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노략질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내지도 않았고, 노략질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십분의 일과 십일조는 다르며, 원상회복을 위한 노략행위와 노략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를 논하는 것은 최근에도 소위 구원을 전하는 모임들중에서도 십일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교훈을 가르치는가 하면 과거에도 이 부분에 관한 토론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좀더 분명히 밝힐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그리고 강조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 십일조는 십자가 이후에 폐해졌습니다>
폐해진 십일조를 아직도 자꾸만 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의 의도가 인간의 탐욕에 있어서, 주장하고 있든지, 성경 진리에 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하여 흔히 교계에서 가져오는 변명
1) 십일조란 율법시대에만 해당되던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 있었던 아브라함 시대에도 십일조가 있었다 – 그 예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2) 야곱도 십일조를 서원했다
3) 예수님은 율법의 더 중한 바 공의와 긍휼과 믿음 을 행하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마 23장 23절과 루카 11장 42절)
1) 에 대해서는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십분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십분의 일이란 토지소출의 1/10이 아니라 전쟁 노획물의 1/10이었으며 땅의 소산의 1/10을 드리도록 요구한 민수기 18장의 교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건 이후로 어떠한 소출의 1/10도 십일조로 드렸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단순히 일회에 있었던 사건이요, 소득의 1/10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후(창 14:1-16) 그는 멜키세덱에게 노략물의 1/10을 멜키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소득의 십일조는 드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소득과 산업은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온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시리아에서 노략해온 물건들중 1/10 만을 멜키세덱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이 멜키세덱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입고 마리아를 통해서 인생들처럼 인자로 오시기 전에, 수시로 구약시대에 나타나셨던 분으로서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분별됩니다. 그 상세는 히 7:1-5에서 동일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란 생산 소출의 1/10을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서 제사장지파에게 응식이 되도록 드려지는 것을 민수기 18장에서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멜키세덱에게 드렸던 십분의 일은 소득의 1/10 이 아니라 전쟁에서 노략해온 물건의 1/10이었으며 소득의 십분의 일은 그의 본가에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십일조의 효시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브라함의 평생동안 그가 헤브론 지역에서 가졌던 농산물의 1/10이 한번이라도 드려졌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면 누구에게 드렸겠습니까? 소돔왕에게? 혹은 여부스 왕에게?
아니면 매달 멜기세덱이 내려와서 십일조를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오직 한번, 일회에 소득의 1/10이 아닌 노략물의 1/10을 드렸습니다(히 7:4)
그것을 십일조로 본다면 한국의 수많은 교인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노획물을 얻기까지는 십일조를 안해도 됩니다!
2) 야곱 또한 그가 1/10을 서원하였지만 그가 십일조를 누구에게 드렸다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중요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실제로 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3) 예수님이 율법의 더 중한바도 행하고 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것처럼 번역된 성경들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더 중한바,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행하고 또한 율법의 더 중한 바 공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상세는 아래의 글들로 대체합니다.
