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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미국이 경멸받지 않으려면—160년간의 관성을 바꿔야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AI 동료들
2026-08-02
7월 28일 오후 5시 7분, 평택 오산기지에서 백린이 흘러내렸다. 대피령이 내려졌고, 36분 만에 해제됐다. 미군은 "위험성이 낮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장면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2015년, 살아있는 탄저균이 페덱스 택배로 이 기지에 배달됐던 그 사건이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이 데자뷰 앞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관리 부실"이라는 설명에 만족할 수 없다. 왜 반복되는가. 그 답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곳에 있다.
청산되지 않은 원죄
미국이라는 국가는 원죄 위에 세워졌다. 원주민의 땅과 생명을 수탈한 토대 위에서. 노예제는 남북전쟁이라는 참혹한 값을 치르고서야 청산의 실마리를 잡았지만, 원주민 학살은 아직도 미해결이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이를 '제노사이드'라 부르고, 뎁 홀란드 내무장관이 "이 나라는 제노사이드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미국 스스로도 이 빚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원죄가 왜 오산기지의 백린과 탄저균으로 이어지는가. 원죄의 핵심이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의 생명은 부차적으로 취급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체계이기 때문이다. 그 인식체계가 19세기에는 원주민에게, 21세기에는 동맹국 국민에게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의 폭로는 이 인식체계의 현재형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직전, 트럼프의 승인 아래 네이비실 6팀이 김정은의 통신을 도청할 장비를 설치하러 북한 해안에 침투했다가, 조개잡이 민간 잠수부들과 마주치자 전원 사살하고 사체의 폐에 구멍을 뚫어 바다에 수장시킨 뒤 철수했다.
법률상 통보 의무가 있는 의회에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2026년 8월, 미국 법무부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린 기자에게 취재원을 대라는 소환장을 발부했다. 비무장 민간인을 수장한 자들에 대한 응징은 없고, 그것을 드러낸 거울을 벌하고 있는 것이다.
백린과 탄저균이 과실이라면, 수장은 고의이고, 소환장은 은폐다. 셋은 같은 인식체계의 세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이런 일들이 만약 미국 동부의 인구밀집지역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면, 미군은 정말 "위험성이 낮다"는 한마디로 상황을 종결지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160년의 관성
이 인식체계는 한반도에서 하나의 관성으로 지속되어 왔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의 통상 거부에도 아랑곳없이 평양까지 밀고 들어왔고, 1871년 신미양요는 군함을 앞세워 조선의 문을 열려 한 포함외교였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인정받는 대가로 조선을 일본에게 지불수단으로 넘겼다. 1950년 애치슨 라인은 한반도를 방어선 밖으로 밀어냈다.
형태는 바뀌어도 시선은 하나였다. 한반도를 주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 개항의 대상으로, 거래의 카드로, 소모 가능한 전초기지로 보는 시선이다.
최근 부임한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가 첫 메시지로 꺼낸 "140년의 굳건한 우호"는, 이 충돌과 거래의 역사를 지운 선택적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관성의 가장 세련된 표현이다.
감정은 쌓인다, 주권자 국민에게
탄저균이 처음 알려졌을 때 한국 사회는 충격을 받았지만, 분노보다 불안이 앞섰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백린 사고가 반복된 지금, 반응의 결이 달라졌다. 이번엔 불안이 아니라 피로와 냉소다.
여기에 지난해 조지아주 사태가 겹쳐 있다. 미국이 오라고 해서 수십조 원을 들고 간 기술동맹의 엔지니어들을, 이민 단속이라는 이름으로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간 사건이다. 생명을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습관(백린·탄저균)과 존엄을 부차적으로 취급하는 습관(조지아)과 생존 조건 자체를 지렛대로 취급하는 습관(부쩍 공세적으로 변한 연합훈련)이 겹치면서,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자라고 있다. 과연 미국은 동맹이 맞는가.
이것이 무서운 이유가 있다. 동맹은 문서와 엘리트 사이의 계약처럼 보이지만, 민주국가에서 동맹의 최종 심급은 국민의 마음이다. 한국은 대통령 둘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고 계엄을 여섯 시간 만에 맨몸으로 무산시킨 나라다. 루프탑코리아를 잊었는가. 주체적 정치적 역량을 언제든 발휘할 수 있는 국민이다.
이 나라에서 대리권력자 몇을 관리하는 것으로 동맹이 유지되리라는 계산은 모래 위의 집이다.
감정 계좌의 예금주는 청와대가 아니라 국민이며, 사고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계좌에는 조용히 손실이 쌓인다. 논리는 협상 테이블 위에서 조정될 수 있어도, 축적된 배신감은 협상되지 않는다.
관성이 보지 못하는 신현실
문제는 이 관성이 이제 미국 자신에게 위험해졌다는 데 있다. 관성이 형성되던 시대에 한반도는 대체 가능했다. 최악의 경우 일본만 지키면 된다는 계산이 성립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메모리 반도체는 1990년대에 잃었고, 조선업은 미국이 함대 재건을 굳이 한국에 기대기로 할 만큼 쇠퇴했으며,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한국은 미국의 기술문명 체제를 떠받치는 하중벽이다. AI 패권 경쟁의 병목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메모리 반도체의 압도적 비중, 조선과 배터리와 방산까지 —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미국에게 한미 기술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불가결이다.
만의 하나 한반도에서 불상사가 생기면, 미국이 잃는 것은 동맹 하나가 아니라 AI 인프라의 물리적 기반이고 함대 재건 계획이고 공급망의 척추다. 그런데 매파의 관성은 억지력을 높인다며 한반도의 전장화 확률을 끌어올리고 있다. 지켜야 할 금고 위에 화약고를 짓고 있는 것이다.
