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1장을 중심으로
성경에서 규례(ordinances)란 "정해진 규칙이나 법"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국가의 공권력이나 법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롬 13:2; 벧전 2:13), 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종교적 의식이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월절 규례와(출 12:43; 민 9:14), 신약 교회에게 주어진 밥티스마와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들 수 있습니다(마 28:19; 고전 11:23-29).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는 교회의 규례(Church ordinances)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게 지키도록 명하신 외적 의식"(outward rites prescribed by Christ to be performed by His church)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공통적인 교회 의식으로서 밥티스마(침례, Baptism)와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의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교회 의식 외에도 세족식(요 13:1-14), 애찬(고전 11:17-22), 안수(행 8:15-18), 거룩한 키스(살전 5:26), 병자에게 기름 바르는 의식(약 5:14-15),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여자가 너울 쓰는 것(고전 11:3-16) 등을 교회 의식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로마 카톨릭의 경우는 일곱 가지 성사(seven sacraments)를 교회 규례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동방정교, 성공회, 다아비의 형제교회와 메노나이트 등 몇몇 기독교 그룹에서 교회의 규례로서 존중하여 실행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것이 과연 성경이 의미하는 교회의 규례(church ordinance)인지를, 그 근거로 제시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문제의 제기
우리는 먼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실제적이고 진지한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접근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veil)을 써야 한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명령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여자가 "너울 쓰는" 것이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교회 규례(church ordinances)라면, 왜 성경 전체에서 유독 고린도전서 11장 3-16절에서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도 직접적으로 "너울(veil)을 쓰라"고 명하지 않고 여자의 머리가 덮여져야(covered) 한다는 간접적인 언급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고로 교회의 규례로 잘 알려져 있는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은 사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여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명령하며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마 26:26-28; 28:19; 막 14:22-25; 눅 22:15-20; 롬 6:4; 고전 11:23-26; 히 6:2; 벧전 3:21).
만일 여자가 너울 쓰는 것이 교회의 규례라면, 이 규례를 실행치 않고 있는 모든 교회들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이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인정받는 데 중대한 결격사유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이것이 교회의 규례가 아니었다면, 너울 쓰는 것을 교회의 규례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행치 않는 모임들을 정죄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실수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분열시킨 중대한 죄를 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반드시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규명해야 할 것이며,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순종하는 일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규례인가 아니면 풍습인가(ordinance or custom?)
고린도전서 11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사도로부터 전달받은 규례들(ordinances, 복수)을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3절).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긴 머리로 덮여져야 하고, 여자가 머리가 덮이지 않은 채로 기도나 대언을 하는 풍습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못박아 말하였습니다(4-16절). 그리고 나서 주님의 만찬 실행에 있어서 합당치 못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가르쳤습니다(17-34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칭찬한 바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었던 규례들(복수)이 주님의 만찬과 함께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쓰는 것도 포함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정적 단서가 16절인데, 왜냐하면 16절이 여자가 너울 쓰는(혹은 머리를 덮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울 쓰는 것이 2절에서 말한 규례 중의 하나였다면, 사도 바울은 16절에서도 분명히 '규례'(ordinance, 단수)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즉, "논쟁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이러한(혹은 그러한) '규례'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문제는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여타의 현대 역본들이, 2절의 규례(ordinances)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대부분 전통(traditions)으로 잘못 번역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대 역본을 읽는 독자들은 16절의 풍습이 2절의 전통의 일부라고 오해하기 십상이었고, 특히 한글 개역성경은 아예 16절의 풍습(custom)을 '규례'(ordinance)라고 번역함으로써, 너울 쓰는 것을 교회의 규례로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전 11장 2절과 16절의 단어 비교:
권위역: 2절-규례들(ordinances)/ 16절-풍습(custom)
한글개역: 2절-유전/ 16절-규례
표준새번역: 2절-전통/ 16절-풍습
공동번역: 2절-전통/ 16절-풍습
NASV: traditions/ practice
RSV: traditions/ practice
NIV: teaching/ practice
New KJV: traditions/ custom
(참고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역은 "2절-관례/ 16절-관습"으로 번역하였음.)
2절의 규례(ordinances)와 16절의 풍습(custom)은 의미상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2절의 '규례'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파라도시스'(paradosis)는 "전통, 모세에 의해 전해오는 율법 의식, 교회의 규례" 등을 뜻하며, 16절의 '풍습'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수네쎄이아(sunetheia)는 "친밀한 교통, 관습, 풍습" 등을 뜻합니다. 전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후자는 단순히 보편적 생활습관을 가리킬 뿐입니다. 풍습(custom)을 실행(practice)이라 번역한 것도 옳지 못합니다. 실행이라 하면 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자칫 규례와 풍습을 모두 포함하는 애매모호한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2절에서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으로서의 '규례'를 언급한 반면, 16절에서는 인류 보편적인 '풍습'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규례가 풍습이 될 수 없듯이, 풍습이 규례가 될 수 없으며, 명확히 구분되는 규례와 풍습을 실행(practice)이란 단어로 모호하게 얼버무려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확한 용례와 어의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성취될 것이며, 우리 각 사람은 정확한 순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배경 이해
고린도(코린트)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가장 번창하는 도시로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동방을 잇는 동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번화한 무역도시이자 항구도시로서의 고린도는 도박과 합법적 신전 매음, 각종 스포츠 게임과 모험적인 비지니스 및 향락산업 등의 메카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상인들, 선원들, 이주민들, 전문 도박꾼들과 운동선수들, 그리고 예술가와 철학자들뿐 아니라 노예들과 부랑자들이 밤낮 없이 거리를 헤메고 다녔고, 신전 매음을 중심으로 사방에 남창들과 여창들이 들끓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생겨난 고린도 교회였기에, 문제도 많았고 미혹도 많았으며, 늘 타락한 세상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전형적인 현대 도시 교회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과의 경계선이 모호하고 분명치 못한 고로, 한편으론 성경적인 실행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세상의 온갖 타락한 문화가 밀려 들어와 순수한 신앙과 뒤섞일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들이 잡초처럼 자라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교회라고 질책하면서, 그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인내를 가지고 다루어나갔습니다. 세속 지식과 학문의 영향에 대해서, 교회 안의 성적 부도덕과 법정 소송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결혼과 독신주의, 우상숭배에 관련된 문제들, 관습과 도덕, 합당치 못한 만찬 모임의 문제, 영적 은사에 대한 혼돈과 오용, 변질된 복음, 특히 육체적 부활이 없다는 주장 등등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운 문제들을 진리의 빛으로써 하나하나 조명해 나갔습니다.