이제 본문의 본 주제에서 아브라함이 노략질을 하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변합니다.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은 소득이나 땅의 소출의 1/10 이 아니라 노략물의 1/10이었다는 분별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노략질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논리로 반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노략이라는 단어가 한글사전에 의하면
노략 : 떼를 지어 사람이나 재물을 빼앗아감 ( 엣센스 국어사전)
노략질 : 노락하는 짓
노략이란 떼를 지어서 사람이나 재물을 빼앗아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노략질을 하여 사람과 재물을 탈취하여 갔을 때에 그것을 원상회복하기 위하여 적진에 쳐들어가서 사람과 재물을 빼앗아 오는 행위를 하였다면 그것도 노략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다음의 예들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둘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노략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노략행위에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남의 사람들과 재물들을 탈취해가는 탐욕적 범법행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허락하심안에서 정의의 심판으로 원상회복을 위한 적법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습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남의 재산과 인명을 탈취하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다만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미쉬파팀)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진 깊숙히 쳐들어가서 롯을 구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여러 사람들을 구하였으며 바빌론왕과 엘람왕의 연합군의 많은 재물을 탈취해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 창 14:1-20)
이것은 악의적, 탐욕적 노략질이 아니라 정의의 심판으로서 원상회복을 위한 노략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전쟁노획물이나 전리품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에 대해서는 좀더 상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은 분명히 악인들에 대하여 정의의 심판으로서 그들이 노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노획물이라는 단어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해도 주변 주민들이 전쟁터에 널려진 여러 시체들 가운데서 여러 물품을 주어가는 것도 노획하는 것이 되는 반면에 아브라함은 그냥 주어온 것이 아니라 적를 쳐부수고 그들에게서 되 빼앗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왕과 엘람왕의 연합군은 능히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을 격파한 정도의 강력한 군대였으며 최소한 수천명 이상의 병력이었을 것입니다. 야살의 책 일부 사본에는 그 병력이 8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많은 병력을 300여명의 아브라함의 군사들이 쳐부수고 그들이 붙들고 있던 인명과 재산을 탈취해올 때에는 단순하게 도둑질하여 탈취해온 것이 아니라 기습작전으로 전투를 벌여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냥 주어오지도 않았으며 엄청난 전투를 통해서 탈취하였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사법정의에 따른
정의구현의 원상회복 행위가 노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은 상습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남의 재물이나 인명을 탈취하지 않았습니다.
- 아브라함은 그냥 전쟁터에서 사람들과 재물을 주어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벌여서 원상회복과 함께 적의 재물들도 함께 탈취하여 가져왔습니다.
- 적의 재물들을탈취하여 가져온 것은 침략자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미쉬파팀) 에 해당하는 보복행위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은 자기가 수고하여 농사지은 소출이나, 사육한 양떼나 가축의 십분의 일을 멜키세덱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탈취한 것들의 1/10을 멜키세덱에게 드렸습니다.
- 아브라함이 구약 율법에서 요구하는 소득의 1/10을 반복적으로,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주장은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란 땅의 소산 혹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기적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브라함이 드린 것이 십일조이고 우리도 그렇게 아브라함처럼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겨서 전쟁노획물이 생길 때까지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서 7장 4-10절에서 십분의 일과 십일조를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글 번역들도 그점에서 오류를 안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글 개역등은 십일조와 십분일을 구분하고 있으며 그점에서 히 7장 번역에 있어 더 정확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9장
7 각자가 근심에서나 부득이함에서가 아니라, 그 마음에 사려깊게 정한대로 할지니,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쁘게 베푸는 자를 사랑하심이라. (하토브역)
만일 십일조가 폐해지지 않았다면, 마음에 정한대로가 아니라,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려라, 하였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16장
. 2 주의 첫 날에 너희의 각자는, 그가 번창하게 되어진 만큼을 따라 저축하여, 자기에게 두게 하여, 내가 갈 때 그때에야 연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라.
각자가 번창하게 된 것을 반영하여 마음에 정한바를 따라 연보하는 것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만일 십일조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가 얻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라고 가르쳐졌을 것입니다.
십일조가 유효하다면, 그것을 받는 수혜자는 레위지파이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레위지파에게 송금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신약시대의 제사장들에게 지급해야 한다면, 벧전 2:9, 계 1:6, 5:10 말씀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사장들이므로 교회 안의 성도들 모두에게 그 십일조가 전액 배분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 십일조는 십자가 이후에는 폐해졌으며, 대신 넉넉한 연보가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앞서 언급한 종전의 십일조 관련 글 몇개를 올립니다.
2014. 6. 26 하토브
마태 23장 23절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ανηθον και το κυμινον, και αφηκατε τα βαρυτερα του νομου,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ον ελεον και την πιστιν ,ταυτα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αφιεναι.
