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의 방. 고풍의 가구들. 안쪽으로는 열린 창문을 통해 건너편 건물의 정면이 보인다. 많은 꽃. 생화가 적당하다. 밤이다. 선희역의 여배우는 과거 여자 종들이 입었을 법한 의상을 입고 있다. 검은 색이 알맞을 듯하다. 같은 종류의 옷 한 벌이 방 안 어디엔가 보여야 한다.))
[명희] (속치마바람으로 경대를 등뒤로 한 채 서서. 동작- 팔을 뻗친- 과 대사가 몹시 과장된 비극투이다.) 그 장갑! 또 그놈의 장갑! 몇번이나 말했어? 부엌에 놔 두랬잖아. 그걸 끼고 그 두부장수 녀석을 꼬시려는 거지? 아니, 아니,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수채통 위에 걸어 둬. 이 방을 더럽히면 안 돼, 알겠어? 부엌에서 나온 건 뭐든지 다 가래침이야, 뭐든지. 나가. 가래침도 갖고 나가. 잠깐! (이 독백이 진행되는 동안 솔랑쥬는 고무 장갑 낀 손을 들여다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다.) 편하게 해. 갈보처럼 멋을 내 봐. 절대 서두르지마, 시간은 많으니까. 나가! (선희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손가락 끝으로 고무장갑을 들고 다소곳하게 나간다. 명희는 화장대 앞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아보기고 하고, 화장품을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머리를 빗고 얼굴을 매만진다.) 내 드레스를 준비해라.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거기 없니? (돌아선다.) 명희야! 명희야! (선희가 들어온다.)
[선희] 죄송합니다. 마님. 코피 좀 타느라고요.
[명희] 내 옷을 준비해라. 보석이 박힌 흰 드레스로. 부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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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도 꺼내고.
[선희] 보석을 죄다 꺼낼까요?
[명희] 그래. 내가 고르겠다. (잔뜩 허세를 부리며,) 물론 구두는 에나멜 무도화를 신겠다. 몇 년전부터 네가 탐내던 그 구두 말이다. (선희는 옷장에서 보석함을 몇 개 꺼내, 침대 위에 열어 놓는다.) 네 결혼식 때 신으려고 말야. 바른 대로 대라. 그놈한테 반했지? 너 임신했지? 그렇지? (선희는 양탄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에나멜 무도화에 침을 뱉아 가며 닦는다.) 침은 뱉지 말라니까. 명희야. 그런 건 네 뱃속에나 처박아 두는 거다. 거기서 썩도록 내버려 두란 말이다. 아유, 우리 예쁜이, 어쩜 이렇게 끔직이도 못생겼을까. 어디 한번 내 구두에 비쳐 보렴, 좀 더 구부리고. (명희가 발을 내밀자 선희가 들여다본다.) 내 발을 온통 네 침으로 범벅을 해 놨는데 내가 기분이 좋겠니, 그 늪 속에서 나온 것 같은 안개로 말이다?
[선희] (무릎을 꿇고 몹시 저자세로.) 마담께서 아름다워지시길 바랍니다.
[명희] (거울을 보며 가다듬는다.) 내가 밉지, 그렇지? 그래서 날 눌러 죽이려는 거지? 너의 친절로, 너의 굴종으로, 카아네이션으로 글라디올러스로 말야. (일어나서, 더 낮은 목소리로) 괜히 걸리적거릴 뿐이다. 꽃이 너무 많다. 죽을 지경이다. (또다시 거울을 보며.) 난 아름다와지겠다. 너 같은 건 어림도 없을 거다. 그런 얼굴과 그런 몸으로 그 놈을 유혹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멍텅구리 두부 장수 녀석이 널 농락한 거다. 널 임신시킨 것도---
[선희] 오! 아녜요, 절대로---
[명희] 닥쳐, 멍청아! 내 드레스!
[선희] (옷장에서 이옷 저옷 헤쳐 가며 찾는다.) 빨간 드레스. 빨간드레스를 입으세요.
[명희] 보석 박힌 흰 드레스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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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딱딱하게) 오늘 저녁엔 빨간 우단 드레스를 입으세요.
[명희] (순진하게) 응? 왜?
[선희] (냉정하게) 우단 자락 사이로 보이던 마님의 가슴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나리께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던 모습을 말예요. 하긴, 과부 신세가 되셨으니 검은 옷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명희] 뭐?
[선희] 설명이 필요한가요?
[명희] 아, 그 얘길 하고 싶다?--- 좋아. 협박을 해 봐. 주인마님을 욕해봐. 나리의 불행을 얘기하고 싶은거지. 그렇지, 언니? 멍청이. 아직 그 얘길 끄집어 낼 때 가 아냐. 하지만 이왕 나왔으니 그대로 써먹겠어. 웃어? 못 믿겠단 말이지?
[선희] 아직은 마님께---
[명희] 욕을 할 때가 아니란 말이지? 욕, 욕을 한다, 좋지.
[선희] 마님!
[명희]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 벌써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처음부터 날 욕하고 있지. 내 얼굴에 침을 뱉을 순간만을 노리는 거지?
[선희] (측은한 듯이) 마님, 마님, 우린 아직 거기까지 안 갔어요. 나리께서---
[명희] 나리가 감옥에 간 건 나 때문이라는 말이지? 어디 말해봐. 말해 보라니까. 항상 솔직하잖아, 말해 봐. 난 꽃 뒤에 숨어 은밀히 움직여. 날 막을 순 없어.
[선희] 아무 것도 아닌 말도 협박으로 들리시나 보죠. 잊지 마세요. 전 하녀예요.
[명희] 내가 나리를 경찰에 밀고했다고, 그 사람을 팔아먹었다고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더 지독한 일이라도 했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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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더 완벽하게. 난 안 괴로웠는 줄 알아? 명희야, 난 손을 억지로 움직였어. 알겠어? 억지로 움직였단 말야. 천천히, 확실하게, 틀린 데도 없고, 고친 데도 없이, 내 애인을 감옥에 보내는 편지를 쓴 거야. 그런 날 격려는 못할 망정 비웃어? 날더러 과부 신세라고? 명희야, 나리는 안 죽었어. 나리는 이 감옥 저 감옥을 전전하다 결국 외딴 섬까지 귀양을 가겠지. 그럼 난 미칠 듯한 고통을 안고 그이를 따라갈 거야. 난 그분의 애인이니까. 호송 대열에 끼어 그이와 영광을 함께 나누겠어. 과부신세? 뭘 모르는 군. 햐안 드레스는 여왕의 상복이야. 그런데 그걸 못 입게 해?
[선희] (냉정하게) 빨간 드레스를 입으세요.
[명희] (단순하게) 좋아. (엄격하게) 그 옷을 가져오너라. 아, 난 친구 하나 없이 외로운 신세. 너의 눈빛도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선희] 전 마님을 사랑해요.
[명희] 그렇겠지. 누구나 주인을 사랑해. 사랑하고, 존경하지. 유산을 기다리는 거야. 유언장에---
[선희] 전 무슨 일이라도---
[명희] (비꼬듯이) 알아. 날 불구덩이에 처넣을 수도 있을 거야. (선희는 명희가 옷 입는 것을 돕는다.) 혹크를 채워라. 좀 살살 당기거라. 날 꽁꽁 묶을 생각이니? (선희는 명희의 발 아래 꿇어앉아 드레스의 주름을 매만진다.) 내 몸에 스치지 말아라. 물러나거라. 너한테선 짐승의 냄새가 난다. 퀴퀴한 구석방, 밤마다 하인 놈들이 찾아드는 더러운 골방, 그곳에서 가져온 냄새 말이다. 골방! 구석방! 하녀들의 방! (우아하게) 명희야, 구석방 냄새 얘길 하다 보니 기억이 나는구나. 저쪽엔--- (명희는 방 한구석을 가리킨다.) 저쪽에 꼬질꼬질한 이부자리가 둘, 이쪽엔 너덜너덜한 서랍장, 그 위엔 쭈글쭈글한 물 주전자 하나, 또 그 옆엔 먼지를 흠빡 뒤집어쓴 목불상 하나. 내말이 맞지? 틀렸니?
[선희] 저희 불행해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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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내 말이 맞아. 우리가 목불상 앞에 앉아 합창하는 얘기는 관두지. 시들어빠진 꽃 얘기도 관두고--- (명희는 웃는다.) 시든 꽃! 마님께서 주신 꽃! 그런 얘긴 다 관두자고. (명희는 방안의 꽃들을 가리킨다.) 나의 영광을 위해 활짝 피어난 이 화관들 좀 봐. 난 더욱 아름다운 성처녀야.
[선희] 그만 하세요---
[명희] 그리고 저쪽엔 바로 그 창문이 있지? 그 두부 장수 녀석이 반은 벌거벗은 채 네 이불 속으로 뛰어드는 창문 말이다.
[선희] 정신 차리세요, 마님---
[명희] 손! 네 손이야말로 정신 좀 차려야겠다.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네 손에선 수채구멍 냄새가 난단 말이다.
[명희] 스치지 말라 그랬다. 울려거든 네 골방에나 가서 울어라. 여기 내 방에선 고매한 눈물밖엔 용납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내 드레스 자락이 눈물로 빛나게 될 거다. 하지만 그것은고귀한 눈물이다. 내 옷자락을 잘해라, 이 화냥년아!
[선희] 화가 나셨군요!.
[명희] 그 향내 넘치는 팔로 악마가 날 나꿔첸거지. 날 들어올린거야. 난 지상을 떠난다. 난 떠나간다--- (명희는 구두굽으로 바닥을 찬다) --- 그냥 있네. 목걸이는? 서둘러. 시간이 없어.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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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가 너무 길면 핀으로 접어 올리고. (선희는 일어나 보석함에서 목걸이를 집으러 간다. 하지만 명희가 앞질러 보석을 움켜잡는다. 그러는 중에 선희의 손가락이 명희의 손가락에 스친다. 그러자 명희는 질겁을 하며 물러난다) 그 손을 저리 치우거라. 너와 접촉하는 것은 불결하다. 빨리 서둘러라.
[선희] 너무 과장하지 마세요. 눈빛이 이글거려요. 벌써 강변까지 오셨어요.
[명희] 뭐라구?
[선희] 한계라구요, 마님. 경계선에 도착했단 말입니다. 좀 거리를 두셔야죠.
[명희] 그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복수를 하는 거지, 그렇지? 역할을 그만둘 때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선희] 잘 아시는군요. 제 맘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네요.
[명희] 하녀 역할을 그만둘 때가 다가오는 걸 느끼는 거야. 복수를 하려는 거지. 그래, 준비는 다 됐어? 손톱을 뾰족해? 증오심은 불타고? 명희는 결코 잊지 않는다. 내 말 들려? 명희야, 내 말 안들려?
[선희] (건성으로) 듣고 있어요.
