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대회 [펌글] 나의 50번째 마라톤 도전기

[톱10(남국종)]

‘1페이지 제안서’라는 것이 있다.
제안 하고자 하는 사업계획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단 1페이지에 요약하여 결재권자
또는 사업대상자를 설득시켜야만 한다.
유능한 강사는 정해진 강의시간 종료 5분전쯤에 끝내주어야 한단다.

하지만 나는 3시간짜리 강의시간에도 거의 정확한 시간에 시작하여 거의 정확한 시간에 끝낸다.
그래서 재미없는 강의가 더 지루할진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키려 하는 것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그저 욕심의 발로일 것이고 또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의 후쿠오카 대회 참가기를 적는다.
역시 간단 명료하고 명쾌한 글이 나오질 않는다.
능력의 한계다.

남들 다 하는 100번째 마라톤도 아니고 겨우 50회째 가지고 얘기하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다소 길고 지루하며 또한 별 내용도 없는 글을 이렇게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난 시간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능력이 부족한 내게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짧고 간단명료하게 쓰여진 글들을 보면 부러움이 먼저 앞선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이쯤에서 마우스를 다른 곳으로 클릭하시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ㅎㅎ

================================================================================

니시테츠 그랜드 호텔 상공의 회색빛 하늘을 한 마리의 까마귀가 배회한다.
‘일본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라지!’
우리 일행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암시를 하러 간간히 날리는 눈발 속으로,
텐진역을 갓 빠져 나온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것일까?


(호텔 앞 상공을 배회하는 까마귀)

벌써 세 번째의 참가지만 후쿠오카는 아직 내게 많은 과제를 안겨준 채
나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정답은 없고 내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마라톤이다.

그래서 이번 후쿠오카 대회를 위해 춘천마라톤 이후 장거리 훈련을 지양하며
지난 시즌 동안의 피로를 회복했고
대회를 앞둔 10여 일간은 새벽 수영을 하루도 나가지 않았다.
조그마한 피로라도 몸에 축적시켜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어쩌면 올해가 내겐 마지막이 될 수 도 있는 대회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 대회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회출발 시 까지는 별 달리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짬짬이 시간을 내어 관광을 하는 것으로
다리근육도 좀 풀어주고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주는 방법은 그간 마라톤 여행을 하며
터득한 하나의 방법이다.
다만, 작년의 경우는 밤 늦도록 혼자 돌아 다녔던 것이 대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올해에는 저녁 식사 후에는
숙소에서 동료들과 이바구 하는 것으로 긴장감을 달래었다.


(동양 최초의 개폐식 돔인 야후 돔의 야경 /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다.ㅡ.ㅡ;;;)

“비올 것 같은데요”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 김광호 선수의 근심 어린 한마디에
‘오늘 오전엔 맑고 오후에 흐리다고 했으니 걱정 마’ 하고 창문을 열어보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잿빛 하늘 사이로 가끔씩 두세 줄기 빛이 힘겹게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내려와 곳곳으로 다가가며 따사로움을 전하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아침이고 먹구름의 기세에 눌려 차가운 기운을 이겨내기가 버거워 보인다.

카메라를 들고 우리들의 출발지인 오호리공원을 지나고 운동장에 들르니
대회준비가 한창이다. 여기저기 TV 카메라(TV-ASAHI / KBC 등 2개사)가 설치되고,
주자들의 발소리마저 놓치지 않기 위해 주로 가까운 곳곳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있다.





(운동장 준비상황과 스탠드에 게양되어 있는 태극기)

은행단풍이 작년만 하지 못한 마이주루 공원을 지나 일본 특유의 바위 성벽만이
이 곳이 과거에 성곽이었음을 암시해주는 후쿠오카 성터에 오른다.
과거는 이미 지난 시간이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공간이다.
과거엔 이곳이 성주의 공간으로 호령하던 곳 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필부의 휴게공간에 불과하다.

또한 나의 지난 2년간의 후쿠오카 마라톤 또한 성벽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바위 틈 속으로
사라져 버린 과거일 뿐이다.
오늘은 다만 지난 과거를 반추하며 발전하는 나를 만들어야 할 뿐.....