23 너희에게 화있을진저, 서기관들과 파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왜냐하면 너희가 박하와 향미료(딜)와 커민을 십일조하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것 곧 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음이라. 이것들을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에 대하여 한가지 오해가 있는 부분이 있으므로 규명해드립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고 그것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 23:23절을 해석할 때에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커민)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마 23:23)”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저것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 저것은 카케이나( κακεινα) 의 번역으로서 그것은 Και+ εκεινα 의 합성어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성 복수명사의 목적격입니다. 그런데 앞서의 문장에서 십일조라는 단어는 아포데카토우테(Αποδεκατουτε)로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십일조하다로 쓰였습니다. 다시말하면 박하와 딜(미나리과)과 커민까지 십일조하는데(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십일조를 하는데) 율법의 더 크고 중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설사 십일조가 명사로 쓰인다 해도 복수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박하, 딜, 커민(박하, 회향, 근채)가 그 선행사가 될 수 없음은 문장의 문맥상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들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카케이나는 부정대명사로서 바로 그것들을 또한, 혹은 또한 그것들을, 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박하와 미나리와 커민까지 사소한 것들을 십일조하되 율법의 더 중한 것들(Βαρυτερα), 곧 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그것들(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행하고 또한 그것들(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보충 번역 ( 설명을 가미한 번역)
너희가 박하와 미나리와 커민까지 사소한 것들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것들(Βαρυτερα), 곧 정의의 판단과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실행하고 또한 그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더 중한바들인 정의의 판단과 긍휼과 믿음을 행하고 그것들 곧 정의의 판단과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율법도 지키고 십일조를 지키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앞문장에서 동사로 쓰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일조에 들어가는 박하와 딜과 커민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박하와 딜(미나리과)과 커민이 아까워서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킹제임스 성경이 무오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티알을 갖고 헬라어 권위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모든 번역들이 틀렸습니다. 다만 다비는 그것을 those 로 번역하여 옳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습니다.
이 문제는 아람어 사본들로 들어가면 매우 분명해집니다. 카케이나 대신에 올레힌 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앞서의 바로 그것들 즉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가리킴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일조를 버리지 말도록 하셨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행해야 하며 또한 그것들(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명사는 앞문장에 없습니다! 있다 해도 복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오는 그것들(이것들로도 번역될 수 있음)은 복수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행하고 또 십일조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해석이요, 잘못된 번역입니다!
23절 안에 율법의 더 중한 것들 외에 복수의 명사는 없습니다. 오직 율법의 더 중한 것들 만이 복수의 명사입니다.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행하고 그것들(바로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좇던 제자들은 누구에게 십일조 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던 제사장들, 대제사장에게 십일조 했겠습니까? 율법에는 제사장들에게 십일조 하라고 지시되었지요?(민 18:26-). 십자가를 예수님이 이루신 다음에는 누가 제사장들입니까?(벧전 2:5-9, 계 5:10, 1:6)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피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입니다. 거듭난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제사장들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제 제사장들에게 드려졌던 십일조는 성도들 자신들이 제사장들이므로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단지 교회 운영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가 있을 뿐입니다!
주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토브
2011. 7.14
오늘날 성직자 제도를 주장하거나 실행하고 있는 집단은 고정급여 제도가 아주 절실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런 구절을 바로 번역하거나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예수님이 마치 십일조를 권장하신 것처럼 번역하게 하고 해석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강조하신 말씀이지 십일조를 강조하시지도 않았거니와 두둔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분깃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른 지파들이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지급하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며 그 내용은 민수기 18장 21-26절에 소상히 기술되었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희생제사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하시고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남자나 여자나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기억하고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피를 의지하여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벧전 2:5-9, 계 1:6, 5:10, 히 13:15) 따라서 신약성도들 모두는 동등하고도 존귀한 제사장들인 것이며 누가 특별히 누구에게 십일조를 지급할 대상도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신약교회에는 연보가 있을 뿐이며 그 연보로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이 연보는 고린도후서 9장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9장
7 각자가 근심에서나 부득이함에서가 아니라, 그 마음에 사려깊게 정한대로 할지니,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쁘게 베푸는 자를 사랑하심이라.
