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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타라 브라크
[2]
집을 떠남: 작은 자아[小我]의 혼수상태
존재에서 온 것들이
저마다 존재물에 붙잡혀 있네,
술에 취하여
돌아가는 길도 잊고서.
-루미
우리는 순진하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아름답고 활짝 열린 영혼과 함께 태어났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을 힘든 세상 속으로 가져왔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주복(space suit)을 짓기 시작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를 폭력과 탐욕에서 지켜주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자아-도취와 불안으로 한계가 있는 보호자들한테서 양분을 받아먹는 데 우주복의 목적과 기능이 있다.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주복은 우리를 위한 최선의 전술(strategy)을 찾아내어 그것을 사용한다. 분노, 걱정, 부끄러움 따위 몸과 마음의 긴장들, 심판하고 챙기고 엉뚱한 공상을 하는 정신작용들, 안전한 거처와 음식, 섹스, 사랑 따위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온갖 행위들이 우주복의 전술에 포함된다.
우리의 우주복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 전술들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가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고 책임지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우리를 보호해주는 같은 우주복이 오히려 우리가 자연스럽게 즐겁게 그리고 자유롭게 인생을 헤엄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 우주복이 우리를 가두는 감옥으로 된다. 우주복의 성능, 그 장점과 단점이 우리가 누군지를 결정짓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또는 남들과 교제하는 기술이 바로 자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내리는 판단과 자기의 소유, 자기의 불안과 분노, 이런 것들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기 동일시(同一視, identify)라는 말은 자기 우주복이 곧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는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자아(self)가 곧 우리라고, 판단하는 자아가 곧 우리라고, 남들이 인정해주는 자아가 곧 우리라고, 특별하고 부족하고 외로이 동떨어진 자아가 곧 우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우주복과 융합될 때 내가 혼수상태라고 부르는 삶이 비롯된다.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감각이 철저히 무뎌지고 우주복 마스크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자기를 완전히 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넓은 가슴과 밝은 눈을 망각하였다. 왔다가 사라지는 느낌들, 생각들 또는 행위들의 배경인 ‘지금 여기’에 언제나 있는 신비로운 현존을 잊어버렸다.
혼수상태로 사는 것은 꿈속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다. 그 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경험들로부터 분리되고, 살아있는 세계와의 접속이 끊어진다. 우리는 집―자기의 깨어있음과 살아있음―을 떠나 현실의 뒤틀린 파편 속에 자기도 모르게 갇힌다.
우리가 집을 떠나는 데는, 충족되지 않은 필요에서 오는 아픔에 대처하는 우주복의 전술들에는, 각자 자기 스타일이 있다. 하지만 깨어나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이다. 서서히 또는 급작스럽게 우리는 자기가 여태 망각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왔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근본적인 선(善)과 순진함에 다시 접속되기를 원한다. 참 자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은 진지한 갈망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도피처에 이르는 길을 향하여 돌아서게 해준다.
나의 생에서는 8년 전 첫 번째로 참석한 불교 수련모임에서 깨어남의 과정이 비롯되었다. 그 경험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한꺼번에 모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혼수상태가 풀어질 때,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우리는 자유로워질 가능성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볼 수 있다.
완벽 프로젝트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진실을 알고 싶었고 깨어있고 싶었고 만사에 친절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요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보스턴의 요가 수련원으로 달려갔다. 거기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치면 그 길이 나를 영적인 자유와 해탈로 인도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매우 엄격한 스케줄에 맞추어 새벽 일찍 일어나서 냉수로 샤워하고 연이어 요가, 명상, 노래, 기도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요가 센터와 채식식당과 하버드 광장 매점을 달음박질로 오가며 수련에 정진하였다. 나는 열심을 내어 다른 수련생들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행복하고 자유로우려면 이기심, 탐욕, 불안, 공격성으로 가득 찬 나의 에고를 정화(淨化)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영성수련에 대한 나의 갈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기계체조를 방불케 하는 고난도의 요가 동작을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나 명상 중에 신비한 느낌이 온몸을 감쌀 때면 내가 꽤 진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모자람’을 아프게 시인해야 했고 그럴 때면 더욱 맹렬히 수련에 박차를 가하곤 했다.
실은 그렇게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혼수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내가 제한되어 있고 부족하고 그릇된 존재라는 생각이 나의 혼수(昏睡)에 땔감을 제공하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나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면 어떻게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상형을 나름대로 그려놓고서 그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 비추어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하고 채찍질하였다. 물론 나는 언제나 모자랐다. 그럴싸한 나의 겉모습 아래로 이기심과 불순한 동기(動機)들과 욕망과 판단이 잠복되어 흐르고 있었다.