(마이주루공원에서 후쿠오카 성터로 오르는 길)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 마다 후쿠오카의 시경이 조금씩 더 멀리까지 눈에 들어오고
마침내 천수대 자리에 오르니 후쿠오카 시내가 발 아래 펼쳐진다.
출발지인 운동장과 오호리 공원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오호리 공원)

오늘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더 발전한 스스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혹은 특별한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즐기며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어지간히 좋은 날이 아니고서는 시야가 확 트인 날이 없는 국내와 달리
일본에서는 확 트인 시야가 사람 기분마저 상승시켜주는 것 같다.
몇 차례의 일본 방문 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이다.
어제 제법 눈이 내렸는지 멀리 보이는 산 정상부의 설경이 이채롭다.
이렇게 상승된 기분이 대회 끝나고 나서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타이즈에 반팔티, 귀마개 그리고 토시를 하는 것으로 참가복장을 정한다.
긴 소매 옷을 가져오려다 그렇게 까진 춥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왔는데
예상외의 추위에 저으기 혼란스럽다.

숙소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본격 대회 준비를 한다.
평소와 달리 아침을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먹어 두었다.
요즘엔 항상 후반에 처졌기 때문에 일단은 에너지원이라도 많이 축적해두자는
치기 어린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라도 위안이 된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정신적 도움은 될 수 있을 테니까.

10칸 다다미 방에는 맨**담 냄새가 가득하다.
옆에서 보는 내가 눈이 따가울 정도인데 정작 본인은 다리에 거의 떡칠을 해 놓고도
담담해 한다. ㅎㅎ

다시 나가서 바깥 공기를 관찰해본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오늘 여기 어떻게 해서 왔는가? 왜 왔는가?’를 곱씹어보며 좀 더 공격적인 레이스에
임하고자, 입었던 타이즈와 반팔티를 슬리브리스와 숏으로 바꿔 입는다.
다만 귀마개는 혹시 바람의 영향을 받을 까봐 일단은 목에 두른다.
목이 따뜻해서 나쁠 건 없으므로…ㅎㅎ



출발시간은 시나브로 다가오고 참가자 일행은 출발지를 향해 즐거운 표정으로 나선다.
각자의 마음속엔 비장함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믿지만
오늘 우리 일행은 국내의 대회에서처럼 서로간 경쟁이 아닌 팀 동료로써 함께 하기에
비장함보다는 즐거움의 표현이 더 컸으리라.

다행스럽게도 아침보다는 공기가 많이 따뜻해진 것 같다.
바람이 심한 것 같지는 않지만 후반 바닷바람만 없다면 당초 목표했던 기록보다
좋은 기록으로 완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젯밤 꿈이 좀 걱정되기는 하지만……ㅡ.ㅡ;;;

일단은 초반 오버페이스 무리에 휘말리지 말고 매 구간을 18분대 초반만 유지하면서
달린다면 오늘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5분 전부터 대회 심판은 매 1분 간격으로 출발까지의 남아있는 시간을 알린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의 팽팽한 긴장감은 ‘출발준비’라는 한마디에 최고조에 이르고
출발총성소리와 함께 팽팽했던 긴장감은 풍선 터지듯 찰나의 순간에
힘차게 박차고 나가는 주자들의 발소리에 묻혀 잿빛 허공속으로 사라진다.
              
***** 대회 기록 *****

공식기록 : 2:36:38
순위 : 168위

1구간 0~5km : 측정기록: 18’05” / 공식기록: 18’07”
2구간 ~10km : 측정기록: 18’16”(36’21”) / 공식기록: 18’16”(36’23”)
3구간 ~15km : 측정기록: 18’16”(54’37”) / 공식기록: 18’16”(54’39”)
4구간 ~20km : 측정기록: 18’11”(1:12:48) / 공식기록: 18’11”(1:12:50)
하프 통과 : 측정기록: 1: 16:47 / 공식기록: 1:16:50
5구간 ~25km : 측정기록: 17’41”(1:30:29) / 공식기록: 17’41”(1:30:31)
6구간 ~30km : 측정기록: 18’12”(1:48:41) / 공식기록: 18’12”(1:48:43)
7구간 ~35km : 측정기록: 18’17”(2:06:58) / 공식기록: 18’16”(2:06:59)
8구간 ~40km : 측정기록: 19’47”(2:26:45) / 공식기록: 19’48”(2:26:47)
Finish : 측정기록: 9’51” (2:36:36) / 공식기록: 9’51”(2:36:38)

