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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a. 배경 및 의의
1980년대에 들어가면서 교회는 통일의 문제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 최대의 과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제까지 가졌던 교회 내적인 선교적 접근태도에서 민족 해방의 관점으로 그 입장을 바꾸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 통일문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81년 6월에 개최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라는 인식을 공유한 교회 대표들은 1982년 2월 제31차 NCC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설치를 결의하였다. 그후 내규 작성 등 재빠른 내규 논의 과정을 거쳐 교단대표 12명, 각 위원회 대표 2명, 전문인사 5명, NCC 총무 등 20여명이 위원으로 참여하여 9월 16일 위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당시 통일 문제는 정부 당국만 다룰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위원회를 조직한다는 것 자체가 정부에 대항하는 일로 비쳐져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의회의 개최가 무산되는 등 위원회는 활동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당하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위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온 분단의식을 극복하는 화해와 통전의 복음적 실재를 경험하고 증거해" 간다는 입장에서 한국 교회의 통일운동을 주도하고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의 물꼬를 트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1985. 2.28)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는 결실을 맺었다.
그 중에서도 1988년 2월 29일 NCC 제37차 총회에서 만장 일치 기립박수로 채택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은 한국교회와 사회의 통일운동의 단계를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문서는 "같은 피를 나눈 한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을 극복하여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 한국 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선교적 사명"임을 한국교회와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 앞에 선언하였다.
이 선언문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전통', '민족분단의 현실',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민족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교회의 건의'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에서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그 준비 작업으로 교회 갱신운동, 평화통일 교육시행, 화해와 일치의 실천, 연대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을 그 실천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비록 보수적인 10여 개 단체들이 비난성명 등을 내는 등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보장되고 민족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통일 논의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KNCC 통일선언'은 종래의 선언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통일의 원칙에서 '7.4 공동성명'이 천명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에다 '인도주의 원칙'과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삽입한 것은 그간의 통일원칙들이 외면했거나 소홀히 한 점을 보강한 것이다. 또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 증진을 위한 조치로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와 불가침조약 체결을 강조한 것, 주한 미군의 철수와 군축 비핵화를 강조한 것은 그 뒤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협상쟁점으로 떠올려 그 결실을 맺게 했다. 여기에다 이 선언은 해방 50년을 맞는 1995년을 기독교적인 평화개념인 '평화통일 희년'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언이 장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선언이 발표되기 이전 국가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통일과정과 방법의 문제점들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에서의 정리 소화 작업이 미흡했고 분단을 고착화시킨 이념과 체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지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이 미흡하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으로 통일에 대한 열기가 전국민에게 확산되었으며 교회 통일 운동은 그 방향을 지시하는 확실한 이정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선언은 기독교 통일운동사와 한국의 통일운동사에 미친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운동사에도 일정하게 자극을 주었다.
첫째, 한국기독교계에 미친 영향이다. 이 선언은 남한의 기독교계가 그 동안 통일논의를 처음으로 종합 정리한 것으로 이로써 기존의 운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척도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선언은 또 기독교계에 통일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 진보 측은 물론 보수 측에도 통일논의의 물꼬를 터 주었다. 90년을 전후하여 종래 선교적 차원을 중심으로 북한을 생각하던 보수주의권 교회들이 민족적인 차원에서도 통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서구에서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한반도에서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화해, 불가침, 비핵화의 분위기가 감돌게 된데다가 이 선언을 계기로 민족통일 논의가 기독교계 내에서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 밖의 한국통일운동사에 미친 영향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선언은 '민간에 의해 이룩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선언'이라고 평가된다. 때문에 한국사회에 던진 충격 또한 컸다. 그 동안 NCC 주관의 통일협의회를 극력 저지해 온 정부가 받은 충격은 더 심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KNCC 통일선언'이 발표된 그해 여름 노태우 대통령에 의한 7.7 통일정책선언을 도출해 내는데 혹은 그 정책선언을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지적은 적절하다. 그리고 1991년 12월13일 남북사이에 채택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그해 12월 31일에 가서명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성명>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천명한 이 선언의 내용을 거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문서에는 한국교회협의회 선언이 주장한"통일원칙, 상호존중과 비방금지, 학술, 문화교류, 자유왕래, 비핵화 등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는 이 선언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적인 정당성과 민족적 공동선을 위한 성격을 남북당국이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세계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은 해외의 동포들과 외국의 형제교회 및 세계교회 기구들과의 연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KNCC 통일선언' 이 끼친 공헌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교회와 공유해야 할 것이다. 이 선언에 이어 4월25-29일 까지 인천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한반도 평화협의회'는 한국교회의 이 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 선언서에 나타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적 연대를 심화 확대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결의문 7개중에는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복역중인 정치,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하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함께 노력한다는 것도 있었다. 그 뒤에 개최된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제 2차 글리온 회의의 선언서와 1989년 7월 2일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정책성명 그리고 1989년 8월 15-26일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 연맹의 '한반도의 통일과 화해' 결의안에서도 각각 이 '88선언'을 지지, 환영, 인준했다.
b. 본문내용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1)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 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1. 한국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마22: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방지의 명목으로 최강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6-20, 44:6-7)를 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뿐 만 아니라 정치, 경제 각 분야에서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고 동서냉전체제에 편입되고 예속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족 예속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독립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롬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한다.
2. 우리는 한국 교회가 민족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온 자주적 민족통일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행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 13:17)이다.
2) 민족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본원칙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화해의 복음(엡 2:14-17)을 실천해야 하며 동족의 고통스러운 삶에 동참해야 한다.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곧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룩하는데 있으므로 우리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바로 신앙의 문제임을 인식한다. 통일은 곧 민족의 삶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분단을 극복함으로서 갈등과 대결에서 화해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침내 하나의 평화로운 민족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회협의회는 1972년 남북간에 최초로 합의된 7.4공동성명에 나타난 자주, 평화, 사상 이념 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3대 정신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기본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이와 함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이 통일을 위한 모든 대화 및 협상 실천 속에서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1.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나 민족도 인간의 자유와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념과 체제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배려와 조치의 시행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다른 어떠한 이유로도 인도주의적 조치의 시행이 보류되어서는 안 된다. 2.통일을 위한 방안을 만드는 모든 논의 과정에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특별히 분단체제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늘 소외되어온 민주의 참여는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3) 남북한 정부에 대한 한국교회의 건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이와 같은 고백에 입각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평화와 화해의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고 민족 분단의 고통에 동참하고 통일로써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하여,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희년 선포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자 한다.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다.
2. 한국교회는 '희년을 향한 대행진' 속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교회갱신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3. 평화와 통일의 희년을 선포하기 위하여 한국교회는 평화와 화해의 결단을 하는 신앙공동체로서 평화 교육과 통일교육을 폭넓게 시행해 나갈 것이다.
4.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을 선포하는 희년 축제와 예전을 통하여 신앙을 새롭게 하고 참다운 일치와 화해를 실천해 나간다. 5.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