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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
(1917. 12. 30 북간도 명동촌~1945. 2. 16 일본 후쿠오카[福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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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은 해환(海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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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활동]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중국의 관립소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했으며, 옌지[延吉]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에 윤동주(尹童柱)라는 필명으로 동시를 발표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뒤 2년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남다른 친교를 맺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東京]에 있는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다.
유해는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고,
1968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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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7년 용정의 윤동주시비 앞에서 / 시인 김석림>
윤동주의 생애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윤동주 시인은 당시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에서 1917년 12월 2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파평(坡平)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년 음력 6월 12일 출생)은 그 당시의 상당한 인텔리였다. 그는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한 때 소학교 교편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1920년대엔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다시 유학을 하기도 했다. 시인의 어머니는 교육자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1862-1942) 선생의 누이였다. 김약연 선생은 당시 간도 주민들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이 고장 명동 소학교와 중학교 모두 그가 설립한 규암서숙이 모체가 되어 세워진 학교이다. 윤동주 시인은 원래 4남매였는데 아우 일주(一株)는 성균관대 교수로 일하다가 86년에 작고했으며 누이인 윤혜원(尹惠媛)은 월남하여 부산에서 거주하였고 아우 광주(光株)는 북에 남아 있어서 생사를 알 수 없다. 윤동주의 아명(兒名)은 해환(海煥), 아우인 일주는 달환(達煥), 그리고 막내 동생은 별환(갓난애 때 죽음)이었다. 이 아명은 모두 그의 아버지가 지은 것인데 자식들 이름 앞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지은 그의 부친의 정서적 일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시인 윤동주의 '동(東)' 자는 「명동」에서 따 온 것으로 그만큼 이 고장 명동에 대한 애착은 각별하고도 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66년 그의 증조부 윤재옥이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 이끌고 북간도 자동(紫洞)으로 옮겨 온 후,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때에는 다시 명동촌으로 이사, 자수성가하여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그의 동생들이 태어난 생가는 이 고장에서도 돋보일 만큼 큰 기와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고장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리 만큼 그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도 이름난 곳이었다. 이 고장에 대한 그의 부친의 애착과 집념은 특별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후일의 윤동주의 저항시인적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이 고장 명동촌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도 결코 군더더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자란 명동촌의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어주었다. 마치 존 키츠나 워즈워스의 고향이 그들의 시와 생애에 절대적 영향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당시에 명동 출신이라 하면 의례 배일(排日) 운동가의 낙인이 찍힐 만큼 삼엄한 대외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평생 일본(日本)이라고 부르기가 싫어서 왈본(曰本)이라고 불렀던 지사(志士)들이 많았던 것도 그 고장의 개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문재린(文在麟), 윤영석(윤동주의 부친), 문성린, 김석환 등이 그들이었다. 북간도에서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선생이 터잡고 있던 명동은 한 시인의 풍운에 찬 생애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고장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나 외숙인 김약연 선생의 가르침과 영향을 크게 받았다. 3·1만세 후에 결성된 '북간도국민회'는 상해 다음가는 임시정부 구실을 했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청산리(靑山里)대첩이 북간도국민회가 주도했으며 그 활약이 눈부셨다. 