[명희] 내 덕분이야. 하녀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덕분이야. 나외 외침과 나의 몸짓 덕분이란 말야.
[선희] 듣고 있어요.
[명희] (울부짖듯) 내 덕분에 존재하는데, 그런데 날 경멸해? 명희야, 마님 노릇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해? 하녀들한테 아양떨 기회를 만들어 주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내가 약간만 생각을 달리하면 하녀들은 존재하지 못해. 하지만 난 착해. 하지만 난 아름다워. 마음대로 해 봐. 난 애인 때문에 절망에 빠졌어. 그래서 난 더욱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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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경멸하듯) 애인이요?
[명희] 나의 불행한 애인은 날 한층 더 고결하게 해 주지. 더욱 위대해질 거야. 그래서 더욱 왜소하게 만들어 주겠어. 더욱 자극을 느끼도록 해 주겠단 말야. 그러니까 온갖 수단을 다 써 봐. 이제 시간이 됐어.
[선희] (냉정하게) 그만해요! 서둘러요. 준비됐어요?
[명희] 준비됐어?
[선희] (처음엔 부드럽게) 준비됐어요. 멸시를 당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저도 마님을 증오해요---
[명희] 부드럽게, 제발, 부드럽게--- (명희는 선희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린다.)
[선희] 전 마님을 증오해요. 마님을 경멸해요. 전 이제 마님이 무섭지 않아요. 애인 생각이나 하세요. 애인한테 보호해 달라고 해보세요. 전 마님을 증오해요. 향긋한 숨결로 부푼 마님의 젖가슴을 증오해요. 상아 같은--- 젖가슴! 황금 같은--- 허벅지! 백옥 같은--- 두 발! (선희는 빨간 드레스에 침을 뱉는다.) 전 마님을 증오해요!
[명희] (숨이 막히는 듯) 오! 오! 어떻게---
[선희] (명희에게 다가가며) 그래요. 마님, 아름다운 마님. 언제까지나 모든 게 마음대로 될 줄 아셨죠? 천상의 아름다움을 훔쳐내서 혼자만 독차지하고 제겐 안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죠? 향수도, 분도, 매니큐어도, 비단 옷도, 우단 옷도, 모피 옷도 혼자만 골라 가지고 제겐 안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죠? 그런데 두부 장수까지 뺏으려고요? 자백하세요. 두부 장수 얘길 자백하세요. 그 젊음에, 그 싱싱함에 반하셨죠, 그렇죠? 두부 장수 얘길 자백하세요. 선희는 이제 마님을 개떡같이 생각하니까요.
[명희] (질겁해서) 명희야! 명희라니까!
[선희]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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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속삭이듯) 명희라고, 언니, 명희라니까.
[선희] 아참! 명희. 명희는 이제 마님을 개떡같이 생각해요. 명희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아져서 환하게 빛나죠. (그녀는 명희의 뺨을 때린다.)
[명희] 오! 오! 명희--- 네가--- 오!
[선희] 꽃들의 방책이 마님을 지켜주고, 예외적인 운명과 희생이 마님을 구해줄 줄 알았겠죠. 하녀들의 반란을 계산에 넣지 않았을 테니까요. 자, 이제 반란이 일어났어요. 마님의 연애 사건 따위는 찌부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걸요. 나리는 보잘것없는 도둑이고, 마님은---
[명희] 안돼!
[선희] 안 된다구요! 농담도! 마님이야말로 당황하셨군요. 표정이 볼 만해요. 거울 좀 보실래요? (그녀는 명희에게 손거울을 건네준다.)
[명희] (황홀한 듯 거울을 비춰 보며) 난 정말 아름다워. 위험의 후광을 받아서 난 더욱더 빛이 나. 하지만 명희 너는---
[선희] --- 지옥의 암흑이죠. 저도 알아요. 그 기나긴 독백을 저도 안다고요. 마님의 얼굴만 봐도 제가 어떻게 대꾸해야 되는지 알 수 있어요. 마지막까지 가 보겠어요. 두 하녀가 여기 있어요. 아주 헌신적인 하녀들이죠. 한층 더 아름다워져서 하녀들을 경멸하세요. 저흰 이제 마님이 두렵지 않아요. 저희는, 저희가 뿜어 대는 냄새와, 저희가 누리는 영화와, 저희가 마님에게 품고 있는 증오심에 둘러싸여 뒤죽박죽이에요. 하지만 마님, 저희도 이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비웃지 마세요. 아! 무엇보다도 제가 큰소리를 친다고 비웃지 마시라고요---
소리를 다시 찾겠어요. 마님에겐 꽃이 있고 제겐 수채통이 있어요. 전 하녀예요. 그러니까 마님께선 절 더럽힐 수 없어요. 언제가지나 행복할 줄 아세요? 천당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할 거예요. 천국의 문 앞에서 증오심을 버리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어요. 자, 좀 웃어요. 웃으면서, 기도를 하세요. 빨리, 아주 빨리요! 이젠 더 이상 할말도 없으신가 보군요. (명희는 자신의 목을 보호하려 하고, 선희는 그 손을 친다.) 손을 내리고 그 가냘픈 목을 내놔요, 자, 겁내지 말아요. 떨지 말아요. 재빨리, 조용히 해치울 테니까요. 그래요, 저의 부엌으로 돌아가야죠. 하지만 그 전에 제가 할 일을 끝내야겠어요. (선희가 막 명희의 목을 조르려 할 때, 갑자기 자명종이 울린다. 선희는 멈춘다. 두 여배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가선다. 두 사람은 밀착된 상태에서 귀를 기울인다.) 벌써?
[명희] 서둘러. 마님이 오겠어. (명희는 드레스의 훅크를 끄르기 시작한다.) 좀 도와줘. 벌써 끝났어. 끝까지 못 갔어.
[선희] (도와주며. 서글픈 듯이) 언제나 이 모양이지. 너 때문이야. 넌 항상 준비가 느려. 그러니까 죽일 수가 없잖아.
[명희] 시간이 걸리는 걸 어떡해? 준비가 되려면---
[선희] (드레스를 벗기며) 창문이나 감시해.
[명희] 아직 시간은 충분해. 다 정리할 수 있어. 그럴 만한 여유를 두고 시계를 맞춰 놨으니까. (명희는 지친 듯이 안락의자에 주저앉는다)
[선희] 답답한 날씨로구나, 오늘 저녁은. 오늘은 하루 종일 답답한 날씨야.
[명희] 응.
[선희] 명희야, 답답해 죽겠지?
[명희] 응.
[선희]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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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응 (명희는 지친 듯 일어난다.) 커피 물 올려야지.
[선희] 창문을 잘 감시해.
[명희] 아직 시간이 있어. (명희는 얼굴을 닦는다)
[선희] 또 거울을 보는구나--- 얘, 명희야---
[명희] 지쳤어.
[선희] (엄하게) 창문을 감시하라니까. 넌 실수가 많아. 모든 걸 제 자리에 놔 둬야 돼. 드레스는 내가 손볼게. (선희는 동생을 쳐다본다) 왜 그러니? 이제는 네 자신으로 돌아와야지. 네 얼굴로 돌아오라구. 자, 명희야, 다시 내 동생이 돼야지---
[명희]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환한 불빛이 끔찍해. 언니 생각엔 저 앞집 사람들이---
[선희]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니? 하지만 정리를--- 캄캄한데서 정리를 할 수는 없잖니. 눈을 감아. 명희야, 눈을 감고 잠깐 쉬어.
[명희] (자신의 하녀 옷을 입는며) 아! 지쳤다 그런 건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야. 날 동정할 필요는 없어. 날 지배할 생각은 말란 말야.
[선희] 넌 쉬는 게 좋아. 그게 오히려 날 도와주는 거야.
[명희] 무슨 말인지 알아. 긴 설명 필요 없어.
[선희] 아니, 난 설명해야겠다. 시작은 네가 했어. 우선 그 두부장수 얘기만 해도 그래.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아니? 물론 그 녀석은---
[명희] 맙소사!
[선희] 물론 그 자식은 밤마다 날 모욕해. 하지만 그건 너한테도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조금 아까 넌 행복에 겨워서---
[명희]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지 말고 정리가 잘 됐는지나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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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지. 봐, 책상 열쇠는 여기 있었어. (열쇠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나리도 말했지만, 카아네이션이나 장미꽃 위엔 언제나---
[선희] (격렬하게) 그런데도 조금 아까 넌 행복에 겨워서 네가 그 놈한테서 받은 모욕과---
[명희] --- 언제나 하녀들의 머리칼이 있어.
[선희] 잡다한 우리 사생활 얘기를 뒤섞어 가며 온통 뒤죽박죽을 만들었어---
[명희] (비꼬듯) 뭐가? 뭐가? 뭐가 뒤죽박죽이야? 말해 봐. 우리 연극 말이야? 어쨌든 지금은 토론을 벌일 때가 아냐. 마님이 곧 돌아와. 하지만 언니, 이번엔 마님도 별수 없어. 우리한테 꼭 잡혔어. 애인이 체포된 걸 알고 마님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언니는 봤지? 언니가 부러워.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가 잘 해낸 거야. 언니도 인정하지? 언니는 내 덕분에, 내가 쓴 밀고 편지 덕분에 그렇게 기막힌 구경을 한 거야. 수갑을 찬 애인과 눈물에 젖은 마님. 마님은 괴로워 죽으려고 해. 오늘 아침엔 잘 서 있지도 못하던데.
[선희] 잘 됐어. 콱 뒈져 버려라! 나한테 유산이나 물려주고! 그 더러운 골방에도 안 들어가고, 머저리같은 부엌데기나 하인들 사이에 낄 필요도 없게 말야.
[명희] 그래도 난 우리 골방이 좋던데.
[선희] 괜히 감상적인 척하지 마. 내가 싫다니까 좋다는 거지? 나한테 반대하려고 말야. 난 있는 그대로 느껴. 골방은 더러워. 골방은 헐벗었어. 마님 말대로 골방은 벌거숭이야. 하긴, 뭐, 우리 스스로가 빈털터리 가난뱅이니까.
[명희] 아! 제발 또 시작하진 말어. 창문이나 좀 감시해. 나는 아무 것도 안 보여. 너무 깜깜한 밤이야.
[선희] 난 말을 해야겠다. 다 쏟아 버려야겠어. 그래, 나도 골방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없는 그 방에선 아무 짓도 안해도 괜찮기 때문이었어. 걸어 놓고 째려볼 그림도 없고, 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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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밟아 뭉갤 돗자리도 없고, 쳐다보고 걸레질하며 애지중지할 가구도 없고, 거울도 없고, 양탄자도 없어. 그러니까 그 방에선 전혀 우아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지. (명희의 몸짓을 보고) 하지만 걱정마라. 넌 그 감옥에 갇힌 채 여왕 노릇을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밤마다 마님의 방을 거닐 수 있을 거란---
[명희] 돌았군! 내가 언제 마님의 방을 거닐었어?
