 보였다.
일주문은 남대문에서 종묘 가는 버스를 몰라... 다시 서울역에서...지하철을 타고..종로 3가 까지..
가서..종묘와 창경궁을 둘러 보고...답사를 끝마쳤다................
저녁에 쥬디랑.. 손동미..쥬디후배들이랑 술 한잔 들이 켰는데,...백세주(약주대표주자)..한잔...시켜
놓고...약현과..고성이씨...약현성당에 대해 ..떠들려다가.....쓴..참이슬 소주 한잔에.. ...삭혀..두고..
3월 중순...영월 주천강의 ....술샘..까지..이 기분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목구멍 까지 올라온..
이야기 보따리를 접어 두었다.
[종묘와 창경궁 답사 후기를 쓰야 되는데, 쩝..!..............내..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