특히, 고전 11:3-16에서 다룬 내용은 여자들이 머리를 덮지 않은 상태로 기도와 대언을 하는 문제였는데,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된 배경은 바로 이방 신전의 여사제들이었습니다. 여사제들 중 상당수가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깎거나 비구니처럼 빡빡 민 머리를 하고서 신전을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기도를 해주거나 예언자 노릇을 하였고, 한편으론 신전 매음을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은 이교적 관행이 고린도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쳤고, 급기야 교회 안에서도 여자들이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이 사도 바울의 귀에 전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로 모일 때마다 사도 바울이 전해준 대로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실행하였는데, 문제는 만찬 모임에서 자매들이 남자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는 이교적 모방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 내에 파당과 분열이 야기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을 기록한 목적도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사도로부터 전수받은 규례들(밥티스마와 주님의 만찬)을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는 칭찬할만하지만, 만찬 모임에서의 합당치 못한 실행들과 그로 인한 분열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장구조
이러한 맥락에서 기록된 고린도전서 11장은 전체가 34구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어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보기로 내세워, 고린도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독려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본보기를 따르라고 선언한 것은, 바울 자신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느덧 자기 십자가를 내려 놓고서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을 본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선언한 직후, 사도 바울은 곧바로 2절부터 규례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2절과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2절이 시작되는 접속사와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는 둘다 똑같이 그리스어로 '데'(deh)인데, 문맥에 따라서 "also, but, now, moreover"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입니다. 이 두 접속사는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문맥을 어떻게 파악하였고, 어떻게 이해했느냐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권위역에서는 2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를 "Now"로 번역하였고,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는 "But"으로 번역하였습니다.
2절의 'Now'(이제)라는 접속사는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 시작한다는 표시로서, 사도 바울이 전해준 "규례"(the ordinances)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니"란 문구와 함께 주님의 만찬을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되듯이,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규례의 문제가 다름아닌 주님의 만찬에 대한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
3절의 'But'(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시작부터 갑작스런 반전을 시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에 대한 규례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게 맨먼저 상기시켜야 할 일이 있음을 강력한 논법으로 시사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사도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고, 영적 분노를 야기시킬 만큼 심각하였기에, 입을 열자마자 터져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논조는 매우 강하였습니다: "너희 고린도 교회는 내가 전해준 규례들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칭찬할만하다. "그러나"(But), 너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만찬 모임에서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강한 논조가 3절의 첫 접속사가 'But'라는 역접으로 시작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바울이 입을 열자마자 터져나온 3절의 접속사 "그러나"(But)는 3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만찬 모임에서 이교적 실행을 본받는 자매들의 행위를 용납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문제를 3절에서 16절까지 분명히 지적한 다음, 17절에서부터 다시 만찬 모임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7절의 첫 접속사가, 2절과 마찬가지로 "Now"(이제)로 시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절에서 언급한 규례의 문제를 곧바로 17절에서 연이어 다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3절-16절은 삽입구였습니다. 즉, 2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지키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였지만, 17절에서는 만찬 모임에 "분열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결코 칭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된 것입니다. 칭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17절 이하 34절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장구조는 1절의 선언문과 함께, 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 곧 주님의 만찬의 규례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였고, 3절부터 16절까지의 삽입구에서는 무엇보다도 만찬 모임의 큰 걸림돌인 이교적 풍습에 따른 그릇된 실행의 실체를 알게 하였으며, 17절부터 34절까지는 본격적으로 주님의 만찬의 의의와 합당치 못한 만찬의 실행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하고 바로잡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문 이해는 앞서 제시한 규례와 풍습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으로 고린도전서 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울(veil)을 쓴다"는 개념이 전혀 발견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울' 혹은 '베일'이란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 위에 무엇을 쓴다(wear)는 동사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고전 11:3-16의 삽입구에서 다룬 내용 중에는 단지 '긴 머리'(long hair)와 머리가 덮여지는 것(covering)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머리가 덮여지는 것(covering the head)을 머리 위에 너울이나 모자나 수건 같은 것을 쓰는 것으로 오해하여 대부분 무엇을 "쓴다"라는 동사로 번역하였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덮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덮는 '자연스런'(natural) 방식이지만, 너울이나 모자나 수건으로 쓰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씌우는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머리를 인위적으로 씌우는 문제가 아니라, 본성(nature) 자체와 관련되어 자연스럽게 덮는 문제임을 14절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성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느냐"(Doth not even nature itself teach you, 고전 11:14).
