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일생/의성 김씨부인
헛뿌다 나에 일신 가석할사 이내몸이
안동 땅 율리촌에 도암선조 후예로서
십이 대 우리 종택 조부님이 분가하사
남매 분을 두신 후에 우리는 사남매라
이내몸이 남아이면 우리부모 귀동자로
일등교육 잘 배워서 사회출발 하였을 걸
애들 하사 여자로다 시대를 못 만나서
학교문전 못가보고 침선방적 열심하여
이구방년 당도하여 각기타문 혼담나서 예천용문 죽림동에 선비가로 택정하고
길일양신 택일하여 서동부서 홀기불러
일 년을 지낸 후에 시댁문전 입문하니
층층시하 봉제사와 다망한 접빈객에
다사한 내 일신은 잠시도 쉴 새 없이
날이 새면 방아 찧고 낙락식수 물 길러서
십여 권구 삼시조석 동동촉촉 조심이요
많은 식구 의복지절 혼정신성 때 맞추니
밤이 되어 살펴보면 손은 터져 밭골 같고
다사한 나에 일상 잠이 온들 어이자리
부호가라 들었더니 가옥은 삼간초옥
수백 년이 흘렀든지 문골하나 성치 않고
주먹만 한 구멍으로 파리벼룩 모기빈대
한경 잠을 못 이루어 울기도 무수했네
그러그러 무정세월 팔년 만에 득녀하니
너 없을 때 무산 자미 애지중지 하였건만
육남매를 기르자니 저의 소임 오즉 할까
몹시몹시 키운 일이 면면이 알시롭다.
기축시월 자아탄생 층층시하 기쁨이나
단란한 우리가정 육이오가 침범 했네
남선 북선 갈린 땅에 좌우사정 판단 못해
큰 서방님 인민군 작은 서방님 의용군 입대하니 안부를 모르는데 사생을 어이아리
무사귀향 하였으나 고생은 시작 일세
무슨 사연 있었던지 용문순경 신오균이
밤낮없이 찾아와서 사람 달라 졸라대니
집안에 숨겨놓고 그 간장이 오죽할까
결국은 구속되니 부모님의 녹는 간장
무사출옥 시켜 달라 기정 어른 볼 때마다
푸닥거리 식상반도 삼일이 멀지 않고
팔년 동안 재심공판 한푼 두푼 거금이요
미숫가루 장만하기 디딜방아 찧을 적에
두 되도 하루 종일 서 되도 하루 종일
밀밀 봉지 붙쳤건만 간수는 별수 있나
흉년 져서 배고픈데 주는 대로 따까 먹고
정성으로 위한 양반 구경 한번 못 했다네 설상에 가상인가 조부님이 별세하사
천지가 혼흑하고 일월이 회명이라
구일장에 우졸곡이 십오일이 걸렸구나
때마다 먹는 식구 오십명이 넘었으니
비용은 뒤로하고 그 골물이 오즉 할까
소상이 못되어서 어머님의 상고 나니
지야몽야 깨닫지못 통곡해도 소용없고
삼년거퍼 재년이라 초근목피하든 시절 고래유풍 삼년상과 초하루 보름 삭망제전
허다한 상가손님 생각하니 흉몽일세
그러그러 세월 흘러 계묘년에 고가탈옥 가역시작
유렴없는 농촌생활 근검하고 절약하여
입택은 하였으나 완수는 덜 되었네
그런 중에 조모님의 상고를 당하오니
향년은 구십이나 오년 넘는 병석생활
대소변을 받낼 적에 당신고생 나의고생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못 받든 일 한이로다.
구일장 우졸곡에 남은 것이 전혀 없네
그해도 흉년인데 장도 염도 남김없네
고래유풍 지켰지만 살아가기 어렵구나.
계쌀내고 계돈내니 사부 오부 이자로다
일년농사 탈곡하여 겨우겨우 갚는 중에
육년 만에 아버님의 상고를 또 당 했네
태산같이 높은 은택 망극하기 그지없고 칠십삼세 고령인가 한심하고 가이없다.
