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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기도안에서 두드리시오, 관상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의 목적인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단계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며, 또 거룩한 독서의 수단이 아니라 결과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사실 지금까지 묘사해 온 모든 것은 벌써 기도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독자 편에서 기도한다는 의식이 더 뚜렷해져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독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기서 더 기도하는 상태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거룩한 독서는 묵상의 단계에서 하느님 안에 몰입되는 상태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은 이해력으로 이런 이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러 주고 있다. “ 만일 성서 본문이 기도하면 기도하시오, 만일 성서 본문이 신음하면 신음하시오, 만일 감사하면 기뻐하시오, 희망의 본문이라면 희망하시오.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거든 두려워하시오, 왜냐하면 성서 본문에서 듣고 있는 것들은 여러분 자신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성서 본문의 정신과 자세로 하느님과의 대화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즐겨 들으시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말씀은 우리 안에 왔다가 이제 기도의 형태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암브로시오는 “들을 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기도할 때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라는 금언이 이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기도이다. 이 기도는 간청과 청원, 중재와 찬양 그리고 감사…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자” 주님과 맺는 충만한 관계에 온갖 면면이 다 표현될 수 있다. 동시에 이 기도는 그 내용을 성서로부터 얻어내며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모양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감도하시고 또 이 말씀에 육화를 이끄신 성령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일’이며 사실 늘 그러했다. 이는 선포되고 되뇌어지고 묵상된 말씀이요 나아가 노래로 불려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관상이 되고 간청이 된 말씀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분 역시 너 없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생-티어리의 굴리엘모는 거룩한 말씀이 마음을 움직여 나오는 기도를 묵상의 기도라 부른다. 이것이야말로 에제키엘이 말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계약의 궤를 모신 성전으로부터 솟아나는 참된 강이다. 이런 기도는,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는 쌍날 칼과도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을 뵈었을 때, 거기서 흘러내리는 핏방울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통회가 솟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응답이다. 하느님께서는 독서를 통해 내게 당신을 내어 주셨고, 나는 기도로 나를 그분께 내어 드린다. 예로니모도 “기도하면서 신랑께 말하라”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성서 본문으로부터 솟아나는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기 위함이며, 그 현존을 사랑에 찬 대화로써 바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사실 신약에 “아나뷤”(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되, 하느님께서 이미 구약 성서 속에서 말씀하셨던 동일한 말씀으로 응답한 사람들이었다. “즈가르야의 노래”,”마리아의 노래”,”시므온의 노래”가 그 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작은 자로서 드리는 겸손한 기도이지만, 또한 당당하고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로써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작은 자로서 드리는 겸손한 응답이지만 또한 당당하고 솔직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의 말로써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강하며 능한 기도는 바로 거룩한 독서에서 솟아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기도를 위해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깊은 전례적 이해력으로 깨달은 바이기도 하다. 사실 전례는 독서의 선포에 이어서 신자들로 하여금 음성으로서 시편을 노래하게 한다. 어떤 단계에서 기도는 독서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노래로 감사와 찬미의 송가로 시작된다. “주님 당신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요 ! 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로 저를 기쁘게 하셨으니, 당신 손에 업적에 제가 환호하나이다.” 이 순간은 기쁨의 눈물이나 춤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법열法悅의 순간이다. 주님을 위해 제가 춤추겠나이다! 이런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눈이 먼 것처럼 느끼게 되고, 그리 그리하여 이 체험을 나누기 이해- 그런데 이 체험은 사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벗들과 다른 믿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마음은 하느님으로 가득 차 흘러 넘친다. “ 가난한 이들이 듣고서 기뻐할지어다.” 그리고 주님이 얼마나 좋고도 감미로운지 모든 이는 즐겨라…
물론 이런 감흥은 쉽게 일상적으로 솟아나거나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감흥이 일어날 때는 감사로이 받아들이며 어떤 이유로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계약의 궤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것을 본 다윗은, 법열法悅에 잔뜩 취한 듯 보였다. 한나 역시 감격하여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있던 순간에 술 취한 것 같았다. 예언자들은 자주 이런 기쁨의 상태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이것은 단지 그들에게만 주어진 특전이 아니라 더러 우리에게 생기는 체험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이런 순간을 마치 목적인 것처럼 추구해서는 안 되지만 이런 감흥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이어서 놀라움과 경탄의 단계가 온다. 말씀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빛,길,생명으로 계시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거나 표현할 길이 없지만 겨우 감지할 수는 있다. 여기서 관상)기도는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분명한 신앙이 된다. 이것이 하느님과 맺는 고요한 대화이다.