연보는 근심에서도, 억지로도 아니고 각자의 마음에 사려깊게 정한대로 하는 것이며 그것은 1/10의 고정비율이 아닙니다. 다만 기쁘게 베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1/10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양립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서 반드시 내야 하며,10%를 안내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강도행위라고 하는 공갈 협박성 설교와 양립될 수 있겠습니까?
이 연보는 교회안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데 사용되어 성도들이 가능한한 평균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사용되어야 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3 이는 다른 이들에게는 평안하게 하고, 너희에게는 고난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14 평균케함에서, 지금 시기에 너희의 넘침이 저들의 부족함을 위하고, 후에 저들의 넘침이 너희의 부족함을 위할 수 있도록 하여, 평균이 되게 하려함이라.
여기서 분명히 보는 바는 헌금이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사용되는데 쓰여졌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헌금 사용처는 그것의 40% 가 목회자(전도사 포함)의 사역비로 쓰인다는 것이고 가난한 성도들의 구제를 위한 용도로는 0.3-0.7% 에 불과하다는 보도를 들은 바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운영의 형태는 성경적 기독교 모임의 형태가 아니라, 바빌론 종교와 그들의 종교제사장 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보다 많은 교훈을 헌금에 관하여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5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가 아니라, 저희가 자기들 스스로를 먼저 주께 드렸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었으며,
연보는 분명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 교회는 먼저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뜻을 좇아 헌금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3장
18 창녀들의 대가들과 개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에 들여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께 가증함들이니라.
오늘날 수많은 공무원들이 촌지를 받으며, 그 촌지로 헌금을 내어도 좋다고 받아들이는 교회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학부모에게서 촌지로 받은 돈을 내는 교사들의 헌금을 덥썩 받고 있겠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한국교회들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경적 교회들의 실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제도와 관행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는 바빌론 종교의 체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행하고 버리지 않는 진정한 모임들이 서야 하겠으며 성경적 연보가 십일조와 결코 같을 수 없으며 성경적 연보를 충실히 실행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데 쓰여야 할 것입니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고, 빚을 내서라도 십일조를 내라는 것이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이었겠습니까? 하물며 신약시대에는 제사장직업이 없어졌고 모든 성도가 동등한 제사장들인데 그들이 누구를 위하여 그토록 십일조를 내야 하겠습니까? 십일조란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양잡고 소잡아 희생제사 드리는데에 필요한 인건비였습니다!
이제 그 모든 제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완성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도 당연히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십일조가 폐해졌다고 나오냐구요? 그렇다면 성경 어디에 양잡고 소잡아 드리는 제사가 폐해졌다고 나옵니까? (히 7:12- 18)
아직도 이것을 못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아직도 십일조가 유효하며 그것을 드려야 한다고 공갈 협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빌려 악용하는 사기꾼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며 드리지 않는 것은 강도요 절도라고 공갈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돈을 중간에서 착복 횡령하고 있는 사실들은 수많은 통계들이 증거합니다.
이제는 성경적 연보로 교회 모임의 운영은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연보에 관하여는 고후 8-9장과 고전 9장 16장 1-2절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정한대로(고후 9장7절) 규칙적으로 (고전 16장1-2) 드리는 것이며 가난한 성도들의 구제를 위해 우선적으로 쓰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안의 일꾼들은 당연히 직업을 갖고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함이 살후 3:8-12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교회 사정과 합의에 따라 전심 사역자를 둘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성직자들은 계속 나올 것입니다. 성직자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며 성경에 근거가 없는 바빌론 종교의 풍습일 뿐이며, 바빌론 종교는 예수님 재림때까지 계속 궤변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들의 모임들은 성경대로 모이며 실천할 것이며 십일조는 폐해졌으며 대신 연보제도가 있어서 성도들을 돕는데 사용되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오늘날 목사들은 십일조가 율법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때부터 있었던 실행이었다고 주장하며 야곱도 십일조를 서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간단히 아래에 반박한 댓글들이 있으므로 그것을 올립니다.
<<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그냥 그 시대의 습관으로 치부하시나요?
