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0. 09. 20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6호 | 20100307 입력
때로는 이념이 총칼보다 강하다. 사회의 불신이 팽배한 주류 집단을 공격하는 세력은 중간파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공신 집단은 정치·경제적 권력을 독점했지만 전횡과 부패 때문에 명분과 인심을 잃었고 그 공간을 사림이 차지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의 사림이 공신 집단과의 투쟁을 선악의 싸움으로 생각하면서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이목 사당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김종직의 문인인 이목은 성종 때 사림의 선봉장이었으나 연산군 때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절반의 성공 성종
⑤ 압구정 사건
사림들은 성리학의 대의(大義)와 의리(義理) 같은 명분론을 중시했다.
수양의 즉위를 찬(簒: 신하가 왕위를 빼앗는 것)으로, 단종의 죽음을 시(弑: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로 보았으니 공신 집단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었다.
이념 지향성을 갖고 있던 사림에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인물도 적지 않았다.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이 그런 인물이었다.
효령대군은 세조의 즉위를 지지한 대가로 막대한 이권을 챙겼는데 증손자는 거꾸로 사림이 된 것이다.
성종 9년(1478) 4월 이심원은 ‘세조조의 훈신(勳臣)을 쓰지 말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세조 때 형성된 공신 집단을 벼슬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대담한 상소였다.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은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모름지기 옛 신하[耆舊]를 써야 한다고 여겨집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무렵 도승지 임사홍은 사림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는데, 이심원과는 사돈 사이였다.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아들이자 이심원의 할아버지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였다.
<1> 이심원 정려(旌閭)현판 충남 계룡시 금암면에 있다.
효령대군의 증손자였던 이심원은 사돈인 임사홍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연산군 때 사형 당했으나 사림이 집권하면서 신원 되었다.
<2> 이심원에게 내린 시호 조선 후기 고종 때의 것이다.
그 무렵 흙비(土雨)가 내렸는데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군주는 하늘의 견책으로 생각하며 수성(修省)해야 했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은 “예로부터 천지의 재변은 운수(運數)에 있으니 운성(隕星: 별똥)도 역시 운수며 지금의 흙비도 때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이지 어찌 재변이겠습니까?”라면서 하늘의 경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양관(兩館: 홍문관·사간원)의 관원 20여 명이 “임사홍이 말한 바는 모두 옛 간신의 말”이라고 공격해 큰 소동이 벌어졌다.
성종은 임사홍의 고신(告身: 관직임명장)을 거두고 양관(兩館)의 관원 20여 명도 파직시키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자 이심원이 성종에게 친계(親啓: 직접 만나 아룀)를 요구해, “임사홍은 신의 숙모부(叔母夫)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참으로 소인입니다···양관의 선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성종실록』 9년 4월 29일)”라고 사림의 편을 들었다. 성종은 당초 “네가 이를 위해 왔느냐?”라며 크게 화를 냈다.
조선 같은 사회에서 사돈을 공격하는 것이 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사홍 부자가 치부(致富)한 정상이 드러나면서 이심원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심원은 자신의 부친이 이 일을 알면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할 것이라면서 “신이 나라를 위해 어버이를 잊었으니 진실로 낭패입니다”고 통곡했다.
임사홍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이심원도 부친에게 불효죄로 고발당해 제사권과 장자권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강원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성종 12년(1481)에는 압구정(鴨鷗亭)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6월 24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는 성종에게 “명나라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보려고 하는데 정자가 매우 좁으니 만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성종은 승지를 사신에게 보내 “압구정은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명 사신은 “압구정이 비록 좁더라도 가보겠다”라고 우겼다.
세조가 쿠데타를 추인받기 위해 명에 저자세 외교를 하고 난 후 명 사신의 위세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공신 집단은 명 사신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심지어 한명회는 명 황제에게도 뇌물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때 가뭄에 우박이 겹쳐 조정은 그 대책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성종은 기우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논의하는 한편 명 사신 접대를 위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소주(燒酒)와 어육(魚肉)을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으로 보내야 했다. 한명회는 압구정이 좁아서 잔치할 수 없다고 말한 다음날인 6월 25일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명회가 아침에 명 사신을 찾아갔더니 자꾸 권유해 주반(晝飯: 점심)을 함께했다면서 압구정 잔치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명 사신이 “얼굴에 난 종기가 낫지 않았으므로 (내일 압구정에) 갈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나가 놀면서 구경하면 병도 나을 텐데 하필 답답하게 객관(客館: 태평관)에 오래 있겠습니까?”라고 청했더니 상사(上使)가 “마땅히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성종실록』 12년 6월 25일)」
명 사신이 안 가겠다는 것을 자신이 권유해 오도록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한명회는 “신의 정자가 본래 좁은데 지금 더울 때를 맞이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사(該司: 해당 부서)에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대막(大幕: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오지 않겠다는 사신을 억지로 초청해 놓고 정부에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성종은 “경(卿)이 이미 명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해 놓고 이제 다시 무엇을 혐(嫌)하는가?