성경에서 "베일"(veil or vail)이란 단어는 창 24:65부터 히 10:20까지 총 43구절, 46회 사용되었지만, 대부분 간막이, 휘장(주님의 육체)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밖에 성별의 의미와 모세의 얼굴 빛을 가리는 베일(고후 3:13,14)로 사용되었거나, 혹은 사막 지방에서의 일상용도로 사용된 경우 등이 대부분입니다. 레위기 10장 6절의 "머리에 덮은 것을 제거하지 말고 너희 옷도 찢지 말아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다가 죽임당한 자들을 위해 애곡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애곡하기 위해 머리를 풀어재치고 옷을 찢는 행위는 고전 11장 내용과는 무관하며, 더욱이 이러한 애곡 행위가 일반적으로 남자에게 해당되므로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도 베일이 고전 11장의 경우처럼 머리 덮는 용도로 사용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 11장의 배경과 본문 자체의 이해를 통해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분명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경은 이교 신전의 여사제들이 짧은 머리와 민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모방하여 교회 안의 자매들이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였고, 그러한 풍습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16절). 사도가 문제 삼은 것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 역할을 대신하는 그릇된 풍습에 대한 것이었고, 핵심적 관건은 남자와 여자가 머리를 덮는 것(covering)으로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남녀 구분의 목적을 가지고 머리를 덮는 자연스런 용도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4절은 여자 머리를 한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남자의 수치를 말씀하고, 5절은 남자 머리를 한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여자의 수치를 말씀합니다. 여자가 긴 머리를 하지 않는 것은 짧게 깍거나 민 머리를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짧게 깍거나 밀어버리면 본성이 수치를 느끼듯이, 긴 머리를 하지 않고 마치 남자 머리처럼 하는 행위도 동일하게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 자매들이 비록 이교 여사제처럼 짧게 깍은 머리나 민머리를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일반적인 남자 머리 정도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와 구분이 될 정도의 긴 머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예 빡빡 밀어버린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15절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15절을 대부분의 한글 역본들이 잘못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역 영어 성경의 "for her hair is given her for a covering"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덮기 위해 그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입니다. 개역한글은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라고 오역하였고,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역은 "이는 그녀의 머리가 그녀의 쓰는 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라"로 오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for a covering"의 'for'를 "대신하여"로 번역한 것이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for'는 목적과 용도를 나타내는 'for'이기 때문에, "덮기 위해서" 혹은 "덮는 용도로"라고 번역해야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5절은, 하나님께서 머리 덮는 자연스런 용도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고전 11장의 머리 덮는 수단으로서 '긴 머리' 이외의 다른 해석은 배제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그러한 풍습"이 없다고 말씀한 것은, 여자들이 남자 머리를 하고서 기도하고 대언하는 그러한 이교적 풍습을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머리의 권위와 관련하여 남녀구분의 자연스런 수단으로 주신 것은 긴 머리였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베일(너울)이 이러한 목적으로 대신하여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베일(너울)은 오히려 분리와 순결의 의미로써 주로 사용되었고,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베일을 썼으며, 의복의 일종으로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베일도 영광의 빛을 일시적으로 차단키 위한 가리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경우에서처럼,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을 본성 자체가 가르쳐 주는 권능의 표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긴 머리카락(long hair)이지 사람이 만든 베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규례가 아닌 풍습의 문제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듯이, 얼마든지 예외가 허용될 수 있고, 또 각 나라와 민족마다 다양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긴 머리가 어느 정도 길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민족과 문화와 풍습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여자가 나면서부터 대머리인 경우에는 긴 머리를 대신하여 베일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머리를 덮는 것(covering)은 강조하되, 덮는 수단에 대해서는 14,15절 외에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런 덮개가 긴 머리이고, 예외적으로 긴 머리 대신 쓰는 것이 허용된다 할지라도, 역으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너울을 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범위를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 머리를 하고서 지도자 노릇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이며, 긴 머리로 남녀구분을 하는 문제는 본성에 따른 풍습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목사 제도나 여사제 제도를 강력하게 경계하는 것이 성경의 강조점이며, 머리 덮는 수단이나 재료 논쟁은 성경의 의도를 빗나간 것으로서 단지 인류 보편적 풍습의 문제일 뿐입니다. 풍습의 문제는 교회의 규례가 될 수 없고, 교리로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상식과 본성을 거스리는 단정치 못한 행위에 대해서는 꾸짖고, 이교적 영향에 따른 이단적 행위(여사제 제도)를 강력히 경계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입니다. 긴 머리와 관련된 풍습의 문제는 문화적 차이와 정도 차이를 인정하되, 본성과 사회적 정서에 어긋날 정도의 방종 행위는 마땅히 책망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처신 문제에 대해서는 고전 14:34-40; 딤전 2:9-15; 딛 2:3-5 등지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11장에서는 이런 문제보다는 주로 여사제 제도와 관련된 이단적 행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독교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여목사 제도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목사 까운을 입고 사람들에게 기도도 해 주고, 공중 설교도 하고 하는 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생한 이단적 행위와 같은 종류의 이단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이교적 여사제 제도에 기원하는 것으로서, 비록 성경으로 교묘하게 합리화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긴 머리로 남녀구분을 하는 풍습은 교회의 풍습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풍습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인류에게 주신 남녀 구분의 본성에서 비롯된 지극히 자연스런 구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풍습은 기꺼이 받아들이되, 본성을 거스리는 가증한 풍습은 배격해야 마땅합니다. 풍습이기 때문에 예외와 관용이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정서와 본성을 거스릴 정도의 이상한 행위까지 용납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며, 더욱이 여자가 남자 행세를 하고서 지도자 노릇을 하는 그런 이단적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경계하고 단호히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경우로서, 여사제 제도의 이단적 행위가 침투해 들어와서 급기야 만찬 모임에서까지 논쟁과 분열을 야기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이교에서 비롯된 종교적 베일(너울)의 문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달리, 고린도전서 11장을 잘못 이해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쓰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더욱이 성경대로 실천하기를 고집하는 극보수 기독교 그룹들에서 오히려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을 고수해왔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옳바르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 때에 여자들이 쓰는 너울의 기원은 남자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처녀로서의 성적 순결과 종교적 헌신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수녀들의 베일(veil) 역시 로마의 베스타 여신에 대한 순결과 종교적 헌신의 의미에서 비롯되었으며, 처녀로서 신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제물을 상징하였습니다(알렉산더 히슬롭의 두 개의 바빌론 참조). 수녀의 베일의 종류도 여러 가지였는데, 처음 입교한 수녀의 경우는 하얀 색의 수습수녀 베일(the veil of probation)을 입게 되고, 수녀 중에 25세 된 처녀는 주교로부터 특별 봉헌된 처녀의 베일(the veil of virginal consecration)을 하사받아 입게 되며, 수녀가 40세가 되면 성직수임의 베일(the veil of ordinantion)을 하사받아 여부제(deaconess)가 되고, 60세가 되면 고위 성직자 베일(the veil of prelature)을 입게 됩니다(Catholic encyclopedia, religious veil 참조).