이 청산리 보복으로 일본군은 간도 지방의 우리 겨레 3만여 명을 무참히 학살한 일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태어나게 하고 그가 자란 지리적 상황 배경은 바로 이런 '역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 정신적 배경에는 이토록 사무친 민족적 비애와 울분이 서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이 명동 소학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학과는 조선 역사와 조선어였는데 이것이 씨(種)가 되어 항일정신의 싹이 텄으며 강인한 자아추구의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요람은 운명을 결정하듯이 천성적으로 감정이 밝고 예민한 시인에게 주변의 개성적인 풍물과 인정, 산천과 현실이 안겨준 불씨는 후일에 불굴의 투혼과 장렬한 기개를 양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다녔던 명동소학교는 네 명의 시인을 키워냈다. 자랑의 땅 간도 벌판은 그들의 시혼으로 불타고 그들이 남긴 언어의 체온 속에서 역사화된 꿈을 이루었다. 윤동주와 송몽규,《새삼스러운 하루》와《꿈을 비는 마음》등의 시집을 펴낸 문익환,《불 덩어리, 돌》,《별들의 이야기》,《돌들의 이야기》,《불의 눈》등의 시집을 펴낸 김정우 시인 등은 풍운의 명동지방이 낳은 시의 순례자들이다. 윤동주 시인의 외숙이며 이 고장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은 바로 김정우의 백부였다. 윤동주 시인의 나이 12살 명동 소학교 4학년 때, 그는 이미 서울에서 나오는 월간 소년잡지를 구독해서 읽었고 그의 고종사촌이며 동갑내기인 송몽규도 같은 문학소년으로서 몽규는〈어린이〉 잡지를, 동주는〈아이생활〉이란 잡지를 구독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서울의 월간지를 구독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그곳 문학 소년들이 힘을 합쳐〈새 명동〉이란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잡지명은 그 당시 존경의 대상이었던 한주명 목사(중앙신학교 교수)가 지어준 것이었다. 1932년에는 용정(龍井)으로 집과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용정가 제2구 1동 36호-20평 남짓한 초가집이었다. 그곳은 바로 1937년까지의 윤동주 시인의 작품 산실이기도 했다. 윤동주가 명동에서 30리나 떨어진 미션계 학교인 은진(恩眞) 중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시대와 환경의 압박요인이 있었다. 그 무렵은 일본이 중국을 짓밟고 만주에다 괴뢰정권을 세운 때여서 안팎으로 정세가 몹시 긴박하고 어수선했으며 그 고을에서도 좌우익 싸움이 치열하여 도무지 배겨나기가 어려운 때였으므로 어차피 도시로 빠져나가야만 할 궁지에 몰려있었다. 타의 반 자의 반의 이사였다. 은진 중학 시절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에 걸친 것으로서 축구, 농구, 웅변, 문예, 편집 등을 위시해서 그림과 디자인 방면까지 고루 취미와 소질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씨는 회고한다. 수학과 기하학에 특히 재미를 느낀 듯했고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성복을 고쳐 입거나 나팔바지를 곧잘 만들어 입기도 했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소원은 고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길림(吉林)을 거쳐 북경까지 갔다 온 송몽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으로 옮겨간 문익환 등을 더할 나위 없이 부러워하던 시인 윤동주 자신도 마침내 1935년 9월 평양숭실중학으로 배움의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학과가 서로 달랐을 뿐 아니라 학기 도중에 갔었으므로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야 했다.
그 무렵에 그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주로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가 발표 무대였다. 1939년 가을 무렵 용정의 정안구(精安區) 제창로(濟昌路) 1의 20으로 또 한 차례의 이사를 해다. 예전 집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집이었다. 캐나다 선교부의 조계지(祖界地)로써 경치가 매우 좋은 언덕바지에 세워진 집이었다. 주위 풍물이 회화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적도 드문 곳이어서 윤동주의 산책길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의 지은이 칸트가 규칙적인 산책을 즐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인 윤동주의 산책 기호(嗜好)는 정녕 유다른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삼베나 옥양목으로 차려입은 한복 맵시와 더불어 손에 들린 책은 산책길의 운치와 여유를 더욱 풍겨주었다. 풍채가 훤칠한 데다가 모든 행동이 의젓해서 남을 은근히 압도하는 면이 있었으며 어떤 차림이나 그에겐 아주 잘 어울렸다. 일본 옷인 '하오리'나 '유가다'를 걸친 조선인을 보면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으며 친구들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일부러 우리말로 대답하곤 했다. 그는 노래도 곧잘 불렀다. 현재명 작고인 '희망의 노래', 미국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그리고 '산타루치아', '아, 목동아'... 그 중에서도 유독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애창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애절한 흑인영가의 멜로디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진 탓이었는 지도 모른다. 영국의 호반이 워즈워스를, 움부리아 숲이 성(聖) 프란시스를 태어나게 하였듯이 간도는 시인 윤동주의 성장배경이었다 특히 용정마을은 민족문화의 중심지요 한교(韓僑) 사회의 경제적 종교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당시 약 2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학교를 세워 구국이념과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3·1절이 되면 단군 임금의 초상화를 정면에 걸고 그 옆에 태극기를 내어 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광복의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하곤 했다. 윤동주 시인의 성장 환경이 이만큼 치열한 생존 여건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피나는 환경적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 이미 그의 가슴 속에는 곧은 신념과 대의를 위한 십자가의 개념이 차분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해 연희전문 학교에 입학했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할할 때 그의 아버지 윤영석은 여러 가지로 많이 망설였던 모양이다. 