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한 얼굴보다 맨얼굴이 더 이쁠 때가 있고
맨얼굴보다 화장한 얼굴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아름다움이란
보이는 피사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전체보다 부분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고
부분보다 전체가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인생살이 희론(戱論)이 많은가 보다.
~현림/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
중랑천이 맑아지면서부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많은 철새가 모여들고 있다.
물속에는 잉어가, 물 위에는 백로, 왜가리, 오리 떼 등이
강변을 산책하는 즐거움에 눈요기를 더하고 있다.
최근에는 보기 드문 가마우지, 비오리 등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지금까지는 그저 왜가리와
백조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가마우지를 알게 되어
궁금증이 나서 이틀간 연속 출사를 나가 보았다.
가마우지는 백로와 달리 깃털이 흰색도 아니고,
원앙이나 청둥오리처럼 아름다운 새도 아니다.
몸 전체가 녹색 광택이 있는 검은색이며
회갈색 부리는 가늘고 길며 윗부리 끝이 아래로 굽어 있어
독수리 부리처럼 생겼다. 부리가 기부에서
눈 아래까지 노란색 피부가 노출돼 있고
부리 기부의 노란색과 때 묻은 듯한
흰색 뺨이 만나는 부분이 각진 형태가
다소 아름다운 면이 있지만 전체 모습이
그리 아름다운 새로 보이지 않는다.
가마우지의 짝짓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가난한 집에 효자 나듯 둔탁한 생김새로 보아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원앙새의 부부애와 달리
짙은 부부애의 의리를 지키는 새로 보인다.
@원앙은 잉꼬부부를 상징하는 새로 불린다.
그래서 원앙을 필조(匹鳥). 배필새라 부르는데
이는 원앙이 번식기 동안은 원앙 부부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행동해서
금실 좋은 다정한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는 새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생태 조류학자들에 의하면
원앙의 수컷은 바람둥이라고 한다,
원앙새의 부부관계는 번식기에만 유지되고
번식기가 끝나면 각자 행동한다고 한다.
수컷은 다시 새로운 짝을 찾아 구애 행동에 들어가며,
암컷도 수컷이 시원찮으면 강한 새끼를 얻기 위해
다른 배우자를 바로 바꾼다고 한다.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검은 호색(好色)으로 영 딴판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를 알았다면 금실 좋은 부부를 원앙에 비유하였을까?
그러나 사람들이 원앙을 금실 좋은 부부로 여기는 것은
눈은 보이는 색(色)에 속고, 귀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속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상품을 포장하는 포장지와 같다.
사람들은 호(好), 불호(不好)는 내용물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을 싸고 있는 포장지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은
안이 아니라 밖의 포장지를 보는 것이다.
무봉대(無縫袋) 그 포장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겠는가?
원앙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 있다. 청둥오리다.
암컷과 달리 수컷 청둥오리도 원앙만큼 아름다운 새다.
일반적으로 청둥오리는 번식기가 될 때까지는
지조 있게 일부일처제를 이루어 번식한다.
하지만 때로는 짝이 있는 수컷은 자기 암컷에 개의치 않고
다른 암컷과 마음 내키는 대로 짝짓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같은 행동을 ‘extra-pair copulations’라고 한다.
그래서 수컷 청둥오리를 호색 방지한 새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비해 못생겨도 의리는 지키는 새가 있다.
기러기다. 기러기는 사랑의 약속을 영원히 지키는 새다.
보통 수명이 15~20년인데, 짝을 잃으면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한다.
열녀문(烈女門)을 세운다면 단연 일등이 아닐까.
의리를 지키는 동물을 말한다면 늑대를 꼽을 수 있다.
늑대는 모습도 험악하여 무서운 동물로 혐오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늑대는 한 무리의 리드가 되어서도 평생 한 암컷만을 사랑하며,
굶주려 사냥할 때라도 자기가 먼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암컷과 새끼들에게 먼저 가져가 먹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암컷과 새끼들이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경계를 서다가 나중에야 남은 것을 같이 먹는다고 한다.
개는 반려견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자기 밥그릇이 침범당하면
주인이라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지만 늑대는 그렇지 않다.
