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김치 같은 것
글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
사랑이 모나더냐, 둥글더냐, 쓰더냐, 달더냐, 길더냐, 짧더냐 하면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랑의 참뜻을 알려고 퍽 애를 써왔다. 요즘 노래에도 사랑을 씁쓸하고 달콤한 것이라느니, 눈물의 씨앗이라느니 하면서 여러 면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말은 15세기에 ‘생각하다’와 ‘사랑하다’의 두 가지 뜻으로 쓰였는데, 지금은 ‘사랑’을 뜻하는 말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한자어인 ‘생각 사(思)’와 ‘부피 량(量)’자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으나 나는 좀 견해를 달리한다. 몽골어와 비교하면 사랑의 어근 ‘살’은 사람의 어근 ‘살’과 일치한다.
즉, 사람과 사랑의 어원은 같다고 하겠다. 사랑이란 사람과의 관계라 하겠으며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게 곧 사랑이 되는 것이다. 몽골에서도 ‘사돈(saton)’은 친척, 애인의 뜻을 지니는데, 그 어근은 ‘삳’이다. ‘사람’의 어근 ‘살’의 옛말이 ‘삳’인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의 척도가 된다 하겠다. 상대방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느냐의 무게가 곧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다’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는 ‘너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녀기다’로 변하고 다시 ‘여기다’로 변하였다. 평안도에서는 지금도 ‘사랑하다’를 ‘너기다’라고 한다. 한편 ‘괴다’라는 말도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상대방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즉, 마음이 상대방에게 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ㄷ.ㅅ 다’라는 말도 ‘사랑하다’의 뜻으로 쓰였는데 ‘따스하다’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사랑이란 따스한 것이지 밍밍하거나 찬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차가워서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듯 옛사람들은 사랑을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생각하는 부피와 마음이 물이 흐르듯 괴는 것으로 보았다. ‘그립다’라는 형용사는 ‘그리다’라는 동사에서 변한 말이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눈으로 그림 그리듯 그린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사랑은 정신적인 면을 값지게 여겼고, 요란스럽지 않고 은근하며 따스하고 회화(繪畵)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사랑이란 김치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15세기 문헌을 보면 ‘김치’라는 말이 ‘딤치’(沈菜)로 나온다. 만약 제대로 구개음화가 되었다면 ‘짐치’가 표준어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짐치’가 ‘김치’에서 변한 말인 줄 알고 ‘김치’를 표준어로 삼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라는 말의 개념이 역사성과는 거리가 먼 향락적인 개념으로 잘못 여겨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김치는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통적인 반찬이다. 아무리 반찬이 좋아도 김치가 없으면 입맛이 덜 나며 먹은 뒤에도 입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는 김치의 재료를 생각해 보자. 배추, 무, 젓갈, 고추, 소금과 마늘, 생강, 갓 등 하나하나의 맛은 맵거나 짜거나 그렇지 않으면 싱겁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알맞게 섞여지고 어머니의 알뜰한 마음씨와 고운 손길을 거쳐 얼마간 독에서 지내는 동안, 각기 다른 맛들이 하나의 맛으로 바뀌어 시원하고, 개운한 김치가 되는 것이다. 살아가노라면 고추같이 맵고, 소금같이 짜고, 싱겁고, 씁쓸하고, 떫은 일들이 잇달아 우리 앞에 부딪쳐 온다.
이렇게 맵고 짜고 싱거운 일을 당하게 될 때 이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이것은 고추, 저것은 소금, 하고 김치 담그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얼마의 기간이 지나 차원을 달리하는 사랑으로 바뀔 것이다. 사랑은 어디서 굴러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니며, 빼앗아 오거나, 꾸어 오거나, 동정으로 얻거나, 사 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김치와 같이 오랜 시일을 두고 이 세상을 다할 때까지 두고두고 각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김치와 같이 만들어진 사랑은 싫증나지 않고 언제나 생활을 싱싱하고 부드럽게 할 것이다.
예로부터 시골에서는 전염병이 돌 때 곰팡이가 뽀얗게 뜬 김칫국물을 마신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익을수록 영양가가 높고 살균력이 강하여 전염병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사랑도 김치처럼 익을수록 영양가가 높고 살균력도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과 아픔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보잘것없는 인생의 여러 곰팡이 같은 일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며, 우리의 생활을 보다 살찌게 할 것이다.
서 정 범 님은 192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경희대 문리과대학 학장, 한국 수필가협회 부회장, 어문연구회 연구이사, 국어어원학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평생 우리말과 민속 문화 연구에 매진해온 님은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한국특수어 연구> <국어어원사전> <일본에서 한국어의 샤머니즘> <일본어의 원류와 한국어> 등이 있습니다. |
첫댓글 이글 늠 좋던데 ^^
사랑이란 김치 같은것 ~ 아 좋다 ^^
월간 마음수련도 김치같아요 ㅋㅋㅋ 알찬것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