이 험난하고도 어려운 시대에는 의학을 해야만 무난히 살아갈 수 있지 사상적인 운동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의학을 한다면 공부를 시키고 싶으나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시키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중에 그의 조부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권함에 못 이겨 본인의 생각대로 할 것을 결정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시키기로 결정이 되었다. 현실 인식의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그의 내면과 고통은 차츰 시에 대한 집념의 확산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밖으로 중일(中日) 전쟁이 확대되어 갔으며 안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고 특히 지식인에 대한 증오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언더우드 일가가 창립자가 되고 선교사 측의 정신적인 뒷받침과 국제적인 관심도가 높은 연희전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으려니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걸핏하면 연전 교수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곤 했던 시기였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일정한 법이 없는 세상이었다. 이따금 윤동주 시인은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 애국가, 기미 독립 만세, 광주 학생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묵시적 동조를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정직하고 맘씨가 깨끗할 뿐 아니라 폭넓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바로 그것은 성장시의 가정환경이나 곧은 인품에서 나온 것으로서 순수한 열정의 솟아남이었다. 시인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도 말한다. 소설가 장덕순씨는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도 자기는 회의와 일종의 혐오로 자신을 부정하는 휴머니스트다.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시작에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전문학교에 입학시험 보러 상경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때 그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시인 동주는 나를 위해 하숙방을 얻어 놓고 역까지 마중나왔다. 저녁 늦게까지 내 하숙방에서 이야기하다가 동주는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나갔다. 아마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여독을 풀자고 자리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밖에서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깼다. 동주가 다시 온 것이었다. 방에서 냇내가 나니 창을 좀 열고 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내가 들창문을 좀 열어 놓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어두운 신촌 굴길을 타박거리고 더듬어 갔다. 뒤에 들으니 동주는 가깝지 않은 기숙사까지 다 갔다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왔더라는 것이었다. 그 방에는 학생 하나가 냇내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주가 '너는 아늑한 호수에', '나는 험준한 산맥'에 있겠다는 그 시심(詩心)과도 같은 일화이다. 외유내강,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모가 나는 일이 없었고 누구도 그를 지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없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변명하는 데는 너그러웠지만 스스로 용서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일제의 분노나, 울분, 비애와 절망 등을 조용히 안으로 깊이 삭이면서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는 온유한 성품이었다. 그는 행동파이기보다는 사색형에 가까웠다."
연전 시절의 그의 교우관계를 보면 동요나 동화 등으로 활약했던 엄달호, 판소리의 김삼불과 풍류객 김운용, 영어에 능통한 한혁동, 강처중, 한글 학자 허웅, 영문학의 이순복 등을 꼽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이라는 강의를 특히 좋아했으며 민족주의의 사상을 고취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강의이기도 했다. 윤동주의 연전시절 이야기를 연전 2년 후배이며 윤동주의 자필 시고 3부 중의 한 부를 극적으로 보관했다가 해방 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상제(上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병욱씨의 회고담을 통해 시인의 면모를 그려본다.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운 입술,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라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려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이 없었고 CCC라는 글자가 새겨진 교복의 단추를 모로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반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중략>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협성교회로서 이화여전 음악관에 있는 소강당을 교회 당으로 쓰고 있었다. 거기서 예배가 끝나면 곧이어서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 성서반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도 도주가 내 곁에 있는 것을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이끌어 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이지만,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에 나는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뚜렷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거예요."