돌아보면 순수한 영적 갈망이 무의식적인 완벽주의(unconscious perfectionism)와 손을 잡고서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몸과 마음을 불태우게 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나는 “완벽은 아픔 아닌 그 무엇도 전제(前提)하지 않는다.”는 시인 다나 폴드의 말에 동감한다.
무너지는 완벽 프로젝트
요가 수련원의 아침명상은 나에게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고 자기-중심의 속박에서 잠시 자유롭게 해주었다. 나는 도반들과 함께 노래하고 명상하는 달콤한 맛을 즐겼고 아침 식사 뒤에 일터로 차를 모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아침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뜻밖의 복병과 맞닥뜨렸다.
그 무렵 나는 우리 요가 센터의 총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를 앞두고 주말 스태프 미팅을 하고 있는데 지역 공동체 회장이 잔뜩 성난 얼굴로 뒤늦게 나타났다. 내가 그에게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었다.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그가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걸 좀 보시오.” 그가 내 앞에 던지듯이 내민 것은 앞으로 있을 행사를 알리는 광고지였다. 그런데 거기 커다랗게 붉은 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맙소사, 날짜가 잘못 인쇄되어 있지 않은가? 그 광고지를 작성한 게 바로 나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당황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잘못된 광고지를 삼천 장이나 찍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일생일대의 실책이었다.
우리는 광고지를 다시 만들고 발송을 하루 이틀 미루기로 하는 등 몇 가지 수습책을 의논하였다. 머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빴지만 스스로 저지른 잘못이 무거운 돌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회의를 마치면서 나는 사과(謝過)의 말을 꺼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책임입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나는 사람들 눈길이 나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질책과 분노의 열기도 느껴졌다. 눈시울이 더워졌다. 하지만 눈물을 삼키면서 말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로서는 참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했어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광고지 문안을 검토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격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 계속 내 머리를 점령하고 나를 윽박질렀다.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에 성실한 대신 다른 요가 교사들한테 내 요가 교실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섬기기보다 자기 수련의 성과를 나타내 보이는 데 마음이 가있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기적이고 불안한 사람의 모습이 나한테서 보였다. 주변 모든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내가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 원치 않는 자아 속으로 침몰되었다.
그렇게 힘든 며칠을 보내는 동안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괜찮은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자기가 발전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주려고 몹시 애써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학생으로 사회활동가로 요가 수련자로 그리고 교사로서의 자기-성취를 꾸준히 체크해왔다.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하면서 남을 잘 도와주고 남의 말을 잘 듣고 매사에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온 나였다. 정말로 나는 요가와 명상을 수련하는 데 누구보다도 열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단순한 실수 하나로 그 모든 자긍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스스로 괜찮은 수련자라는 자의식 또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자신의 반발로 깨끗이 지워져버린 것이다.
자기-계발을 위한 그동안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자아라는 느낌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우주복은 작은 자아다
내가 혼수상태에 대하여 가르칠 때, 학생들이 자아의 모든 경험들을 나쁘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非)영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없애거나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수련원에 있을 때 가졌던 바로 그 생각이다. 지금 나는 우주복을 ‘작은 자아’(small self)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에고’(ego)라고 생각한다.
‘에고’는 보통 좋지 않은 의미를 함축한 말로 통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작은 자아(에고)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모든 사람이 살면서 몸과 마음으로 무엇을 할 때면 그것을 “내가” 한다고 생각한다. 그 ‘나’에는, 어떤 전통들이 “두려움에 뿌리박은 몸”이라고 말하는, 두려워하고 자기를 방어하는 자아가, 밖으로부터 음식과 섹스와 안전과 존중을 받고 싶은 ‘결핍된 자아’가 포함된다.
하지만 이 작은 자아는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참된 우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우리를 작은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다가 아니라 바다의 파도로 보는 것이다. 자기가 바다임을 깨달을 때, 비슷한 형태의 파도들―두려움과 방어기제, 분주함과 모자람 등―이 모두 우리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우리 자신은 아니다.
자기 정체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인식이 붓다의 가르침 중심에 있다. 그는 우리에게 즐겁거나 익숙한 경험들을 움켜잡으려 하고(집착) 불편한 경험들을 밀어내려고 하는(혐오) 굳어진 성향이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집착과 혐오는 우리의 참 자아에 대한 감각을 좁혀서 자기 자신을 제한되고 개별적이고 동떨어진 존재로 보게 만든다.