또한 위험이 닥치면 자기 암컷과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라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암컷과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위험이 닥치면 인간들처럼 자기 살 궁리만 찾는 것이 아니라
닥친 위험을 피하지 않고 침략자를 유인하여
홀로 희생할 줄도 아는 부성애와 지도자의 덕목을 갖춘
의리가 깊은 동물이 바로 늑대다.
밖은 검어도 안은 흰 동물이다.
가마우지류도 집단으로 번식하고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회성이 높은 새로 알려져 있다.
둥지는 주로 무인도의 바위 절벽에 마른풀이나
해조류를 이용해 만든다고 하는데 중랑천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내가 본 가마우지는 늘 같은 장소에
두 마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놈이 암컷이고 수컷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앙이나 청둥오리처럼 딱 붙어 다니지 않고 항상
둘 사이에 조금 거리를 두고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겸양과 의리 절제가 있어 보인다.
강변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니 다른 새와 달리
암컷과 수컷이 먹이를 두고 서로 다투는 일도 없고
또 애정 표현도 원앙이나 청둥오리처럼
그렇게 요란을 떠는 새는 아닌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가마우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도 있다.
일본에서는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씹지도 않고 그대로 꿀꺽 삼키는
그것에 빗대서 어떤 말이나 사상 등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노미(鵜呑み)라고 하는데
<우>는 가마우지를 말하고, <노미>는 삼킨다는 말이다.
사실 새들은 기본적으로 이빨이 없어서
음식을 씹어 먹지 못하고 통째로 삼킨다.
가마우지도 마찬가지다.
가마우지는 유독 목구멍이 유연해 꽤 큰 물고기도
통째로 무리 없이 삼키기 때문에
비판 없이 무언가를 꿀꺽 삼키듯 수용하는 모습을
가마우지에 빗대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상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그릇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르다 해도 오를 수 있다.
세상의 소리는 허상(虛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말과 글이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세속의 도리란 모두 말이나 글에 의존하고 있다.
한 여자의 말은 독백이 되지만
둘이 말하면 카탈로그가 된다는 속어가 있다.
세 사람이 모이면 개도 호랑이가 된다는
“삼자성호”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할구폐로총(瞎狗吠蘆叢) 맹인창적호(盲人唱賊虎)”라 비유한다.
외눈박이 개가 갈대를 보고 짖으니
눈먼 사람은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친다는 의미다.
선악(善惡), 시비(是非), 호(好)불호(不好), 증오(憎惡)는
보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흰 것이 검은 것이 되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바뀌게 된다.
주체도 객체도 실체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인연 따라 생하고 인연 따라 멸하는 것을
내 마음이 지어낸 허상인 말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에 의해 더해지고 덜해지는 것이다.
옳다고 여겨 10가지 말을 만들어 내다가도,
그르다고 여겨지면 금방 100가지 이유를 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순경(順境)에는 웃다가 역경(逆境)에는 화를 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돌변하여 말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다.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으로 나뉘고,
시(是)와 비(非), 선악(善惡) 미추(美醜)로 흘러간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말 많이 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들은 것이 많기 때문에 아만(我慢)하며 방일(放逸)할 것이요,
말에 대해 사유(思惟)하고는 마땅히 물들어 집착할 것이요,
마땅히 본래의 생각을 잃어버려 자기의 바른 생각이 없을 것이요,
하는 바의 일은 마땅히 바르지 못할 것이요,
위의(威儀)는 몸과 마음을 능히 조복하지 못할 것이요,
행할 바의 곳에서는 몸이 두루 바르지 못할 것이요,
법인(法忍)을 잃어버렸기에 몸과 마음이 굳세고 강하여
돌이키고 굴복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發覺淨心經)
말은 신의(信義)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는 진심(眞心)에서 나옵니다.
진심은 한 마음입니다.
한 마음에서 선악(善惡) 시비(是非) 애증(愛憎)이 생깁니다.
한 마음은 본래 부동입니다. 상(像)에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말은 상(像)을 따라갑니다. 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아야 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鸆: 사다새 우. 일본어로는 제(鵜)(ぅ), 한자어 치(雉)의 고자(古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