그가 연희전문에 다닐 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은 외솔 최현배(崔鉉培), 이양하(李敭河), 김윤경(金允經) 세 분 선생이었다. 아마도 한글에 깊은 애정과 매력을 느끼고 시를 쓰게 된 동기도 결정적으로 이분들의 영향이라고 믿어진다. 윤동주의 한글에 대한 애착과 흠모의 정은 대단했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돌아가면 연전 자랑을 하는 가운데 특히 한글을 배울 수 있어 기쁘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떳떳이 말하곤 했다. 윤동주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주변에 술친구도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중국집에서 외식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때 더러 배갈을 청해 마시는 그런 정도였다. 술기운이 돌아도 자세는 별반 흐트러짐이 없었다. 평소보다 말수가 조금 늘어난 정도였을 뿐, 도무지 횡설수설이란 게 없었다. 결국, 술은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의 장점은 남을 헐뜯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시종여일 입을 다문 채 함부로 게걸게절 혀끝을 놀리는 일이 없었다. 옛말에도 술을 주어보면 그의 덕을 안다고 했거니와 그만한 혈기방장한 나이에 술에 기대어 남을 욕하거나 빈정거리고 허세를 부리는 일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술과 여자와 노래……이 세 가지 것들이 우리 인생을 장식한다'는 영시(英詩) 구절이 있지만 적어도 윤동주에게는 무관한 얘기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정신적인 청교도주의로 일관했을지언정 그는 결코 의식적으로 세속을 멀리하거나 도덕군자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선비로서의 정제된 자세와 정신적 품격이 그로 하여금 늘 행동보다는 사색, 타협보다는 저항 쪽에 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연전을 마친 뒤 고종 사촌인 송몽규는 교토제대 철학과에, 동주는 도오지샤대학 영문과에 전학했다. 이를 계기로 짧고 분방했던 일본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안하고 비우호적인 정세 속에서나마 그들은 역시 젊은이답게 이국의 하늘 밑에서 맘껏 견문을 넓히고 감성을 다듬을 수가 있었다.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 근처를 쏘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물들을 익히고 하꼬네나 비와호 등지를 바람 같이 구름같이 휘돌아 오기도 했다. 그때 이미 동주는 사고 면에서 어엿한 철학적 체계를 갖춘 인테리로서의 풍모를 엿보이게 해줬을 뿐 아니라 굳건한 항일 레지스탕스로서의 행동 윤리를 몸에 익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족속되는 윤영춘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나는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 방에서 추운 줄 모르고 새벽 두 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이것이 거의 그날 그날의 과제인 모양이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프랑스 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와 프랑시스 잠의 시는 구수해서 좋고 신경질적인 쟝콕토의 시는 염증이 나다가도 그 날신날신한 맛이 도리어 매력을 갖게 해서 좋고 나이두의 시는 조국애에 불타는 열성이 좋다고 하면서 어떤 때는 흥에 겨워 무릎을 치기도 했다. 이 무렵이 시인 동주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였던 것 같다. 굳이 행복의 절정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나름의 불안의식 속에서나마 자유로운 시적 상상과 오묘한 영성의 자극이 부단히 꽃을 피운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시인의 행복이란 어쩌면 절대적 고독과 끊임없는 불안의 늪, 창백한 지적 방랑과 마음의 열기 속에서 찾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어둠을 짖는 개는 가자 가자 <또 다른 고향(1941. 9)> 이 시에는 그 당시 쫓기는 자의 심정과 위치에서 일종의 세찬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의 정신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 있다. 아마도 이상(李箱)의 <오감도(烏敢圖)>를 방불케 하는 시심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싶다. 무엇에 의지하거나 호소하지 않고선 정신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내공해 들어오는 갈등과 번민에서 스스로 풀려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투철한 선비 기질과 청교도적인 양심의 세계는 그로 하여금 외부와의 일체의 비타협과 단절 쪽으로 몰고 나가서 팽팽히 긴장된 디아노이아(사상) 세계를 지탱하도록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그 당시의 주변 상황을 살펴본다면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날만 새면 전선으로 글려나가는 출정군인과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는 병사와 백골로 돌아오는 전몰군인의 행렬을 쉽사리 대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국인 학도병들의 유골 행렬, 무언의 귀환을 대할 때마다 거꾸로 피가 끓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을 뿐 아니라 허무주의적인 의식 속에 빨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의식분자로서는 도저히 평범하게 보아넘길 수 없는 세찬 민족 감정과 분노와 허무를 동시에 느꼈을 법하다. 앞에 쓴 <또 다른 고향>만 하더라도 그러한 그의 의식 세계와 이미지가 자기 자신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작품이라도 할만 하다. 일제는 패전이 임박해오자 난무하는 유언비어 속에서 더욱 서슬이 퍼렇게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의 눈초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져 갔다. 