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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1)
<고백록>에 대하여, 루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간단하게 비교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죄에 대한 두 가지 평가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다윗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과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는 죄인(사울왕과 루소)로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청교도의 죄로 구분한다면, 세 가지 평가가 이루어진다. 먼저 <주홀글씨>에 나타난 세 가지 죄는, 1) 딤즈데일 목사의 감추어진 죄(concealed sin), 2) 헤스터의 폭로된 죄(revealed sin), 3) 칠링워스의 용서받지 못할 죄(unpardonable sin)이다. 예를 들면 먼저 이상의 <날개>에 나타난 주인공은 마지막에 날자 날자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땅속으로 들어가자는 풍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닫힌(폐쇠된) 죄로서 감추어진 죄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폭로하여, 죄를 지었다고 하나 열린 죄로서 천사(Angel)로 변화한다. 마지막으로 루소의 <고백록>은 죄를 고백할수록 더 저주가 내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Devil)이다.
계속해서 밀턴의 <실락원>에 나타난 죽음(Death)은 악마(Satan)의 아들이자, 동시에 손자이다. 왜냐하면 사탄의 딸이 죄(Sin)이고, 동시에 사탄의 부인이며, 더 나아가 죽음의 어머니가 죄이기 때문이다. 마치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렉스>나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그레고리 7세의 교황등극. 남매의 결혼과 모자간의 결혼이란 이중의 근친상간)을 연상시키고, 많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근친상간(incest)에 의한 남매이자 부인(예를 들면 제우스와 헤라과 일본건국신화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러한 내용은 심리학에서 프로이드의 이드에 의해서 확인된다. 즉 이드는 이고나 슈퍼이고 처럼, 윤리도덕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최상류층(황제노동이나 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최하류층(한 방에 10여명이상이 거주하는 하층민들)에 사는 사람들의 윤리의식은, 윤리의식이 투철한 중산층과 다르다. 자본주의의 딜레마는, 1895년 이탈리아에서 파레토가 제시한 법칙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 자본이 처음은 골고루 소유하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점 20%의 상류층에서 80%를 소유하여, 자본의 양극화 현상(즉 1/4은 부를 축적하고, 2/4는 겨우 먹고 살고, 1/4은 소득이 적어져 사회에서 도태되는 양극화 현상)이란 피할 수 없는 현상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을 파레토 법칙(전진문, 1500년 지속성장의 비밀. PP.188-191)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자칭 일류 정치가들 중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 경제법칙으로써 파레토의 법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리더로써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한편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Hippo. 354-430)는, 사도 바울 이후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에, 최고의 신학자(교부들의 교부요 사상가)였다. 주요 저서(117권의 책 중에서, 구약의 인용 13,276회와 신약의 인용 29,540회, 즉 총인용 42,816회임)로는 <고백록>(Confessionum)과 <신국론>(Treatise on the city of God)과 <신앙핸드북>(The Enchiridion) 그리고 수많은 신학논문이 있다. 파울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신학자로써 “서양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의 기초”(교보문고 제공)로써, 마치 철학사상에서 철학자 플라톤과 비교된다.
기독교 역사신학(or 역사철학)의 비조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13권. 1-10 나/ 11-13 성서)은, 문학(특히 서양의 대서사시 즉 일리어드(Iliad)와 오딧세이(Odyssey), 아에네이드(Aeneid), 신곡(La Diivina Comedia), 실낙원과 복락원(Paradise Lost and Paradise regained),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등)의 두 가지 주제인 애국심과 개인 간의 사랑(특히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도 신의 사랑에서 지극히 작은 사랑으로 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고백록>은 애국심이 아니라 애신(God)심이며, 개인 간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신속의 이웃 사랑(소위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Love)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애신심이란 이란의 마니교(구약의 성조와 예언자를 악한 자로 비판하고, 구약의 하느님을 악신이라고 비난함)를 거부하는 신으로 정하고, 기독교의 그리스도의 신관을 받아들여서 참된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랑한다. 마치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교를 비판(포도나무의 가지를 흔들면서 돼지피를 먹는, 트로키아Thracia의 메나데스Mainas(or 마이나스)들을 물리치고)하고 영성체(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인도하였듯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제3권 카르타고에서)에서 언급하였듯이,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의 영향으로, 마니교에 빠진 9년간(AD 373-381)이었다. 예를 들면 미술(회화)로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모든 성인의 성당이 소장한 ‘관상에 잠긴 아우구스티누스’(by 보티첼리. 1447-1510)가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탕자의 비유’(루카 15:14)로 서술하고 있다. <고백록>의 내용을 일독하면서, 처음에 느낀 점은 너무 유치한 어린이의 고백처럼 소박-단순함을 느꼈다. 특히 어린 시절과 <성서>의 결합은 말살에 소살을 붙인 것처럼 어색한 느낌이었기에, 오히려 과거에 읽은 톨스토이의 <유년시절>이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켜서 더 흥미가 있었다. 다만 조금 맛본 <신앙핸드북>에서, 오히려 즐거운 독서의 맛이 우러나왔다.