그럼, 아브라함의 제사도 그 시대의 문화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겠네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냈다고요? 이러니까 니골라당의 신학은 대충 대강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평생에 몇 번 십일조를 냈습니까? 한번도 낸 적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십일조란 소득의 십일조이지요? 전쟁에 나가 노략물의 십분일을 한번 낸 것이 아브라함의
십일조입니까? (창 14장20절,
히 7:4)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칩니까? 평생에
전쟁에 나가서 노략물이 생기면 한번 내라고? 그외에 언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냈습니까? 누구에게 냈습니까? 매달 멜기세덱이 수금하러 왔습니까?
2011 11.20 하토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은 오늘날이나 구약시대의 십일조를 실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처럼 십일조 하려면 평생 내내 한번도 안해도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하여 승전한 다음 그 승전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치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왕에게 십일조 바쳤습니까? 매달 혹은 매년 누구에게 바쳤습니까? 아브라함이 바빌론 왕에게 바쳤습니까? 꺼꾸로 바빌론왕 엘람왕을 쳐서 이기지 않았습니까? (창 14:1-16) 아브라함이 매년 하나님께 십일조 드렸습니까? 제사로 썼다고요? 그럼 예수님의 희생제사가 모든 것을 대체 완성했으므로 더 이상 필요없겠습니다?
야곱이 언제 십일조 바쳤습니까? 야곱처럼 서원만 해놓고 한번도 안바쳐도 됩니까?
야곱은 서원만 해놓고 한번도 십일조 한적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했습니까? 형 에서에게 했습니까? 파라오왕에게 했습니까? 아니면 외삼촌 라반에게 바쳤습니까? 꿈에 보였던 사다리를 통해 하늘로 송금했습니까? 아니면 매달 멜기세덱에 내려와서 수금해갔습니까? 아니면 일년에 한번씩 번제로 태워버렸습니까?
번제로 태워버렸다면 모든 번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제사를 믿음으로 끝났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니골라당은 분석해내지 못합니다. 니골라당은 그냥 연보라고만 하면 될 말을 은근히 1/10을 강조합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십일조는 폐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에 관한한 연보로 통일되었으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출연하고 구제하기 위해 드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말씀 전하는 사람들이 수혜자로 포함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관행을 생각할 때에 그분은 더욱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결코 마이너스 통장으로 십일조 하도록 강요하는 분이 아니심을 생각할 때 더욱 그분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오늘날 성전제사를 다시 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반석이신
예수님을 두번 치는 일이 됩니다. 그들은 축복을 받기는 커녕 저주를 받습니다!
십일조는 다음 글들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성전제사를 드리던 시대에 그 제사장
가문들인 레위지파를 위해 드리는 것이었으며 그
십일조 행사는 바로 그 레위지파들을 위해 공급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민수기 18
20 주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의 땅에서 상속 재산도 갖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서 아무 몫도 갖지 못하리니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 몫이요,
네 상속 재산이니라.
21 보라, 내가 레위 자손이 섬기는 일 곧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십분의 일을 다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었느니라
24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십일조 곧 그들이 주께 거제 헌물로 드리는 것을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상속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상속 재산을 갖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26 레위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취해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로부터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그것의 거제 헌물로 주를 위하여 드릴지니라
( 이 구절은 레위지파들 마저도 그들이 이스라엘의 십일조로 받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위의 모든 설명에서 보듯이 십일조는 성전제사의 일부로서 제사장지파 레위지파에
공급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십자가에서 모든 성전제사가 성취되고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없게 된 현재에는 (히 10:17-19) 제사장지파도 없고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5-9, 계 1:6, 5:10) 따라서 제사장지파가 없는
오늘날에는 십일조도 당연히 폐해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늘날의 목사들은 바로 제사장들이라고 우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며 이 세상신이 바로 그런식으로 성경말씀을 비틀어서
사기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오늘날은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들이며 교회에는
오직 두가지 직책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로이며 다른 하나는 집사입니다.