[선희] (비꼬듯) 아, 아씨께선 마님의 방을 거닌 적이 한번도 없으시다! 새벽 두시에 일어나, 커텐이나 침대보로 몸을 칭칭 감고, 아니야? 거울을 들여다보고, 베란다를 으스대며 거닐고, 창문 아래 몰려든 군중들에게 답례를 하고, 아니야? 정말 그런 적이 없었어? 정말?
[명희] 그런데 언니---
[선희] 너무 깜깜해서 마님이 오는지 볼 수가 없구나. 베란다를 거닐 때 아무도 널 못 보는지 알았지? 날 뭘로 아니? 몽유병자인척 할 생각은 말어.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 털어놓지 그래.
[명희] 그런데 언니, 왜 그렇게 악을 써?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마님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겠어--- (명희는 창문으로 달려가 커어튼을 쳐든다)
[선희] 커텐 내려. 그만할 테니까. 네가 그런 식으로 커텐을 쳐드는 건 보기 싫어. 내려 놔. 나리도 너처럼 커텐을 쳐들었어. 체포되던 날 아침 경찰이 있는가 살피려고 말야.
[명희] 사소한 동작 하나도 뒷문으로 도망치려는 살인자의 행동처럼 생각하는군. 겁이 나시나 보지.
[선희] 날 놀려라. 약을 올려. 놀리라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우릴 사랑하지 않아.
[명희] 그 여잔 우릴 사랑해. 그 여잔 착해. 마님은 착해. 마님은 우릴 아껴.
[선희] 자수 방석을 아끼듯이. 화장실 변기를 아끼듯이. 뒷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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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쓰는 대야를 아끼듯이 우릴 아끼지. 하지만 우리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없어. 쓰레기가---
[명희] (거의 짐승이 짖듯이) 아!---
[선희] --- 쓰레기를 사랑할 수는 없어. 내가 더 이상 그걸 참을 것 같아? 밤마다 연극이나 하다가 더러운 이부자리로 기어 들어가는 이 생활을 계속할 것 같아? 아니, 연극이나마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난 내 이름을 명희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침을 뱉지 못하면, 아마 숨이 막힐 거야. 내가 뱉는 침은 나의 다이아몬드 장식이야.
[명희] (일어나 울며) 살살 좀 얘기해, 제발. 마님은--- 마님은 착하다고 말해 줘, 제발.
[선희] 착하다구? 착하고, 미소짓고, 친절하기야 쉽지. 하지만 그건 예쁘고 돈이 많을 때 얘기야. 하녀가 착할 수는 없어. 기껏해야 청소나 설거지를 하면서 으스대는 걸로 만족해야 돼. 빗자루나 붙잡고 부채처럼 흔들어 대든지, 걸레나 들고서 우아한 척해 보는게 고작이란 말야. 하긴 너처럼 역사적인 군중 행렬을 상상하며 밤마다 마님의 방에서 사치스런 꿈에 바지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
[명희] 언니! 또 그 얘기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날 욕한다고 우리 마음이 편해지나? 언니에 대해선 더 지독한 말도 할 수 있어.
[선희] 네가? (꽤 긴 사이) 네가?
[명희] 물론 맘만 먹으면. 결국--- -
[선희] 결국? 결국 뭐야? 뭐냐니깐? 넌 그 남자 얘길 했어. 난 네가 싫다.
[명희] 나는 어떻구. 그래도 두부 장수 얘기로 언니를 협박할 생각은 없어.
[선희] 협박? 누가 더 겁을 낼지 해 볼까? 응? 왜 망설이지?
[명희] 먼저 해 봐. 먼저 쏴봐. 왜 물러서지? 너무나 큰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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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감히 협박도 못하겠지? 내가 보낸 밀고 편지 말야. 골방은 온통 내가 연습한 종이장으로 가득찼었지. 난 최고로 지독하고도 최고로 아름다운 얘길 꾸며냈고, 언니는 그걸 최대로 이용했어. 어제 밤엔 황홀해서 미치려고 하더군. 흰 드레스를 입고 부인 역할을 하면서 말야. 벌써 몰래 배를 탄 기분이었지? 그---
[선희] (유식한 체) 죄인 호송선. (한 음절씩 끊어 읽는다.)
[명희] 나리와 함께, 애인과 함께--- 육지를 떠난다. 악마의 섬을 향해, 절해고도를 향해 그이와 함께 떠난다. 정말 멋진 꿈이지. 내가 밀고 편지를 써 보낸 덕분에, 내 용기 덕분에 언니는 거룩한 창녀가 되는 사치를 했던 거야. 언니는 기쁜 마음으로 희생을 감수했어. 뉘우칠 줄 모르는 그 도둑의 짐을 대신 져 주고, 그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그이를 부축해 주고, 그이가 조금만이라도 편안해 질 수 있다면 다른 죄수들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도 서슴치 않았어.
[선희] 넌 안 그랬니? 너도 좀 아까 그이를 따라간다 그랬어.
[명희] 그래, 그랬어. 하지만 난 언니가 하다 만 얘기를 계속 했을 뿐이야. 그리고 언니처럼 격렬하지도 않았고. 언니는 골방에서부터 벌써, 편지에 파묻혀, 마치 배라도 탄 양 흔들거렸어.
[선희] 네가 어땠는지는 모르는구나.
[명희] 아니, 알아. 언니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봤거든. 언니 얼굴은 초췌했어. 우리의 희생자 덕분에 말야. 나리는 지금 철창에 갇혀 있어. 이건 즐거운 일이야. 적어도 그 자의 조롱은 안 받아도 되잖아. 물론 언닌 더 마음놓고 그이의 가슴팍에 안겨 쉬겠지. 그이의 몸뚱이를 그려보기도 하고, 그이의 다리를 상상하기도 하고, 그이의 거동을 훔쳐보기도 하면서 말야. 언니는 배를 타고 흔들거렸어. 벌써 그이한테 언니를 내맡겼던 거야. 우리 일이 실패하든지 말든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선희] (분개하며) 뭐야?
[명희] 그래, 실패할 뻔했어. 경찰에 밀고 편지를 쓰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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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건과 정확한 날짜가 필요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지? 응? 생각해 봐. 얼굴이 빨개지니까 아주 예쁜데. 창피하지? 언니도 거기 있었잖아? 나는 마님의 서류를 뒤져서 문제의 그 편지를 찾아냈어--- (침묵)
[선희] 그런데?
[명희] 아유, 정말 미치겠네! 그런데라니? 그런데 언니는 나리의 편지들을 감춰 두려고 했지 뭐야. 어제 밤에도 다락방에서 찾아냈어. 나리가 마님한테 보낸 카드 한 장이 남아 있더군.
[선희] (공격적으로) 너, 내 물건을 뒤지는구나!
[명희] 그럴 수밖에.
[선희] 너야말로 조바심이 대단하구나---
[명희] 조바심이 아냐, 신중한 거지. 난 위험을 무릅쓰고 양탄자에 엎드려 책상 열쇠를 돌리고 있는데, 정확한 자료를 찾아내 이야기를 꾸며내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언닌 죄짓고 귀양가는 애인 꿈이나 꾸면서 취해 있었어. 난 버려 둔 채 말야.
[선희] 난 현관문이 잘 보이게 거울을 놓고 지키고 있었어.
[명희] 천만에! 난 다 알아. 오래 전부터 언닐 지켜봤어. 워낙 용의주도하잖아. 마님이 오면 언제라도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찬방 문턱에 서 있었어.
[선희] 거짓말 마. 난 복도를 지키느라---
[명희] 거짓말! 하마터면 마담한테 들킬 뻔했어. 서류를 뒤지는 내 손이 떨리는 건 아랑곳 않고, 언닌 벌써 바다를 건너---
[선희] (비꼬듯) 넌? 너는 황홀해 하지 않은 줄 알아? 명희, 넌 귀양가는 죄수 꿈을 꿔본 적이 없어? 정말로 그 사람 꿈을 꿔본 적이 없어? 맘속 깊이 멋들어진 연애 사건을 상상하며 그 사람을 밀고한 게 아냐? 정말? 정말?
[명희] 물론 그래.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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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아. 게다가 그 얘길 생각해 낸 건 언니야. 얼굴 좀 돌려 봐. 아, 자기 얼굴을 좀 봐야 하는 건데. 언니 얼굴엔 아직도 망망대해의 태양이 번득이고 있어. 언니 애인의 탈출 준비를 하고 있어. (명희는 신경질적으로 웃는다) 고심을 하시는군! 하지만 안심해. 내가 언니를 싫어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니까. 언니도 알 거야.
[선희] (목소리를 낮추며) 겁 안 나. 날 미워하는 것도 무섭지 않고, 네 속임수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조심해, 너 보단 내가 윗사람이야.
[명희] 윗사람? 그게 무슨 뜻이지? 더 강하단 얘기야? 자꾸 그 남자 얘길 시켜서 내 주의를 돌릴 생각이신가 본데, 맘대로 해 봐. 하지만 내가 모를 줄 알아? 마님을 죽이려고 했지?
[선희] 뭐라구?
[명희] 시치미 떼지 마. 봤으니까. (긴 침묵) 무서웠어. 언니, 무서웠어. 언니랑 연극을 할 때 난 내 목을 조심해. 언니는 마님을 노리지만 정작 위험한 건 나야. (긴 침묵. 선희는 어깰 으쓱한다)
[선희] (결연히) 그래, 난 마님을 죽이려고 했다. 널 해방시켜 주고 싶었어. 난 참을 수 없었다. 마님의 짜증과 친절 속에서 빨갛게 상기됐다 파랗게 질렸다 하며 숨막혀 하고 썩어 가는 널 보면 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더구나. 그래, 네가 옳다. 난 욕을 먹어도 싸다. 널 지나치게 사랑했으니까. 내가 만약 마님을 죽였다면 제일 먼저 네가 날 고발했겠지. 네가 날 경찰에 넘겼을 거야.
[명희] (선희의 손목을 잡으며) 언니---
[선희] (뿌리치며) 상관 마. 내 문제니까.
[명희] 선희 언니, 내가 잘못했어. 마님이 곧 돌아올 거야.
[선희] 난 아무도 못 죽였다. 난 비겁했어. 알겠니? 물론 노력이야 했지. 잠을 자던 그 여자가 돌아눕더구나. 조용히 숨을 쉬더군. 이불이 불룩했어. 하지만 역시 주인 마님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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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그만 해.
[선희] 아직 안 끝났어. 알고 싶어했잖아. 나머지 얘길 들어야지. 네 언니가 어떤 여잔지 알아야 돼. 네 언니라는 여자가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하녀란 게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알아야 된단 말야. 난 그 여자의 목을 조르고 싶었---
[명희] 하늘을 생각해. 하늘을 생각해. 뒤에 올 일을 생각해.