워싱턴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 태극기가 내걸렸다드니, 한국 학생 대표가 독립의 소청을 위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중국 장개석 총통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체포되었다느니 해서 인심이 극히 뒤숭숭한 판이었다. 이는 숫제 일본인들의 조작한 거짓말이었다. 1929년 관동대진재 때도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한 유언비어의 날조극을 연출하더니 똑같은 수법으로 그들은 다시 한국 청년들을 때려잡기 위하여 별의별 억지와 허언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날마다 불길하고 우울한 소식만이 전해졌다. 전황도 급박하고 불리했지만 반사적으로 한국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무차별 체포, 구급이 자행되고 있었다. 근대사의 암흑기 절정이었다. 윤동주도 우울했다. 벽에 부딪힌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더욱더 말수가 적어지고 쫓기는 자의 심정이 되어갔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향길에 오른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세운 일경의 명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비국민(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 서구 사상이 농후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확실한 행동의 명세는 없지만 그의 죄명은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이고 시가 저항시로서 성립되기 위해선 먼저 그 해답이 의식사의 맥락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시사적 통념처럼 그를 저항시인 쪽에 비중을 두고 생각해 온 이론적 근거는 다름 아닌 투옥의 명분인 '독립운동'이란 면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이 대명제가 뒤집어지는 날에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친지들의 증언을 종합한다면 그의 피체(彼逮)는 실제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가 아니라 평소 그가 지닌 항일적 색채의 민족의식을 구실로 삼은 일제의 과잉 단속 행위였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논리적으로는 투옥과 옥사로 이어지는 그 생애의 종말을 저항으로 인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평론가들의 구구한 이론 전개에도 수긍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말년의 물리적인 상황만을 충실히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가 구금된 후에 교토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던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취조의 양상이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해졌던 것과 똑같이 혹독하고 끈질긴 것이었음도 몇몇 방문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었다. 취조 형사는 그가 쓴 조선어로 된 시와 산문들을 모조리 일본어로 번역을 시켰다. 윤영춘씨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잠깐 그를 만났을 때 어깨너머로 본 원고 뭉치는 꽤 부피가 큰 것이었다. 어쩌면 몸이 축나기 전에 써둔 원고까지도 합쳐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니 그 푸짐한 분량을 짐작기 어렵지 않다. 그때 취조실에 놓여 있던 그 원고들이 지금 전해진 유고로 다 수렴됐는지 여부는 미심쩍은 일이다. 아마 많이 산실됐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경황 중에 어찌 그 원고가 온전히 간수되었으랴 싶으면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동주는 2년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석방 운동은 엄두조차 낼 형편이 못되었다. 일제의 일방적인 올가미 속에 완전 방치된 셈이었다. 그 무렵의 처절한 상황과 그의 심경이야 일일이 설명할 길이 없다. 가뜩이나 예민한 감성과 정서적인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역경이요, 피나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주로 역사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평자들은 그의 투옥―옥사의 과정에다 비중을 두었다. 충분한 타당성이 인정되는 대목이다. 그 경위나 내막은 어떻든 간에 한 인간의 생애가 투쟁과 옥사로서 마감됐다고 하는 것 자체가 비장미를 나타내고 저항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동주가 죽은 것은 1945년 2월 16일. 조국이 광복되기 꼭 반년 전의 일이었다. 동주의 부음을 듣고 부친 윤영석과 족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를 방문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열흘 뒤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송몽규는 살아있었다. 산 사람부터 먼저 찾기로 했다. 면회 절차 수속을 밟으며 뒤적거리는 놈들의 서류를 보아 한즉 '독립운동'이라는 글자가 한자(漢字)로 판 박혀 있는 것이었다. 옥문을 열고 들어서자 간수는 우리더러 송몽규와 이야기 할 때는 일본어로 말할 것, 너무나도 흥분된 빛을 본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시국에 관한 말은 일체 금지라는 주의를 받고 복도에 들어서자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왔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 왔느냐고 묻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하고 말을 흐렸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었다. 또다시 내 손목을 붙잡는 몽규의 손길은 뜨거웠다.
