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아모레스 페로스(Arores Perros)>는 퍼즐이다. 영화 속 세 편의 이야기와 여기 글 토막 그리고 나머지 한 조각은 당신. 퍼즐은 떨어진 조각을 맞추는 게임이지만, 언제나 곧장 흩어져 버릴 운명을 동반한 것.
1. 불온할수록 욕망은 더더욱 용감하다. 그리고 파멸은 불온한 욕망을 깔끔하게 완성시켜주는 마침표! <아모레스 페로스>는 우리의 저속한 관음증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썩 괜찮은 내러티브를 선사해준다, 그것도 다양한 코스식 정찬으로. 하나, 자기 형수인 수잔나를 욕망하는 순정한 옥타비오. 둘, 몸짱에 얼짱으로 무장한 발레리아와 염분을 뿌리는 유부남 다니엘. 그리고 다가설 수 없는 딸 마루를 그리워하는 전직 게릴라 엘 치보. 이들 모두는 서로의 죄악을 대신 단죄하듯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 설겨 파멸의 구렁텅이로 조금 앞질러 인도한다. 물론, 이들 코 구멍 크기가 제 각각이듯 그네들 사랑의 기원과 행방도 저마다 고유하다.
수잔나의 남편 라미로는 도둑놈에 양아치다. 낮에는 슈퍼마켓 점원이다가 밤이면 복면을 쓰고 제 일하는 직장을 털어 개별적으로 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고 솔선수범 부의 재분배를 실천한다. 이런 철지난 철없는 의적(?)들을 잡자고 근대 사회는 기꺼이 경찰들을 봉급 주며 고용했다. 우리 순정한 옥타비오는 그래서 개싸움으로 개같이 번 돈으로 개 같은 형과 개처럼 살아야 하는 수잔나를 구원하고 싶다. 그렇게 꼬박꼬박 형수에게 건네준 승리의 전리품, 화폐는 그들이 같이 떠나갈 그 날을 위한 거사 자금. 근데, 아뿔싸! 그 보다 앞서 형과 형수가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다, 당연 화폐 뭉치와 더불어. 수잔나를 구원하므로 스스로를 구원하려 했던 옥타비오는 은행을 털다 죽은 형의 장례식장에서까지 사랑을 구걸하지만, 예정된 차디찬 생의 리얼리티는 여차없다.
발레리아는 발레리나보다 잘 빠졌다. 그의 직업은 몸이 곧 자본인 모델. 그에게 흘레붙은 사내는 위풍당당한 잡지사의 간부다. 이들은 드디어 불륜 아니 또 다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용감한 결단을 집행한다. 한 마디로 딴 집 살림을 차린 것. 허나, 그들의 허니문은 조만간 지옥문으로 직행하게 되는데, 아직 그들은 곧 방문할 불행의 정체를 모른다. 살정이 붙은 인간들에게 최고 불행은 무엇보다 망가진 신체일 터.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깁스 덩어리가 된 발레리아는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사내는 좀 억울하다, 집도 사주고 그동안 팍팍 밀어줬는데…. 이런 웬걸, 이제 겨우 투자 수익을 맘껏 누려보나 했더니, 때 아닌 늦가을 태풍에 한해 농사가 깡그리 거덜 나 버린 꼴. 옛 아내에게 전화를 돌리는 다니엘, 그는 진정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투자 종목을 물색하려 사냥에 나설 테다. 아직도 그에겐 총알 즉, 권력과 자본이 여전히 마르지 않았으므로.
엘 치보는 날거지다. 정확히 말해, 투잡족이다. 그의 또 다른 직업은 돈을 준 사람이 찜해 준 이의 수명을 조금 앞당겨 주는 역할, 흔히 살인청부업자라고도 한다. 그의 젊은 시절 이력은 비록 상세히 서술되진 않지만, 직업적 혁명가 그것도 총 들고 정글을 누비던 게릴라였던 건 분명하다. 그의 역사적 사명 때문에 2살 때 헤어졌던 딸은 혁명의 가을이 저물수록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새 다 큰 처녀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딸을 그저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뿐 다가갈 수는 없는 처지. 후회는 언제나 한걸음 늦기에 후회이며 또한 늦바람이 무섭듯 회한은 보다 깊숙해서 짙은 사랑의 가면을 쓰고야 등장하는 법! 그의 딸에 대한 마지막 선물은 사람 죽여 번 돈다발을 딸 베개 밑에 쌓아주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엘 치보의 아비된 자로서의 사랑은 옥타비오와 다니엘의 욕망과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까? 그 역시도 자기 삶을 딸 마루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련지.
