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문헌서원(文獻書院)은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는 서원으로, 1594년(선조 27)에 지방의 유림들이 이곡(李穀,1298~1351)과 이색(李穡,1328~1396) 부자(父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세웠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610년(광해군 2) 고촌에다 복원하였으며, 1611년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종학(李種學), 이개(李塏,1417~1456), 이자(李耔,1480~1533)를 추가로 모셨다가 1871년(고종 8)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 유림들이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여 이종덕(李種德)을 추가로 모셨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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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書院記 - 李恒福,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維昔武王伐紂。周召贊業。而伯夷採薇於西山。光武受命。耿賈收功。而子陵垂釣於滄波。不事匪躬。士各有志。何可以一例觀也。然而孤竹淸風。軼十亂而無讓。桐江奇節。駕雲臺而有光。何哉。抑隱者反顯而達者反窮歟。將隱顯窮達。只係於身。不係於名歟。或総之關天。而都不在於身與名歟。天意若曰樹風節於周朝者。須商家之遺老。傲至尊而無懼者。必微時之故人。故不食周粟。卧動星象。以立其義。以成其高。雖云效節於前朝。實亦垂敎於新國。則後之聞風者。如劉萇二老之義。黨錮諸賢之節。咸有所自而爲周漢不拔之鞏基。若是則或隱或顯。迹雖不同。而立德詔後。均之爲益國則一也。是宜序十倫而居貳。配五祀而並美。位在西學。享榮食報者。其誰曰不然也。洪惟我聖祖應天握圖。堯傳舜受。時則有若牧隱李公。揖千乘而長往者。故人加足之高也。視一死猶脫屣者。遺老餓死之義也。朝鮮號多烈士。凡有大危難。爲士者擧皆知熊魚取舍之分。輒守義而不顧者。是誰之所自。而當立德垂敎之功。視古人孰爲重輕哉。今按譜籙。稼亭文孝公生牧隱文靖公。牧隱文靖公生麟齋公。又五世而有陰崖公。大家長德。譜不絶書。世言韓山多君子。信哉。牧隱葬在韓山郡西麒麟山下。李尙書誠中爲郡時。立廟於墓下。扁曰文獻。壬辰之亂。擧爲灰燼。在今薦紳之間柯葉所布。有可以紹德承家者。曰左議政公德馨。吏部右侍郞公德泂。相與圖所以起廢重新。移建於郡西舊宅之基。於是稼亭公以序。牧隱公以德。背北面南。各專其尊。麟齋,陰崖。亦紹厥緖。分配東西。父子曁孫。承繼益顯。德行文章。粤自家傳。以實以華。孰與高下。院旣立。李侍郞托記於余。余曰。昔范武子以世祿不朽。取譏於穆叔。若此者流。眞不朽矣。抑余亦有托於吾子矣。今二君者。能新祖廟。儘知尊祖敬宗之義。雖然。光前而顯祖者。盡於此而已乎。爲後孫而志于道者。死而不登于斯堂。命之曰忝祖。吾不取也。侍郞作而曰。不敢。敢不勉。遂爲記。
白沙先生集卷之二 / 記 / 文獻書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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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武王 : 주(周) 무왕(武王).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周、召 : 주공과 소공 석. 무왕을 도와 왕업을 완성하였다.
◇伯夷採薇 :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고사.
◇光武 : 광무제.
◇耿、賈 : 경감과 가복.
◇子陵 : 엄광. 광무제의 옛 친구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十亂 : 주나라 창업에 공을 세운 열 명의 공신.
◇雲臺 : 광무제가 공신의 초상을 그리게 한 운대(雲臺). 후한 개국공신을 상징한다.
◇卧動星象 : 엄광이 광무제와 함께 누워 황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렸다는 고사.
◇劉萇二老 : 한나라 초 절의를 지킨 두 노인에 관한 고사.
