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지도자가 될 사람들의 싸움이 벌어지다. 아부 바르크가 이슬람 종교지도자 '칼리프(=칼리파)' 가 됨으로서 칼리프 시대(정통 칼리프 시대)가 시작됩니다
칼리프는 이슬람 최고 종교지도자를 뜻하는데
그러면서 군주의 성격을 띄고있었던 이슬람 종교+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처음 무함마드 사후
4명의 칼리프가 나왔는데
칼리프는 세습제가 아닌 선거군주제 형태를 띄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그러나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암살되며 정통 칼리프 시대가 끝나고
이슬람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본격적으로 분리됩니다
수니파는 이슬람 8~90%가 믿는 파로 이슬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공동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프라면
무함마드 혈통이 아니어도 상관없다했고
시아파는 무함마드 사촌 알리와 그의 후손만이 진정한 칼리프라 했습니다
현재도 아랍권에서는 사우디 , 이집트 , 터키 등 대부분 , 90% 국가가 수니파를 믿고있고
이란 , 이라크 , 시리아 , 아프가니스탄 등 10% 국가가 시아파를 믿고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건국]
정통 칼리프시대에도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정복하는 등 사방으로 확장했고 점차 제국화됩니다
정통칼리프 시대 말기는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혼란이 계속됬고 3대 칼리프 우스만이 암살당하고 배후가 밝혀지기 전 4대 칼리프 알리가 선출되자 이 과정에서 의심을 품은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가 우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알리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초기엔 알리에게 유리했지만 알리와 무아위야의 힘의 균형은 점차 무아위야에게 옮겨졌고
알리 암살 이후 무아위야는 칼리프 자리에 오르고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려하나
이 시기 이슬람교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됩니다
당연 무함마드나 알리의 혈통이 아닌 무아위야는 시아파가 아닌 수니파였고 무아위야의 집권기부터는 수니파의 시대가 시작됬고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에게 칼리파 지위를 물려준 후 사망했기에 칼리파 선출제는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
첫 이슬람 제국이 탄생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옴미아드 왕조)'
[투르-푸아티에 전투]
점차 이슬람제국은 제도화 , 중앙집권화를 시작했고 로마제국 양식에 따라 군사조직도 편성했으며 아랍인 우대정책 및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시켜서 아랍어가 여러 지역 , 이슬람 세력권에 퍼지게 됩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제국 최대영토를 확보해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는 '이슬람 문화권' 을 형성했고 중동 , 서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에 이르른 광활한 영토가 우마이야 왕조의 정복지가 되었습니다
여러 정복전쟁에서 이슬람 제국의 압도적 기술 , 군사력이 차츰 드러나게 됬고 점차 유럽까지 공략하려 하자 기독교를 믿던 유럽 백인들은 이슬람 제국의 강성함에 두려움에 떨게됩니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 스페인 지역을 몽땅 정복하고 나아가 북진해 프랑스까지 따먹으려 했는데
우마이야 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까지 진입하려 하자 이 사실을 알아낸 카롤루스 마르텔(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은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 지방에서 우마이야 군의 북상을 저지해 기독교 , 유럽세계를 지켜냈고 이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유럽에서 차기로마를 잇는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가 되고 현대 유럽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건국]
하여튼 무시무시한 기세와 번영의 우마이야 왕조는 그럼에도 아랍인 우월주의와 민족차별등에 많은 내부불만이 제기됬는데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 , 이슬람교 신자 비율은 10%도 안됬는데 일반 백성들은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의 정통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기득권 , 귀족정을 정당화시키려 이슬람교를 이용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런 문제로 인해 100년도 채 못간채 부패 , 반란 , 내전이 있어 점차 지방 영주들도 중앙 정부를 따르지 않게 되었고