제 1권 타가스테와 마다우로에서의 어린 시절(열다섯 살까지, 354-369)
※) 서시: 당신의 한줌 피조물/ 인간이 감히 당신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오니/ 님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참고: 서시는 13권 중에서 오직 6군데에만 나타나 있음. 즉 1권, 3권, 7권, 8권, 9권, 13권이다.)
1권의 1) 주여, 당신을 부르옵니다.
“주여, 당신은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하옵시며”(시편 145,3)[주석1) 위대한 옛시인들이 그 시의 허두에서 시신 詩神[or Muse]의 영감을 빌렸듯이...첫 머리를 기도로 장식 ‘나의 역사’를 찬미의 향화로 주님께 바친다.] “당신 권능이 크시고 그 슬기는 헤아릴 길 없나이다”(147,5)
이제 당신이 내신 한 줌의 피조물, 이 인간이[주석2) 무인칭의 겸손한 말로 자신을 가리킨다]...지은 죄의 증거와[주석3)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끼쳐진 교만과 욕정.] “오만한 자를 당신이 물리치시는:(야고 4,6) 그 증거를 몸소 지니는 인간이 아니오니까?
...주여,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당신을 기리는 것이 먼저인지, 또는 당신을 아는 것이 부르는것보다 먼저인지 알게 하소서.[주석 4) 인간 심리와 그 역사의 통찰에서 우러나오는 영탄, 모든 회심의 동기가 여기에 있고, 이는 또한 <고백록>의 테마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불씨를 제 안에 지니기 때문에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본래의 성정이고. 그 아니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있어 당신을 모르면서 부르오리까? 모르고 하는 자는 이것 대신 딴 것을 부르기가[주석 7) 하느님 대신 거짓 신을 신앙하던 마니교를 가리키는 듯] 쉽사옵니다... 당신 성자의 인성과 당신 전도자의[주석 8) 아우구스티누스를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세례를 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 성직으로 내게 불어 넣으신 내 신덕의 주여, 당신을 부르옵나이다.
2) 내 안에 계신 주, 주 안에 있는 나
내 하느님, 내 주 하느님을 부른다 함이 어인 말인고, 그를 부름이 곧 내 안으로 불러 모심이거늘?[주석 9) 묻는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저자가 <고백록>을 쓰는 독특한 수법이다.].
...나 아직 지옥에 있어 보지 않았어도 당신은 거기도 계시나이다. “나 지옥에 내려갈지라도 거기 당신이 계심”[시편 139, 8]이나이다...하늘 땅 너머 어디로 벗어나서 그리고 좇아 내 하느님을 내안으로 오시게 하오리까. “내가 하늘과 땅을 채우리라.”(예레 23, 24) 말씀하셨거늘?
3) 어디든 오롯이 계시는 하느님
당신이 그것들을 채어주신다 하여 하늘과 땅이 당신을 담고 있는 것입니까? 채우셔도 당신을 담지 목사는 것들이기에 오히려 남으시나이까?...그러면 당신에게 큰 부분, 작은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가? 어디든 오롯이 계시되 아무것도 당신 전부를 용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니까?
