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사람팔자 시간문제여
- 은유시인 -
흔히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써먹는 속담 중에 ‘사람팔자 시간문제다.’란 속담이 있다. 난 이번 대선에서 대통령 당선자가 된 노무현 씨를 보면서 문득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참으로 진리로구나.’라는 생각에 젖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
이 말은 주로 어떨 때 사용하는 말일까?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빗대어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도 언젠가는 그리 될 수 있을 거란 의미로 즐겨 쓰는 말일까? 아니면, 성공한 사람이 훨씬 못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위해 쓰는 말일까? 아마 이 말은 보다 못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분을 삭이기 위해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말의 본뜻은 ‘모름지기 부귀영화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쉬 옮겨 갈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라 하겠다.
우리 주위에는 이 말이 실감나게끔 흥하고 망하고 성하고 쇠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엄청난 부자가 하루아침에 망해 알거지가 되었는가 하면, 얼마 전까지는 끼니도 못 잇다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렇듯 사람이란 하루 앞도 내다 볼 수 없기에 부자들은 전전긍긍하는 것이고, 가난뱅이들은 앞날에 대해 희망을 거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엔 충청도 삽교읍 상하리 깡촌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모님 댁에 자주 갔었는데, 이모님 댁 근처의 몇몇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구 중에 ‘안동 김 씨’네가 있었다.
김 씨는 자식뻘인 우리가 가더라도 ‘같은 안동 김 씨’라며 꽤나 반가와 했으며, 다정하게 대하였다. 이 김 씨는 나와 비슷한 또래와 그 밑으로 꽤나 많은 자식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나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아 늘 궁기에 찌든 채 살았다.
김 씨네 아이들은 거의 헐벗은 상태로 여름에는 다 헤어진 팬티 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고 나돌아 다녔으며, 늘 굶주린 듯 우리가 식사할 때에도 눈치 없이 빙 둘러앉아 군침을 다시곤 했었다.
그러나 그 김 씨네는 모든 식구들이 거처를 서울로 옮기고, 지금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자식들 대부분이 명문대를 나왔으며, 아들들은 의사며 교수며 사업가로 자리 잡았고, 또 딸들도 모두 잘 사는 집으로 시집을 가서 귀부인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렇게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던 김 씨네가, 그리고 그 꾀죄죄하고 볼품없던 아이들이 장성하여 그렇듯 일가의 번영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사하지역에서 ‘사하신문’이란 지역신문사를 차렸을 때, 임대한 사무실의 빌딩 주인 김 회장은 부동산 갑부였다. 그는 사하지역에만 여러 개의 번듯한 빌딩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부산 곳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소유인 부동산만 100억대를 넘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그 빌딩들을 쉽게 소유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10여 년 전만해도 도심권 요지에 땅만 있으면 그 땅을 담보로 하여 중소 건설사들이 빌딩을 지어 주었고, 당시 부산엔 번듯한 빌딩들이 드물었기에 빌딩이 완공되기 무섭게 사무실은 쉽사리 임대가 나갔다. 그때 전세보증금만으로도 빌딩 건축에 소요된 건축대금 대부분을 상환할 수 있었다.
당시 빌딩의 경우 건축비가 평당 120만 원선으로 임대보증금 또한 평당 100만원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일부 상환 못한 건축대금은 다시 그 땅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대출받아 건축비 잔금을 지불하고, 월세 받는 돈으로 은행 빚을 상환하면 되니 그야말로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빌딩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빌딩의 사무실 월세 수입도 꽤나 짭짤한 것이었다.
김 회장은 통통하고 허여멀건 하며 머리가 허연 것이 그야말로 있어 보이는 풍채지만, 시쳇말로 지독한 짠돌이였다. 내가 그 빌딩 사무실을 3년 가까이 임대해 있는 동안 김 회장과 한 달이 멀다하고 식사를 하거나 술을 한잔씩 했어도 그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지갑을 열고 계산한 기억이 없다. 늘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미안했던지 간혹 자기가 사겠노라 한 적은 있었는데, 그땐 꼭 조흥은행 당리동 지점장이 대신 식대를 계산하곤 했었으니까. 아마 그 은행에 몇 억 이상을 찐박아 놓았지 않았겠나 싶었던 것이다.
‘아이엠에프’ 한파 이래로 부동산 거품이 많이 빠지고, 또 대출이자가 초강세였을 때, 그 김 회장이란 자가 잘 견뎌냈겠나 궁금해지기도 했었다.
내 중고등학교 친구 하나는 학교 다닐 때 그런 농땡이가 없었다. 공부는 늘 꼴찌를 도맡아 했으며, 그렇다하여 내로라할 만한 재주 또한 없었다. 그러나 고교 졸업 이후 고물상을 시작하여 꽤나 큰 부를 축적했었다.
