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와디야 상사디야.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니 잎은 꽃을 그리워하고, 꽃은 잎을 그리워한다. 온 곳도 간 곳도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비밀스런 절터에 긴긴 사연 꼭꼭 묻어 둔 산각시의 숨결인가. 옴 몸에 신열 든 댕기머리 귓불처럼 외줄기 꽃대 위에 헝클어진 가는 머리 상사화 두엇 피었다. 남도 땅은 어이하여 상사화가 지천인가.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 풍경소리 은은한 산사의 오솔길엔 기러기 떼 오르내리듯 스님네들 발뒤꿈치 소리조차 없는데, 풀숲의 상사화들 어이 저리 목을 뽑고 천년의 기다림으로 숨바꼭질을 하는가. 무너진 절터에도 상사화가 피었다. 그리움 한데 모아 총지(摠持)인가. 기다림조차 무너져 버린 옛 가람 빈터에 오늘도 못미더운 약속이듯 상사화 두엇 그렇게 잎새도 다 지운 채 저희끼리 피었다.
남도 땅은 멀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유달산 가까워지면 파도소리로 잦아드는 ‘목포의 설움’ 귓전에 스미고, 월출산 신령스런 솔빛은 지친 가슴을 파고든다. 가던 길 에돌아 무안 땅 몽탄면 승달산 기슭에 이르면 ‘총지마을’ 어귀엔 기다림에 지친 석장승(전남 민속자료 제23호) 노부부 여전히 안녕하시다. 해 어스름 비낀 절 터 안엔 상사화 꽃무리 오솔길까지 달려 나올 터이지만, 석장승 노부부 너스레를 떠는 사이, 마을 안 굴뚝 수도 세어볼 참이고, 산비탈에 감나무, 까치밥도 챙겨 볼 참이다.
남도 땅은 멀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유달산 가까워지면 파도소리로 잦아드는 ‘목포의 설움’ 귓전에 스미고, 월출산 신령스런 솔빛은 지친 가슴을 파고든다. 가던 길 에돌아 무안 땅 몽탄면 승달산 기슭에 이르면 ‘총지마을’ 어귀엔 기다림에 지친 석장승(전남 민속자료 제23호) 노부부 여전히 안녕하시다. 해 어스름 비낀 절 터 안엔 상사화 꽃무리 오솔길까지 달려 나올 터이지만, 석장승 노부부 너스레를 떠는 사이, 마을 안 굴뚝 수도 세어볼 참이고, 산비탈에 감나무, 까치밥도 챙겨 볼 참이다.
무안은 ‘석장승’의 고장. 장승을 나무로 깎지 않고, 돌로 다듬어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 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일일이 곡절을 따지고, 오물오물 아쉬움을 곱씹는 것이 무안의 풍습이다.
장승은 되도록 못생겨야 하는 것. 나무로 깎은 목장승이든 돌로 깎은 석장승이든 눈은 밤톨처럼 튀어나오고, 콧방울은 실룩거려, 고집이 세거나 심술궂게 보여야 하는 것. 누구나 끌과 망치 하나면 한나절 땀방울로 장승하나쯤 거뜬히 일으켜 세운다.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금새 헛기침을 해대는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 이정표이다. 악귀를 물리치고, 역병을 막기 위해 마을의 입구에 신상(神像)으로 서 있거나 길 잃은 길손들을 위해 노표로 서있는 것이다. 운흥사터 돌장승, 불회사 측백나무길 등 뒤에도 석장승들이 웅크리고 있다. 총지사터 길목의 노부부 석장승도 그저 장승이 아닌 불법을 수호하는 장승 중의 장승들이기에 만나면 시주도 하고 싶고, 등도 긁어주고 싶은 것이다.
무안은 또한 ‘품바’의 발상지이다. ‘품바’는 일로읍 의산리에 소재한 천사촌을 배경으로 밑바닥 인생의 한과 아픔을 풍자한 의성어이다. 본래는 각설이 타령의 후렴구로 사용되었으나, 걸인의 음악,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되었다. 각설이 타령의 ‘각설(覺說)’과 석장승들의 익살과 심술로 남도의 하늘 밑은 언제나 편안하다. 무안이야말로 노령산 끝자락에서 아랫목처럼 퍼질러 앉고 싶은 편안한 곳이다.