4) 당신은 뉘시오니까
내 아느님이시여, 그럼 당신은 뉘시오니까? 주 하느님 아니시고 무엇이오니까? 주님 말고 또 주심이 누구이며 우리 하느님 아닌 하느님이 도 누가 있사옵니까?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좋으시고, 지극히 능하시고 지극히 전능하시고...거만한 자들은 낡음으로 이끄시나 저들은 모르옵고, 항상 일하시면서 항상 고요하고, 아쉰 것 없으시되 항상 거두시며, 받쳐 들고 채우시고 감싸주시고...아쉰 적 없으시되 이[익]를 좋아하시고, 인색할 리 없으시되 변리를 요구하시나이다.[주석 14) 루카복음 10장 33절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람이 자기 본분이상이ㅡ 좋은 일 하는 것을 하느님이 원하신다.] 당신께 빚지우려 더 바치는 것이 무엇이 있다더이까?[주석 15) ...‘누구도 제 것이라곤 죄밖에 지니지 않는다.’(요한복음강해, 5,1)]...내 생명, 거룩한 내 감미 내 하느님이시여, 무엇을 우리 아뢰었나이까?...그러나 슬픈지고, 당신을 두고 침묵을 지키는 자들이여, 저들이야말로 종알대는 벙어리들[주석 16) ...하느님에 대해서는 침묵하던 마니교도들. 그들에 대해 7권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말씀이 울려 나오지 못하는 저들이기에 벙어리 된 말쟁이들을 나는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인지고.
5) 내가 무엇이기에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나이까
뉘 있어 나를 당신 안에 쉬게 해주리가 그 누가 당신을 내 마음 안에 오시게 해주리까?...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어여삐 여기소서, 아뢰나이다...아아! 주 내 하느님이여, 당신이 나의 무엇인지 어여삐 여기심으로써 내게 말씀하소서.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라.”(시편 35,3)하고...“당신 얼굴을 나하테서 감추지 마옵소서.” 차라리 뵈옵고 죽으리다, 아니 죽기 위해서(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것이 <탈출기>와 고대인들의 통념이었다. 여기 첫째 죽음은 육체의 것이요. 둘째은 영혼의 죽음이다. 저자는 영혼이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두 번째 죽음이라 했다-옮긴이)...주여, 당신은 아시옵니다. 내 하느님이여, “내가 당신께 내 죄를 고백하였삽더니 당신은 내 마음의 악을 사하여 주시지 않았나이까?”(32, 5)...
6) 생명의 신비 앞에서
그러하오나 “먼지요 재‘(창세기 18,27)인 내가 당신 자비 앞에서 말하게 하소서. 내가 말 말하옵기는 나를 비웃은 사람[주석 18)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과 이 책 군데군데에서 원수들과 독자들의 ‘비웃음’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서인지 성격의 소치인지 알기 힘들다...] 아닌 당신의 자비에게 하오니 아뢰옵게 내버려 두소서...그 무렵엔 고작해야 젖을 먹고 색색 자거나, 몸이 언짢으면 우는 것밖에 몰랐습니다[주석 20) 그의 생각으론 인간이 세강에 나오자 웃기보다 울기를 먼저 하는 것은 세상이 장미보다 가시가 그득한 귀양살이, 눈물의 골인지라 즐거움 보다 괴롬이 많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따라오는 장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놀랍다. 이 점 아동심리학의 창건자라도대하는 느낌이다.]...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를 조금씩 느끼에 되었고,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들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싶었어도 되지 않았습니다. 생각은 속에 있고 사람들은 밖에 있어 이들은 내 영혼 안으로 들어오려야 전혀 길이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내 갓난이 시절이란 이미 없어진 내 전생의 계속이었사온지요?...이 시절의 이전의 나는, 내 감미 내 하느님이시여, 누구였사오며 어디 있었겠나이까?[주석 21) 플라톤의 영혼 선재설靈魂先在說을 빗대어 하는 말인 듯. 이 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어느 곳에 살다가 거기서 잘못을 저지른 벌로 인간 육체로 추방을 당한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번도 이 설에 타협한 바가 없었다. 다만 영혼의 기원 문제에 관해서는 죽을 때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하느님이 사람을 내실 때마다 영혼도 몸과 함께 만들어 주신다는 창조설과, 어버이한테서 육체와 더불어 영혼도 전해 받는다는 영혼 전이설 사이에서 헤매었다.]...그 즈음 나는 존재하고 살아 있어 유아기가 끝날 무렵엔 내 느끼는 바를 남에게 알리고자 무슨 시늉을 더듬거리고 있었사옵니다. 주여, 당신 아니고 어디로 좇아 이런 동물이 나올 수 있겠나이까?[참고로, 프로이드와 라깡은 1.6세(18개월)의 유아 상징 생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끝이 없고 변함이 없으시니 당신에겐 ‘오늘’이 가지 않는 것...또한 “당신의 해[年]가 다함없으니”(시편 102, 28) 당신의 연연세세가 오늘 하루[주석 23) 하느님께서는 항상 오늘밖에 없다. 어제와 내일은 변화를 전제로 하나 하느님께는 변화도 추이도 없다...다시 11권에서 시간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것이다.][참고로, 절대중력에 의한 뉴턴의 절대시간과 공간이 아닌, 아인쉬타인의 상대적인 공간과 시간을 차지한다는 특수상대성이론(1905년)과 일반상대성이론(1916년)에서는 자신의 중력에 의해서 빛의 직진이 아닌 굴절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을 설명함]로 소이다.