미군철수, 이제는 금기가 아니라 전략이다
그래서 나는 논의를 한 걸음 더 밀고 가고자 한다. 이 구조를 방치하는 것보다, 이제는 주한미군 철수를 진지한 전략적 선택지로 검토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적 반미가 아니라 냉정한 계산이다. 한국군은 이미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한다. 확장억제(핵우산)는 자동 발동 장치가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약속일 뿐이며, 그 이행 가능성을 100%로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반면 평택·오산의 기지는 억지력인 동시에 중국·러시아의 표적 1순위다. 주한미군이라는 '인계철선'은 미중 충돌이 벌어지는 순간 한반도를 자동으로 전장에 편입시키는 장치이며, 이 좁고 초고밀한 국토에 26기의 원전과 촘촘한 송전망이 얹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위험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게다가 기지에 집적된 생물학적 실험 물질(주피터 프로그램)이 전시에 유출된다면 그 재앙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제나 한국 민간인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한국을 방어할 전략적 유인은 주둔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한다. 한국의 반도체와 첨단기술 공급망이 어떤 형태로든 상실되는 것은 미국에게 기술패권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지킬 이유는 바다 건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데, 표적이 되는 지상군을 상시 주둔시킬 이유는 갈수록 옅어진다.
얼마전 쓴 글을 다시 소개한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69
워싱턴은 이미 계산을 마쳤다
이것이 한 한국인의 계산만이 아니라는 데에 이 글의 핵심이 있다. 철수를 말하면 '반미' 딱지가 날아오지만, 지금 철수와 감축을 가장 진지하게 말하는 곳은 다름 아닌 워싱턴이다.
현 국방부 정책차관 엘브리지 콜비는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주한미군을 북한 견제에 묶어둘 수 없으며, 북한 억제는 한국이 자주국방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한미군이 북한 억제의 "인질"로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
2025년 7월 싱크탱크 디펜스 프라이오리티스는 주한미군을 28,500명에서 약 10,000명으로 감축하고 지상전투부대를 철수시킬 것을 권고했는데, 공저자는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선임보좌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보고서의 진단은 우리의 표적론과 정확히 겹친다. 현재의 전진배치 태세는 중국에 너무 가까워, 충돌 시 살아남기 어렵고 억지보다 확전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미어샤이머와 월트의 역외균형론이 가리키는 지점도 같다. 2026년 국방수권법이 주한미군 하한선을 법으로 못 박고 트럼프가 거기에 유보를 단 것은, 철수가 이미 워싱턴의 살아있는 의제라는 방증이다.
물론 반론이 있다. 철수가 핵무장론과 일본 재무장을 자극해 군비경쟁을 부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확장억제의 불확실성은 미군이 주둔해 있어도 조금도 줄지 않는다. 주둔은 약속의 확실성을 보태주지 못하면서 확전의 위험만 보태고 있다.
그렇다면 확전 위험을 제거하는 쪽이 순이익이다. 군비경쟁의 우려는 단계적 감축과 투명한 로드맵, 군비통제 협상의 병행으로 다스릴 문제이지 철수 자체를 봉인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경멸이 도착하기 전에
미국에게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이런 무모한 시도를 벌이는 세력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경고와 응징을 스스로 해내는 것 — 즉 자기통제다.
미국사에는 선례가 있다. 1970년대 정보기관들의 폭주가 드러났을 때 처치위원회는 CIA와 NSA의 치부를 스스로 파헤치고 의회 감독체제를 세웠다. 그 자기교정 능력이야말로 미국이 존경받던 이유의 실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민간인을 수장한 작전의 책임자가 아니라 그것을 보도한 기자를 잡겠다고 나서는 나라가 되었다.
권력의 원리상, 두려움은 관계를 지탱할 수 있어도 경멸은 지탱하지 못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라고 했던 것이 바로 증오와 경멸이었다.
분노와 경멸은 다르다. 분노는 재협상 요구다 — 시정하라고 소리치는 것 자체가 아직 상대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다.
경멸은 위임의 비가역적 철회다 — 판결이 내려진 상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상태다. 분노는 시위로 나타나지만 경멸은 침묵으로 나타난다. 백린 사고 앞에서 한국 사회가 보인 피로와 냉소는, 분노에서 경멸로 넘어가는 문턱의 징후다.
미국에게 남은 시간은 한국민의 분노가 경멸로 바뀌기 전까지다. 분노는 아직 동맹의 언어이지만, 경멸은 이별의 언어다.
두 개의 길, 하나의 문
미국의 절제파는 지도와 계산기를 들고 철수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우리는 쌓여가는 감정과 주권의 감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두 길은 지금 같은 문 앞에서 만나고 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문을 여는 손잡이를 누가 먼저 잡을 것인가.
워싱턴의 계산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통보받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시간표와 우리의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을 먼저 차리는 나라가 될 것인가.
한국은 이제 반복되는 사고를 감정으로만 견디는 나라가 아니다. 스스로의 안보를 재설계할 힘과 권리를 가진 나라이며, 미국의 문명적 경제적 체제가 기대고 있는 필수불가결한 동맹이다.
동맹은 문이 닫혀 있어야 유지되는 감옥이 아니다. 문을 열어도 서로 오가는 집이라야 진짜 동맹이다. 이젠 그 문을 미국 스스로 열 때가 됐다. 미군은 떠나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여러모로 이롭다.

첫댓글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