관 뚜껑을 열었을 때 동주의 시신은 원형 그대로 나타났다. 부친 윤영석은 기가 막힌 나머지 "동주야¨"만을 소리쳤을 뿐 한동안 울지도 못했다.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망한 지 열흘이 지났으나 규슈제대에서 시신에 방부처리를 한 덕분에 전혀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더 가증스럽고 원통한 일이기도 했다. 임종시 뜻을 알 수 없는 격렬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면서 담당 간수 한 사람이 동정을 표시했다. 그토록 애타게 염원하고 기다렸던 조국 광복을 반년 남겨 놓고 그는 한 많은 이역 하늘 아래에서 숨을 거두었다. 짧지만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몸으로 살고 간 시인이었다. 그 삶 자체가 하나의 불길이요, 별이요, 신앙이었던 시인의 생애는 세월이 흐를수록 영롱한 광채를 띤다.
전쟁 말기의 일제의 단말마(斷末魔)적 현상의 하나로 생체실험을 꼽을 수가 있는데 윤동주의 사인도 계속된 식염수 주사에 있다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끌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한 일본인 유학생 코노에씨가 제출한 논문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가 그것이다. 매우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짐작의 불확실성을 넘어 정확한 논리와 고증으로 가려낸 '시인의 사인'은 퍽 생산적인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그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였건 간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생체실험'의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일제의 잔인성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폭로해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생체 실험의 모르모토'- 그 사실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그가 겪어야 했던 절망적인 말년의 상황이 한 번 더 후세의 독자들을 울리고도 남는다.
윤동주의 무덤은 북간도 뒷동산에 있다. (용정 동산) 세월이 흘러도 말이 없는 고독한 비목(碑木)―이제는 갈래야 갈 수조차 없는 금단의 지역이 된 그곳, 시인의 별은 북녘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다. 그의 뜨거웠던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참뜻을 모르는 이에게까지도 그 무덤은 살아서 속삭이고 그의 시는 영원히 향수처럼 나부낄 것이다.
해방 후 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단짝 친구였던 정병욱 덕분이었다. 1947년 2월 16일, 그의 유족과 친지들이 모여 첫 추도회를 했었다. 1948년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호의로 첫 시집이 상재되었다. 1955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시집의 증보판을 간행했었다. 1967년 제3판 시집이 햇빛을 보게 되자 세상은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를 완전히 달리했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 이것은 시집 초판(1948년)의 서문에서 정지용이 내뱉은 경탄이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내가 한국 신문학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일제 말기의 한 대목 즉 1941년 이후 5년간을 <암흑기>라고 부른 데 대하여, 어느 젊은 작가가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시인 윤동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레지스탕스의 시기라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내용을 대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였고 다음번엔 개정판을 낼 때에는 기어이 그런 의사를 반영시켜서 제목을 바꾸리라고 마음먹었다. ……<중략> 그 뒤 이 시인의 가치가 날로 밝혀져 가는데 따라서 기성의 문학사의 내용을 새로 써야 하게 될 만큼 그 존재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집 증보판(1967년) 부록에 실린 평론가 백철 박사의 글이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윤동주의 시집이 엮어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는 3부로 정리되었는데 그 하나는 윤동주 자신이 가졌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선생이, 남은 한 부는 정병욱씨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시가 <별 헤는 밤>이었다. 1941년 11월 5일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자로 되어 있다. 짐작건대 <별 헤는 밤>을 쓰고 난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하고 그 가운데서 한 부를 정병욱씨에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가야 병을 고친다. 병원은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곳이다. 그래서 '병원'을 선택하려 했었다는 그의 설명은 꽤 명분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처음에 이양하 선생은 출판을 만류했었다. 작품 가운데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이 일제 관헌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했을 뿐 아니라 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미리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극한 사제간의 정리(情理)와 사랑이 빚은 충고였다. 동주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실망의 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세상을 내다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위안을 자신의 안에서 찾았다. <간>도 그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시인의 치열한 정신의 내공은 언어 이전의 분노와 달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참회록>을 쓴 것이 1942년 1월 24일자. 