7) 죄는 누구에게나
하느님이시여 들으소서. 앙화로다, 사람의 죄악이여!...그 누가 내 갓난이 적 죄악을 내게 알려주리이까? “당신 앞엔 아무도 죄에서 깨끗한 자 없으오니 세상에 하루를 사는 아기라도 그러하거늘”[주석 25) 칠십인역 욥기 14,5. 갓난이의 죄에 대해 냉엄하리만큼 무서운 판단이다. 저자은 <율리아누스 논박>에서 ‘아무런 죄도 없다면 어린이들이 무엇 때문에 괴롬을 당하느냐?...’라고 하듯이 원죄의 결과가 어린이에게도 나타난다 했다. 원죄로 말이암은 인간의 비참함, 동시에 은총으로 구원되는 인간의 초자연적 가치!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주제다.] 그 누가 내게 알려주리이까...일찍이 나는 어린이가 질투하는[주석 26) 옛사람은 질투를 마력의 결과로 간주했고, 리는 부적이나 굿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것이 [제 어머니에게서] 제 젖을 먹는 [다른] 애를 보자 눈을 부라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망각의 어둠에 속하는 것이야 어미의 태중에 산 것이나 매한가지인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죄 중에 배이었고 내 어미가 죄 중에 나를 복중에서 길렀다.”(시편51,7)...그러하오나 이제 그 시절은 생략하오리다...
8) 말 배우기
나는 유년기를 거쳐 소년기로[주석 27) 저자와 옛사람들은 사람의 한 평생을 일곱 때로 나우었으니 날 때부터 7세까지 유년기, 14세까지 소년기, 28세까지는 청년기, 50까지는 성년기, 60까지가 장년기, 80까지가 노년기, 죽을 때까지가 퇴령기로, 스페인 세비야의 교부 이시도르[제주도의 이시도르 목장의 신부님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에피소드가 생각남]가 중세 유럽에이를 널리 퍼뜨렸다.] 접어든 게 아니오니까. 그보다는 이것이 내게 와서 유년기에 이어졌다는 것이 옳겠습니다...나는 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을 배웠는지를 다음에 안 일이옵니다. 그건 얼마 뒤 글을 배울 때처럼 일정한 교육법의 순서를 밟아서 어른들이 내게 말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내 하느님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정신을 가지고 내 스스로 한 것이었습니다. 마음속 뜻을 나타내려 꿍얼거리고 온갖 소리를 내며 별의별 짓을 다 해보는 때였습니다.[철나기 시작하는 어린이의 이성이 모방과 독창으로 활동을 하는 모습. ‘하르나크’[신학과 교회사에 능통한 독일계 러시아인. 1851-1930.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영지주의에 대한 박사 논문. 대표저서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등] 마저 이 깊은 심리통찰에 놀라 저자가 지닌 정신의 독창성과 위대성을 높이 평가한다.] 보 그들의 의사를 몸짓에서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모든 민족의 동통된 언어로서 안색과 눈짓, 다른 지체들이ㅡ 동작과 목소리는 무엇을 청하거나 가지거나 버리고 피하는 데에 맘속 감정을 표시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9) 매를 맞으며 글공부
하느님 내 주님이시여, 내가 어렸을 때 불행하고 딱한 일들을 얼마나 치러야 되었습니까.[에를 들면 베토벤의 혹독한 시련은 <장크리스토프>by 로망롤랑에 잘 묘사됨]. 올바른 생활이랍시고 철없는 것에게 제시된 것은 사회에서 출세하고, 그러려면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에 종노릇하는 웅변학이 뛰어난 만큼 이의 스승을 불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문학을 배우러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닿는 것인지 철부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주 29) 여기서 아우구스티주스는 문학이나 학문의 무용론[니이체와 하이데거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린이이ㅡ 머리에 가혹한 부담을 주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던 교육방법을 비난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의 작품들에서 진정한 학문을 강조하고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한다.] 그 즈음 주여, 우리는 당신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한테 배워서 제법 당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애가 작지 않은 정으로 당신께 빌면서 학교에서 매 맞지 말게 해줍소사, 했던 것입니다...