사제와 수녀들의 엄격한 독신생활과, 순결과 헌신을 의미하여 입는 각종 베일들의 기원은 성경이 아니라 바빌론의 바알숭배 종교의 사제복이었습니다. 당시 바알 사제들은 바쿠스(님로드 혹은 니므롯의 다른 이름)가 죽음에 처해졌을 때 있었던 수족 절단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로쉬게자"(Rosh-Gheza)로서 애곡하였는데, 로쉬-게자(Gheza는 털깍기 혹은 면도하기를 뜻함)란 말은 '자른' 혹은 '면도로 민 머리'를 뜻하고 있습니다(두 개의 바빌론, 안티오크, 1997, 314-322쪽 참조). 훗날 고린도의 이교신전 사제와 여사제들이 짧은 머리와 면도로 민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예언을 한 것도 바알 사제들에 기원한다 할 수 있으며,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온 여자들의 이상한 풍습도 여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종교적 베일 외에도 일반인들이 흔히 두르는 베일, 모자, 터번, 두건, 망또 등 다양한 문화와 풍습들이 있는데, 그 의미와 기원은 매우 다양하며, 비록 그러한 문화와 풍습 가운데 남녀 구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도 없진 않지만, 긴 머리로 남녀 구분을 하는 인류 보편적인 풍습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단지 보조수단이나 대체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특별한 의미의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종교적 성별이나 헌신, 신분과 지위의 상징, 보호와 환경적 요인 등 다양한 의미에 기원한 다양한 풍습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로마 카톨릭의 각종 사제복과 수녀복은 바알 사제들이 입은 베일(veils)에서 기원하였으며, 회교권 여성들이 입는 베일이나 차도르 등도 이러한 종교적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교적 관행들을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걸러내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동방정교, 성공회를 비롯하여 메노나이트, 아미쉬, 형제교회 등등의 여러 기독교 그룹으로 전수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이 비록 성경의 구약 제사장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었던 베일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신약교회는 구약의 관행을 실행해서는 안되며, 또한 일반인의 의상 풍습을 종교적 규례로 가르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본 의도에서 빗나간 그릇된 해석이며, 긴 머리의 건전한 풍습을 너울 쓰는 이상한 종교적 행습으로 대체하여 마치 주님께서 명령하신 교회의 규례인 것처럼 가르치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교제를 거부하는 등 많은 논쟁과 분열을 야기시킨 것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며, 그릇된 가르침에 책임이 있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반드시 이에 대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의 결론
사도 바울은 머리가 덮이지 않은채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에 대하여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고 질책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 때문에 여자는 머리 위에(머리카락 위가 아닌) 권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용도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1절, Nevertheless), 주님 안에서는 여자 없는 남자도, 남자 없는 여자도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삽입구(3-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자 한 것은, 로드-게자라는 민머리를 하고서 대언자 노릇하는 이교적 여사제의 풍습을 강력히 경계하고, 그러한 그릇된 풍습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논쟁을 야기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자매들의 처신에 대해서는 고전 14:34-40; 딤전 2:9-15; 딛 2:3-5 등의 말씀에서 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의 말씀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의 자매들에 대한 말씀 중 헤어스타일이나 건전한 풍습에 관계된 말씀이 있다면, 딤전 2: 9,10의 말씀일 것입니다. 자매들의 옷차림은 단정하게 하고, 헤어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치스럽게 장식을 하지 않도록 하며, 외모보다는 내적 아름다움과 선행으로 단장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옷과 헤어스타일을 하나로 통일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세상 패션을 따르지 않는다고 구식 유니폼을 고집하는 기독교 모임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건전한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본성을 거스르는 가증한 풍습은 경계하지만, 비록 이 세상의 유행과 의류패션과 헤어스타일일지라도 건전하고 소박하며 단정하기만 하면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관한한, 성경은 결코 하나의 풍습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이나 그 어떤 특정한 풍습도 교회가 지켜야 할 것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습니다.