◇黨錮諸賢 : 후한 말 당고의 화 때 절의를 굽히지 않은 선비들.
◇十倫(십륜) : 유교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한 열 가지 윤리. 여기서는 제향의 위차(位次)를 논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五祀(오사) : 국가 또는 향촌에서 지내던 다섯 제사. 문묘와 향사(享祀)의 제도적 권위를 비유한다.
◇西學 : 서원의 서재(西廡) 또는 문묘의 배향 위치를 가리킨다.
◇揖千乘而長往 : 천승(千乘)의 군주에게 읍하고 영영 떠났다는 뜻으로, 이색의 절의를 백이와 엄광에 견주어 찬양한 표현이다.
◇故人加足 : 엄광이 광무제와 함께 잠들며 황제의 배 위에 발을 올렸다는 고사.
◇熊魚取舍 : 맹자「고자(告子)」의 '생선과 곰 발바닥'의 비유. 생명보다 의를 택함을 뜻한다.
◇稼亭 : 이곡.
◇麟齋 : 이종학.
◇陰崖 : 이자.
◇李德馨 : 이덕형.
◇李德泂 : 이덕형의 아우.
◇范武子·穆叔 : 춘추시대 인물. 세록(世祿)을 불후의 근거로 삼은 범무자를 목숙이 비판한 고사를 인용하였다.
◇忝祖 : 조상을 욕되게 함.
[국역]
옛날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할 때에는 주공과 소공이 왕업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나, 백이는 서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절의를 지켰다. 또 후한 광무제가 천명을 받아 제업을 이룰 때에는 경감과 가복이 전공을 세웠으나, 엄자릉은 창랑한 강물 위에서 낚시를 드리울 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몸을 바쳐 군주를 섬기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떠나 자신의 뜻을 지키는 사람도 있으니, 선비의 뜻은 저마다 다르다. 어찌 이를 한 가지 기준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고죽국 백이의 맑은 절개는 주나라 창업의 열 공신에게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고, 동강의 엄자릉이 지닌 기이한 절조는 운대의 공신들보다도 더욱 빛나고 있다. 이는 어째서인가.
혹 은거한 사람이 오히려 더욱 드러나고, 세상에서 크게 통달한 사람이 도리어 묻혀 버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은둔과 현달, 궁핍과 영달은 오직 그 사람의 처지에만 관계될 뿐 명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인가. 혹은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을 뿐, 몸이나 이름과는 애초부터 관계가 없는 것인가. 하늘의 뜻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주나라에서 절의의 풍범을 세울 사람은 반드시 은나라의 유신이어야 하며, 지존의 황제를 마주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반드시 황제가 미천하던 시절의 옛 친구여야 한다.”
그러므로 백이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아 의리를 세웠고, 엄자릉은 광무제와 벗으로 지내며 자신의 높은 절개를 이루었다. 비록 그들이 이미 망한 왕조를 위하여 절의를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 왕조를 위하여 더욱 큰 교훈을 남긴 것이다. 후세에 그들의 풍도를 들은 사람들은 유장의 두 노인이나 당고의 여러 현인들처럼 모두 그 정신을 계승하였고, 마침내 주나라와 한나라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은거하였든 세상에 나아갔든 그 자취는 서로 다를지라도, 덕을 세워 후세를 교화하고 나라를 이롭게 한 점에서는 본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들이야말로 마땅히 십륜의 위차에서는 둘째 자리에 들고, 오사의 제향과 나란히 아름다움을 함께하여, 서학에 배향되어 제향을 받으며 그 공덕에 대한 보답을 누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명을 받아 왕업을 여신 것은 마치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천하를 전한 것과 같았다. 그때 목은 이공이 있어 천자의 부름을 사양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은, 엄자릉이 옛 벗인 황제를 높이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던 고결함과 같고, 죽음을 헌신짝처럼 여긴 것은 백이가 굶어 죽으며 절의를 지킨 뜻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은 예로부터 절의를 지킨 선비가 많기로 이름났다. 나라에 큰 위난이 닥칠 때마다 선비들은 모두 삶과 의리 가운데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하는지를 알았고, 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이겠는가. 덕을 세워 후세를 교화한 공으로 본다면, 어찌 옛 성현들과 견주어 그 경중을 따질 수 있겠는가.