정말 우리의 공포도 이에 못지않았고 이에 못지않게 그것을 모면하고자 빌었습니다만[주석 31) ‘글은 피라야 들어간다’는 로마 속담이 있듯이, 매질, 채찍질, 곤장질로 교육하던 풍습은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같은 문인들의 글에서 엿볼 수 있고, 아직도 나폴리 박물관에는 어린이를 공중에 매달고 몽둥이 세례를 주는 벽화가 남아있다.][루소의 <에밀>에서 유아를 벽에 머리가 아래로 가서 피가 역류하여 질식시키는 아기보는 풍습을 고발하여 고쳤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글쓰기, 읽기, 익히기에 모자랐으므로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어린이 혹사에 모자라서 범죄인으로 취급하고 벌하는 풍토를 비판함]...놀음놀이도 어른이 하면 일이라 부르고 아이들이 하면 그 어른들의 책벌을 받고, 그래도 아이들에겐 그 누구에나 동정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10) 간지러운 얘기, 싹트는 허영
주 내 하느님,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질서를 세우시고 죄악만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아무래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내가 저들에게 순종하지 않은 까닭은 더 나은 무엇을 선택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락을 즐기기 때문이었습니다...자꾸만 간지러워 오는 허구의 얘깃거리에 귀를 팔기,[...소설따위에 정신을 쏟던 아우구스티누스는...민감한 시인 기질이 있었다. <아이네이스>에 몰두하는 반면, 희랍 문법과 수학에는 냉랭하던 그의 성격이 뒤에 나타날 것이다.] 이같은 호기심이...어른들이 구경하는 투기, 연애[그 무렵 사회엔 공식, 비공식의 두 가지 놀이가 잇었다. 전자는...신들이나 영웅들의 영예를 위해...군주, 고관들의 것이었다. 후자는 아무라도 할 수 있는 흥행물이었다.] 등에 열을 띠게 되는 안광, 이러노라 오락[오늘날의 컴퓨터 오락?]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11) 미루어진 세례
내가 어렸을 때 영생에 대한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교만함에까지 내려오사 우리 주 하느님의 겸손[주역에서 겸자는 6괘가 모두 길함]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그것입니다...주 예수여, 죄 사함을 위해 당신께 부르짖으며 생명의 성사를 받잡고 맑게 씻기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나 나는 금세 나았습니다. 이리하여 자의 정화는 늦추어졌으니[주석 36)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임종이 가까워서야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미루는 것이 당시의 풍조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주교위에 올라 이 폐습을 근절하고자 투쟁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살면서 아직도 더 때묻어야 할 필요가 있삽는지요? 세례 후에 다시 죄악의 더러움을 쓰는 것이 더 크고 더 위험스런 죄이니 말씀입니다...아비는 그때까지 믿지 않았어도[주석 37) 파트리키우스. 그는 아내 모니카의 성덕으로 급기야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 내가 그리스도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그렇게까지 내게 대한 모정의 권리를 유린하진 않았습니다...결국 죄악의 고삐가 늦추어진 것이 내게 잘된 일이었나이까, 안 늦추어진 것이 나을 뻔 했나이까...그러하옵니다. 훌륭할 뻔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어린 때가 지나면 하고많은 유혹의 물결이 들이칠 것이 빤했고...애 어미는...내가 그 꼴이 되고야 말 흙덩이[주석 38) 여기선 그냥 영혼을 가리킨다...그 까닭에 ‘영혼의 영혼이신 하느님’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에게 나를 맡기려 했던 것이었나이다.
12) 억지로 공부와 섭리
청년기보다 덜 무섭던 그 소년기[토마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에서 인생을 몇 등분하여, 유아기에는 똥속에 묻혀살면서 달을 보고 달라고 하고, 소년기에는 아가씨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고, 청년기에는 오직 아가씨의 다리만 보임...장년에는 남에 대한 음모만 꾸미다가, 결국 장의사의 향료를 묻히고 떠남을 묘사함]에 나는 글을 좋아하지 아니했고 따라서 억지 공부를 시키는 것이 미웠습니다...억지로 시키지 않았으면 공부하지 않을 나였습니다. 아무도 억지로 잘하지 못하옵는 것은 하는 일이 본디 좋아도 그러한가 하옵니다.[주석 39) 선행이나 악행의 전제조건이 자유의지이기에.]...
