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비 계좌이체? 머리가 하얘졌다” 어르신들 당황
신수민입력 2023. 3. 1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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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리스 사회’의 그늘
“붕어빵은 계좌이체 해봤는데 버스는 또 처음이네요”
이달 1일부터 서울시 일부 노선에서 시행된 ‘현금 없는 버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 8일 은평구 버스차고지 부근에서 만난 서모(70)씨는 “카드에 ‘잔액 부족’이 떠서 계좌이체를 하라고 종이를 받았는데 머리가 하얘졌다”며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다가 옆의 할머니분이 도와 줬다”고 말했다. 임모씨(52)도 “지난 주말에 초등학생들이 버스를 탔는데 현금만 있어서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며 “기사분이 ‘다음에 탈 때 합쳐서 내라’며 그냥 태워줬는데,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걱정되긴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이달 1일부터 현금통이 없는 ‘현금 없는 버스’를 기존 18개 노선, 436대 버스에서 108개 노선, 1876대로 확대했다. 노선 기준으로만 6배 늘어난 셈이다. 현금을 낸다면 계좌이체로 입금하면 된다. 이미 대전광역시는 ‘현금 없는 버스’가 전면 확대 시행 중이다. 시행 일주일 째, 신촌~교대역을 운행하는 버스의 고원준(55) 기사는 “4일 운행 중 3일은 현금을 받아 봤는데 연로한 분들에겐 계좌이체해야 한다는 걸 계속 설명드려야 했다”며 “30대 남성분이 비슷한 노선의 현금 받는 버스로 골라 타는 모습도 봤다”고 말했다. 이외 인터넷 카페에선 “카드로 일괄 결제하라는 ‘통제사회’ 같다”라는 의견도 종종 보였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현금 없는 사회’는 버스뿐 아니라 일상 속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서대문 행 ‘현금 없는 버스’를 겨우 탔다는 김모(57)씨는 가방 한 번 바꿨는데 카드가 없어 황당한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현금을 뽑았던 아들 체크카드가 생각나 간신히 버스를 탔다”며 “이후 들른 스타벅스에선 5만원권 지폐를 내니 ‘현금 없는 매장’이라 거스름돈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유통업계에선 ‘현금 없는 매장’이 확산되고 있다. 스타벅스는 1780곳의 전체 매장 중 60%가 ‘현금지양 매장’이고, 할리스 커피도 시행 중이다. 한국은행의 설문조사(2021)에 따르면 1년간 상점, 음식점에서 현금결제를 거부당한 응답자는 전체 가구의 6.9%로 3년 전(0.5%)보다 증가했다. 결국 김씨는 기다렸다 직원이 구해 온 현금으로 거스름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카드를 대다수 사용하는 현재, 이같은 ‘캐시리스(현금 없는) 사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다만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현금 기능이 범용적으로 가능해야 하고, 다양한 결제수단을 충분히 보장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현금결제 비중은 매년 급감하고 있다. 2013년 41.3%에서 2021년엔 21.6%로 확연히 줄었다. 전세계적으로 봐도 비현금결제 비중(80.2%)은 스웨덴(87%) 다음으로 가장 높다. 하지만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금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지급결제수단이 카드, 페이로 바뀐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연령별 현금 결제 비중은 70대가 40%, 60대도 20.5%로 현금을 꽤 많이 사용한다.
현정환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현금 없는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임에도, 문제가 되는 건 논의가 현금의 결제 수단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라고 지적했다. 현금은 결제 이외에 가치저장 기능도 있다. 비대면 결제가 증가한 코로나 기간동안 현금 보유가구 비중은 2018년 23.3%에서 2021년 31.4%로 늘었다. 현 교수는 “비상금으로서의 현금 수요도 존재한다”며 “현금은 사라지지 않기에 계속 보급돼야 한다”고 말했다.
캐시리스 사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현금 접근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언제든 현금 인출이 가능한 자동화입출금기기(ATM)가 대표적 예다.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ATM은 2013년 12만4236대에서 2021년 11만7282대로 7000대 줄었다. 이미 캐시리스 사회로 진입한 스웨덴, 영국, 뉴질랜드 등 3개국에선 우체국이 금융업무를 중단하거나 ATM이 대폭 줄자 ‘현급접근성 유지’를 핵심 아젠다로 내걸었다. 영국은 ATM 감독을 강화, 화폐유통시스템을 관리하는 현금전략그룹을 설치했다.
문제는 현금을 발행해 유통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것이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한국은행의 화폐 발주량이 줄다보니, 화폐사업 부문에서 매출이 감소하면서 이 부문의 인력 구조조정 등을 이미 한 상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금 유통망을 더 효율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 교수는 “은행권 공동 ATM을 설치하거나 영국처럼 ATM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금 없는 식당’은 현금 투입이 가능토록 하고, 버스는 자동 잔금처리 기술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독 한국에서 ‘현금 없는 사회’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에 대한 논의가 더딘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승훈 KB경영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카드 사용빈도가 타국에 비해 워낙 높아 대응 필요성이 크지 않은 게 이유”라며 “금융취약계층 보호를 민간에 맡겨두면 소수 현금 사용자의 편의성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결제시장이 재편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금 사용 보장, 화폐 발행은 정부밖에 할 수 없는 일로 공적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 교수는 “대안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연구 중인데 실물화폐도 동일선상에서 고민해야 한다”며 “미국 하원에서 현금결제 선택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한 것처럼 입법 논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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