[선희] 알 게 뭐야. 마님 좀 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좀 봐. 마님은 변했어. 고통으로 찬란한 빛을 발해. 마님은 자기 애인이 도둑이란 얘길 듣고도 당당하게 경찰한테 대들었어. 마님은 기쁨에 넘쳤어. 이제 마님은 혼자 된 여자로서, 숭고함에 빛나는 여자로서, 자신의 괴로움을 함께 슬퍼해 주는, 사려 깊은 두 하녀에게 양팔을 내맡기고 있어. 너도 봤지? 보석과 비단 옷과 샹드리에 불빛으로 번쩍이는 마님의 고통을! 명희야, 난 나의 초라한 슬픔을 찬란한 범죄로 보상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난 불을 지를 생각이었어.
[명희] 선희 언니, 진정해. 불은 안 붙었을 거야. 발각이 났을거야. 방화범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선희] 그래, 안다. 난 열쇠 구멍에 귀와 눈을 대고 있었다. 난 어떤 하녀보다 열심히 엿들었다. 그러니까 난 다 안다. 방화범! 훌륭한 호칭이지.
[명희] 그만 해. 질식하겠어. 숨이 막혀. (명희는 창문을 조금 열려고 한다.) 아, 환기라도 좀 시켜야겠어.
[선희] (불안한 듯) 어떻게 하려고?
[명희] 열려고.
[선희] 너도 그렇구나. 나도 아까부터 숨이 막혀. 진작부터 난 사람들 앞에서 우리 연극을 하고 싶었다. 지붕에 올라가 나의 진실을 외치고 싶었다. 마님의 옷차림으로 거리에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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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그만 해. 내 얘기는---
[선희] 그래, 네 말이 맞다. 시간이 너무 일러. 창문은 놔두고 거실하고 부엌문이나 좀 열어. (명희는 차례로 문을 연다) 물이 끓는지 좀 가 봐.
[명희] 나 혼자?
[선희] 기다려, 그럼. 마님이 올 때까지. 모피와 진주와 눈물과 미소와 한숨과 친절을 가지고 마님이 나타날 때까지. (전화벨이 울린다. 두 자매는 귀를 기울인다)
[명희] (전화에 대고) 나리? 나리시군요! --- 명힙니다, 나리. (선희는 다른 수화기를 들려고 하지만 명희가 못하게 한다.) 네, 마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리께서 석방되신 걸 알면 마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네, 나리. 적어 놓겠습니다. 오뚜기 다방에서 마님을 기다리신다고요. 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나리.(수화기를 걸려고 하나 손이 떨려 탁자 위에 놓는다)
[선희] 나왔어?
[명희] 판사가 가석방을 시켰대.
[선희] 그럼--- 그럼 다 틀렸잖아.
[명희] (냉담하게) 잘 아시네.
[선희] 그 잘 풀어 줘? 뻔뻔스런 놈의 판사 같으니. 정의를 우롱했어. 우릴 모욕했어. 풀려났으니까 조사를 하려고 하겠지. 집안을 뒤져 범인을 찾아내려고 할거야.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겠구나.
[명희] 난 최선을 다했어. 어차피 위험을 무릅썼던 거야.
[선희] (신랄하게) 암, 잘했다마다. 정말 훌륭해. 너의 밀고, 너의 편지, 다 기막혔어. 이제 그들이 네 글씨만 알아보면 돼. 그럼 완벽한 거야. 한데 왜 곧장 이리로 오지 않고 다방으로 갔을까? 왜 그런지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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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그렇게 잘난 사람이 왜 마님은 못 죽였을까? 무서웠지? 공기는 향긋하고, 침대는 포근하고, 결국 주인 마님이었지! 이제는 계속 이렇게 살수밖에 없어. 또다시 연극이나 하면서 말아.
[선희] 이젠 연극도 위험해. 분명 어딘가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네 잘못이야. 우린 언제나 흔적을 남겨. 너무 많아서 지울 수도 없어. 마님은 그 흔적을 다스려 가며, 그 흔적들 사이를 거닐고 있어. 마님은 그 흔적을 읽고 있어. 마님은 분홍색 구두 끝으로 우리가 남긴 흔적을 짚어 가고 있어. 마님은 하나하나 우리의 비밀을 벗겨내고 있어. 마님은 우릴 조롱하고 있어. 네 잘못이야. 마님은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종만 울리면 모두가 마님에게 복종해. 마님은 우리가 자기 드레스를 입는 것도 알게 될 거고. 자기 몸짓을 훔치는 것도 알게 될 거고, 자기 애인한테 거짓 아양을 떠는 것도 알게 될거야. 명희야, 모든 게 말을 할거야. 모든 게 우릴 고발할거야. 네 어깨를 스친 커텐, 네 얼굴을 비쳐본 거울. 늘 우리의 광기를 지켜본 불빛, 그래, 불빛이 모든 것을 일러 줄 거야. 다 틀렸어. 네 잘못이야.
[명희] 언니 때문에 다 틀린 거야. 언니한테 용기만 있었어도, 마님을---
[선희] 마님을 뭐?
[명희] 마님을 죽였을 거야.
[선희] 난 아직도 용기가 있어.
[명희] 어디? 어디? 언닌 내 밑에 있어. 언니 나처럼 나무 꼭대기에 살지 않아. 그러니까 고작 두부 장수 생각만 해도 정신이 없지.
[선희] 명희, 넌 마님의 얼굴을 못 봐서 그래. 갑자기 마님 옆에 그렇게 가까이 가니까, 자고 있는 마님 옆에 가니까, 힘이 쑥 빠지더군. 마님의 목을 찾으려면 이불을 들춰야 했어.
[명희] (비꼬듯) 이불이 포근했지? 깜깜한 밤이었고? 그런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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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 해치워야 돼. 언닌 그렇게 무서운 짓을 못해.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언니도 알 거야.
[선희] 수면제.
[명희] 그래, 차분하게 얘기하자고. 난 용기가 있어. 언닌 날 지배하려고 했지만--- ---
[선희] 하지만 명희야---
[명희] (침착하게) 잠깐, 미안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알아. 난 밝을 명자, 명희야, 난 냉정해. 결심도 섰어. 난 진저리가 나. 거미가 되는 것도, 수채통이 되는 것도, 때밀이 수건이 되는 것도 이젠 지겨워. 가마솥을 신주처럼 모시는 것도 물론 지긋지긋하고 말야. 난 썩은 냄새를 풍겨. 난 누가 봐도 불쾌한 인간이야. 언니가 봐도 그럴 거야.
[선희] (명희의 어깨를 잡으며) 명희야--- 우리 둘다 너무 예민해졌어. 마담이 안 오는구나. 나도 못 참겠다.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참을 수가 없어. 내 손도, 내 검은 양말도, 내 머리도 참을 수가 없어. 명희, 내 동생, 널 나무라는 건 아니다. 산책을 하면 네 마음이 좀 가라앉곤 했는데---
[명희] (신경질적으로) 아! 가만 놔 둬.
[선희] 널 도우려는 거야. 널 위로해 주고 싶단 말야. 물론 넌 날 싫어해. 나도 잘 알아. 내가 혐오스럽지? 그럴 거야. 나도 네가 혐오스러우니까. 서로 혐오감을 느끼며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냐.
[명희] 지나치게 사랑하는 거지. 하지만 나도 그 끔찍한 거울에 진저리가 나. 악취 풍기는 내 얼굴을 그대로 비춰 주는 그 거울이 지겨워. 언니는 나의 악취야. 그래, 난 결심했어. 난 나의 왕관을 찾겠어. 난 마님의 방을 마음놓고 거닐겠어.
[선희] 하지만 그 정도 이유로 마님을 죽일 수는 없어.
[명희] 정말? 정말 불충분해? 어째서? 말해 봐. 그 이상 좋은 이유가 또 어디 있어? 정말 불충분해? 오늘 밤 마님은 우리가 당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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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꼴을 보게 될 거야. 깔깔대며 웃겠지. 눈물이 나오도록 웃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겠지. 안돼, 난 나의 왕관을 찾겠어. 나는 언니가 못한 일을 하겠어. 난 독살자가 되겠어. 이젠 내가 언니를 지배할 거야.
[선희] 하지만 절대로---
[명희] (마님을 흉내내듯 심술궂게 늘어놓으며) 수건을 다오! 빨래 집게를 가져오너라! 양파를 까거라! 당근을 깍아라! 유리창을 닦아라! 다 끝났어! 이젠 다 끝났어. 아참, 깜빡했네. 수도를 잠가라! 그런 건 다 끝났어. 이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겠어.
[선희] 명희야!
[명희] 언니도 날 도와줘.
[선희] 넌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지 모를 거야. 명희야, 이건 보통일이 아냐, 물론 아주 간단한 일이긴 하지만.
[명희] 두부 장수의 튼튼한 팔이 날 받쳐 줄 거야. 그 사람은 꺽이지 않을 거야. 왼손으로 그이의 목덜미를 짚겠어. 언니도 날 도와 줘. 그리고 만약 내가 더 멀리 가게 되면, 내가 만약 귀양을 가게 되면 나와 함께 가 줘. 배에 함께 타 줘. 선희 언니, 우리 두 사람은 영원한 한 쌍, 죄인과 성인의 한 쌍이 되는 거야. 우린 구원받을 거야, 언니, 틀림없이 구원받을 거야! (명희는 마님의 침대에 주저앉는다)
[선희] 진정해라. 내가 우리 방으로 옮겨 줄게. 좀 자거라.
[명희] 그냥 놔 둬. 어둡게 해 줘. 조금만 어둡게 해 줘, 제발 부탁이야. (선희는 불을 끈다)
[선희] 좀 쉬어. 좀 쉬어, 명희야. (선희는 꿇어앉아 명희의 신을 벗기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다.) 좀 가라 앉혀, 명희야. (명희를 쓰다듬는다) 발을 이리 뻗어. 눈을 감아.
[명희] (한숨을 쉬며) 창피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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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아주 부드럽게)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 내가 재워 줄께. 잠들면 내가 저 구석 골방으로 옮겨 줄께. 옷을 벗기고 네 자리에 눕혀 줄께. 자. 내가 여기 있을게.
[명희] 창피해, 언니.
[선희] 쉿! 내가 얘기 하나 해 줄게.
[명희] (구슬프게) 언니?
[선희] 왜?
[명희] 언니, 내 말 좀 들어 봐.
[선희] 자. (긴 침묵)
[명희] 언니 머리는 아름다워. 아름다운 머리야. 그 여자 머리는---
[선희] 이제 그 여자 얘기하지 마.
[명희] 그 여자 머리는 가짜야. (긴 침묵) 생각나? 우리 둘이서, 나무 밑에 앉아. 발에 햇볕을 쬐었지? 언니?
[선희] 자. 내가 여기 있잖아. 언니가 있잖아. (침묵. 얼마 후에 명희가 일어난다.)