오호리공원을 다소 느긋(?)하게 한 바퀴를 돌아 나간다.
번호순대로 출발선이 정해져 있어 두 번째 줄에서 출발했으니 여느 대회같으면  
내 앞엔 사람이 많지 않아야 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봇물 터져나가는 물살처럼
나를 스치며 앞서 나간다. 그 무리에 섞여 범일님은 이미 앞서 가 버렸고
병주님 또한 앞서 가려 한다. 컨디션이 좋다기에 잘못 오버페이스에 걸리면
-분위기상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다- 후반 고생은 불보듯 뻔한 터라
같이 가자며 붙잡는다. 2km 통과시간이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또 빨라지려 하고 나는 다시 붙잡는다.

이제부터는 너무 빠른 속도에만 주의하면서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면 어렵지 않게
목표한 기록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주님과 계속해서 빨라짐을 경계하며 의식적으로 주변현황을 살피며 달린다.
첫해부터 느꼈던 주로 포장상태는 아직도 보수되지 않아 착지느낌이 좋지 못하다.
주로에 응원 나온 금발의 여성도 ‘간빠레’를 외치고 제법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작년과 재작년의 응원과 달라진 점이 없을 정도로 역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길거리에 나와 응원을 해 준다. 이들이 바로 일본 마라톤의 저변이며
또한 이들로부터 일본 마라톤의 힘이 잉태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오버페이스를 방지하며 탐색전을 펼친 것으로 1막을 정리하고
10km 지점 즈음에서부터 병주님과 나와의 일본 정벌 2막이 오른다.
그저 페이스만 유지하며 달리고 있는데 수많은 주자들이 뒤로 또 뒤로 밀려난다.
아직은 무리하게 초반 오버페이스를 범한 뒷번호 주자들이 주 대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번호가 앞당겨진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건각에 닛뽄도가 부러져 나가고,
그 추월의 칼날 앞에 ‘닥광’들이 한 둘씩, 때로는 무리지어 뒤로 넘어갈 때의 뿌듯함이란...

그렇게 하프지점까지 동반주를 했던 구병주님을 뒤로하고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병주님의 속도가 처진건지,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병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이쯤에서 다시 레이스를 생각해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은 나의 통산 50번째 마라톤이자 20번째의 30분대 기록 도전이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후쿠오카 대회이다. 현재의 몸상태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아침과 달리 그렇게 춥지 않은 온도와 예상보다 약한 바람이기에 충분히 개인최고기록에
도전해 볼만 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래 기다리지 말고 그냥 밀어부쳐 보자!’

운동장 골인하면서 힘이 남아 있음은 어쩌면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자칫 후회할 수 있는
레이스가 될 수도 있음을 새기자!
나의 레이스를 지켜보시고 계실 아버지에게 잠시 의지해본다.

‘아버지! 저 오늘 힘 좀 써 볼랍니다.
그래도 괜찮겠죠? 제게 힘 좀 넣어주세요.
오늘 또 아버지의 함봉실이 되어 드릴께요.’

또한 어떻게 지금 오늘 이 주로를 달리게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냥 그저 그런 기록으로 완주하며 50/20 이라는 횟수를 채움에 안주할 수만은 없음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전의를 가다듬으며 추월의 칼을 더욱 곧추 세운다.