13) 연애에 죽은 디도 앞에서 울고
어릴 때 배우던 희랍 말이 왜 그리 싫었는지, 지금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라틴 말은 퍽 재미가 있었으나 초등교사들이 가르치는 것 말고 이름 있는 문법학자들이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정말 초등교육은 예나 지금이나...아이네이아스인지 무엇인지하는 따위의 표랑을 ...외우게 했고 연애로 자살한 디도[주석 43) 로마의 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남긴 <에이네이스>에 나오는 인물. 엘리사라고도 불리는 티로의 이 왕녀는 망부 시케오에 대한 절개를 굽힐 수 없어 아프리카 왕 자르바스와 재혼을 거절하고 단도로 자살했다는 것이 희랍의 전설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와 달리 각색했다...]를 울어주도록 강요했습니다...그때 만일 이런 것을 읽지 말하 했던들 슬픈 것을 못읽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옵니다. 내가 읽고 쓰기를 배운 그 학과들보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이 더 훌륭하고 잇속있는 것으로 아려진 그때였습니다...그러므로 나는 어려서 저 쓸데없는 것들을 쓸모 있는 이것들보다 좋아하고, 아니 그보다는 이것은 미워하고 저것을 사랑하느나 죄를 지었습니다...그리고 저 ‘크레우사의 그림자’[주석 47) <아에네이스> 제2권 772항의 인용. 아이네이아스가 불타는 트로이를 버려둔 채...‘이다’ 산을 향하여 아내 크레우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허황된 광경이 흥미 진진한 것이었습니다.
14) 입맛 썼던 희랍 말
그렇다면 이런 따위를 노래하는 희랍의 문법학이 왜 싫은 것이었습니까 호메로스는 이런 이야기를 엮는 솜씨가 능란하나 흥미진진하면서도 허황되어서 나 같은 소년에겐 입맛이 썼던 것입니다...몰아대는 이들의 벌짐이 아니라도 엄저 맘먹은 것을 내놓으려는 내 마음이 바빠서 배워댔습니다...이리하여 나는 느끼는 대로 나타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말을 배우는 데 더 큰 힘이 되는 것은 자유로운 지식욕[주석 48) 스스로 배우고 가르쳐 본 경험을 통해 저자는 교육의 바탕을 강제 아닌 자유에 둔다, 철학자 오이켄[Rudolf Christoph Eucken 1846-1926.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오이켄의 노벨상 증서(1908년)에는 '관념론적 생철학을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저서에서 그가 보여준 서술의 온유함과 강직함'이 지적되어 있다.]이 그를 가리켜 ‘최초의 현대 사상가’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최초의 현대 교육자’라고 부를 수 있다. 펫탈로치인들 이화 다른 이론을 내세울 수 있을까?]이지 겁에 질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하오나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법은 저것의 흐름을 이것으로 막으시나니, 스승의 채찍에서 순교자의 고형에 이르기까지 세워주신 그 법...