[명희] 안돼! 안돼! 약해지면 안돼! 불을 켜! 불을 켜! 기회가 너무 좋아! (선희는 불을 켠다) 일어나! 뭘 좀 먹어야 돼. 부엌에 뭐가 있지? 응? 먹어야 돼. 그래야 힘이 나지. 자, 가르쳐 줘. 수면제?
[선희] 그래. 수면제는---
[명희] 수면제!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즐거워야 돼. 노랠 해야돼. 같이 노래해! 노래를 불러. 부잣집으로 구걸하러 갈 때처럼 노래를 불러. 웃어야 돼. (함께 깔깔대며 웃는다.) 웃지 않으면 비극적이 돼서 우리 둘다 창 밖으로 날아가 버릴 거야. 창문을 닫아. (선희는 웃으며 창문을 닫는다) 살인이란--- 말로는 형용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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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 노래를 부르자고. 그 여잘 숲 속에 데려가, 전나무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조각조각 토막을 내는 거야. 그리고 노래를 해야지. 그 여잘 꽃밭에 묻어 놓고, 저녁마다 조그만 물뿌리개로 물을 줘야지. (출입문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선희] 그 여자다. 그 여자가 왔어. (선희는 동생의 두 손목을 잡는다.) 명희야, 정말 할 수 있겠니?
[명희] 몇 알을 넣어야 돼?
[선희] 열 알을 넣어. 코피에다 타. 수면제 열 알을. 넌 못할 거야.
[명희] (손을 빼고 침대를 정리하러 간다. 선희는 잠시 명희를 쳐다본다) 약병은 나한테 있어. 열 알?
[선희] (아주 급히) 그래, 열 알. 아홉 알은 약해. 너무 많으면 토하고. 꼭 열 알이야. 코피를 아주 진하게 끓여. 알겠지?
[명희] (속삭이듯) 알았어.
[선희] (나가려다 뭐가 생각난 듯, 자연스런 어조로) 아주 달게 타. (선희는 왼쪽으로 나간다. 명희는 계속 방을 정리하다 오른쪽으로 나간다. 잠시 시간이 흐른다. 무대 뒤에서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린다. 모피 망토를 걸친 마님이 들어온다. 선희가 뒤따라 들어온다) .
[마님] 갈수록 더하는구나! 끔찍한 글라디올러스, 넌덜머리나는 장미, 게다가 미모사까지! 이 미친애들은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해도 뜨기 전에 새벽시장을 헤맬 거야. 얘, 선희야, 이 못난 주인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다니! 그이는 지금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데 날 위해 이렇게 많은 장미꽃을 준비하다니! 난 이제--- 선희야, 너와 네 동생에게 신뢰의 표시를 해주겠다. 난 이제 희망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번엔 그이가 정말로 투옥됐어. (선희는 마님의 모피 망토를 벗긴다.) 선희야, 투옥됐단 말이다! 투-옥! 그것도 아주 고약한 사정으로!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니? 너의 주인이 가장 더럽고도 바보 같은 일에 말려들었단다. 그 분은 거적대기 위에서 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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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데 너희들은 날 신주 모시듯 하다니!
[선희]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감옥도 옛날하곤 달라져서---
[마님] 물론 축축한 거적이 깔린 지하 감방은 이제 없겠지. 그건 나도 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이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상상하게 되는구나. 감옥엔 위험한 죄수들이 득실거리는데 그렇게 섬세하신 분이 그 속에서 지내야 하다니! 부끄러워 죽고 싶다. 그 분은 자신의 혐의를 해명하느라 애를 쓰시는데, 나는 낙심한 채, 상심한 채, 정자 아래서 꽃밭이나 거닐고 있구나.
[선희] 손이 얼음장같아요.
[마님] 난 정말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심장이 무섭게 뛰어서. 언젠간 쓰러져 너희들의 꽃 속에서 죽고 말 거다. 너희들은 내 무덤을 준비하는 거다. 며칠 전부터 내 방에다 장례식 꽃을 모으고 있는 거야. 몹시 춥더구나. 하지만 어떻게 불평을 하겠니? 난 그렇게까지 뻔뻔스럽진 못해. 저녁 내내 복도를 서성였지. 얼음장같은 사람들, 대리석 같은 얼굴들, 밀납인형같은 표정들, 하지만 난 그 분을 찾아냈어. 아주 멀리서. 난 손가락 끝으로 신호를 보냈다. 간신히. 죄를 짓는 것 같았어. 그 분이 순경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사라지는 걸 봤지.
[선희] 순경이요? 확실해요? 간수가 아니고요?
[마님] 넌 나도 모르는 걸 아는구나. 간수인지 순경인지 하여튼 그 분을 끌고 가더구나. 난 지금 막 어떤 법관 부인을 만나고 오는 길이란다. 명희야!
[선희] 명희는 마님의 코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님] 빨리 하라 그래! 미안하구나, 선희야. 미안하다. 그 분은 음식도, 담배도, 아무 것도 없이 홀로 계신데, 난 커피나 시키고 있으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감옥 속이 어떤지 너무들 몰라. 상상력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상상력이 지나쳐서 탈이야. 난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 정말 고통스럽다. 미칠 지경이야. 너희들은 참 좋겠다. 이 세상에 단둘뿐이니까. 명희하고 너 말이다.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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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비천한 신분이지만, 대신 불행이라는 걸 몰라도 되잖니?
[선희] 나리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이 곧 밝혀질 거예요.
[마님] 물론이지 죄가 없고 말고! 없어! 하지만 죄가 있건 없건 난 절대 그분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은 바로 이렇게 해서 깨닫게 되는 거란다. 그 분은 죄가 없다. 하지만 그이가 만약 죄를 졌다면, 아마 난 그이의 공범이 됐을 거다. 나는 그이와 함께 갈 거다. 두메산골까지라도. 절해고도까지라도. 물론 그이는 이 난관을 극복하겠지. 하지만 난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 덕분에 그이에 대한 나의 애정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릴 갈라놓으려던 사건이 우리를 더욱 굳게 맺어주는 셈이지. 더 큰 행복이라고나 할까? 물론 좀 괴상한 행복이긴 하지만! 그 분은 죄가 없다. 하지만 만약 죄가 있다 해도 난 기쁜 마음으로 그이의 고통을 대신 질 거다. 가는 곳마다, 감옥마다, 유배지까지도 따라갈 거다. 걸어서라도. 유배지까지라도, 유배지까지라도 말이다. 선희야! 담배가 피고 싶다! 담배를 다오!
[선희] 아마 못하게 할 걸요. 부인이나 누이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조차도 악당들을 따라가도록 허용되진 않을 거예요.
[마님] 악당! 별 소릴 다 하는구나. 넌 뭐 그렇게 아는게 많니? 그리고 일단 판결을 받으면 악당이라고 할 수 없는 법이다. 어쨌든 난 억지로라도 밀고 들어갈 거다. 온갖 용기를 다 내고, 온갖 꾀를 다 짜낼 거다.
[선희] 마님은 정말 용감하세요.
[마님] 넌 아직 날 모른다. 지금껏 너나 네 동생이 보기에 나는 그저 시중이나 받고 사랑이나 받으며, 커피나 마시고 옷차림에나 관심을 갖는, 그런 여자였겠지. 하지만 그런 습관들, 버린지 이미 오래다. 난 강해졌다. 싸울 준비가 돼 있어. 물론 그 분이 교수대에 오를 염려는 없다. 그렇지만 그 정도까지 각오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머리도 민첩하게 돌아가고, 그래야 상황 판단도 좋아질 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 덕분에 오늘 아침부터 우리 집을 감싸고 있는, 이 불안한 분위기를 꿰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덕분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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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집에 은밀히 첩자를 배치시킨 그 못된 경찰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말야.
[선희] 너무 괴로워 마세요. 더 큰 사건도 무죄 석방되는 경우를 봤어요. 대법원에서---
[마님] 더 큰 사건? 너, 그이가 연류된 사건이 뭔지 아니?
[선희] 저요? 아뇨. 전혀 몰라요. 그냥 마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뿐예요. 그저 별일이 아닐 거라고 추측하는 거죠---
[마님] 횡설수설하는구나. 무죄 석방은 어떻게 알지? 재판소에 자주 가 봤니?
[선희] 신문에 난 걸 읽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나쁜 죄를 저지른 사람 얘길 한 거예요. 그러니까---
[마님] 그이의 사건은 비교 거리도 안 된다. 글쎄, 말도 안 되는 도둑질을 했다고 고발한 거야. 이제 시원하니? 도둑질! 말도 안돼! 말도 안되는 밀고 편지 때문에 체포된 거란다.
[선희] 좀 쉬시는 게 좋겠어요.
[마님] 피곤하지 않다. 날 불구자처럼 취급하지 말아라. 오늘부터 난 너희들의 충고대로 움직이며 게으름이나 부리는 여주인이 아니다. 날 동정할 생각은 말아라. 너희들의 탄식 소리는 참을 수가 없다. 너희들의 친절은 짜증이 난다. 너희들의 친절은 나를 짓누른다. 너희들의 친절은 숨이 막힌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너희들의 친절은 나에게 정다운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꽃들, 결혼식도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인데, 축하연을 하듯 잔뜩 꽂혀 있는 이 꽃들! 그런데 어떻게 불을 지펴 날 덥혀 줄 생각들은 안 했는지 궁금하구나. 그이의 감방에도 불이 있을까?
[선희] 불은 없을 거예요, 마님.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가 마님께 소홀한 점이 있다면---
[마님]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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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오늘 쓴 가계부를 보여 드릴까요?
[마님] 정말이지 넌 생각도 없구나! 내가 지금 숫자를 볼 정신이 있겠니? 선희야, 그래. 그렇게 날 생각해 주지 못하니? 꼭 그런 식으로 날 모욕해야겠니? 숫자다, 가계부다, 요리법이다 하는 소리가 나와? 슬픔을 간직한 채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나한테 어떻게 그런 얘길 할 수 있단 말이니? 왜, 그러고 있지 말고 가서 장사꾼들이라도 불러오지 그러니?
[선희] 마님께서 얼마나 슬프신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어요.
[마님] 집에다 검은 천을 두르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희] (모피 어깨걸이를 치우며) 안감이 찢어졌네요. 내일 모피점에 맡겨야겠어요.
[마님] 맘대로 하려므나. 하긴 그럴 필요조차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옷차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게다가 나도 이제 늙었어. 그렇지, 선희야, 나도 이젠 늙었지?
[선희] 자꾸 어두운 생각만 하시는군요.
[마님] 꼭 상을 당한 기분이다. 그러니 놀랄 것 없다. 그인 지금 감옥에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옷차림을 생각하고, 어떻게 모피 생각을 하겠니? 이 집이 너희들에게 너무 슬퍼 보인다면---
[선희] 아녜요, 절대---
[마님] 너희들까지 불행을 나눌 필요는 없다.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선희] 저흰 절대 마님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마님께서 저희한테 해 주신 걸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마님] 그래, 안다, 선희야, 그럼 너희들도 몹시 괴로웠니?
