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2:18-38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여관을 들렀습니다.
여관을 들러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어 보니까 애굽에서 양식을 살 때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공짜로 양식을 사게 되었습니다.
공짜로 양식을 사게 되면 이것 정말 신나고 좋은 일이지요. 우리나라 말에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슈퍼에서 어떤 물건을 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물건을 비닐봉지에 싸주었는데 집에 와서 비닐봉지를 풀어보니까 돈을 그대로 넣어 놨더라. 이러면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이 웬 횡재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둘째는 양심상 찝찝하니까 다음에 가면 돌려주어야지, 그러면 주인이 나를 멋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이 두 가지 생각을 둘 다 하지 않습니다. 횡재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다음에 가면 돌려주면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고마워하고 정직하다고 좋게 봐 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생각을 가지냐 하면 28절을 보면 혼이 나서 떨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형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35절을 보면 야곱과 그 아들들 모두가 돈뭉치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요셉의 형들과 야곱은 공짜로 생긴 이 돈뭉치를 보고 좋아하거나 기뻐하기는 커녕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슈퍼에서 물건을 샀는데 비닐봉지 안에 돈이 그대로 있다. 만약 그 돈이 적은 돈이면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큰돈이면 돌려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힘듭니다. 그냥 꿀꺽하고 그 가게에 안가고 다른 슈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싶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동네, 아니 자기가 살고 있는 온 나라 안에 슈퍼가 하나 밖에 없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슈퍼에 반드시 가야하는데 슈퍼 주인이 물건은 주면서 돈은 비닐봉지에 넣어 돌려준다. 그런데 슈퍼 주인이 웃으면서 기분 좋게 보내주었다면 주인의 호의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싸우거나 주인과 안 좋은 상태로 슈퍼를 나왔는데 돈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러면 드는 생각이 이 슈퍼 주인이 우리랑 거래를 안 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너희 돈 필요없다. 오지 마라.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가져 간 돈은 분명 적은 돈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야곱의 식솔들이 몇 명이냐? 46장 27절에 보면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때 요셉의 두 아들까지 쳐서 70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서 요셉의 형들이 10명이나 양식을 사러 간 이유가 약 70명의 인원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사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 먹을 양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사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꽤 많은 나귀를 가지고 가서 양식을 사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굉장히 큰 돈을 가지고 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큰 돈을 요셉이 자루에 그대로 넣어준 것입니다. 그것도 일부러 넣어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당시에 지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용카드로 긁을 수도 없고 전부 무게가 나가고 덩치가 있는 화폐였으므로 일부러 다시 자루에 넣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다시 갈 일이 없다면 돈뭉치가 들어 있는 것이 횡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므온은 잡혀 있고 기근은 심해지고 양식은 곧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오직 요셉이 있는 애굽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무조건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마지막으로 애굽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 광경이 어떤 광경입니까? 24절을 보면 시므온을 그들 눈 앞에서 결박당하는 것을 보고 떠나왔습니다. 요셉의 따듯한 마음과 사랑과 정성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엄하게 대하고 무서운 요셉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돈뭉치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 우리 보고 다시 오지 말라는 말인가보다. 우리랑 거래하기 싫다는 이야기인가보다. 우리 돈따위는 필요없다는 생각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은 다시 구하러 가야하고 이런 상황 속에 야곱의 가족들은 돈뭉치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야곱과 그 아들들이 이 돈뭉치 사건을 설명했느냐 하면 과연 요셉이 정말 요셉의 형들보고 두려워하라고 돈을 그대로 돌려주었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단순한 에피소드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가 돈뭉치를 이야기하고 있고 43장에서도 돈뭉치 사건으로 요셉의 형제들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그들에게 돈을 다시 돌려 돌려주었는가?
23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극심한 기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47장에 보면 기근이 심해지자 사람들이 땅 팔고, 집팔고, 재산을 다 팔아 양식을 사 먹습니다. 양식은 없는데 사람들은 이제 돈이 없습니다. 기근이 심해지면 모든 사람이 궁핍해지고 어려워집니다. 요셉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안의 어려움을 막아 주고 도움을 주고자 돈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인도하고 계신데 그것이 오히려 두려움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되는 요셉과 그 형들 사이에 있는 전반적인 오해입니다.
이 이후에도 요셉은 형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셔서 우리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내가 이곳으로 왔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형들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분명 요셉을 통해 온 가족이 굻어 죽을 위기를 넘기고 편안한 삶을 보장을 받는데도 그 두려움과 근심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이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죄와 현실에 대한 염려와 걱정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뭉치가 자루에 다시 들어가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손길임을 몰랐고, 요셉의 총리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 이런 말을 합니다.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도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다친 야생동물들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친 야생동물들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취총을 쏘아서 마취 시킨 후에 치료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들에게 아무리 잘 설명해도 모릅니다. 자기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너희들이 다친 것, 덫에 걸려서 가만히 두면 죽는다고 암만 얘기해도 모릅니다. 자기들을 해치려고 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야생 동물들은 사람들의 말이나 뜻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의 손길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면서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그것을 잊어버렸고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고, 요셉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길을 가면서도, 이러한 선물을 받고서도, 마치 이 돈이 자기들을 죽이려는 음모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앙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의 관심 밖의 일인 것은 없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이 분별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뜻을 알아갑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한다고 하는데도 엉터리가 많습니다. 르우벤은 자기들이 요셉에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요셉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는 것인데 오해합니다. 우리 또한 집에 우환이 생기면 쉽게 ‘십일조 안해서 그래. 교회 빼먹어서 그래’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풀리면 ‘교회생활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너무 쉽게 말합니다. 물론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 접촉사고는 십일조를 안해서 나느냐? 헌금생활 잘 안해서 하나님께서 차 수리비로 빼앗아 가고, 합의금으로 돈을 빼앗아 가기 위해 사고가 나느냐.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돈을 많이 벌면 신앙생활 잘해서 좋은 회사 취업하고 돈을 많이 벌게 되느냐. 그것도 절대 아닙니다. 좋은 회사 취업하고 돈 많이 벌어서 신앙생활 제대로 안하는 수많은 사람을 우리는 봐 왔습니다. 반면 신앙이 정말 훌륭한 사람인데 생활이 변변치 않게 사는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 도식화 시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은 명확합니다. 요셉의 꿈과 형들의 시기와 죄악 그리고 요셉의 고난 이런 것이 엄청나게 엉켜 있는 것이 요셉의 삶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한 순간만을 콕 집어서 요셉의 삶이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삶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의미에 대한 선명하고 분명한 분별력을 지닐 수 있어야 삶이 능력이 있습니다. 폼나는 인생이나 폼나지 않는 인생이나, 화려한 인생이나 화려하지 않은 인생 모두 그들의 삶의 작은 부분에서 큰 부분까지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신비합니다. 그러기에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 이면에 오묘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선명해집니다. 그 삶은 어두움이 붙잡지 못하는 삶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여....
우리의 삶에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간섭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하심을 바른 분별력으로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