희노애락 애오정이 사람마다 같을 손가 원수로다 병진년아 가군이 득병했네
병원진찰 하고보니 폐암이라 판명났네
수술도 않된다니 사병이 분명하다.
미혼전 오남매에 군인생활 자아형제
등교하는 여아형제 살아갈 길 아득구나
병원문밖 나올 적에 억수눈물 쏟아 졌네 십육개월 이류하며 혹의나 명의만나 완쾌할까
대구라 경대병원 사십일 간 입원하고
서울이라 국립병원 사십오일 입원하고
안동이라 광제병원 강원도라 삼척병원
모두가 무효 되고 결국은 기세하니
그 비용은 어이하며 어데 가서 변통 할꼬 고마울 사 우리형님 금곡 사는 우리형님
말만하면 변통하여 갔다주고 전해주니
이런 육촌 또 있는가 고맙기가 그지없네
후세가 있다하면 다시 만나 보사이다
야박한 이 세상에 누구를 의지 할꼬
유관하다 차자 내외 상거가 초원하나
대소사를 책임지니 너희 덕이 태산이라
성효받아 살아보니 자식보화 이것일래
그 후로 나의 생업 육남매를 기대하고
불피풍우 봉두난발 부끄럽지 아니하고
붕우 이웃 돌아보며 알뜰살뜰 살았건만
전생죄업 또 남았든가 부아의 청춘요절
천지가 암흑하고 아깝고도 불쌍하다
온순한 그 자질에 객지생활 다권으로
고생한 일 생각하면 만맥이 다 녹는다.
다행이 면혼하여 부아의 통활유순
잔잉한 경아형제 기출같이 잘 길러서
각각성취 시켜주니 고맙기도 한량없고 기쁘기도 측량없다. 너의 헌심 다복하여
만득 기범 장성하면 문호창대 하오리다. 어여쁘다 친 외손 재롱동이 면면각각 행복해라
침상에 홀로 누워 왕사를 생각하니
다사하던 내 일신이 한가함도 짝이 없다.
고진감래 흥진비래 일로 두고 말함인가
여러 남매 성효 받아 남선일대 명승지를
곳곳마다 구경하고 사찰마다 참배하고 외국까지 유람하고 각색요리 다 먹으니
심신은 황홀하고 생활은 여유롭다.
세월 좋고 시대 좋아 돈도 있고 옷도 많다
그러나 노쇠하여 득병하니 소용이 무엇 일꼬 나의나이 팔칠이라 세상이 두렵구나
가세 가세 구원으로 어서가세 구원으로 나무아미타불.
이 글은 금년(2014년)에 93세인 어머니께서 87칠세 되던 해에 지으신 것인데 공책에 적어놓은 것을 우연한 기회에 보고 소개를 하게 되니 자식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된다. 이글의 저자이신 내 어머니는 의성김씨로서 이글의 첫머리에 도암선조는 도암(陶庵) 김후(金煦1613~1695)선생이며 도암선생은 의성김씨 5현자로 유명한 청계 김진선생의 5형제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중 둘째인 귀봉 김수일선생의 증손자이다. 안동땅 율리촌은 안동에서 예천방면 길 서의문 바로 옆 동네로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방갓골을 이른다. 어릴 적 외가에는 의성김씨 들만 살았으나 이제는 의성김씨는 한집도 없고 도암정사라는 종택만 덩그렇게 남아있고 더구나 앞에는 소우사가 막고 있어 예전의 도암정사 전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식교육을 잘 시킨 청계 김진선생의 후예답게 어머님의 사남매중 남동생 두 분은 어려운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안동농림학교를 나온 학구열이 높은 집안이었다. 그러기에 남아로 태였더면 일등교육 잘 받아서...라고 한탄을 하셨으리라. 학교 문전에도 못가보신 어머니께선 글 솜씨가 뛰어나셔서 동네에 사돈지와 여자들 제문은 도맡아서 쓰시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고 설악산 기행문 가사와 나의 일생이라는 이글만이 남아서 자식으로서 지켜드리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그래도 다행히 가사 두 편이 남아있어 소개할 수 있음을 행복해 하며 차자 oo가 삼가 소개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