[선희] 그럼요!
[마님] 사실 너희들은 내 딸이나 마찬가지다. 너희들과 같이 있으면 슬픔도 좀 덜하겠지. 함께 시골로 가자꾸나. 가서 정원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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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꽃도 가꾸려므나. 그런데 너희들은 즐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젊은 아이들이 도무지 웃지를 않아. 시골에 가면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다. 난 너희들을 아낄 거고, 결국 내가 가진 모든 걸 너희들에게 물려줄 거다. 사실 지금도 너희들한테 부족할 거야 없지 않겠니? 옛날에 내가 입던 옷만 가지고도 공주처럼 차려 입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젠 이 옷들도--- (옷장으로 가서 자기 옷들을 바라본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난 이제 우아하고 고상한 삶을 포기했다. (명희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온다.)
[명희]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마님] 음악회도, 파티도, 연극도 이젠 이별이야. 그런 건 모두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명희] (냉정하게) 마님께선 계속해서 치장을 하셔야 합니다.
[마님] (깜짝 놀라며) 뭐라구?
[명희] (담담히) 마님께선 더 예쁜 옷들을 주문하셔야 합니다.
[마님] 날더러 지금 양장점을 뛰어다니란 말이냐? 네 언니에게도 방금 말했다만, 이제 나에겐 면희하러 갈 때 입을, 검을 옷만 있으면 충분하다. 어떻게 거길---
[명희] 더욱 우아하게 꾸미셔야 합니다. 마님에게는 슬픔도 치장을 위한 훌륭한 이유가 되니까 말입니다.
[마님] 뭐? 그래. 네말이 옳다. 그이를 위해 계속 치장을 해야겠다. 그이가 유배당할 때 내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할지 생각해야겠다. 그이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화려한 상복을 입겠다. 그래, 새 옷을 맞추겠다. 더 예쁜 옷을 주문하겠다. 내가 입던 옷들은 너회들이 입어라. 그게 날 돕는 거다. 너희들에게 그걸 주면 혹시 그분 일이 잘 풀릴지 아니?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명희] 그런데, 마님---
[선희] 코피를 가져왔어요, 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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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거기 놔라. 조금 이따 마시겠다. 너희들한테 내 옷을 주겠다. 전부 다 주겠다.
[명희] 저희는 절대로 마님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어요. 마님의 옷을 정리할 때 저희가 얼마나 조심하는 줄 아세요? 저희는 옷장을 열 때---
[선희] (냉정하게) 코피가 식겠어요.
[명희] 저희는 옷장을 활짝 열어요. 그건 저희들의 축제예요. 저희들은 그저 마님의 옷들을 바라보기만 할뿐이예요. 저희들에게 그 이상의 권리는 없어요. 마님의 옷장은 신성해요. 그것은 거룩한 옷장이에요.
[선희] 쓸데없는 수다로 마님을 피곤하게 하면 안돼요.
[마님] 이젠 다 끝났다. (붉은 우단 드레스를 쓰다듬는다.) 내 아름다운 드레스. 제일 예쁜 옷이지. 가엾은 것. 자, 가져라. 너한테 주겠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명희야! (마님은 그 옷을 명희에게 주고 다시 옷장을 뒤진다.)
[명희] 어머! 정말로 이걸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마님]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그럼. 그렇다고 하지 않았니.
[선희] 마님께선 너무나 친절하세요. (명희에게) 어서 마님께 감사드려요. 오래 전부터 감탄하던 옷 아녜요.
[명희] 전 도저히 못 입겠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마님] 고쳐 입으렴. 옷자락에 붉은 빌로드만 떼어내도 소매는 충분히 덮을 수 있을 거다. 아주 따뜻한 옷이란다. 너희 같은 애들이 입으려면 옷감이 튼튼해야지. 그리고 선희야, 너한텐 뭘 줄까? 너한텐--- 자, 내 여우 털 망토를 주지? (마님은 그것을 집어 중앙에 있는 안락의자에 놓는다.)
[명희] 오! 과시의 망또!
[마님]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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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명희는 마님께서 특별한 자리에 참석하실 때만 입으신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마님] 천만에. 어쨌든 너희들은 옷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겠다. 난 옷을 갖고 싶으면 내가 사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더 고급 옷들을 맞추겠다. 그이의 초상을 최대로 훌륭하게 치뤄 내야 할테니 말이다.
[명희] 마님은 아름다워요!
[마님] 아니, 아니.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자기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난 항상 착한 일만 생각하건만! 도대체 날 벌줄 만큼 사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도대체 뭘 갖고 날 벌준단 말야? 난 너희들의 헌신적인 보호를 받으며, 또 그이의 완벽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서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정과 사랑이 힘을 합쳐도 절망을 막아 줄만큼 높은 방책은 세울 수 없나 보구나. 난 절망에 빠졌다! 그 편지! 나밖에 모르는 얘기지만, 편지가. 선희야?
[선희] (자기 동생에게 인사하며) 네, 마님.
[마님] (이쪽으로 오며) 뭐하니? 아니, 너, 명희한테 절을 하니? 재미있구나! 너희들은 농담같은 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
[명희] 커피를 드세요, 마님.
[마님] 선희야, 너를 부른건--- 아니, 누가 또 책상의 열쇠를 만졌니?--- 널 부른 건 네 생각을 물어보려고 그랬던 거다. 도대체 누가 그 편지를 보냈을 것 같니? 물론 모르겠지. 너희들도 나처럼 깜짝 놀랐을 거다. 하지만 얘들아, 모든 게 백일하에 드러날거다. 그이는 비밀을 밝혀내실 거다. 편지의 필적을 감정해서 누가 그런 흉계를 꾸몄는지 알아낼 거다. 수화기가--- 누가 또 수화기를 내려왔니? 왜 내려왔어? 전화가 왔었니? (침묵)
[명희] 제가요. 아까 나리께서---
[마님] 나리? 나리라니? (명희는 입을 다문다) 말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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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나리께서 전화하셨을 때요.
[마님] 감옥에서? 감옥에서 전화를 하셨단 말이냐?
[명희] 마님을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선희] 나리께선 가석방되셨어요.
[명희] 지금 오뚜기 다방에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셔요.
[선희] 진작 말씀드려야 했는데.
[명희] 저희를 용서하실 수 없을 거예요.
[마님] (일어나며)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다니! 자동차. 자동차를 불러라, 선희야, 빨리, 빨리. 서둘러라. (발음상의 오류가 예상된다.) 뛰어라. 어서. (마님은 선희를 밖으로 밀어낸다) 코트를 가져와! 빨리! 너희들 미쳤구나. 아니면 내가 미쳤든지. (모피 망토를 입는다. 명희에게) 언제 전화를 하셨던?
[명희] (느낌 없는 목소리로) 마님께서 오시기 오 분 전에요.
[마님] 얘길 했어야지. 커피가 식었구나. 선희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도저히 기다릴 수 가 없구나. 그래, 그 이가 뭐라고 하시던?
[명희]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에요. 무척 침착하셨어요.
[마님] 그이야 늘 그렇지. 그이는 아마 사형 선고를 받아도 태연할 거야. 원래 성격이 그래. 그리곤 또 뭐라시던?
[명희]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그저 판사가 석방을 시켰다고만 하셨어요.
[마님] 어떻게 밤 열두시에 재판소에서 나왔을까? 판사들이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보나?
[명희] 훨씬 늦게까지 일할 때도 있어요.
[마님] 훨씬 늦게?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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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전 잘 알아요. 탐정소설을 읽거든요.
[마님] (놀라서) 아, 그래? 그것 참 희한하구나. 넌 정말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명희야. (마님은 손목시계를 본다.) 선희가 서둘러야 할 텐데. (긴 친묵) 잊어버리지 말고 망토 안감을 꿰매 놓거라.
[명희] 내일 모피점에 맡기겠어요. (긴 침묵)
[마님] 계산은 어떻게 됐지? 가계부 가져오너라. 지금 시간이 있으니까 좀 보자.
[명희] 그건 선희 언니가 맡아 해요.
[마님] 그래, 그렇구나. 하긴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봐도 뭐가 뭔지 모를 거다. 내일이나 봐야지. (명희를 쳐다보며) 이리 좀 와 봐라! 더 가까이! 아니--- 너, 화장했구나! (웃으며.) 그래, 명희야, 너도 화장을 하는구나!
[명희] (몹시 난처한 듯) 마님---
[마님] 아, 숨기지 마라! 하긴, 네가 옳다.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 웃으면서 말이다. 그래, 누굴 위해 화장을 했니? 말해 봐라.
[명희] 그냥 분을 좀 발랐어요.
[마님] 분이 아니야. 그건 연지야, 『장미의 재』라는 연지다. 내가 쓰지 않는 오래된 연지지. 네가 옳다. 너는 아직 젊어. 예쁘게 꾸며라. 치장을 해. (명희의 머리에 꽃을 한송이 꽂아 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도대체 앤 뭘 하고 있는 거야? 밤 열두 신데 아직도 안오니!
[명희] 이 시간엔 택시가 드물어요. 아마 주차장까지 달려갔을 거예요.
[마님] 그런가? 내가 시간 생각을 못 했구나. 너무 행복해서 정신이 나갔나 보다. 그이가 이런 시간에 석방됐다는 전화를 하다니!
[명희] 좀 앉으세요. 커피를 데워 오겠어요. (명희는 나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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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마님] 아니다, 목마르지 않다. 오늘밤엔 샴페인을 마실 거다. 우린 오늘 안 들어올 거다.
[명희] 한 모금이라도---
[마님] (웃으며) 벌써부터 몹시 흥분이 된다.
[명희] 그러니까요.
[마님] 우릴 기다리지 말아라. 바로 올라가 자도록 해라. (갑자기 자명종을 본다.) 그런데--- 저건, 저게 왜 여기 있니? 어디 있던 거지?
[명희] (몹시 난처한 듯) 자명종 말씀이세요? 부엌에 있던 거예요.
[마님] 저게? 난 한번도 못 봤는데.
[명희] (자명종을 지으며) 선반 위에 있었어요. 옛날부터요.
[마님] (미소지으며) 그래, 부엌은 내게는 낯선 곳이다. 부엌은 너희들의 집이지. 그것은 너희들의 영역이야. 거기선 너희들이 왕이다. 그런데 왜 여기다 갖다 놨니?
[명희] 언니가 청소를 하느라고 가져 왔어요. 괘종시계를 못 믿거든요.
[마님] (미소지으며) 정말 정확한 아이로구나. 난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하녀들의 시중을 받는 거야.
[명희] 저희는 마님을 사랑해요.
[마님] (창문 쪽으로 향하며)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너희들에게 안 해준 게 있니? (마님은 나간다)
[마님의 목소리] (무대 뒤에서) 저 소릴 들어 봐라! 들어 봐! 택시다, 택시가 오고 있다. 그렇지? 뭐라고 하는 거니?