정자가 좁다면 당연히 제천정(濟川亭)에 차려야 할 것이다”고 전교했다. 성종은 하지 않아도 될 잔치를 하게 만든 한명회에게 화가 나서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치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성종의 전교를 무시하고 왕실의 보첨만(補簷幔=처마를 잇대는 장막)을 내려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성종은 “지금 큰 가뭄을 당하였으므로 뜻대로 유관(遊觀)할 수 없다”면서 “내 뜻은 이 정자는 마땅히 헐어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사신이 귀국해 정자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하면 뒤의 사신이 모두 다 유관하려 할 것이니 폐단을 여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성종은 “또 강가에 정자를 꾸며서 유관하는 곳으로 삼은 자가 많다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도 비판했다.
성종은 명 사신들이 이미 아는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겠다고 덧붙였다. 성종의 결정에 반발한 한명회는 자제를 보내서 항의했다.
“신은 정자는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숙질(宿疾)이 있는데 지금 병이 더하므로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비록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갈 수 없을 듯합니다.” 압구정이 아닌 잔치에는 가지 않겠다는 항변이었다. 승지들은 신하의 예가 없다면서 국문(鞠問)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명회는 변명에 나섰다.
성종은 “정승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정승이 잘못했다”라고 단정지었다.
성종은 곧 사헌부에 한명회의 “무례가 막심하다”면서 “추국(推鞫)해서 아뢰라”고 추가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사헌부는 불러서 묻지 않고 서면으로 질문하는 공함(公緘)으로 조사했다. 사간원에서는 “마땅히 조옥(詔獄: 의금부 감옥)에 내려 그 사유를 취조해야 하는데 지금 편안히 집에 앉아 공함으로만 물으니 매우 미편(未便)합니다”고 항의했다.
성종은 “이미 사헌부에 추국을 명했으니 의금부로 옮길 수 없다”라며 투옥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7월 1일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상을 보고하자 성종은 “죄는 크지만 여러 조정의 원훈(元勳)이고 나에게도 구은(舊恩)이 있으니 다만 직첩(職牒)을 거두고 성 밖에 부처(付處: 주거지 한정)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면서 의정부의 견해를 물으라고 말했다. 구은이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은혜를 뜻한 것이다.
의정부는 ‘대체로 직첩은 거두되 부처는 면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고 성종은 그대로 따랐다.
비록 부처는 면했지만 한명회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드디어 성종 18년 한명회와 정창손이 세상을 뜨면서 세조 때의 원상들이 모두 사망했다.
그러자 적개 1등공신이자 좌리 4등공신인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공신 집단의 대표로 부상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가 윤필상의 당숙(堂叔)이므로 국왕의 인척이기도 했다.
성종 23년 12월 이목(李穆) 등 성균관 유생들이 “나라 사람들이 윤필상을 ‘간사한 귀신(奸鬼)’이라고 지목하는데 전하께서만 홀로 충성스럽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라면서 윤필상 공격에 나섰다.
이 무렵 모후 인수대비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윤필상 등이 동조한 것이 원인이었다.
성종은 화를 내면서 “수상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니 간사한 귀신이라는 정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라”고 꾸짖었다.
이 무렵 사림은 구체적인 증거보다는 유학에 비추어 간신이라는 식으로 대신들을 공격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종은 이목 등 8명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목을 제외하고 석방했으나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대간의 간쟁이 잇따르면서 이목도 석방시켰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 중 어느 한쪽을 붕괴시킬 생각은 없었다.
성종이 보기에 훈구세력은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반면 사림은 일체의 부정을 용납 않는 도덕성이 있었다.
성종은 양자를 적절히 활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양자의 이런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연산군이 즉위한 후 공신들이 사림을 공격한 것이 사화(士禍)다. 그 과정에서 이목과 이심원이 사형당한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조용히 힘 키운 성종, 왕명 거스른 한명회 축출|작성자 미친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