서울마라톤 스탭분들이 응원을 하신다고 하였던 24km 지점이 가까워지니 멀리
응원인파 속으로 태극기가 위풍당당 휘날리고 있다. 우리의 응원군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나는 아직 싱싱하고 아무런 문제 없으니 걱정 말라는
자신감의 손짓을 해주고 다시 레이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아뿔싸!
25km 지점을 통과하며 시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26km 지점에서 시간을 보니
3분30초로 달리고 있다. 목표했던 3분 36초 내외에 비해 너무 빠르다.
살짝 페이스를 줄여본다. 27km 지점에서는 3분 34초. 역시 아직 빠른 기록이다.
이러면 곤란할 텐데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만 유지할 수 있다면 개인 최고기록을
충분히 노려볼 만 했기에 급작스런 브레이킹을 하지 않고 자연스런 흐름에 맡겨보았다.
목표를 상향 조정하여 최선을 다하고 실패한 후회나, 그저 그런 목표를 달성하고 좀 더
열심히 달려볼걸 하는 후회나 어차피 남는 후회라면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전자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승부수를 너무 일찍 띄운 느낌이 있었기에 일말의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나는 아직 건재하고 남은 거리도 충분히 현재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마인드컨트롤 하면서 달린다. 30km를 넘어 35km 지점까지도 문제없이 달려왔다.
그래! 이렇게 가는 거다. 아직 시간도 충분하고 나의 몸 상태도 좋을 뿐만 아니라
이제 남아있는 거리는 7km 남짓. 조금 페이스를 올려 25분여만 잘 달려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목표다.

다행히 이후로도 그리 큰 변화는 없는 듯 하였지만, 36km 지점이 넘어서면서 종아리가
굳어오며 전세는 급격히 역전모드로 바뀌어간다.
이렇게 제3막이 오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무너져 가는 37.5km 지점쯤(다리 건너기 직전)에서 누군가
“강호! 달려!”를 거듭 외친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였지만 55세~60대 초반 정도의 분으로 아는 얼굴이 아니다.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3년 연속 30km~39km 지점쯤에서는 한국말 응원을 받았었다.
첫해에는 거의 현기증에 쓰러져 갈 즈음에 ‘힘내세요!’라는 아주머니의 응원을
30km 조금 넘은 지점에서 들었었고,
작년에는 ‘분당! 힘!’ 이라는 청년의 응원을 39km 지점쯤의 육교에서 들은 바 있다.

이들의 작지만 큰 응원이 분명 그간의 무사(?)완주에 기여를 했을 것 인바,
오늘도 ‘왜? 아직!’ 하는 찰나에 나타난 전혀 예기치 못한 응원은 힘이 되기보다는
자못 당황하게 하였다.

누굴까? 누가 이곳 먼 이국 땅에서까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까?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정녕 환청이었던가???
하지만 그런 복잡한 심경은 나를 오래 붙잡아둘 형편이 못 되었다.
마치 망부석과 같이 돌덩어리로 급속히 변해가는 종아리의 무거움에 비례하여 36km 이후
역전된 닛뽄도의 칼날에 이리 베이고 저리 베인 상처가 커져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난 왜 이렇게 후쿠오카의 후반에는 정신력으로 버텨내어야만 하는가?
왜? 개선장군처럼 헤이와다이운동장에 보무도 당당히 입장하지 못하는가?’ 하는 자책감이
잔뜩 긴장되어있는 전신을 옥죄어온다.

아직 컷오프에 대한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한걸음 한걸음에 가해지는 종아리 통증이
머리까지 치올라오는 느낌이다.
큐슈제빙 거리를 지나 운동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시가지를 달리는 동안 한참 전에
추월했던 사희무님이 힘찬 걸음으로 내게 용기를 주며 앞서간다.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잠시 후엔 하프지점까지 동반주 했던 구병주님이 앞서가고…

운동장에 오르는 그 짧은 언덕은 지난 2차례의 대회에서 그야말로 내겐 핫브레이크힐(heart break hill)
수준을 넘어선 거의 데쓰힐투피니쉬(death hill to finish)와 같은 죽음의 언덕이었으며,
단장의 미아리 고개와도 같은 고개로 다가왔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왜 이리 비참한거야!!!’
운동장에 들어설 때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울려 퍼진다면 딱 어울리는 모습일 것 같다. ㅡ.ㅡ;;;

운동장에 들어서니 멀리서 ‘강호! 파이팅!’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럴 땐 차라리 모르는 체 해주는 것이 더 좋을텐데...
너무 죄송스럽고 면목없고 또한 수정된 목표는 물론 당초의 설정된 목표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더욱 작아지는 모습을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린다.