[명희] (아주 큰 소리로) 마님께서 베풀어주신 친절을 외우고 있다고요.
[마님] (미소를 띤 채 들어오며) 영광이로구나! 영광이야--- 그런데 좀 소홀한 것 같구나. (손으로 가구를 문지르며.) 장미꽃은 갖다 놓으면서 가구는 닦지 않으니 말이다.
[명희] 저희가 시중을 잘못 들었나 보군요.
[마님] 괜찮아, 아주 좋다. 명희야, 난 가야겠다.
[명희] 커피가 식었지만 조금이라도 드세요.
[마님] (웃으며, 명희에게 몸을 구부리며) 넌 커피와 꽃과 충고로 나를 죽일 생각이구나. 오늘 밤 난---
[명희] (애원하듯) 조금이라도---
[마님] 오늘 밤 난 샴페인을 마실 거다. (마님은 커피 접시 쪽으로 간다. 명희도 천천히 그 쪽으로 간다.) 커피! 연회용 찻잔에 따랐구나! 엄숙한데!
[명희] 마님---
[마님] 이 꽃들을 치우거라. 너의 방에 가져 가. 그리고 쉬어라. (나갈 것처럼 돌아선다.) 그이가 풀려났다! 명희야! 그이가 풀려났어, 난 그이를 만나러 간다.
[명희] 마님.
[마님] 마님은 도망간다! 이 꽃들을 올려 가거라! (마님이 나가고 쾅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명희] (혼자 남아) 마님은 착해요! 마님은 아름다워요! 마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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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해요. 우린 마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아요. 우린 절대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아요. 마님 앞에서 우린 서로 반말을 하지도 않아요. 그처럼 마님의 친절은 우릴 죽이고, 마님의 호의는 우릴 중독 시켜요. 마님은 착해요! 마님은 아름다워요! 마님은 친절해요! 마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가 자신의 욕조에서 목욕하는 걸 허락해요. 마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케익을 주기도 해요. 마님은 우리에게 시든 꽃을 넘겨줘요. 마님은 우리에게 커피를 타 주기도 해요. 마님은 나리 얘기로 우릴 감동시켜요. 마님은 착해요! 마님은 아름다워요! 마님은 친절해요!
[선희] (들어오자마자) 안 마셨니?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다. 잘 했구나.
[명희] 언니라도 별 수 없었을 걸.
[선희] 날 비웃더니. 마님은 도망갔어.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갔어. 어떻게 그 여잘 놓칠 수가 있니? 마님은 나리를 만나서 모든 걸 알게 될 거다. 우린 다 틀렸다.
[명희] 날 욕하진 마. 난 커피에 수면제를 탔어. 그런데 마님이 안 마신 거야. 내 잘못은---
[선희] 넌 항상 그래.
[명희] --- 목이 간질간질했지? 나리의 석방 소식을 알리고 싶어서 말야.
[선희] 그 얘긴 네 입에서 먼저 나왔어---
[명희] 하지만 끝까지 다 말한 건 언니야.
[선희] 나도 할만큼은 했어. 어떻게든지 말을 안 하려고--- 나한테 덮어씌울 생각은 마. 난 모든 일이 성공하도록 애썼어. 너한테 시간을 주려고 계단도 아주 천천히 내려갔고, 택시도 제일 한산한 길로 잡으러 나갔어. 그런데 택시가 너무도 많더구나. 나로선 어쩔 수가 없었어. 얼떨결에 택시를 잡았지. 어쨌든 난 시간을 끌었어. 그런데 그 동안 너 일을 다 망쳤어. 넌 마님을 놓쳤어.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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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물건을 챙겨서--- 도망치자---
[명희] 다 소용없어. 우린 저주받았어.
[선희] 저주!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명희] 언니도 알잖아. 모든 물건이 우리를 저버려.
[선희] 아니, 물건들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다.
[명희] 아냐, 틀림없어. 물건들은 우릴 배반해. 물건들은 악착같이 우릴 고발해. 마치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듯이 말야. 하마터면 마님한테 다 들킬 뻔했어. 전화가 우릴 배반했고, 그 다음엔 우리 입술이 우릴 배반했어. 언닌 다 못 봤지? 난 다 봤어. 마님은 하나하나 발견해 내고 있어. 하나하나 밝혀내고 있어. 아직까지 확실히 깨달은 건 없지만 거의 다 찾아냈어.
[선희] 그런데도 마님을 보내 주다니!
[명희] 언니, 마님은 우리가 제 자리에 갖다놓지 않은 자명종도 보았고, 우리가 경대 위에 꺼내놓은 분첩도 보았고, 내 뺨에 남아있는 연지 자국도 보았고, 우리가 탐정소설을 읽는 것도 알아냈어. 그렇게 하나하나 발각이 나는데 나 혼자 그 충격을 견뎌야 했어. 나 혼자 우리가 침몰하는 걸 봐야 했단 말야.
[선희] 떠나자. 우리 옷을 챙겨서 도망치자. 빨리, 빨리, 명희야---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선희] 이렇게 걱정만 하면서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니. 내일이면 그 두 사람이 돌아온다. 편지의 출처를 알아낼 거야.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모든 걸! 그 여자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알아? 넌 못봤지? 계단을 내려가던 그 모습! 승리자의 걸음걸이! 그 끔찍한 행복을 못 봤지? 마님의 환희는 우리의 치욕이다. 마님의 승리는 붉게 물든 우리의 치욕이다. 마님의 드레스도 붉게 물든 우리의 치욕이다. 마님의 모피도--- 흥, 모피도 다시 가져갔구나.
[명희] 난 지쳤어!
[선희] 한탄을 하실 때가 됐어요. 아주 적당할 때 고상해지시는군요.
[명희] 너무 지쳤어.
[선희] 마님에겐 죄가 없지만 하녀들은 죄인이죠. 그건 틀림없어요. 마님이 무죄가 되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만일 제가 마님의 사형 집행을 맡았다면, 난 끝까지 해냈을 거예요.
[명희] 하지만 언니---
[선희] 끝까지! 독약이 든 이 코피를, 마님께서 마시길 거부하신 이 코피를, 강제로 턱을 벌려서라도 삼키게 했을 거예요. 죽기를 거부하시다니요? 제가 그렇게 무릎을 꿇고, 옷자락에 입을 맞추며 두 손 모아 애원했는데도요?
[명희] 끝까지 해 내기가 어려웠어.
[선희] 그래요? 전 마님께서 도저히 살 수 없게 만들었을 거예요. 저한테 오셔서 독약을 달라고 간청하시도록 했을 거예요. 아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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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전 거절했겠죠. 어쨌든 마님께선 사는 게 못 견디게 괴로우셨을거예요.
[명희] 명흰지 선흰지 널 보면 화가 난다. 난 너희들을 구별할 수 없다. 명흰지 선흰지, 어쨌든 널 보면 화가 난다. 널 보면 분노가 치민다. 우리의 불행은 모두 네 탓이기 때문이다.
[선희]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죠. (선희는 관객을 향한 채 자신의 옷 위에 흰 드레스를 입는다.)
[명희] 넌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선희] 미쳤군요! 아니면 취하셨든지. 명희야, 우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어디 정확한 죄명을 대고 싶으면 대 봐.
[명희] 그럼 꾸며내기라도 해야지--- 넌 네게 욕을 하고 싶었지? 자, 망설이지 말아라. 내 얼굴에다 침을 뱉어라. 내게 쓰레기를 끼얹어라.
[선희] (돌아서며, 마님의 드레스를 입은 명희를 보며) 마님은 아름다워요!
[명희] 앞부분의 격식은 빼 버려라. 벌써 오래 전에 넌 변신을 위한 거짓말과 망설임을 무용 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빨리, 응, 빨리 해. 난 더 이상 수치와 모욕을 참을 수가 없어. 남들이 우리 얘길 엿듣고, 우릴 비웃고, 우릴 미친년이나 질투쟁이 취급을 하겠지만, 난 기뻐서 온 몸이 떨려, 난 기쁨에 전율한다, 명희야, 난 환희에 넘쳐 소리를 지를 테다.
[선희] 마님은 아름다워요!
[명희] 욕부터 시작해.
[선희] 마님은 아름다워요.
[명희] 넘어가. 서곡은 넘어가. 욕부터 시작해.
[선희] 마님은 눈부셔요. 정말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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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욕부터 하라니까. 내가 찬사나 듣기 위해 다시 이 옷을 입은 줄 아느냐? 내게 증오와 욕설을 퍼부어라. 내게 침을 뱉으란 말이다.
[선희] 좀 도와주세요.
[명희] 난 하인들이 싫다. 난 그 천하고 추악한 족속을 싫어한다. 하인들은 인간에 속하지 못한다. 그들은 흘러 다닌다. 그들은 우리의 방과 복도를 흘러 다니는 악취이다. 우리에게 스며드는, 우리의 입으로 스며들어 우리를 부패시키는 악취이다. 난 널 보면 구역질이 난다. (선희는 창가로 가려는 몸짓을 한다.) 그냥 있어.
[선희] 화가 솟는다. 솟아오른다---
[명희] (계속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물론 장의사나 청소부나 경찰관이 필요하듯이, 하인들 또한 필요하다. 나도 그건 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다 악취만을 풍겨댄다.
[선희] 계속해요. 계속해요.
[명희] 불안과 회환으로 가득 찬 너희들의 낯짝, 주름으로 뒤덮인 너희들의 팔꿈치, 유행에 맞지 않는 너희들의 옷차림, 우리의 헌 옷을 주워 입는 너희들의 몸뚱아리. 너희들은 우리의 비뚤어진 거울이고, 우리의 수채통 마개다. 너희들은 우리의 치욕이고, 우리의 술찌끼다.
[선희] 계속해요. 계속해요.
[명희] 이젠 할 말이 없어. 빨리 해, 제발. 너희들은--- 너희들은--- 미치겠네, 없어, 생각이 안 나. 욕설도 바닥이 났어. 명희야, 넌 날 고갈시키는구나!
[선희] 밖으로 나가겠어요. 붙잡지 마세요. 온 세상에 대고 우리 얘길 하는 거야. 모두들 창문으로 우릴 내다보고, 모두들 우리 얘길 듣도록 말야. (선희는 창문을 연다. 명희는 선희를 방안으로 끌어당긴다.)
[명희] 앞집 사람들이 우릴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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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벌써 발코니에 나가서) 봐야 돼. 기분이 좋구나. 아주 자극적인 바람이야!
[명희] 언니! 언니! 나랑 같이 있어. 들어와!
[선희] 이젠 됐다. 감정이 끓어오른다. 마님의 비둘기, 비둘기의 노래 소리, 마님의 애인들, 마님의 두부장수, 모두가 마님 거였지.