장로는 감독으로도 불리웠습니다(행 20:17, 28, 디도 1:5-9)
성전제사 시대에 필요하던 십일조를 오늘날에도 내야한다고 믿거나 가르치는 자들은
바로 모쉐처럼 반석을 두번치는 사람이 됩니다. 모쉐는 카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 분별인데, 아직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믿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천년왕국에는 못들어갑니다! 물론 그들이
거듭난 이상, 천국에는 궁극적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특별히 축복받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누릴수 있는 곳입니다. 십일조에 매여서 인간들의
비난과 눈치에 순종하려는 외식 신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많은 목사들은 누가 헌금을 냈는지를 공개 발표합니다.
어떤 교회는 심지어 헌금액수들을 공표합니다. 모두 장삿속이 훤히 보이는 방법이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역이며
그에 순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인간들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으로 저희는 그 받을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마 6:1-2)
그런 헌금 관행들 중에는 십일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십일조를 안내면 저주 받고 내면 복받는 것이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인데, 빚을 내서라도 내야한다고 공갈치면 마이너스 통장으로라도
내야 한다는 것을 아래 글들에서 보셨습니다.
그만큼 십일조라는 율법에 종노릇하며 얽매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얽매임에서 해방시키시려고 나무위에 매달리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으며 (롬 8:2-4, 10:4) 더 이상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폐해진 것입니다.
대신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되는 교회를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경비의 충당을 위해 그리고 구성원인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 연보는 다음과 같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1. 첫째 규칙적으로 - 고전 16:2
성도들을 위한 것의 연보에 관해서는, 갈라티아의 모임들에게 내가 명했는 바와 같이, 너희도 그와같이 실행하라. 2 주의 첫 날에 너희의 각자는, 그가 번창하게 되어진 만큼을 저축하여, 자기에게 두게 하여, 내가 갈 때 그때에야 연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라.
여기서 연보로 번역된 단어는 로게이아, 로서 보통 모금에 해당됩니다. 십일조라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2. 번창하게 된 만큼, 이익을 반영하여 - 고전 16:1-2
3.성도들을 위하여- 어느 특정인들을 위한 것이 아님- 고전 16:1, 고후 8:14-17
4. 마음에 정한대로 - 고후 9:7-9
7 각자가 근심에서나 부득이함에서가 아니라, 그 마음에 사려깊게 정한대로 할지니,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쁘게 베푸는 자를 사랑하심이라.
8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은혜로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기에 능하시므로, 모든 일에 항상 너희가 유능함을 지니고서 모든 선한 일에 넘치도록 하시느니라. 9 기록되어진 바와 같으니,
< 그분이 널리 흩어, 궁핍한 자들에게 주셨으니, 그분의 의가 영원히 남느니라>
마음에 정한대로와 소득의 10%로 정해놓는 것이 어떻게 조화됩니까?
5. 근심에서나 부득이함에서(억지로)가 아니라- 고후 9:7
6. 연보는 성도들의 필요를 돕는 점에서 평균케하는데에 쓰여야 합니다
14 평균케함에서, 지금 시기에 너희의 넘침이 저들의 결핍을 위하고,
후에 저들의 넘침이 너희의 결핍을 위할수 있도록 하여, 평균이 되게 하려함이라.
15 기록되어진 바와 같으니,
< 많이 모은 자도 넘쳐 남지 않았고, 적게 모은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
즉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부유한 성도들이 자기들의 소득을 내놓아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야 합니다.
7. 집사들은 이러한 연보의 공평하고 정직한 사용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 행 6:1-4, 딤전 3:8-13
행 6장 1 이 날들에, 제자들이 증가하여, 히브리인들에게 대한 헬레네인들의 원망이 일어나니
이는 자기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사역에서 소홀히되었기 때문이라.
연보는 바로 이러한 과부들, 불행한 성도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토록 십일조를 강조하며
목매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8. 건물숭배와 목사제도가 그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건물들을 크게 짓기 위하여 성전건축헌금과 십일조를 걷는 것입니다.