총지사는 그 절 이름에서 보듯 밀교적인 냄새가 짙게 풍긴다.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안되어 그 사료적 전거나 증거로 내세울 유구조차 캄캄하지만 운주사의 그 수많은 비로자나불과 ‘옴마니반메훔’ 숫막새. 총지사의 사명 ‘총지’, 인근 법천사의 창건 유래로 보면 한때나마 이 지역에 밀법이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의 비밀을 캐는 논서 가운데도 이즈음 밀교적인 연관성을 내세우는 것들이 종종 나오는 것을 보면 총지사지는 우리나라 불교사의 흐름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도 언젠가 한 번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총지사는 법천사와 함께 신라 성덕왕 때 서역 금지국(金地國, 간다라)의 승려인 정명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바닷길로 들어온 서역의 전법자에 의해 창건된 절이라면 고구려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을 고쳐 써야 하는 귀중한 사적이 되는 것이다. 총지는 모든 것을 다 지녔다는 비장(秘藏)의 뜻이다. 밀교적 용어로써 다라니(진언)를 의미한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야 할 총지가 지금은 텅 빈 절터가 되어 마늘밭이 되고, 고추밭이 되었으니 비밀의 단서가 될 돌쩌귀 하나 남기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총지사는 신라의 밀교승으로 대당 구법 여행을 떠났던 혜통이 665년에 개산한 것으로 되어있다. 혜통은 혜일, 명랑과 함께 중국에 건너가 당밀(唐密)을 공부한 역사적 인물이고, 개산 시기인 665년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이므로 그의 총지사 개산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총지사는 처음 백운산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현종 7년(1016)에 화재로 소실되어 이 곳 승달산 기슭으로 옮겨 중창했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재차 중건하였다고 한다. 지금 총지마을로 불리는 몽탄면 대치리 일대가 모두 총지사의 사역으로 승려 800여명, 승방 200동에 암자가 9개에 이를 정도로 대찰이었다.
총지사의 폐사에 관하여는 어처구니 없는 사연이 전한다. 총지사가 없어진 것은 순조 10년(1810) 무렵인데, 당시 충청도 현감을 지낸 임면수가 명당으로 소문난 총지사 뒤에 그의 아버지의 묘를 쓰자 승려들이 반대하여 묘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버렸다. 이렇게 하여 승려들과 임씨 문중 사이에 싸움이 나고, 그 와중에 임씨들이 총지사를 불 질러버린 것이다. 지금도 절 뒤쪽 능선엔 그때의 무덤들이 남아 있다. 불교와 유교의 세 싸움에서 천년의 고찰은 없어졌으나, ‘바라이죄’를 범한 그 무덤들은 남아 여전히 무덤에 잔디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법당 터에는 최근까지 주초석 18개가 가로 90m 세로 80m의 크기로 서로 연결된 채 남아 있었으나, 불교계와 관할부처가 눈 감고 방심하는 사이 도굴범들이 포크레인까지 동원하여 들어가 버렸다. 주초가 놓였던 자리에는 땅을 파 뒤집은 흔적이 역력하고 땅 주인은 농사짓는데 방해되던 터라 말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폐사지 관리가 이렇게 허술하다면 지금의 우리 불교는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쏟고 있는지 막막할 따름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절 뒷편 대숲을 파고드니 풀을 뜯던 흑염소 한 마리가 놀란 듯 뒷걸음친다. 그 흑염소가 고삐를 걸친 자리도 ‘당골’ 이요, ‘중샘’ 이 있는 곳이며, 칡넝쿨 밑에는 깨진 기왓장과 청자 파편이 즐비한 것이다.
절터에 절이야 있건 없건, 상사화는 길목에 피어 길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석장승 노부부는 아직도 금실이 좋은지 마주보는 자세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마을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있는 키 작은 장승이 할아버지 장승이고, 맞은편에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이 할머니 장승이다.
장승들 앞에는 판석이 있어 옛날에는 여기에도 공양물이 올려졌던 모양이다. 도로 양쪽에서 매연을 마시면서도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는 장승이야말로 짓밟힐수록 강해지는 우리네 민간신앙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절터가 엉망이니 다시 또 오라는 석장승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며 북상하는 저문 차창에는 상사화 잔영이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