헤어스타일과 의류 패션을 비롯한 풍습의 문제는 결코 교회의 이슈가 될 수 없고 더더구나 논쟁거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풍습에 관한한, 성경은 단정하고 건전한 정도의 일반적 기준 외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나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모두 하나이지만, 아직 부활의 몸을 입기까지는 여전히 육이 남아있고, 또 첫 창조의 질서도 그 때까지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성령을 좇아 걷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말입니다(롬 8:1). 성경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 특히 아내들이 남자들(남편들)에게 온전히 복종하여 잠잠히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고, 여자가 남자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딤전 2;11,12).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들이 여목사 제도와 여집사 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은 성경말씀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16:1과 딤전 3:11 말씀을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으로 주신 신약교회의 규례들(ordinances) 외에는 불필요한 짐들을 형제 자매들에게 지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규례들은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반면, 불필요한 인간의 명령들을 교리로 삼아 지키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밥티스마를 세례로 바꿔서 지키고, 주님의 만찬은 일년에 한 두 차례 그것도 변질시켜서 형식적으로만 지키는가 하면, 정작 성경에서 명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유다인들도 질 수 없는 온갖 절기들(부활절, 추수감사절, 사순절, 성탄절.... 등등)과 규례들은 수도 없이 발명해내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빼앗아 가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서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의 규례(the ordinances)를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성실하게 준수하고, 주님의 만찬에 암초가 되는 그 어떤 논쟁과 분열의 요인도 과감히 내던져 버리며, 진리의 영의 인도를 따라 바른 성경의 기초 위에서 한 몸을 건축하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같은 영님을 따라서 같은 보조로 걸으며,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화평의 띠 안에서 영님의 하나되게 하신 간증을 힘써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갈 5:22,23의 영님의 열매를 맺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
첫댓글 약은 고양이가 밤눈 못 본다더니....
이건 뭐 짬뽕에 난도질입니다. 허허 기가막혀.... 이렇게 까지 무식할 수 있는 것일까?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려면...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 평가 및 말(글)에 있어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이 더 남아 있으면 마져 해도 됩니다.
더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박만수님의 글을 지난번에 다룬 바 있습니다. 이분의 성경 해석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보았는데 그분 성경을 제가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몇 군데 쟁론이 되는 구절들만 살펴보았습니다. 떠올라 온 구절들 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로 예수님의 육체에 죄가 있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롬 5장 12절도 틀린 번역이었고요. 다음이 이 고전 11장 부분인데, 머리를 덮으라는 말을 반드시 어떤 물체로 덮으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더 나아가서 더 다른 방법이 없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고전 11장 6절에서 만일 여자가 덮지 않으면 그녀로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나 깎는 것이나 면도로 미는 것이 그녀에게 수치스럽거든 그녀로 덮어쓰게 하라. 이 구절을 박만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머리를 길게하는 것이 바로 머리를 덮는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머리털이 여자의 머리통을 덮지 않으면 머리를 깎게 하라, 머리를 깎는 것이나 면도로 미는 것이 부끄럽거든 머리털을 길러라, (길러서 덮으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분의 해석에 의하면 머리털이 3센티만 길면 머리통을 덮으니까, 머리통이 안보이도록 머리를 길러라, 그곳의 장로들은 여자들의 두발을 검사해서 3센티 이상으로 머리를 길러라, 그것을 바울이 훈육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만일 머리털의 길이가 짧은 것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였다면, 바울은 달리 긴머리(코마)를 가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긴머리라는 말을 얼마든지 쓸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덮으라고 하였지 긴머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의 해석의 열쇠는 6절을 정독함으로 나옵니다. 이 문제는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창조의 원리와 여자들에게 영광이 되는 문제와, 천사들에 대한 교훈의 문제를 연결시켜서 중요시 하였음을 볼수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이 문제는 문화적 차이의 문제이니, 혹은 로마 제국시대에 여자 노예들이나 창녀들이나 바빌론 종교예식에서의 문제이니 등의 수많은 변명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단순히 성경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양심에 따라 해석해보아야 합니다. 머리털로 머리통을 덮으라! 이 것이 바울의 말인지, 예언할 때와 기도할 때는 머리털을 3센티 이상으로 길르고, 예언이 끝나고, 기도가 끝나면 머리털을 3센티 이하로 짜르고, 다시 기도할 때와 예언할 때(고전 11:4,5)는 머리털을 얼른 길러라, 아니면 가발을 쓰라! 하는 말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항상 3센티 이상으로 머리를 길르는 것을 훈육했다면,
긴머리(코마)를 항상 유지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 기도할 때나 예언할 때에 여자들이 덮어써야 한다고 하였는가? 그때에만 여자들은 머리털을 길게하고, 기도가 끝나면 머리털을 깎으라, 다시 예언할 때는 머리털을 얼른 길러라! 하는 말이었는가? 는 양심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인간들 앞에서는 얼마든지 우겨댈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유구무언이 될 것입니다.(마 22:12)
고대 카타콤에 있는 동굴 그림들에서 초대 기독교인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썼음을 볼수 있습니다. 1914년 1차대전까지 거의 모든 교회들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쓴채 예배보았습니다.
한국에서도 1906년 평양 대부흥때에 모펫 선교사와 수백명의 여신도들이 찍은 사진에도 여자들은 머리 수건을 썼습니다. 그 사진들은 이 카페의 장기토론 커버링에 관한 계시판에 올려져 있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 같이 작으면서도 세상의 풍속과 다른 성경의 교훈에 순종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일에도 충성하며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하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시는 시각이기때문입니다(룩 16:10).