성막이 성전되고 솔로몬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이 되었으며 다시 예수님 몸이 성전되었으며
(요 2:19) 그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깨어져 성령의 생수가 흘러남으로 성도들이
거듭나고 성도들의 몸이 성령이 거하싲는 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성도들의
몸이 성전인 것이며 교회당 건물은 그 모임이 소유하는 부동산에 불과합니다.
9. 또다른 하나는 바로 성경에 없는 목사제도로 말미암아 목사들의 급여를 매달 지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교회에는 오직 장로와 집사밖에 없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기일을 갖고 직장생활을 통해 믿음들을 검증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각자가 비록 복음 전달자일지라도 자기 손으로 수고한 바를 따라
먹도록 가르치십니다.
교회 안의 사역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손으로 일하며 수고하여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원칙으로 분별됩니다.
데살로니카 후서 3장
8 누구에게서도 값주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밤낮 수고와 땀나는 노력으로 너희 중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도록 일하였으니, 9 이는 우리가 권리가 없음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를 본받도록 우리 스스로를 너희에게 모본으로 주고자 함이었느니라. 10 또 왜냐하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이것을 우리가 너희에게 명하였으니 즉 누구든지 일하기를 원치 아니하거든 그는 먹지도 말게 하라! 는 것이라. 11 이는 어떤-사람들이 질서없이 너희중에 행하며, 아무일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참견하러 다닌다는 것을 우리가 들음이라. 12 그러나 이러한 자들에게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명하고 권면하는 바는 조용함으로 저희가 자기들의 양식을 먹도록 함이라.
이렇게 교회 자도자들이 자기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 복음이 크게 힘이 있고
유익할 것입니다. 또한 복음 전하기에 가장 좋은 직업도 나올 것입니다. 그리하면 십일조를 안내는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하는 공갈 협박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십일조를 지키려는 행위는 바로 율법행위라 할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의 성전제사의 일부였기때문입니다. 형사법 (살인하지 말라 등)등은 그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수용되었다고 믿지만 이러한 십일조는 성전 제사의 일부 였었고 그것이 지금도 유효한 믿음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결코 될 수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으며 십일조가 축복은 커녕 복을 잃게 하는 행위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4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졌도다
십일조를 지켜서 축복받는다 생각하며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일부가 십일조가 아닌가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일조에 매인 신자들은 복을 받기는 커녕 벌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 저주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십일조와 연보는 구분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서 십일조 해야 한다, 하는 공갈 협박에 넘어가면 하나님 앞에 변명이 되겟습니까?
사기꾼들에게 속으면 축복받습니까?
사기꾼들에게 속았다는 것은 영이 깨어있지 않았다는 것이요,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십일조 내야한다고 공갈 협박하기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들이라고 호통치는 목사들에게 속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못 믿겠거든 차근 차근 성경을 다시 보시며 위의 글과 아래 십일조 관련 글들 모두를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속지 마시고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님께 순종하십시오
.
한가지 오해하지 마실 것은 제가 이렇게 십일조가 폐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성전 제사법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중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그대로 수용된 것들이 많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등의 형사법과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등의 도덕법은
그대로 수용되었습니다. 성전 제사법은 예수님 십자가로 완벽하게 대체되고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율법중 형사법과 도덕법을 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법없이 살아가게 되며 그것은 무법주의가 됩니다.
한국교회는 편리한대로 무법주의를 따르면서도 이런 십일조 제도로 나오면 율법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무법주의와 율법주의가 혼합된 형태를 한국교회가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사들은 말라기 3장을 가져다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자들이라고 공갈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도용하여 협박하는 협박범들일 뿐입니다. 말라기 3장을 들어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말라기 시대처럼, 양과 소를 도축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려 하는지요? 하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또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냈다고 주장하며 율법 이전에도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득의 십일조를 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의 노획물의 10분일을 드렸으며 그것도 평생에 단한번 실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들은 마태 23장 23절과 루카 11장 42절을 가져다가 예수님도 십일조를 실행하라고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 구절들이 잘못 번역되었으며 예수님은 그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믿음과 긍휼을 강조하신 것이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제가 쓴 글 마 23장 23절과 루카 11장 42절의 글에서 상세히 설멸하였습니다. 그 글들을 다음의 게시판에서 검색하시면 될 것입니다.
http://cafe.daum.net/Eliyahu?t__nil_cafemy=item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예수님께 의탁하며 기도드립니다.