자기 정체에 대한 이 그릇된 인식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만든 이야기들 속에서 그대로 존속된다. 우리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목소리가 자기라고, 스스로 만든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자기라고, “저기 바깥” 세계에 대한 자기 견해가 현실이라고 믿는다. 당신은 직장, 가족, 친구들로부터 당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요구를 받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당신이 얼마나 많은 자유 시간을 원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지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과도한 작업, 자기 시간을 내기 위한 거짓말, 불안 심리를 달래기 위한 지나친 쇼핑 등 온갖 가짜 도피처로 당신을 쉽게 데려간다. 이런 이야기들을 되풀이함으로써 당신은 더욱 더 당신을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존재, 지나치게 친절하고 상냥한 존재와 동일시하게 된다. 이것이 당신의 지배적인 자아상을 형성한다. 바야흐로 당신의 우주복에 스스로 감금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데 당신한테는 유리한 조건이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고 다른 누구한테는 처음부터 유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화가 나고 경우에 따라서 난폭해지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힘과 재물을 축적하는 가짜 도피처로 당신을 이끌 수 있다. 자기 세계관을 반영하는 이야기들을 지어냄으로써 당신의 정체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자아로 굳어져간다.
두려움이 우리 이야기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 만든 자아상에 갇혀서 살게 된다. 내가 전에 그랬듯이, 마음으로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다”고 믿을 뿐 아니라 몸도 그 믿음에 연결된 감정들―낙심, 부끄러움, 두려움 등―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다”가 쉽게 지울 수 있는 관념이 아니라 아랫배까지 가득 찬 확신으로 굳어진다. 어김없는 사실로 느껴지는 거다. 다른 누구한테 상처를 입으면 그 사람한테도 뭐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이렇게 자기를 자기와 남들한테서 떨어뜨려놓고 보는 혼수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자기를 자신의 작은 자아(에고)에 동일시하는 일은 언제나 깨어있음의 빛이 닿지 않는 데서 생성되고 유지된다. 우리의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고)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에 깨어있지 않는 한, 우리 몸의 생생한 느낌들에 깨어있지 않는 한, 우리의 행동들 뒤에 두려움과 결핍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깨어있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된다. 이것이 혼수상태의 본질이다. 그것은 깨어있음과 나란히 있을 수 없고 우리가 지금 여기를 도피처로 삼을 때 해체되어 사라진다.
혼수(昏睡)에서 깨어나기
잘못 프린트된 글자 하나로 방아쇠가 당겨진 한 주간의 괴로운 경험으로 말미암아, 나를 나의 작은 자아와 동일시하는 낡은 버릇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평생 과제가 비롯되었다.
내가 나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비(非)영성적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나는 아무한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일할 때에는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비즈니스였다. 우연히 만나 수다를 떨거나 함께 회식하는 자리에서 될 수 있으면 빠졌다. 어쩌다가 일삼아 어울려보려고 하면 나 자신이 협잡꾼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몇 주일 뒤, 수련원에 속한 여자들 몇이 자기 신상 문제를 터놓고 얘기하는 감성수련모임을 조직했다. 나는 그 모임이 과연 내 문제를 좀 더 선명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참석하기로 했다.
첫 번째 모임이 어느 여름밤에 열렸다. 몇 사람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자녀들 문제를 털어놓았다. 그들의 말을 듣는데 내 속에서 조바심이 일었다. 이윽고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을 때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많은 요가수련을 쌓았고 요가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므로 내가 남들을 도와줄 수 있는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겉모습이다. 내 속에는 남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쉽게 남을 판단하는 내가 있다.” 잠시 말을 끊고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나는 직구(直球)를 던졌다.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보려는 나의 발언에 그날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에 없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의 부끄러움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그들의 반응을 눈여겨볼 수 없었다. 나는 급히 모임을 떠나 내 방으로 돌아와서 태아 자세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흐느껴 울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아픈 경험을 털어놓자 자기방어의 방패 하나가 부서졌다. 그러자 거친 세상에 알몸으로 선 느낌과 함께 괜히 말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대할 것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가지 요가동작을 해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무엇이 정말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이토록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이렇게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그동안 내가 밟아온 내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여전히 좀 더 많은 수련을 하고, 남들이 내가 바라는 대로 나를 보도록 조정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상황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도피처들의 정체가 밝혀지자 나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붙잡혀있고 싶지 않았다.