이들 모두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했고 진심으로 배신하고, 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화해하고, 하였다. 그들은 결단코 자기 분열이나 이중적 도덕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가장 일관된 자기보존의 욕구이며 정당화의 심적 기제이다, 비록 매순간의 동기와 계기는 다양할지언정. 하지만, 그 진심들은 또 다른 진심에게 조롱당할 준비에 늘상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사랑은 이처럼 자기 구원의 매개고 환상이다. 외려 배신과 불행과 후회는 단지 하나의 진심이 또 다른 진심에 의해 무너지는 소리일 뿐. 사랑하지 않으면 배신도 없다, 또한 화해의 제스처로 폼 잡을 이유 역시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죽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2. 스크린 속 <아모레스 페로스>의 주인공들은 에피소드 밖의 인물들과는 생면부지의 남남이다. 물론, 이들은 시/공간적으로 동시대의 특정 국가, 멕시코에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만큼 서력(西曆) 2004년 한반도 이남의 김창한과 204년에 살았을 지도 모를 어느 섬나라 우탕칸타 추장과의 격절감(隔絶感) 보다야 근접한 동선을 형성할 확률이 높은 게 사실. 어제도 오늘도 우리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 버린’ 수많은 그들은 아니 또 다른 너와 나는 내 부엌의 냄비보다도 나의 이해득실과 무관해 보인다. 물 붓고 라면 한 봉 털어 넣으면 저 허름한 냄비는 내 주린 배라고 지금 즉각적으로 채워주지 않는가.
하지만, <아모레스 페로스>의 스크린 밖에서 그들 운명의 행로를 관망하는 이들에게는 그들 사이의 행/불행이 표면적으로만 우연이란 이름으로 촘촘히 얽혀 있는 어떤 필연의 결과물처럼 보일 법도 하다. (관음증의 1차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 ‘나는 볼 수 있되 내 시선의 대상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어쩜 신과의 동일성에 대한 오래된 욕구이지 않을까.) 그러나, 목적론적 세계관이 거세돼 버린 지금도 확률 속의 우연이 아닌 형이상학적 층위의 우발성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결정적 순간’은 자로크 일당에게 쫓겨 질주하던 옥타비오의 자동차가 발레리아의 자동차를 들이박는 그 지점이다. 이로써 옥타비오의 순정은 찌그러진 자동차처럼 막을 내리지만, 덩달아 찌그러진 발레리아의 육체를 매개로 다니엘의 투자 대차대조표도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의 씨앗인 것.
여기다 상처 입은 옥타비오의 개 코피를 매듭삼아 엘 치보 역시나 하나의 긴 연관의 고리에 설핏 묶인다. 기껏 치료해준 코피가 제 싸움개로서의 생명력에 충실하게도 엘 치보의 가족 같은 개들을 모조리 물어 죽여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엘 치보는 코피에게 겨누었던 방아쇠를 끝내 당기지는 못 한다. 마치 투견장의 개처럼 한때 싸움기계로 살아야 했던 제 자신의 행로에 대한 마지막 연민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개들은 이외에도 사건을 진행시키는 장치이자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의 삶을 은근히 표상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다니엘과 발레리아의 새로운 아파트의 깨어진 마룻바닥에 빠져버린 애완견 리치도 그들 앞에 들이닥칠 운명의 서곡이자 갈등의 전면적 매개물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옥타비오 소유의 코피를 닮은 엘 치보도 이네들 삶이 또 한편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운명은 희랍어로 '모이라'(moira)다. 흥미롭게도 이 운명의 여신은 최고신이 아니지만 신들 마저 모이라가 쳐놓은 운명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물론, 화내고 질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늙고 병들어 죽기까지 하는 고대 인격신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모이라를 넘어서는 것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하나는 '휘페르모론(hypermoron)'으로 놀라운 경이, 놀라운 위대함을 뜻한다. 그 경이의 저변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깔려 있다. 또 하나는 ‘히브리스’(hybris)인데, 마땅히 갈 길을 가지 않고 넘어서 버린 경우다. 무리하거나 미망에 사로잡히면 필연적으로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 이건 도덕적 의미라기보다 존재적인 층위에 놓인 것에 해당한다. <아모레스 페로스>는 우연들의 교집합을 통해 ‘모이라’를 희롱한 ‘히브리스’의 단죄를 그려내는 작품인 것은 아닐까? 그것이 <아모레스 페로스>의 여러 군상들 중에 유일하게 ‘휘페르모론’ 너머를 꿈꿨던 엘 치보에게 잠시라도 어떤 희망의 실타래를 묶어 보고 싶은 성큼한 욕심이라 해도.
3. <아모레스 페로스>는 퍼즐이 아니다. 삶이 사랑과 배신과 화해의 삼박자로 모두 구성되지 않을 뿐더러 운명과 필연과 우연으로 전부 설명되지도 않는 것처럼.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는 게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절망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