하토브
노략물을 기뻐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노략물을 얻게 도와주시기도 하시며,
노략한 물건들의 일부를 드리는 것을 기뻐 받으시기도 하시며, 그분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노략을 당하게도 하시며, 그분을 순종하는 자로 하여금 악독한 백성을
노략하게도 하십니다. 노략을 직접 명하시기도 합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개역개정 성경에 노략이 나오는 대략 77구절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구절들을 뽑아 본 것입니다.
창 34장 27절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민수기 31장 12절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은 자와 노략한 것과 탈취한 것을 가지고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의 진영에 이르러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로 나아오니라
( 31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미디안 족에게 원수갚으로 명하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노략하였습니다)
여호수아 8장 27절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사사기 14장 19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삼상 17장 53절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삼하 3장 22절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삼하 8장 12절
( 다윗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오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여호와께 노략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후손으로 오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삼하 12장 30절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삼하 23장 10절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심으로 노략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셨습니다!
왕하 7장 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켈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여호와께서 이런 노략의 바탕을 제공하셨습니다!
왕하 17장 20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그분의 백성이라도 불순종하면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노략하게 하여 노략꾼의 손에 넘기십니다!
대상 26장 27절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한 일과
노략물도 구별하여 드릴 수 있습니다!
대하 14장 13절
아사와 그와 함께 한 백성이 구스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의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매우 많았더라
대하 14장 14절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에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대하 15장 11절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아사왕은 하나님께 매우 충실한 왕이었습니다. 그도 노략하여다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사야 11장 14절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이사야 33장 4절
황충 ( 풀쐐기) 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스파냐 2장 9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히브리서 7장 4절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성경 인용 : 개역 개정)
만일 이 번역이 잘못되었다면 77개 구절들 모두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략질을 시키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심판으로서의 노략행위를 인정하시고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노략질을 하지도 않았고, 그는 정의의 심판으로서의 노략행위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노략물을 기뻐받으시는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고 의롭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없고 하나님도 필요없습니다!
당신은 천국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나홀로 당신의 천국에 가십시오!
2014. 6. 25 하토브
http://cafe.daum.net/Eliyahu?t__nil_cafemy=item

첫댓글 오늘날 복음주의 전도자들 중에는 십일조는 폐해졌지만 10% 헌금의 원리는 가장 이상적인 비율로 원리상으로 남아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10%보다 많은 것은 너무 많고 10%보다 적은 것은 너무 적으므로 10% 헌금은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교묘히 만인 제사장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사탄의 술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돈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을 약화시키는 어떠한 인간 교훈도 배격해야 합니다.
예전에 성침 목사님께 이렇게 말을 들었었는데 다른 분들도 이런식으로 많이 주장하나 봅니다.
아브라함의 기습작전은 야간에 이루어진 아주 위험한 작전 이었다고 합니다
야간작전은 아군과 적군의 분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작전으로 적은 인원으로 대승을 이루었습니다
롯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기습작전은 못 했을 것입니다
요즘 통박사 조병호의 성경과 5대 제국을 읽고 있습니다
통이면 한 권에 배경 전부 나와 있나요? 읽기는 쉬운가요? 성경 배경에 대해 알고 싶은데 뭘 읽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구원파 유병언의 아들 유혁기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인간이 취하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것과 같다고 설교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십일조를 강요하여 치부하려는 탐욕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파는 소위 복음을 강조하고 율법에서 해방된 것을 강조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설교였고 무자격자임을 알게해주었습니다.
적어도 기복침에서는 십일조 얘기는 안 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저의 생각이 너무 순진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