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마다 기름값이 천차만별이다. 임대료가 다르고 직원 월급, 서비스 수준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이해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싼 기름을 넣자니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다. 과연 기름값에 따라 품질이 다를까?
“어라~ 여기는 아직도 기름값이 1,800원이네.” 지방출장을 온 김 대리는 중얼거렸다. 서울 단골 주유소의 휘발유값이 1,900원을 넘어선 지가 오래 전인데 이곳은 아직도 1,800원이니 김 대리가 놀라는 것도 당연. 어떻게 같은 기름을 파는데 L당 100원 이상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전국 주유소의 기름값을 비교해주는 오일프라이스워치(www. oilpricewatch.com)에 따르면 6월 12일 기준으로 전국 최고의 휘발유값은 L당 2,119원이고 가장 낮은 값은 1,619원으로 무려 500원이나 차이가 났다. 데이터 집계상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큰 차이다.
싸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싼 주유소의 기름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국내 석유품질을 관리하고 있는 한국석유품질관리원(KIPEQ)의 석유품질검사에 따르면 꼭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 1~4월 총 2만3,721건(주유소는 중복될 수 있음)의 휘발유와 경유를 조사한 결과 207건(0.87%)만이 비정상이다. 전국 대부분의 주유소에서 판매되고 있는 석유제품이 국가 기준의 품질을 넘어서고 있다는 말이다. 유종별로 살펴보면 휘발유가 총 9,685건 조사에서 27건(0.28%)이 비정상으로 나왔고 14,036건의 경유 조사에서는 180건(1.28%)이 나왔다.
이 조사결과에 대해 한국석유품질관리원의 전략기획팀 한정근 대리는 “최근 높은 경유값 때문에 일부 주유소에서 경유와 등유를 섞어 판매하는 경우가 있지만 아직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다”라며 “다만 경유값이 지속적으로 올라갈 경우 불법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단속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품질에 큰 차이가 없는 석유제품을 팔고 있는데도 값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석유제품의 복잡한 유통구조와 기름값 자유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는 1997년 공급자들 간의 경쟁을 유발해 기름값을 낮추기 위해 기름값 자율화를 실시했다. 즉, 그 이전에는 각 정유사들이 주유소에 제공하는 기름값을 정부가 고시했지만 기름값 자율화 이후에는 정유사별로 다른 값을 매길 수 있게 되었다.
기름값 자유화 이후에 오히려 비싸졌다? 정부는 기름값 자유화의 이유로 시장 경쟁을 유도해 값을 낮추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효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자율화 이후 1년 사이 휘발유값은 35%나 급등했다. 이유가 뭘까? 정유업계는 당시 물가 안정화 정책으로 정부가 지나치게 기름값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낮은 정부 고시가에 맞추다보니 적자가 누적되었고 가격 자율화에 맞춰 이를 반영했기 때문에 휘발유값이 폭등했다는 주장이다. 정부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도 하나의 이유다. 몇몇 대기업의 독과점 상태인 국내 석유시장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담합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고 조사도 철저하지 못했다. 결국, 적자를 보고 있던 정유사들과 정부가 짜고 친 고스톱에 소비자만 놀아난 꼴이다.
복잡한 유통구조로 기름값 차이나 현재 국내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석유제품은 SK,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 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가 독과점하고 있다. 이들은 해외에서 원유를 사들여 정제 후 석유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2007년 8월까지 일주일 단위로 주유소에 공급하는 공장도 기준가를 공개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판매되는 값과 발표된 공장도가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늘자 일반 공개를 차단하고 주유소에만 공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주유소가 정유소가 발표하는 공장도 값으로 제품을 공급받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국내 석유제품의 유통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주유소와 정유사간의 직거래와 정유사와 주유소 사이에 중간 대리점을 두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국의 주유소는 1만2,500개가 넘는다. 이들 주유소를 모두 정유사가 관리하는 것은 인적, 물질적인 면을 고려할 때 비효율적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중간 대리점들이 존재한다. 즉, 중간 대리점들은 정유사로부터 대량의 제품을 한 번에 사들여 약간의 마진을 붙여 주유소에 넘긴다. 규모가 큰 대리점은 40여 개의 주유소를 관리하기도 한다.
얼핏 주유소와 정유사 간 직거래의 기름값이 더 쌀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정유사들이 주유소 거래값보다 더 싸게 대리점에 제품을 넘기기 때문이다. 즉, 중간 대리점들이 한꺼번에 많은 양을 주문하거나 현금을 지불하면 조금 더 낮은 값에 정유사로부터 석유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고 여기에 약간의 마진을 붙여 다시 주유소에 공급한다.
하루에 1만L의 휘발유를 판매하는 주유소를 가정해 보자. 정유사로부터 직접 1만L의 휘발유를 공급받을 경우 L당 1,780원(정유사 공장도값보다 20원 할인)에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주유소 30개를 거래처로 가지고 있는 대리점은 30배나 많은 휘발유를 현금으로 결제하기 때문에 정유사로부터 L당 1,700원(추가로 80원 할인)에 휘발유를 받을 수 있다. 대리점이 마진 30원을 붙이고 넘긴다고 하더라고 정유사로부터 직접 공급받을 때보다 주유소는 50원 더 싸게 휘발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중간 대리점 입장에서도 각 주유소별로 판매량에 따라서 마진에 차이를 두기 때문에 같은 거래처라도 공급 가격에서 차이 더 나거나 덜 날 수 있다.
수완 좋은 중간 대리점은 기름값이 쌀 때 많은 물량을 확보해 놓고 판매량을 조절하거나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정유사에 내놓는 기름값은 원유 공급가가 같다면 월초가 비싸고 월말이 싼 것이 일반적이다. 이를 이용해 월말에 많은 물량을 확보해 더 낮은 값으로 석유제품을 얻는다. 조사결과 월초와 월말의 원유값은 최대 150원까지 차이가 났다.
복잡한 유통구조가 기름값에 가장 큰 영향을 주지만 주유소의 임대료 및 세금, 직원 급여, 서비스, 판매량, 운반비 등도 기름값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서울 중심부의 땅값은 시골의 땅값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임대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소유의 땅과 주유소를 가졌더라도 이를 유지하기 위한 관련 세금 등이 훨씬 많이 들기 때문에 서울 중심에 위치한 주유소의 기름값이 더 비싸다. 또 공급선과 거리가 멀수록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불리하다.
이렇듯 주유소 기름값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복잡하고, 주유소별 석유품질은 대체적 안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운전자들은 조금이라도 기름값이 싼 주유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끔찍한 고유가 시대를 이기는 길이다. 또 운전자들이 안심하고 기름을 넣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주유소 사후관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