족보를 살펴보니, 가정 문효공이 목은 문정공을 낳았고, 목은 문정공이 인재공을 낳았으며, 다시 다섯 대를 내려와 음애공이 나왔다. 대대로 큰 덕을 이어온 사실이 족보에 끊임없이 기록되어 있으니, 세상에서 한산에는 군자가 많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사실이다.
목은의 묘는 한산군 서쪽 기린산 아래에 있다. 예전에 이성중이 한산 군수로 있을 때 그 묘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문헌'이라 이름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만나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그 후손들이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선조의 덕을 이어 가문을 계승할 만한 이가 좌의정 이덕형과 이부 우시랑 이덕형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폐허가 된 사당을 다시 일으킬 것을 의논하여, 군 서쪽 옛 집터에 새로 옮겨 세웠다.
이에 가정공은 항렬을 높여 중심에 모시고, 목은공은 덕을 높여 중심에 모셨으며, 인재공과 음애공은 각각 동서에 배향하였다. 부자와 자손이 대를 이어 더욱 빛났고, 덕행과 문장은 대대로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그 충실함과 아름다움을 어느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 서원이 완공되자 이 시랑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옛날 범무자는 대대로 받은 녹봉을 불후의 근거라 하였다가 목숙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와 같은 가문이라면 참으로 불후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나 또한 자네들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 그대들은 능히 조상의 사당을 새롭게 세웠으니,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공경하는 뜻을 잘 실천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선조를 더욱 빛내고 드러내는 일이 어찌 이것만으로 끝나겠는가. 후손으로서 도를 지향하는 사람이 죽어서 이 사당에 함께 모셔지지 못한다면, 이는 조상을 욕되게 한 것이라 하겠다. 나는 그러한 일을 결코 취하지 않겠다.” 그러자 이 시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감히 해내지 못할까 두렵지만,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 글을 지어 기문으로 삼았다.
[부주]
저자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정치가로, 사리의 분석과 역사적 비유를 결합한 의론체 산문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그의 기문(記文)은 단순한 건물이나 사적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보편적 원리를 밝히는 특징을 지닌다.
이 글에서는 먼저 주나라와 후한의 역사적 사례를 병렬하여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의 가치를 대비한 뒤, 절의를 지킨 은자가 오히려 새 왕조의 도덕적 기반을 세운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이어 은현(隱顯)과 궁달(窮達)은 개인의 명예보다 천명(天命)과 도의(道義)에 근거한다는 유학적 역사관을 논증하며, 이후 문헌서원의 건립 취지를 설명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서두에서 역사적 논의를 통해 원리를 제시하고, 이를 현실의 대상에 적용하는 전개 방식은 조선 중기 의론체 기문의 대표적인 구성법으로 평가된다.
「문헌서원기」의 후반부에서는 앞부분의 역사론을 현실의 서원 건립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항복은 먼저 목은 이색을 조선 절의의 근원으로 제시한 뒤, 한산 이씨 가문의 계보와 학덕의 계승을 설명하고, 문헌서원의 중건 과정을 기록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건물의 완공 자체에 있지 않다.
글의 결말에서 그는 후손이 단지 조상의 사당을 중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여 스스로도 후일 서원에 배향될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결구는 존조경종(尊祖敬宗)의 실천을 형식적 제사에서 인격 수양과 학문의 계승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조선 중기 유학의 서원관과 가학(家學) 계승 의식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기문으로 평가된다. <끝>
출처>전통의명문 경주이씨종친회 카페 ㅣ 이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