15) 어린 날의 배움을 위한 기도
주여, 내 빎을 들어주사 당신 가르치심 아래 다하지 말게 하시고 당신 자비를 기리는 데에 다하지 말게 하소서...헛된 것을 내 배울 제[주석 49) 고전문학을 전적으로 헛되다 이르기보다 아직 판단이 성숙하지 못한 청소년에게 문체가 아름답다는 구실로 선정적 소재들을 주입함을 개탄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당신이 주셨고 헛된 속에 즐기던 내 죄악을 당신이 사해 주셨나이다. 엇된 속에서도 쓸 말을 많이 배웠습니다만 헛되지 않은 일들에서 배울 수 있는[주석 50)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로마인. 332-363.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신플라톤주의에 이끌렸으며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의 숭배를 받아들였다. 페르시아 공격때 바그다드 근처에서 대패하고 재위 20개월 만에 31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이교의 부흥을 위해 두 가지 법을 세웠다. 첫째, 그리스고교 신자인 교수들을 학원에서 추방하고, 둘째, 신자 학생은 국립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금지함과 동시에 외속 작가들의 작품을 배우는 것조차 엄금하는 것이었다...신교의 자유가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젊은이들은 헛된 것을 배울 것 없이 안전한 길을 갈 수 있었다.] 것이 옵고 아이들이 가지 위해서는그 길이 안전하옵나이다. 16) 아, 지옥의 강이여
아, 지겨운지고 인간 속습의 흐름이여! 너에게 항거할 이 그 누구며 너 마를 날이 언제이겠느냐?...도무지 할 수 없는 두 가지 일을 그래도 했다니 이는 가짜 벼락이 뚜장이 노릇을 하면서 진짜 간음을 본뜨게 권위를 붙여준 것이로다...‘이것들은호메로스가 꾸며낸 것이다. 그는 사람의 일들을 신들에게 옮겨 씌웠다. 나 같으면 차라리 신들의 것을 우리한테 옮겨봤겠다.’(키케로, 투스쿨라니룸 담론, 1,26)를 사심 없는 귀로 들어주느냐?...과연 거기에 적힌 ‘황금의 비’, ‘무릎’, ‘속임수’, ‘하늘 신전’ 같은 말들의 의미를 테렌티우스[주석 54) 로마의 희극작가. 그의 작품 <고자대감>엔 소녀 ‘다나에’가 아버지에 의해 어느 탑 속에 갇혀 있을 때 유피테르가 황금의 소낙비로 둔갑하고 들어가서 ‘페르세우스’ 영웅을 낳게 했다는 애기가 있다.]가 아니었던들 우리는 몰랐을 것이다...
17) 모두 연기요 바람
내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선물인 내 재주를 얼마나 허랑하게 소비했는지 조금 아뢰게 버려두소서. 한 가지 마음 떨리는 일(칭찬의 상, 그리고 망신 아니면 매질의 무서움이 있삽기에)을 해야 했습니다. ‘테우케르’(트로이- 옮긴이)의 임금을 이탈리아에서 쫓아낼 수 없어 분통 터진고 슬퍼하는 유노의 말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유노가 그런 말을 했다고 듣느니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갈팡질팡하는 시적 공상의 자취를 따라라 했고...내가 열변을 토했대서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모두 연기요 바람이 아니더이까? 그렇게도 내 재주, 내 혀를 슬 자리가 또 없더이까?...
18) 문법과 하느님의 법
하느님, 내가 이렇듯 허영에 들뜨고 당신한테서 멀어진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앞에 본보기로 내세워진 사람들은 그 소행이...자기네 육욕이라도 알맞추 깔축없는 말로 곱고 구수하게 서술하기만 하면 치하를 받고 좋아하던 그때가 아니었나이까...작은 아들이 먼 고자으로 가서 당신이 주신 재물을 탕진하였을 때 말이나 수레나 배를 구했나이까...욕정 속에 있음이 곧 캄캄함이요...사람의 종락이란, 말을 쓰언 선대 사람들한테서 받은 문장이나 철자법을 지키기에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 예 발음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혹시 문법 규벙을 거기고 ‘HOMO’의 첫 음절을 닿소기로 내지 않았을 경루...불쾌하다는 것입니다.[주석 56) 기식음 H를 귀에 마찰이 들리게 발음하지 않음을 큰 잘못으로 여긴다.]...그의 혀의 실소로 ‘인테르 호미니부스(inter hominibus, 사람들로 가운데)’라 할까 봐 조심조심하면서도 정작 흥분된 마음 때문에 한 사람을 다른 사랃들 한테서(ex hominibus) 따돌릴까 봐 조심은 도무지 하지 않나이다.
19) 더러움의 심연 속으로
내가 어렸을 때 가엽게도 이런 습속의 문지방에 던져져 있었고 나의 경기장이란, 말이 틀릴까 무서워할 뿐 말솜씨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는 것쯤 꺼리지 않는 자리였습니다...더러움의 심연 속으로 ‘당신 눈에서 멀리 굴러떨어졌어도’(시편 31, 23) 나는 그런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더구나 나는 부모의 식량고방과 식탁에서 훔쳐내기까지 했습니다...놀이에도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허욕에서 승리를 속여서 얻는 것이 일쑤였습니다...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들켜서 비양을 듣는 때는 지기는커녕 도리어 무섭게 덥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천진난만이겠나이까? 주여, 아니오이다. 하느님, 당신께 비나이다. 사실 이런 따위는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가정교사와 선생들을 떠나고, 갖고 놀던 호구와 공과 참새 들을 버린다 해도 이번에는 도지사와 왕에게 옮겨져 황금, 영토, 노예를 더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게 하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의 잘못에 따르는 선생들의 채찍은 그들에게 더 가혹한 형벌로 대치되어 나타나나이다...당신이 ‘천국은 이러한 자들의 것이니라.’(마태 19,14) 하셨을 때는 겸손의 표를 어린이의 키에다 두고 좋다 하심이었나이다.