양촌님과 몇 분은 이 머리수건 문제와,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다는 박만수님의 해석과 죄가 유전되지 않는다는 원죄 부정의 문제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었다는 근거로 로마서 8장 3절을 가져왔는데 그 번역은 한글 번역이 잘못되었거니와, 영문 킹제임스도 불분명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죄가 없고 죄가 유전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우리가 아담이 범죄할 때 그의 허리에 있었고(히 7:10) 로마서 5장 12절을 잘못 번역한데서 왔습니다. 그에 관한 글들은 장기토론 방에 올려져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하시고, 14절에는 모든 육체의 생명(네페쉬=영혼)은 그의 피라고 말합니다.
피가 유전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피속에 생명(네페쉬=영혼)이 있고, 피가 곧 모든 육체의 네페쉬(영혼)이라면, 범죄한 영혼의 죄(원죄부분)가 다음 세대에 유전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에스겔 18장을 들어서 반론하지만 그것은 원죄가 아닌 자범죄 부분임을 구분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과 나머지 5장 전체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었으나 혹은 나머지 인간들과 동일한 육체였으나, 그분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주장은 예수님이 흠없는 자신을 드렸다는 말씀에도 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였다는 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아담은 실패하였고 범죄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고(고전 15:47) 이겨내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던 사실들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 글로 올렸던 것입니다. 그분은 야곱과 씨름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버터와 음식을 먹고 발도 씻었습니다. 그 육체는 마리아에게서 얻어졌습니까? 이런 분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모이고, 예수님의 유전자의 50%는 마리아에게서, 50%는 성령님에게서 받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피가 바로 모든 육체의 생명인가? 하는 문제는 피의 속성을 잘 살펴보면 드러납니다. 인간은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줌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창 2:7) 그런 점에서 호흡은 영과 같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호흡에 의해 들여진 산소는 폐에서 피로 이전됩니다. 피의 헤모글로빈은 산소입자들을 온몸에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일합니다. 뇌에도 산소가 공급될 때에 바로 이 혈관속의 피를 통해 전달됩니다. 이 피가 뇌에 전달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피에 의해 생명의 호흡이 온몸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피는 각각의 특성을 유전인자들을 통해 부모로 부터 물려받고 있습니다. 피는 부모의 모든 유전정보를 포함합니다.
너울 문제 때문에 양촌님이 떠나가신 것이 아닙니다..양촌님 신앙 자체에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것입니다..그분의 카페(양들의 우리)가 내부분열로 얼마가지 못해 문을 닫은 이유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말씀의 진리(죄, 구원, 거듭남, 모임에서의 실행 등)라는 것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게 해 준 산 교훈이었습니다.
저는 고전 11장을 수십 번 한글과 영어성경으로 읽어보았지만 결론은 쓰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이 말씀에 대한 반론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머리(헤어)가 짧은 사람만 쓰라? 원래는 써야 하지만 머리가 길면(가령 5 센치이상) 안 써도 된다? 과연 그런 뜻입니까?
5절과 13절이 전체 내용을 대변하고 있습니다..14절과 15절은 교회 모임 이야기가 아닙니다..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16절에서 누가, 어떤 변론을 하려고 하겠습니까..우리는 빡빡머리가 좋다..제발 우리보고 머리 길러라고 하지마라,,과연 이런 변론이었겠습니까?
현대 교회가 머리에 쓰라는 것을 등한시하고 이상한 해석을 내놓는 바람에 여자 장로도 나오고 여자 목사도 나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이런 말씀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를 잘못하면 결국은 원래의 깨끗한 모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이 편한 것만 추구하면서 그 인과관계나 연결고리를 못 찾고 있을 따름이지요..그리고 그 결론은 항상 우리가 예기치 못한 것으로 흐릅니다..제 눈에는 이런 것이 뻔하게 보입니다..사회의 질서와 교회내의 질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고전 11:3)
제가 보는 박만수 형제님의 주장의 요점, 주제와 다른 분들이 이해하시는 요점, 주제가 서로 다르군요...
그러다보니 같은 내용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 아닌, 서로다른 자신만의 주장을 올리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제가 가져온 글에서 주제는 쓰느냐 마느냐 문제가 아닙니다.
처음에 앞으로 다루게 될 부분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것이 과연 성경이 의미하는 교회의 규례(church ordinance)인지를, 그 근거로 제시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ordinance 인지 custom 인지를 살펴보고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의 초점은 그것이 아닌 다른 부분을 가지고 문제삼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이 원 글의 주장을 올바로 이해한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부족하기에...
자신이 알고있는 상대 주장의 이해가 올바르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겸손.
겸손이 없는 '자만'으로 인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알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토브 님께서 박만수 형제님의 주장에 대해 이해하셨더라면...
아마도 먼저 ordinance 와 custom 으로 이해되는 KJV 가 TR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부터 먼저 살펴보시고,
그런후에 이 글에서 주장하는 custom이 아닌 ordinance이다! 라고 결론내려주시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부족한 부분들이 섞여있다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오도되지 않도록 정정해주시고 주의주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박만수 형제님은 KJV안에서 모든 주장을 풀어나가시기에
부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KJV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는 하토브 님과는 보는 관점이 또 다르겠습니다...
물론 KJV 조차도 이해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이해하도록 주시지 않으신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저는 한 사람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는 못하겠습니다...