내면의 음성이 나에게 물었다.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태를 바꿔보려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러자 내장이 굳어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수치심의 깊은 수렁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오래 전부터 될수록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내면의 음성이 아주 고요하게 속삭이듯이 노래 후렴처럼 익숙한 한 마디를 들려주었다. “그냥 그대로 놔둬(Just let it be).”
나는 척추를 펴고 누워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요를 누르는 몸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은 몇 시간 전에 내가 한 말을 거듭거듭 곱씹으면서 무슨 말로 나를 설명할 것인지에 대하여 궁리하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놔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번번이 앞서 경험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돌아가는 내가 보였다. 그날 밤, 어둠속에 홀로 누워 있는 동안 이런 감정들이 나를 마냥 슬프게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에 내 모든 생기와 사랑이 메말라가는 것이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계속 흐느꼈다. 그러다보니 차츰 슬픔이 잦아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방석에 앉아 마음을 모았다. 마음이 고요해지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갈수록 선명하게 알아차려졌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가득 채워진 침묵의 현존(silent presence)이었고 슬픔의 파도, 말라가는 눈물에 대한 느낌, 크리켓 경기장에서 나는 소리, 축축한 여름밤…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의 공간(space of being)이었다.
그 열린 공간으로 생각들이 다시 부글거리며 떠올랐다. 스태프 미팅에서 나를 방어하던 모습과 함께 공개적으로 사과하려고 애쓰던 게 생각났다. 그러다가 문득 다음날 아침에 있을 요가교실에서 강의할 일이 떠오르며 긍정적이고 분명한 에너지가 생성되는 게 느껴졌다. 이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마치 내가 연극의 주인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기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갈수록 자기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모든 과정에서 주인공인 그녀가 자기에 대하여 좀 더 좋은 느낌을 가져보려고, 아픔을 피해보려고, 실패를 면해보려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또 하고 다시 하는(doing) 것을!
나는 한바탕 벌어지는 연극을 보면서 그 주인공이 ‘참 나’가 아니었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녀의 느낌과 반응들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지만 ‘참 나’의 표면에 떠있는 잔물결들에 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머릿속의 생각들, 가부좌 틀고 앉은 몸의 감각들, 고단한 느낌과 평안한 느낌 등―이 내 존재의 부분들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곧 나는 아니었다. 가슴이 활짝 열렸다. 이토록 제한된 세계에서 얼마나 슬픈 생을 살아왔던가? 이렇게 갈팡질팡 끌려 다니며 얼마나 고된 생을 외로이 살아왔던가?
혼수와 깨어남, 둘 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혼수상태에 있을 때 그리하여 두려움, 부끄러움, 분노 따위 감정들에 붙잡혀 있을 때 우리 안의 지성(知性)은 뭔가가 잘못된 줄로 안다. 잠시 동안,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나한테 뭔가 잘못되었고 세상이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모자람을 채우고 실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는 점차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친다. 그동안 작고 동떨어지고 결핍된 자아를 자기인 줄로 잘못 알고 살아왔음을 깨치는 것이다. 바로 이 깨달음의 순간, “나는 거듭해서 홍수에 빠지게끔 되어있는 금이 간 존재다.”라는 다른 착각 하나를 덧보태기 쉽다. 그러나 ‘일어나는 일들’을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그냥 그렇게 놔둘 때 우리의 작고 제한된 자아가 해체되면서 본연의 옹근 전체로 들어가 쉬게 된다.
그날 밤, 자아에 대한 나의 오래고 낡은 인식이 떨어져나갔다. 그러면 누가 나인가? 자아에 대한 오랜 인식이 떨어져나가면서 ‘참 나’는 어떤 아상(我相)에도 갇힐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현존 자체의 열린 공간, 말없이 깨어있는 침묵의 공간이 안방처럼 아늑하게 여겨졌다. 그러자 한 순간도 나에게서 떠난 적이 없던 감사의 경외의 느낌이 나를 가득 채워주었다.
내가 본 바로는 깨어남에 이르는 방편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대부분이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의식의 집중을 포함하고 있다. 내 친구 하나는 그림교실에 참여하여 거기서 ‘나무’나 ‘구름’이라는 관념을 넘어 끊임없이 바뀌는 모양, 색깔, 그림자, 본질의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관찰자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살아있는 질감, 색깔과 주관적으로 친밀해질 수 있었다. …‘생명의 춤’ 속에 내가 있었고 그것이 나였다.”
내가 아는 한 어머니는 십대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에게 깨어남의 문이 열렸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을 모으고, 딸이 이래야 한다는 자기 생각을 놓아버렸다. 그냥 아이의 목소리들 듣고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딸의 마음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가 느낌으로 전달되었다. 판단 없이 듣기를 배움으로써 그녀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나는 더 이상 비판하는 부모의 함정에 빠져있지 않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어찌나 신선하던지!”