그는 이미 20년 전 서른 남짓 나이에 그 귀하디귀한 외제고급승용차 벤츠를 타고 다녔으며,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대구지역에 몇 개의 빌딩과 나이트클럽이다 호텔이다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웬만한 모임의 감투는 그 혼자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동기회 모임에서도 꽤나 호기를 부렸으며, 몇 백만 원 정도는 우습게 여기듯 뿌려댔기에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려는 자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년 전엔가 바람결에 실려 온 소문에 의하면 그는 철저히 알거지가 되었을 뿐더러 술에 절어 폐인이 다 되었다고 하였다.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망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돈이라고 하는 것은 벌기엔 그리 힘이 들어도 거덜 나기는 의외로 쉽다는 것을 익히 들어온 터라 그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업적 기반이 잘 닦여져야 되는데, 그 기반을 닦기까지가 그리도 힘이 들고 또한 오랜 시일을 소요로 한다. 기반만 닦이면 그 이후엔 돈은 저절로 붙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업이 한번 휘청거리기 시작하면 좀처럼 수습하기가 힘들어진다. 부실은 일껏 키워온 회사를 급속히 무너뜨리는 ‘도미노’와 같은 것이다.
사업은 크게 벌리면 벌릴수록 부실은 수습하기가 더 어렵게 되며, 특히 망했을 경우엔 부채규모가 기하급수로 커져 재기하기가 더욱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또 한 친구는 현재 나와 마찬가지로 부산에 거주하며, 지금도 나와 여전히 교류를 갖는 아주 친한 사이이다.
그의 부친은 왜관지역의 갑부로 양조장과 정미소를 경영했었다. 당시 군 단위의 자그마한 농촌지역에서는 정미소나 양조장을 한다면 그 지역에서는 단연 알아주던 그런 시기였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한땐 부친의 사업을 도왔으나 이후 양조장이나 정미소 사업이 점차 위축되어 갔다. 따라서 그는 신규 사업으로 시멘트 대리점을 차렸으며, 너른 창고에 시멘트를 그득 채웠었다. 그런데 어느 핸가 홍수가 나고 낙동강이 범람하여 그의 창고를 덮친 것이다.
물이 빠져 나간 뒤 그의 창고 속의 시멘트는 이미 상품가치는커녕 산업쓰레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는 10여 년 전 철저한 알거지가 되어 도피하듯 부산으로 내려와 영업용 택시기사로 일했으나 그나마 교통사고를 낸 뒤 한동안은 실직자로 힘든 날을 보내야 했다. 그 뒤 빚을 얻어 커피숍이다 노래방이다 식당이다 등의 유흥업소를 운영했었고, 이후 ‘카드식 도어록’ 대리점을 차렸었으나 자금부족에 경험부족으로 고생만 잔뜩 하고 빚만 키워갔던 것이다.
그러다 지압을 배우게 되었고, 지금은 지압원을 차려 밥술은 먹을 만큼 되었다 한다.
나도 물론 그랬지만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노무현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란 예상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당선되고도 이후 자꾸 불거지는 불협화음으로 그가 대통령후보 자리를 계속 지켜나갈 것인지조차도 불투명했었다.
그는 정몽준 씨와의 단일화 때까지만 해도 마치 외줄 타는 듯이 위태롭게 보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론조사에서도 늘 이회창 씨에게 뒤졌었다. 그러한 불리한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씨에게 적잖이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란 짐작이 된다.
이회창 씨는 노무현 씨에 비해 일찌감치 국회 최고의석수의 최대정당인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직전 15대 대선에서도 김대중 씨와 각축전을 벌였던 사람으로 모든 여건이 유리했음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노무현 씨의 당선을 회의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노무현 씨의 당선 가능성을 의심치 않았더라면 어떻게 민주당 인사들이 그토록 노무현 씨를 끌어 내리지 못해 안달했겠으며, 정몽준 씨 또한 어떻게 기습적으로 노무현 씨를 배신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투표일 전날의 여론조사에선 노무현 씨가 이회창 후보 보다 3.2포인트인가 앞서 갔다고는 하지만, 선거란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론조사 결과가 그리 나왔기로서니 여론조사는 한낱 표본조사에 불과하며 어긋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각 언론사들마다 이번 선거에서 자신들이 조사한 여론조사의 정확성에 대해 대대적인 자랑도 서슴지 않으니 어찌 보면 우습기조차 했다.
정몽준 씨가 ‘노무현 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란 발표가 있기 이전에 이미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와 정작 개표완료 후 노무현 씨와 이회창 씨와의 표차가 3.2포인트로 한 치 오차도 없이 같다고 우겨대니, 그럼 정몽준 씨의 지지철회 발표는 두 후보 간의 표차에 전혀 기여를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정몽준 씨도 자신이 노 후보의 지지를 철회한다면, 노 후보가 여론조사 결과에서 이회창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3.2포인트 앞서가는 것을 훨씬 더 큰 낙폭으로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예상하였을 테고, 따라서 이회창 씨가 당연히 당선되리라 확신했겠기에 결연히 지지철회를 단행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막강한 정보력을 지닌 각 후보 진영은 물론, 정몽준 씨도 이회창 씨가 당선되리라 확신했었거늘 하물며 우리 민초들이야 뭘 알았겠는가?
언론매체들은 때늦게 ‘노사모’의 공로라느니 월드컵 때 보여준 ‘영파워’때문이라느니 하지만, 수많은 함수관계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뜻밖의 행운이 노무현 씨를 찾았다 할 수 있으니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이때만큼 더 절실하게 실감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 역시 주절거려 보았다.
“너거들이 뭘 알간? 사람팔자 시간문제여.”
- 끝 -
(200자 원고지 28매 분량)
2002/12/23/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