[명희] 언니---
[선희] 조용! 마님의 두부 장수, 여명을 헤치며 마님을 찾아오는 새벽의 사자, 마님의 새벽을 울리는 감미로운 종소리, 창백하고 매혹적인 마님의 정부, 이젠 다 끝이야. 무도회를 위해 모두 제자리로.
[명희] 뭘 하는거야?
[선희] (엄숙하게) 순환의 고리를 끊는 거야. 무릎을 꿇어!
[명희] 그만 둬, 너무 지나쳐!
[선희] 무릎을 꿇어! 난 내 운명이 뭔지 알아.
[명희] 날 죽인단 말이냐?
[선희] (명희에게 다가가며) 물론이지. 난 정말 덕분에 용감해졌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아! 우린 저주받았어!
[명희] 그만 해.
[선희] 이제 마님은 죄를 짓지 않아도 돼요.
[명희] 언니!
[선희] 꼼짝 말아요! 잘 들어요. 마님은 그 여잘 놓쳤어요. 마님이 놓쳤어요. 아! 그 여자에게 나의 이 모든 증오를 퍼붓지 못하다니! 우리의 이 모든 분노를 보여주지 못 하다니! 네가, 비겁한 네가, 바보 같은 네가 놓아준 거야. 지금 그 여잔 샴폐인을 마시겠지! 꼼짝 말아요! 꼼짝 말아요! 죽음이 다가와서 우릴 노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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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난 나갈래.
[선희] 꼼짝 말아요. 내 동생을 해방시켜 주고 동시에 나를 죽음으로 인도해 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과 그럴 만한 용기를 찾아내겠어요. 물론 마님과 함께 말예요.
[명희] 뭘 하려는 거야?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선희] (일종의 명령처럼) 명희, 제발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
[명희] 언니, 여기서 끝내. 못 견디겠어. 날 놓아 줘.
[선희] 난 혼자서. 혼자서라도 계속하겠다. 꼼짝 말아요. 이렇게 훌륭한 방법이 있는 걸 아셨더라면, 아마 마님을 놓치진 않으셨겠죠. (명희에게 다가가며.) 하지만 이번에는 이 비겁한 계집애와 끝장을 내고 말겠어.
[명희] 언니! 언니! 사람 살려!
[선희]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질러요! 자, 어서 최후의 비명을 지르세요, 마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명희를 민다) 드디어 죽었군! 마님은 죽었어.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고무 장갑에 목이 졸려서. 마님은 일어나 앉아도 돼요. 마님은 나를 선희 아씨라고 불러도 돼요. 당연하죠. 난 그만한 일을 했으니까요. 마님과 나리는 나를 선희 아씨라고 부르게 될 거에요--- 마님은 그 검은 드레스를 벗었어야 돼요. 그건 우스꽝스러워요. (마님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내 하녀가 죽었어요. 그래 할 수없이 상복을 입었죠. 묘지를 나오려는데 이 동네 하인들이 죄다 몰려와 제게 인사하면 조의를 표하더군요. 제가 마치 죽은 아이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예요. 물론 그 애한테 우린 한 가족이라는 얘기야 자주 했죠. 그런데 그 애가 죽으니까 그 농담이 진담이 돼 버린 거에요. 오! 마님--- 난 이제 마님과 동등해요. 난 이제 고개를 들고 걸어요--- (웃는다.) 아니오, 검사님, 아녜요--- 검사님은 내가 어떻게 했는지 하나도 모를 거에요. 이살인이 우리의 합작품이라는 것도 모를 거고, 우리가 서로 협조했다는 것도 모를 거에요--- 옷이요? 그건 마님이나 가지세요. 우리한테도 우리 옷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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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내가 밤마다 남몰래 입던 옷 말에요. 이제 나에게는 내 옷이 있어요. 이제 난 마님과 동등해요. 이제 난 살인범들의 붉은 옷을 입었어요. 내가 나리를 웃긴다고요? 내가 나리를 미소짓게 한다고요? 내가 미쳤다고요? 예의바른 하녀들은 마님의 못짓을 흉내내지 않는다고요? 그런데도 절 용서하신다고요? 친절도 하셔라. 나와 경쟁을 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누가 더 위대한 지 말예요. 하지만 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위대성을 쟁취했어요--- 마님은 나의 고독을 알아차렸군요. 그래요. 난 이제 혼자예요. 난 무서운 여자예요. 마님한테 가혹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어요--- 마님은 공포에서 벗어나게 될 거에요. 분명히 벗어나게 될 거에요. 마님의 꽃과 향수와 드레스에 파묻혀서 말예요. 음악회에 가던 날 밤 마님께서 입으셨던 하얀 드레스. 내가 항상 못 입게 말렸던 하얀 드레스에 파묻혀서, 또 마님의 보석들과 마님의 애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예요. 난 동생이 있어요. 그래요, 자신있게 그 얘길 할 수 있어요. 자신있게요, 마님. 난 이제 뭐든지 자신있어요. 도대체 누가 내 입을 막을 수 있겠어요? 감히 누가 날 '얘야' 하고 부를 수 있겠어요? 난 시중을 들었어요. 시중을 드는데 알맞은 몸짓을 했어요. 난 마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난 내 몸을 굽혔어요. 침대를 정리하느라, 유리창을 닦느라, 야채를 다듬느라, 문에서 엿듣느라,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닥 대느라 내 몸을 굽혔어요. 하지만 이제 난 내 몸을 똑바로 세워요. 꼿꼿하게 세워요. 난 목을 졸라 죽인 살인자예요. 선희 아씨. 자기 동생의 목을 조를 살인녀! 마님은 정말로 섬세해요. 하지만 난 마님을 동정해요. 마님의 창백함과 마님의 비단같은 피부를 동정하고, 마님의 조그만 두 귀와 마님의 갸냘픈 두 손목을 동정해요--- 난 검은 암탉이예요. 내겐 재판관들이 있어요. 난 경찰에 딸려 있어요. 명희요? 그 애는 정말 마님을 무지무지 사랑했지요!--- 아니오, 검사님, 저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겠어요. 이건 우리들만의 일이니까요--- 명희야, 우리들의 밤이다!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여 서틀게 피운다.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한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이 번에는 선희가 끝까지 해 냈다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모를 거에요. 선희가 붉은 옷을 입은 게 보이죠? 선희가 밖으로 나가는 게 보이죠? (선희는 창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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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로 나간다. 선희는 다음 독백을 객석에 등을 돌린 채 어둠을 향해 할 것이다. 가벼운 바람에 커어튼이 나부낀다) 나간다. 선희는 경찰의 호위 속에 커다란 계단을 내려간다. 모두들 나와서 검은 옷의 속죄자들과 함께 걸어가는 선희를 보시오. 낮 열두시. 선희는 열근이나 되는 횃불을 들고 있다. 선희의 옆에는 망나니가 따르고 있다. 망나니는 선희의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명희야, 망나니가 나를 호위하는 거야. 망나니가 나와 동행한단 말야. (선희는 웃는다) 명희가 마지막 길을 갈 때 모였던 동네 모든 하녀들과 모든 하인들이 줄을 지어 선희를 호위한다. (선희는 밖을 내다본다) 모두 왕관과 꽃다발과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애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화려한 장례식이 거행된다. 아름답다 그렇지? 맨 먼저 청지기들이 청지기 차림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왕관을 쓰고 있다. 다음엔 하인들이 하인 차림으로 들어온다. 그들도 모두 그들의 왕관을 쓰고 있다. 다음엔 하녀들이 들어온다. 그들의 옷은 우리들의 색깔이다. 다음엔 간수들과 하늘의 사절단이 들어온다. 난 그들 모두를 이끈다. 망나니가 나를 어르며 달랜다. 모두가 내게 환호를 보낸다. 난 핏기를 잃고죽어간다. (선희는 들어온다) 꽃도 많기도 하구나!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그렇지? 명희야! (선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안락의자에 주저앉는다) 소용없어요, 마님. 난 경찰에게 복종해요. 경찰만이 날 이해해요. 경찰도 버림받은 사람들과 같은 세계에 속해요. (조금 전부터 명희는 부엌 문설주에 팔꿈치를 기대고 언니 얘기를 듣고 있다. 관객석에서만 명희가 보인다.) 이제 우리는 선희 아씨, 선희 아씨 마님이다. 선희 아씨, 선희 아씨. 고명한 살인녀. (지친 듯) 명흐야, 우린 틀렸어.
[명희] (처량하게, 마님의 목소리로) 창문을 닫고 커어튼을 치거라. 됐다.
[선희] 밤이 늦었어. 모두들 잔다. 그만 하자.
[명희]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명희야, 커피를 따르거라.
[선희]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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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따르라니까.
[선희] 피곤해 죽겠다. 그만 하자. (안락의자에 앉는다.)
[명희] 아! 천만에! 넌 내 하녀야. 그처럼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니? 바람과 함께 모의하고, 밤을 공범자로 삼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야.
[선희] 하지만---
[명희] 긴 말 필요 없어. 이 마지막 순간을 내 뜻대로 쓸 테야. 언니, 난 언니 속에 간직 될 거야.
[선희] 명희야, 내가 얼마나 허약한지 몰라서 그러니? 내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안 보여?
[명희] 겁쟁이. 시키는 대로 해. 선희 언니,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러니까 우린 끝까지 가야 돼. 언닌 혼자 남아 우리 두 사람의 생애를 완수해야 돼. 무척 많은 힘이 들 거야. 내가 유배지까지 언니와 함께 동행한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특히 선고를 받을 때 내가 언니 속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언니, 우리는 아름답고 자유롭고 기쁠 거야. 이젠 단 일분도 허비할 시간이 없어. 날 따라해---
[선희] 말해 봐. 조그맣게.
[명희] (기계적으로) 마님, 커피를 드십시오.
[선희] (강하게) 싫어, 못해.
[명희] (선희의 손목을 잡으며) 못된 것! 따라해. 마님, 커피를 드십시오.
[선희] 마님, 코피를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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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 주무셔야 하니까요---
[선희] 주무셔야 하니까요---
[명희] 제가 안 자고 지키겠습니다.
[선희] 제가 안 자고 지키겠습니다.
[명희] (마님의 침대 위에 눕는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방해하지 마. 내 말 알겠어? 시키는 대로 할 거지? (선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커피를 가져오너라!
[선희] (주저하며) 그런데---
[명희] 커피를 가져오라니까.
[선희] 그런데, 마님---
[명희] 좋아. 계속해.
[선희] 그런데, 마님, 코피가 다 식었습니다..
[명희] 그래도 마시겠어. 가져 와. (선희는 쟁반을 가져온다.) 제일 값비싼 고급 찻잔에 따랐군--- (명희는 잔을 들고 마신다. 그러는 사이 선희는 수갑을 찬 모양으로 두 손을 모은채, 관객석을 향해 부동자세를 취한다.)
첫댓글 퍼가요~ 잘 읽겠습니다.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