어쩌면 이 작품이 그가 도일하기 전, 고국에서 마지막 쓴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 뒤 모든 사태는 뒤바뀌고 사물의 원형은 산산조각이 났다. 동주가 맡긴 시고 가운데서 정병욱씨에게 건넨 작품만이 살아남아 1948년 정음사에서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병욱씨는 동주가 검거된 지 반 년 후에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 그는 동주의 시고를 그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동주가 살아 올 때까지 소중히 지켜 주기를 당부했었다. 만약에 동주나 자기가 죽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거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는 그 시고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행히 그는 살아서 무사히 귀가하였다. 그때 어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놓으셨다. 이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밝은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의 경위이다. 동주의 시들이 일본에서 정병욱 등 친구와 가족에게 발송되고 또 아슬아슬하게 보관되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플라워> 다방(?)에서 윤동주의 추도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정병욱은 그의 필적을 고스란히 복사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김삼불은 윤동주의 시를 세밀히 분석 비판했다. 심지어 품사별로 풍계를 내고 김소월 시보다 한결 우수하다는 쪽으로 이론을 폈다. 이때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시인 정지용이 각도를 달리한 비평을 해서 이채를 띄었다. 즉 민족의 얼을 시에 담고 순교로 겨레 앞에 쓰러진 시인의 아름답고 귀한 시를 자로 재고 칼로 썰고 잘라내어 이리저리 까발리고 난도질하는 것은 더 가혹한 일이 아니냐고 반론을 펴면서 그 나름의 총괄적인 찬사를 보냈었다. 윤동주의 시를 '민족시의 별'로 인식시키고 암흑기를 저항시로 승화시킨 데 있어서 정지용의 후견이 크게 이바지했음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윤동주는 명동촌이 낳은,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 빛을 보내는, 꺼지지 않는 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둠을 거부하면서 설정된 어둠의 상황 속에서 살았다. 그는 '마음'으로 한 시대와 양심을 노래했다. 비록 짧은 생애요, 어둠으로 점철된 공간이긴 했어도…….
- 시인 김윤식
<윤동주 팬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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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계]
중학시절 동시 〈병아리〉·〈빗자루〉·〈오줌싸개 지도〉·〈무얼 먹구 사나〉 등을 발표했고, 연희전문학교 시절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와 교지 〈문우〉에 시 〈자화상〉·〈새로운 길〉 등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대부분 현실세계의 모순과 그 모순을 초월하려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지만, 초기의 시 몇 편은 예외적이다.
초기에는 평화롭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주로 읊었는데, 행복한 유년시절을 노래한 동시 〈햇비〉와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심(童心)을 노래한 시 〈반딧불〉·〈굴뚝〉·〈병아리〉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러한 사춘기의 낙관적인 생각은 시 〈눈〉에 와서 어느 정도 걸러지고 1937~38년에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읊었다.
그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을 나타낸 좀더 성숙해진 시를 썼는데 이때의 시의식은 때로 자전적 성격에서 출발하거나 종교적 의식의 천착(穿鑿)으로 이어지고, 때로 민족의식과 시대의식으로 발전하거나 고향지향성으로 나타났다.
대표시 〈자화상〉(1939)은 자전적 시로 실존적 의식세계의 출발점이 되며, 〈별 헤는 밤〉(1941)·〈참회록〉(1942) 등에 나타나는 자아성찰과 미래를 향한 낙관적 의지, 실존적 윤리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달밤〉(1937)·〈유언〉(1937)·〈아우의 인상화〉(1938) 등에는 고독과 비애를 실감나게 담아냈다.
이러한 자전적 성격은 대표시 〈별 헤는 밤〉의 결구에 집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러움과 절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의 지나간 삶을 토대로 자랑스러운 밝은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의 목소리였다. 또한 〈사랑의 전당〉(1938)에서 보이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은 〈십자가〉(1941)에 이르면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바탕을 둔 비장미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결의를 실존적인 성실성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희생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나며 신앙인으로서의 실천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밖에 이러한 자기 희생과는 또다른 그리스도교적 세계인식을 보여준 시로 1941년에 발표한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새벽이 올 때까지〉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그는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현실에 정서적 연원을 둔 작품을 많이 썼다.
〈십자가〉를 비롯하여 〈무서운 시간〉(1941)·〈또다른 고향〉(1941)·〈간 肝〉(1941)·〈쉽게 씌어진 시〉(1942) 등이 그 예인데, 〈무서운 시간〉에서는 행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 나온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했는가 하면, 〈또다른 고향〉에서는 상황의식에 따른 자아성찰과 행동을 위한 결단을 내비치고 있다.