이러한 우마이야 가문의 약점을 파고들어 새로 일어난 아바스 가문은 민족 , 종교를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워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의 후손들을 내세워 구세주적 선전을 체계적으로 펼쳤고 무함마드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들의 지지를 얻어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아바스 왕조를 건국합니다
[아바스 왕조의 발전]
혈통주의의 시아파와 손잡은 아바스왕조였지만 아바스 왕조는 정작 평등을 기치로 건국된 나라였기에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관직에 등용되고 누구나 공평히 대우받았고
종교에대해서도 이성적이고 관대해 종교차별이 없었고 심지어 이슬람교에 반대하는 의견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합리적 과학나라였기에 오히려 이로인해 이슬람교가 세계 종교로 퍼지게 됩니다
100년도 못가 멸망한 우마이야 왕조에 비해 500년이나 갔고 또 이성+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전성기 국가가 됩니다
아바스왕조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고 학자들은 자유로운 종교토론 , 이슬람교 거부까지 할 수 있었기에 학자들은 이슬람교리를 각종 철학등을 바탕으로 체계화 , 정비 , 근거화시켰고
이슬람교는 아랍민족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발돋움합니다
[지혜의 집]
또 이러한 열린 사회분위기속에 수많은 신학자 , 과학자들이 나와 활동했고
아바스왕조는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 이라는 학문 연구기관을 만들어 유럽 , 중동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려 했고 수많은 그리스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되고 과학 , 수학 , 철학등이 연구되는데
한창 중동 , 이슬람인들이 이성과 과학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벌이며 빛나는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을 때 유럽인들은 반대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이라 조지고 때리며 비위생 , 비과학에 빠지고 타종교들을 거부하던 시대였던 중세 흑역사시기라 오늘날의 반대였다는 유머도 있습니다
[이슬람 상인과 바닷길]
아바스 왕조는 열린 나라로서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비아랍인들에게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독자적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켰고 이슬람 상인들은 이 시기부터 세계 곳곳에 배를 타고 나가
한국 , 중국까지 가서 교류했고
한국과 중국은 독자적인 문명과 불교의 발달 및 이슬람 지역과 너무 멀어서 이슬람교가 퍼지지는 못했지만 특히나 이슬람 상인들이 바닷길로 다니던 인도 , 동남아 지역은 이슬람교가 크게 퍼지게 됩니다
바닷길을 누비던 이슬람 상인들로 인해 장거리 항해술도 발달해 이러한 항해술은 유럽에 전해져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탈라스 전투]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 근처에서 서역으로 서진하려는 중국 당나라와 아바스왕조가 맞다이를 떴는데 아바스왕조에게 당나라가 완벽히 패배했고 이로인해 실크로드 교역료 및 중앙아시아까지 이슬람 세력권에게 넘어가는데 특히 중국이 독점하던 종이 제조기술인 '제지술' 이
이 전투로 인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었고 이슬람의 제지술은 유럽에도 퍼져 세계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칼리프의 실권이 약화되며 10세기부터 여러 왕조로 분열됬고
아바스왕조는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멸망합니다
[후우마이야 왕조]
아바스왕조 시대에는 이외에도 아바스왕조에 반발한 다른 이슬람제국 '후우마이야 왕조' 가 이베리아 반도 , 유럽에 세워지기도 했고 이들은 크리스트교 세계와 대결하며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라봉봉>옛날엔 줄리어스 시저 , 칼리프 , 옴미아드 , 압바스 이렇게 공부했는데
요즘 역사계는 영어권식 표현이나 옛날식 발음보다는 그 지방의 고유어를 쓰는 풍조가 강해져 자주 개정되는데 별 차이는 없습니다
이시기 이슬람 제국은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열린 나라였는데
이때부터 유럽인들의 중동세계에 대한 열등감이 쌓이던 시대라 산업혁명 이후 유럽이 다른 세계들을 힘으로 압도하게 되자 특히 바로옆의 중동지역은 유럽인들의 타겟이 되어
온갖 미개 , 그저 관능적인 , 테러 이미지들을 중동에 뒤집어 씌웠는데 이슬람교는 의외로 평등을 중시한 합리적 종교였기에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슬람 국가들은 생각보다 합리적인 나라였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문화유산들은 다시 서양에 퍼져 유럽에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했고 세계 과학 등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공부 잘 했습니다.
그러니 코로나 19 박멸되면 배길에서 이란도 후다닥 다녀오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