참으로 믿음직한 일이지만, 정규적인 명상수련은 혼수(昏睡)의 겉모습―우리의 실패, 원망, 두려움, 분노, 절망 등―에 의식을 집중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가 어떻게 현존으로 거듭거듭 돌아올 수 있는지, 자기가 누군지를 어떻게 깨어서 끊임없이 알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다음 장(章)에서 말해보겠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혼수상태에 빠져들 때마다 그것을 좀 더 신속하게 알아차리고 자기를, 또는 남들이나 세상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통제하거나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혼수에서 깨어나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혼수에서 오는 고통은 지금 이 순간의 본향으로 돌아와서 ‘참 나’의 더 큰 진실에 다시 결속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자기의 참 자아로 깨어나는 경험을 서술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도의 스승 스리 니사르가닷타가 말하듯이, “깨달음에 이르면 당신은 완전하고 충만한 자유를 맛본다. 하지만 그것들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잘못된 것이 없다’는 부정적인 술어로 그것을 나타낼 수 있을 따름이다.” 혼수의 베일이 걷혀도 작은 자아의 즐거움과 괴로움, 희망과 절망은 계속해서 오고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정체가 아니다. 더 이상 우리는 무엇을 자기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이상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혼수로 말미암아 흐려져 있을 뿐인 천연의 순수함과 선함을 신뢰하게 되고 그것이 엄청난 안도(安堵)와 자유의 맛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명상실습: 자신한테 친절하기]
사랑어린 친절(metta) 명상은 우리가 옹근 전체 생명에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준다. 보통 출발은 자기 존재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간단한 연습은 우리를 혼수에서 깨어나게 하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기 자신한테 사랑어린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써 자기가 동떨어지고 결핍된 존재라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사랑으로 품어주는 바탕이 마련된다.
§
편안하게 고요히 앉아 몸의 긴장을 고루고루 풀어준다. 심호흡을 하는데, 숨을 들이쉬면서 우주의 따뜻하고 신선한 에너지가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감지하고 내쉬면서 자기가 끝없이 열린 우주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감지한다.
소리 없이, 또는 속삭임으로, 사랑어린 친절의 기도를 한다.
아래 기도구절들 가운데 마음에 와서 닿는 네다섯 구절을 선택하라.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사랑어린 친절로 충만하기를.
사랑어린 친절에 삼켜지기를.
안전하고 아늑함이 느껴지기를.
안팎의 해코지에서 보호받기를.
행복하기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를.
깊고 자연스러운 평화에 이르기를.
살아있는 기쁨을 몸으로 알게 되기를.
내 안의 참 도피처가 발견되기를.
머리와 가슴이 깨어나기를.
자유로워지기를.
이 기도구절을 반복하는 사이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이미지가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상을 하나의 실험이라 생각하고, 당신 가슴을 부드럽게 해주거나 열어주는 데 도움이 되는 단어와 이미지를 찾아본다. 이때 손을 가벼이 가슴에 얹고 자신의 온몸을 친절한 사랑으로 어루만져줄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대로 오랜 시간 이 기도구절들을 자신에게 들려주며 그 내용을 묵상한다.
명상을 마치며 한동안 고요히 앉아 몸과 마음에 의식을 집중한다. 텅 빈 공간과 부드러움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있는가? 당신 자신한테서 안방의 아늑함이 느껴지는가?
하루 일과 중에: 당신 자신을 친절하게 보살피면 보살필수록 그만큼 더 참 자아와의 결속과 혼수로부터의 깨어남이 몸으로 느껴질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도, 당신은 사랑어린 친절의 기도를 당신한테 해줄 수 있다.
흥분되거나 화가 날 때: 당신이 무슨 일로 겁이 나고 부끄럽고 당황할 때는 사랑어린 친절의 기도를 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거나 형식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럴 때면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자격미달인지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일 것이다. 그래도 판단하지 말고 그런 당신을 명상에 포함시켜라. “이런 모습의 나조차 사랑어린 친절에 삼켜지기를!” 그런 다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당신의 명상을 다시 시작하라.
말이 너무 기계적인 반복처럼 여겨질 때: 기도구절들을 생각 없이 그냥 되풀이하고 있는 당신이 보일 때에도 걱정할 것 없다. 당신 마음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그런 때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어린 친절에 깨어 있으려고 시도하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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