〈간〉에서는 구토지설(龜兎之說)과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연결시켜 고통스러운 현실과 맞서 유혹과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 유학중에 쓴 〈쉽게 씌어진 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고독을 토로하고 시대의 어둠에 대해 시로 대응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되는 〈서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시로서, 특히 '하늘·바람·별'의 이미지가 서로 대응되어 그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정병욱이 그의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소중히 간직해두었다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이후, 시집으로 〈별 헤는 밤〉(1977)·〈윤동주시집〉(1984) 등이 나왔다. |
윤동주 시인의 문학사적 의의
- 화해와 융화의 세계를 열어준 윤동주

한국 현대 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고 있는 전기적 요소와 시적 사유의 결합은 자의식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근원적 질서 속에서 그의 본질은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그 흐름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소멸의 내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직시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그의 부끄러움의 시어가 탄생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의식 세계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대적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 던져
윤동주는 유별나다고 할만큼 시대적 현실을 포함한 세계를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감지했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늘 세계를 향해 곤두서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쉽게 쓰여진 시] 전문
그의 최후의 시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시]에는 손을 내미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대립이 있다. 이것은 작품 외적으로는 식민지의 청년 윤동주와 지배국인 일본으로 건너온 유학생인 자신과의 대립이며, 또한 일상적 인간과 시인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밤과 아침의 대립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대립되는 세계 사이에서 좌초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킨다. 따뜻한 체온의 나눔이 감지되는 이 악수의 이미지는 먼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다른 자기 응시가 되는 것이다.
'우물'이나 '거울'의 이미지가 동적으로 변화해 자기 성찰과 수련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길'의 공간이다. [서시]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운명적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윤동주 시의 곳곳에서 여기저기로 뻗어 있는 '길'들과, '길 모퉁이', '뒷골목', '어느 낯선 거리'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길]의 일부
[길]의 공간성은 언제나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길은 바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길이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정신적 세계로서의 길이다. 시인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부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참함을 넘어서 끊임없이 가야 하는데, 이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이 여전히 담 저쪽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곳에 남아 있는 자아가 화자가 잃어버린 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관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 현재 잊고 있는 존재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먼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가는 것이며, 고통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길의 선택을 계속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이며, 이러한 결의나 다짐의 태도는 윤동주 시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결국 윤동주의 시와 그의 생애가 모색되어 있는 초점은 따뜻한 화해의 세계로 모아진다. 어둠과 빛, 자기 부정과 긍정, 환자와 건강인, 그리고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게 하는 사랑과 정다움 등 의미의 대응 관계를 이루는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 융화의 세계인 것이다. 그 균형과 조화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떠나며, 자아의 탐구와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상충 속에서 요동하는 괴로움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예리한 현실적 상황과 이상적 가능성의 부딪침 사이에서 윤동주의 감수성은 공존을 시도한다. 그 감수성은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포용하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나와 타인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해, 공존, 융화의 세계 보여 주어 대립적인 것을 조화시켜
따라서 윤동주의 모든 시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긍정적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는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그 두 대립되는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항은 어린 날의 추억이나 친구들, 어머니와 순이, 때로는 이웃 사람들로 표상 되고 있다. '노여움, 억울함, 아까움 같은 것을 마음속에 조용히 새기고는 늘 변함없는 미소로 사람을 대하던' 그의 성품은 밤비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열쇠를 사람들 사이의 연대 의식으로 융화하려는 시 정신과 일치된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부정적인 현실의 나를 극복하여 시적 초월로 자기 존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모색의 과정을 보여 준다. 대상을 주관화시키는 이미지의 처리법, 자기가 또 하나의 자기에게 다짐하는 미래 지향적 시제, 흐르듯 이어지는 시어의 연속적 흐름, 산문적 형식 등 그의 시를 특징짓는 모든 경향들은 이러한 그의 내면적 요구와의 연관에서 해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행위는 괴로워하는 자기가 희망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또 다른 자기에게 내미는 악수였고, 나와 타자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연결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이웃과의 연대 의식을 우리 모두에게 깨우치는 따뜻한 화해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異邦人 / 자유스케치>
윤동주 시모음 /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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