하토브 님이라고해서 이해하는 것이 모두 옳겠습니까?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머리의 위치에 서게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토브 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도움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체중에서라면 오른손쯤 된다고 할 수 있지않을까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왼손이나 발이나 등등 다른 지체를 맡고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오른손이 나서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나선다면...
그리고 왼손이나 발이나 다른 지체들은 너희들은 모르니 오른손의 주장에 동조하라고 한다면...
오른손의 마지막은 과연 어찌될까요?
...
이만 마칩니다.
KJV 번역자들의 교회들이 여자들은 머리 수건을 안쓰고 긴머리로만 교회에서 예배보고 기도했다고 믿어집니까?
수네떼이안은 원래 관습 뿐만 아니라, 실행을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는 이러한 실행이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1:16). 즉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예언하거나 기도하는 실행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규례니 풍습이니 하여 교묘하게 말씀 순종을 못하게 하는 것은 번역자들의 번역 요술입니다. 제가 이 머리수건을 써야한다고 처음 주장하였다면 저를 따르는 것이 그릇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20세기 초까지 모든 교회는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을 써왔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그렇고 형제단들이 그러해왔습니다. 벗기 시작한 것은 1차대전시부터 이고 2차대전때부터 확고히 되었습니다. 이것은 심판날에 확인
될 것입니다. 공교한 번역기술로 사람들을 그릇되게 이끄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에서부터 나옵니다. 왜냐하면 존귀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순종하려는 사람에게 힘주시고 지혜와 총명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순종의 마음으로, 고전 11장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순종하고 싶어하는 자세에서 그 11장을 자세히 정독하시면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1) 머리를 2센티 이하로 기르고 예언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나쁘니까, 2센티 이상으로 머리를 덮게하라,(실제로 1센티만 되어도 머리 살이 안보임) 는 뜻인가? 2) 고린도 교회에는 긴머리 가진 사람들과 머리가 짧은 사람으로 머리를 덮은
여자들로 뒤범벅 되어 있었는가? 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순종의 문제는 여자들이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반대로 남자들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이 순종하는 것을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남자들이며, 성경적 장로들 또한 남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자들에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여자들 중에 감히 혼자서만 머리 수건을 쓸 여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남자들이 모든 여자들의 순종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자들이 전체 여자들이 머리수건을 써야 한다고 가르치면 모두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머리수건 문제를 여자들의 순종이냐 아니냐로 오해, 착각하고 있습니다. 전체 교회는 머리수건을 쓰고 있는데, 한 두 여자만 머리수건을 안쓰고 있다면 그것은 그 여자의 불 순종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일 전체교회가 머리수건을 안쓰도록 교묘히 유도해놓았거나, 쓰지 못하게 하거나, 안써도 되며 그것은 이교도들의 관습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교회 지도부의 문제입니다. 그 지도부는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남자들이 불순종을 야기한 책임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시로네코님과 고린도전서 11장에 대한 이해가 같기에 저도 그 해석에 대해 더 말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토브님의 주장 하심을 듣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서 성경적 교회는, 오직 "여인들이 너울쓰는 형제교회뿐"
이란..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남자들이 여인들에게 너울을 씌우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불순종의 자녀들로 변한것도, 여자목사가
생긴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무엇을 논 하기 이전에 본질적인 구원의 복음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교회도 복음을 안다 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것을 실행 합니다.
비단 너울뿐 만이 아니며 성례전 의미의 "성찬(식)" 이 그렇고 성경적이지
않은일에 순종과 실행이라는 말로 강조하며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듯 합니다.
평소엔 아무렇게나 살다가 일요일 예배라는 한 시간동안 너울쓰고 성찬을 뗀다고 하는데에서 스스로 거룩성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인위적, 가시적 모습은 오히려 주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안하고 주님안에서 누림을 갖고 사는 편이 나을것입니다.
일반 개신교의 잘못된 행태를 논하는 형제교회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하나된 사람들이 함께 단순한 저녁식사를 나누며 또 우리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기억하며 서로 즐거히 보내야할 시간에 장례식장 같은 엄숙하고 침통한 분위기...이런것들은 모두 종교적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종교적 행사"일뿐입니다.
형제모임의 사람들이 그렇고 하토브님 역시도 순종치 않는다며 '심판' 이란 단어를 사용 하십니다.
허나 수건을 씌우지 않고 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훗날 주님께 심판 받을 일은 없을것이라고 말씀 드립니다.
너울을 강조하는 형제교파, 침례식을 강조하는 침례교파,다시 점검받아야 한다는 구원파, 지방파,이들 교파는
진리에 관한한 일치점을 보면서도 서로 교제가 어렵습니다.
왜 입니까, 각자가 속한 교파만이 옳게 실행하고 순종한다며 이미 심판을 해대니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만 초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수건 한장으로 찢어지고 나뉜다면 이는 복음에 앞서
너무도 잘못하고 왜곡되 있는 일 에서라고, 그렇게 결론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자녀들이 모였을때 실행하라, 명령하신 일은 [주의 만찬과 밥티스마],
이 두가지 뿐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의피로 하나된 형제들이 이일을 행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외에
다른것은 없다는것,이것이 제가 배우고 확신 하는바 입니다.
남달리 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으신데도..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에게 다 주시지 않는점,
그것이 사람이신 하토브님의 한계라고 보여집니다.