트랙에 진입하여 직선구간에 들어서니 뒤에서 심상찮은 발소리와 함께 이범일님이
쏜살같이 앞서가고 뒤이어 김윤오님이 앞서간다.
열심히들 달리고 마지막에서도 저렇게 힘이 남아있음이 부럽다.
2코너를 돌아 전광판을 보니 지난 올림픽에서 트랙에서 마지막 추월을 하며
동메달을 거머쥔 이디오피아의 케베데가 2시간 6분 10초로 대회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렇게 나의 50번째 마라톤은 다시금 또 하나의 숙제를 남겨둔 채 기억 저편의 편린되어
사라지지만 앞으로의 마라톤에 분명 새로운 영향을 주었음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렇게 힘겨운 골인을 하고 먼저 들어온 선수들과 서로 격려하고,
앞서 들어온 김광호 선수에게 물으니 28분대 골인을 하였다 한다. 너무 기분이 좋다.
대회 이틀 전 야근하고 쉬어야 하는데 대회참가 일정으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데다가
감기까지 걸린 몸이라서 좋지 않은 컨디션을 대회 전날부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룩한 기록이라 더욱 값지고 자랑스러워 보인다.



한국마스터스들의 후쿠오카 도전 4년만에 나온 나름대로의 쾌거이기에 우리를 더욱
기쁘게 하였다. 더불어 참가 선수 모두가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여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참가기회를 제공해 준 박영석 명예회장님 이하 서울 마라톤 클럽관계자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고 또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선수들의 조그마한 불편함이라도 해결해주시려 적잖은 연세에 청년 같은 기상을 보여주신
‘박영석 명예회장님’
궂은 일일 진데도 해마다 솔선 봉사해 주시는 ‘이장호부회장님, 윤현수부회장님, 이명직부회장님’
생업을 마다하시고 봉사해주신 이문희사장님과 주옥 같은 조언을 해주신 한재호감독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완주에 성공한 참가 선수들에게도 또한 감사 드립니다.

작년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참가해 좋은 기록으로
대한민국 마스터즈 마라톤의 자존심을 세워 준 ‘김광호 님’
발바닥에 자해를 하면서도 완주에 성공한 ‘이지원 님’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한 젠틀먼 ‘구병주 님’ (하프 지점에서 좀 말려주지!)
마지막 질주가 정말 멋있었던 머슬가이(muscle guy) ‘사희무 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력을 보이며 잘 달려준 들무새 ‘이범일 님’
부산의 샤프한 남자, 피터팬 ‘김윤오 님’
멋있는 사나이 군인아저씨 ‘이현석 님’
언제나 웃는 얼굴의 잘 생긴 방글보이 ‘유세준 님’
초반부터 찾아 온 부상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완주하신 서산의 자랑 ‘박종욱 님’

모두 고생 많으셨고 완주를 축하합니다.
회복 잘 하시고 조만간 주로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그 외에도 달리기 전 기력보충과 완주 후의 기쁨을 함께 하라며
여러 홍삼제품과 인삼주를 보내주신 ‘정진원홍삼’에 감사 드리고,
음으로 양으로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2008년의 후쿠오카는 그렇게 또 하나의 기분 좋은 과거의 기억 너머로 사라져 가겠지만,
그 과거를 발판으로 한 해 또 한 해 거듭 발전해 가는 대한민국 마스터스의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이제 후쿠오카에서도 30분대의 벽을 돌파했으니 앞으로 참가할 선수들도
더 나은 기량으로 더 좋은 기록을 달성하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유혈이 낭자한 한 완주자의 신발...누굴까요?)

[톱10(남국종)]

위 대회참가후기는 저와 갑장이신 강호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