그분 곁에 머물고 싶은 원인만 남고 다른 모든 원인은 사라지게 되는 상태이다. 그분의 현존과 가까이 계심이 점점 더 깊어지는 고요 속에서 감지된다. 마치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행복에 넘친 대화와 흥분이 가라앉은 후 단순히 서로 함께 있으므로 충만한 기쁨의 순간에 잠기듯…. 말이 이미 필요 없어진 두 사람은 이제 단지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생각도 점점 더 깊이 알게 된다. 성서 본문 안에서 활짝 열린 그분의 마음을 보게 되고, 거기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
카르투시오의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를 다음과 같은 기도로 마감하곤 했다. “ 주님께서는 제게 성서의 빵을 쪼개어 주시고, 이 빵을 쪼개심으로써 저에게 당신을 알려 주시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단지 글자라는 겉 껍질에서뿐만 아니라. 체험의 감각적 인식으로 주님을 점점 더 깊이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나이다. 주님, 제가 이것을 청하는 것은 저희 공로 때문이 아니오라 당신의 자비 때문이옵니다. 저는 부당한 죄인임을 고백하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에게 장차 얻을 유산의 보증을 주소서. 제 갈증을 조금이라도 시켜 줄 저 천상의 비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 주소서. 제가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나이다.”
이러한 마감 기도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항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성서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리시도록 허용해 드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에 승복하고 문을 열어드리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밥상에 앉으신다. 한 말씀도 없으시다. 그분이 이미 나와 함께 마주 계신 데, 그분의 말을 들을 필요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분이야말로 몸이 되신 말씀이 아니신가? 이리하여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는 그분을 관상하기만 하면 되는 관상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 노력으로 관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은 외부로부터 덧붙여지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거룩한 독서의 싹으로부터 자라온 자연스러운 결실이라고 해야 한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미 한 식탁에서 우리와 마주 앉아 계시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문을 두드렸고, 그리 여기서도 상조작용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도 성서 본문 안에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셔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고 내밀한 곳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을 바라보고 관상하는 것, 이것이 전부이다 마치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스승의 발치에서 그러했듯이 혹 우리가 분심에라도 빠질라치면 언제나 일깨워 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선생님이 오셨는데 너를 부르시는구나”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성서에 각 페이지는 우리에게 바로 이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시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방문을 알리신다. 경탄, 놀라움, 배경, 실세…., 관상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이다, 거룩한 독서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시선은 이제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더 깊은 시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이 시선으로 만사와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도처에 충만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관상은 탈혼도 아니요 비범한 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들 중 가장 수려한 분을 바라보는 것이며,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체험이지 환시의 체험이 아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관상의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바오로가 에페소서 3장 16-17절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지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의 통해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그분을 관상한다. 요컨대 관상은 노력이나 의지력의 행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분의 순수한 선물이다. 이것은 호세아 6장 6절에서 요구하는 그러한 지식이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의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다”
페캉의 요한은 자기 체험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유일하신 하느님, 하느님을 향해 순결한 마음으로 단순한 눈을 들어 올릴 때보다 제 영혼이 더 즐거울 때는 없나이다. 모든 것이 침묵하고 모든 것이 고요합니다. 마음은 사랑으로 타오르고, 영혼은 기쁨으로 꽉 찹니다. 기억은 힘으로 넘치고, 그리고 온 영혼은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뵈오려는 열망으로 불타, 보이지 않는 실재를 향한 사랑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관상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로잡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이 사로잡힘은 신앙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감상적인 것도 감각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사로잡힘의 상태에서, 얻기를 포기함으로써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사로잡힘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 기도에서 관상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것은 사랑과 하나로 이어진 신앙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신앙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그 영광을 알아 뵙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많이 생각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많이 원하게 많이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묵상은 그치고, 모든 생각을 던져 버림으로써 관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토니 블룸은 이 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묵상이 우리를 관상으로 이끌어들인 후에는, 찾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쓸모 없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으면서 하느님께 대해 사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다. 교부들은 하느님과 만나는 일을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늘 경계하였다.”