저를 향해서도 같은 마음 이시겠지만 하토브님이 너울을 벗고 좀더 폭 넓은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를 했으면
하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될 것입니다(롬 14:10) 우리가 행한 바, 주장한 바, 모든 것에 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 교회 모임의 실행에 관해서는 일반 생활보다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바로 그분의 몸이며,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머리수건 문제를 그냥 사소하게 다룬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순서와 천사들의 순종문제까지 들고와서 설명합니다. 이것을 비틀어서 해석하고 고집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만찬이란 그냥 종교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역, 피흘림과 죽으심, 그분이 우리 안에 대신 사심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증거하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이것을 자주 실행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요 부탁이었습니다. (11:2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수건을 비틀어서 해석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만찬도 자주 실행하지 않도록 그들의 성경 번역에서 자주라는 말을 빼버렸습니다. 이런 자세들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경적 의식 혹은 예식들은 구원의 복음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을 더욱 견고하게 재확인시켜 주며 영적으로 성장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침례와 주님의 만찬이며, 머리수건 또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큰일에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룩 16:10)
고전 11장 1-16을 해석하여 보면 머리수건을 쓰는 것이 분명합니다. 긴머리로 머리수건을 대체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을 비틀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긴머리가 머리를 덮는 것이라면 남자들의 긴머리도 머리를 덮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전 11:4) 남자들은 몇 센티 이하여야 되고 여자들은 몇 센티
이상이어야 됩니까? 3센티 이상이면 머리털이 머리통을 덮습니다. 그럼 여자들은 3센티 이상으로 하고, 남자들은 3센티 이하로 머리털을 유지해야 머리통을 덮는 것이 안됩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까? 조금만 파고들면 긴머리로 쓰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나왔다구요? 보고밀파, 왈덴지안들, 알비, 네스토리안, 파울파, 도나티스트, 노바티안, 보헤미아 형제단 이들은 머리수건 안쓰고 예배를 보고, 로마카톨릭은 머리수건을 쓰고 예배를 보았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 증거좀 보고 싶습니다. 만일 그들이 머리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를 보았다면 로마카톨릭은 저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로마카톨릭은 성경대로 머리수건,예배포를 쓰는데 반하여 저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머리 수건을 쓰지 않는 이단이다, 라는 정죄가 종교재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종교재판 기록들에는 그런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순종하는 것이 눈에 너울을 덮어 가리우는 행위일까요? 성경은 자유방임주의를 가르치지 않고 그분의 법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굳이 정죄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똑같이 머릿수건을 쓰고있는데요 뭘...
같은 실행을 하고있는데, 뭘 그걸가지고 이단이니 뭐니 하겠습니까?
그런데 카톨릭이 하고 있는 것 중에 옳은 것도 있는지는? ... 잘 분별해 보아야만 되겠습니다...
갑자기 어제의 적군(?)인 카톨릭 교회를 아군으로 여기시는 듯 하여 의아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군요...
물론 카톨릭 교회안에 속해있지만 '진정한 성도'는 우리의 적은 아니고 우리의 형제이겠지요...
제가 주장하는 바나 논리 전개하는 바를 시로네코님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번도 머리수건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대상자들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을 때 무엇을 심판받겟습니까? 바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실천했는가? 에 대하여 심판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 하여 머리수건 쓰지 않는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를 본사람들은 그 행위에 대하여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이 카톨릭에서 배워서 카톨릭 덕택에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까? 카톨릭은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와 형식만을 전달하며 가져온 것입니다. 카톨릭이 매주일 성체미사를 행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예배를 바빌론 종교로 둔갑시켜서 행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사람들이 구원도, 거듭남도 잘 모르면서 껍데기만 보전하여 왔는데, 기독교는 바로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냐? 따라서 껍데기를 무시하자 하여 매주일 성만찬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나 그 이후의 예배 갱신론자들은 성만찬의 매주 실행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울은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초대교회에서 나왔고 카톨릭은 그 껍데기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을 좇는 것입니까?
제가 머리수건을 쓰지 않는 분들은 이단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심판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분은 바로 sironeko 님입니다. 시로네코님이 부르지저 님에게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그 용어를 이 문제를 분별하는 분들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제가 무엇에대해 심판받을지를 지적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시는군요...
부르지저 님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 그들의 의도와 진정한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평가하는 것이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인데도...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왜그렇게도 저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하시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아마도 저와는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thought process 가 다르게 움직이나 봅니다...
분명하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또한 하토브 님의 사고과정이 이해가 잘 안된다는 것.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런데 시로네코님은 부르지저님이 자기가 퍼온 글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평가한다고 심판대앞에 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본인도 당연히 심판대 앞에 설것이라는 것은 못 깨달으십니까? 부르지저님도 당연히 심판대 앞에 섭니다. 부르지저님이 감당해야할 부분이 있을 것이지만 제가 지적한 바는 이 머리수건 문제는 여자들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고 교회의지도부가 감당해야 하며 그 지도부는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자들의 지도부들은 심판날에 책임을 지게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한말을 깨닫지 못하는 분은 바로 시로네코님으로 들립니다요?
남이 심판받게 될 줄은 잘 아시는 것같은데 시로네코님 자신도 심판받을 줄은 아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항상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려하며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만수 씨는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한 사람인데,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단락의 문맥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16절에 규례라고 했던 풍습이라고 했던지 간에 이 단어가 사용되어진 곳은 16절인데 이 단어가 무엇을 지적하느냐?입니다. 박만수 씨는 이 단어가 머리에 쓰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데, 잘못 본 것입니다. 이 단어는 16절에 나오는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하여 논쟁(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하는 것에 대한 규례 또는 관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한 단어를 잘못보고 있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형제님! 정말 오랫만에 흔적 남기셨네요,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