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아담과 이브도 우리 처럼 배꼽이 있었는가 하는 쪽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은근히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필자의 두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 보니, 둘 다 대답이 같게 나왔다. 아담과 이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배꼽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실이 고맙고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아이들이 놓치고 있음을 발견하고 조금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다. 성경은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 2:7). 즉, 이 말은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엄마의 자궁 속에서 수태되어 지은 바 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사실은 이브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브 또한, 누구의 뱃속에도 들어 있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는 과연 우리 아이들의 대답대로 배꼽이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기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필요한 영양분을 탯줄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공급 받고 있는데, 아기가 출생하게 되면 이제 이 탯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출생과 동시에 잘라 버리게 된다. 배꼽은 바로 이 탯줄이 붙어 있던 자리가 흔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적당한 기간을 보내고서야 출생을 하게 되므로, 따라서 누구나 예외 없이 그 증거로서 배꼽을 자신의 배 한 가운데에 지니고 다니게 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 없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배꼽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드신 아담과 이브가 유일한 그 예가 될 것이다.
여기 까지 설명을 마치고 이제는 바뀌어진 아이들의 대답을 기대하면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뜻 밖에도 이번에는 두 아이의 대답이 다르게 나왔다. 큰 아이는 아직도, 그래도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을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비록 그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 존재치 않았었다 하더래도 그 뒤에 나오는 그들의 자손들과 서로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배꼽을 따로 만들어 붙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만 우리 모두는 서로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래 그거야 진짜 하나님만 아실 일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 그 날의 대화는 끝을 내렸는데, 그날 밤에도 필자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에게는 우리와 같은 배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이 없다면, 배꼽 없는 그들을 바라 볼 때 마다 그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의 기원에 대한 무엇 보다도 확고 부동한 창조론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가 배꼽 없는 그들을 보면서 감히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지구의 나이가 수 십억년이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는 당시에 같이 살았던 후손들에게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은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의 나이를 헤아림으로서 지구의 나이를 또한 가르쳐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아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굳이 가짜 배꼽을 만들어 부치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담의 배꼽과 관련지어 이따끔씩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조롱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대로라면 남자의 갈비뼈 수가 여자 보다 하나가 모자라야 하는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으로 성경이 한갖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창 2:21-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셔서 이브를 만드셨다고 되어 있으므로,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갈비뼈 하나를 아담이 상실했다 하더래도 그의 자손은 여전히 완전한 수의 갈비뼈를 갖고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이와 같은 현상을 가르켜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말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쉽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가령 우리가 살면서 사고로 눈을 한 쪽 다치거나, 팔을 하나 잃어 버리게 되었다고 하였을 때, 그 뒤로 부터 태어나는 모든 우리의 자손들이 팔이나 눈이 하나인채로 태어 난다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새로이 얻게 된 소위 '획득 형질'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로 '유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관찰을 통하여 아는 사실은, 아무리 우리가 사고로 팔 다리를 잃게 되었다 하더래도 여전히 우리의 자손은 두 팔과 다리를 갖고 태어 난다는 사실이다. 과거 19세기에 프랑스의 라마르크라는 사람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기린의 목이 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기린의 목은 그리 길지 않았었는데,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열매를 따먹으려고 자꾸 목을 뻗침으로 목이 길어지게 되었고, 그 뒤 그의 자손들이 그 형질을 물려 받아 그 뒤로는 기린의 목이 모두 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가리켜 '용불용설'이라고 불렀는데, 그 뒤 유전학적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되었고, 따라서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전학에 있어서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이같은 유전학적 법칙에 비춰 볼 때,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잃은 사실은 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요 그의 자손에게는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 일임을 쉽게 알 수 있음으로, 따라서 성경의 이 기록을 가지고 오늘날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의 갈비뼈와 그 숫자가 같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의 기록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놀리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과연 아담이 하나님께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심으로 평생 갈비뼈 하나가 모자라는 채로 그의 생을 살았을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몸을 잘 관찰해 보면, 갈비뼈는 골막이라고 하는 섬유성 조직에 의하여 덮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골막 조직은 바로 그 안에 뼈를 만들어 내고 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함으로, 이 조직만 살아 있으면 갈비뼈가 다시 재생되어 생겨 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병원에서 갈비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더래도 의사들이 이 골막 조직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라내면, 차츰 갈비뼈가 재생되어 수술 후에 곧 상처가 아물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 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우고 갈비뼈를 꺼내는 수술을 하실 때 왜 이 골막 조직을 남겨두고 수술하지 않으셨겠는가? 어쩌면, 아담의 갈비뼈는 얼마 후 멋지게 재생이 되어 하나님의 수술로 인한 아무런 불편도 겪지 않고 지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성경이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쉽게 씌여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훈련이 부족하다. 가령 우리는 노아의 홍수로 인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와 바뀌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데, 성경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면, 창세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의 배꼽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이들 처럼, 성경의 기록에 충실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놓치게 된다. 바른 성경의 이해는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창조과학은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잘못된 성경의 이해를 바로 잡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그 기록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의 정립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