20) 감사합니다
그러하와도 주여, 설사 나를 어린이로만 버려두셨대도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지는 지극히 높고 좋으신 하느님이여!...속기 싫어하는 성미에 기억력은 초롱초롱하고 말씨도 다듬어졌습니다. 우정에 부드럽고 비애와 비굴과 무지를 멀리했습니다. 나 같은 놈이 그랬다는 것이 놀랍고 기림직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하오나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요 내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니온즉 다 좋은 일이요 그 모두가 곧 나[주석 57) 현대 사상가들의 비위에 맞는 구절이다.]였습니다...그때 내가 죄를 짓기는 즐기기와 높기와 참스런 것을 그분 아닌 그의 피보물과 나와 여남은 것들에서 찾은 때문이었고,[주석 58) 죄란 결국 딴데서 아우스트티누스가 말하듯 ‘하느님을 떠나 피조물로 돌이킴’이다][덧붙여서 참된 자유란 바울의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의 선,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의 질서속으로 돌아옴]. 그로 말미암아 슬픔과 어지러움과 그릇됨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감미, 내 보람,내 미쁨이신 하느님이여, 당신의 선물에 감사드리오니 나로 하여금 당신이 주신 것들을 지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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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마니교(Maninism)는 이란인 창시자 마니(Mani. AD215-176))가 214년 4월 14일, 아버지가 기독교 신자였으며, 바빌론(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중간)의 아브루미아(Abrumia)에서 태어나서, 아담부터 조로아스터(Zarathustra)와 석가와 예수를 이은 마지막 예언자라고 하였다. 특히 마니교는 이원론인데, 빛과 어둠의 두 가지 본질을 축으로 하여 이원론적 구조속에, 고대 조로아스터교와 미스라교와 영지주의적인 우주론을 혼합한 신비주의적인 종교 체계를 갖고있는 환상적인 자연철학의 형태로서, 빛과 어둠의 두 본질의 공존을 인정하는 비타협적인 이원론의 신비적 혼합종교이다.(참조: daum. 카페글. ‘마니교의 덫에 걸린 어거스틴’).
참고 2)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 종교 운동 중 하나이다...그러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시기는 기독교가 태동하던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시기로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정통파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신앙 ·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이 "앎(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것에 있다.”(daum.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라고 한다.
참고 3)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교는 그리스에서 기원전 7세기의 디오니소스(Dionysos. 로마의 Bacchus.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와 리디아와 아시아에서 유행함)의 숭배(특히 오모파기아Omophagia 축제 때에, 초인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날고기를 먹음)에서 벗어나서, 기원적 6세기의 오르페우스교(오르피즘. Orphism. 여기서 Orphic 숭배의 or 밀교의)가 탄생함. 오르페우스(Orpheus)는 아폴론과 칼리오페(Caliope.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Mnemosyne(므네모시네)의 자녀인 9명의 뮤즈에서 Clio와 대표임)의 아들 혹은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와 칼리오테의 아들이라고 함. 오르페우스는 신화(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 Eurydice)에서 잘 알려진 신으로, 결혼 후에 아리스타이오스에 쫒기다가 뱀에게 물려 죽은 부인을 찾아, 엘레우시로 가서 데메테르의 신전인 엘레우시스에서 신관의 안내로, 라코니아의 땅 타이나론 동굴을 통하여 저승으로 내려가서, 부인을 데려오는데 실패하자, 특히 여인들을 무시하였다(daum. 블로그, 오르페우스 신화. ‘책을 탐하다’) 참조. 트라키아(기원전 5세기. 불가리아-그리스-터키의 접경지역. 발칸반도의 남동쪽)의 무녀들(마이나스. Mainas)은 오르페우스를 죽여서, 8갈래로 찢어서 헤브루스강에 던지고, 트라키아 근처의 레스보스섬으로 시신이 떠내려가자 정령들과 트라키아의 처녀가 리라과 오르페우스의 얼굴만 건져내고, 그 후에 레스보스섬이 리라의 섬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