그리고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단지 우리 개인만의 관상의 깊이를, 그리스도 신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는 의식마저 지낼 수 없게 되고, 이리하여 우리 기도는 완전하게 된다. 수도승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막의 안토니오가 남긴 말은 과연 옳다.” 수도승이 자기 자신의 대의식하고 있는 한,그리고 기도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한, 그것은 완전한 기도가 아니다” 눈길을 우리 자신으로 향하게 하기가 도무지 불가능하며, 기도의 그 어떤 감각도 불가능하다. 단지 그리스도의 얼굴만이 우리 앞에 있을 따름이며, 그분의 빛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빛을 뵈옵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를 짓누르지 아니한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몸은 우리가 관상하는 그분의 모상을 따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너울이 거친 얼굴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사하며,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룩한 독선은 지복지관의 문턱에 다더라 종말론적 색채를 띠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마지막 순간을, 영원한 관상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의 열매는 바로 그 순간을 앞당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한 독서는 그 순간에 예언이기도 하다 즉, 종말론적 사건의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거룩한 독서를 이런 방식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말씀을 실행해 옮기는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거룩한 독서 방법의 연장선을 따라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또 하나의 단원을 시작해 보고 싶은 욕망도 느낀다. “ 말씀을 실행해 옮기시오.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의도한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말씀이 힘이 있다는 사실, 즉. 말씀. 단지 이럴때에만 거룩한 독서의 목표, 즉 주님과 가까이 머물며 친교를 누리는 것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형제 자매 아들 등의 인간적 표현을 써서 나타내신 이 친교는 주님의 뜻을 어느 정도나 실행하느냐에 달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매 순간 어떤 상황에서 얼마만큼 행동으로 옮기느냐에 달린 것이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씀의 경청은 듣는 이로 하여금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구원 아니면 단죄를 낳는다. 그는 이렇게 설교하였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말씀은 (먹지 않고 저장된)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 구더기가 끓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쌍날 칼과도 같은 말씀이 심판의 효력이다. 선포된 말씀을 한 번 받아들이고 간직하여 마리아처럼 가슴에 품어 묵상하게 되면, 이제 해야될 일은 방문하기, 곧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참된 말씀의 경청은 어쩔 수 없이 실천으로 이끈다. 그것은 사람을 방문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이 마음속에 원래 지닌 하느님의 모상이 꽃 피어나게 해 주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사람 속에 숨은 하느님의 이 모상은 언제나 그 원형이신 창조주의 음성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다. 요컨대 말씀이 구체화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씀으로써 우리 안에 원인을 일으키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거룩한 독서는 단지 기도의 학교일 뿐 아니라 삶의 학교이기도 하다. 거룩한 독서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유순한 응답을 불러일으키신다. 이것은 우리를 ’파견‘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 안에 ‘파견된 이’, ‘선교사’가 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거룩한 독서에서 실천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이렇게 종합하였다.” 거룩한 독서는 우리를 선행의 실천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어떤 말을 생각하는 것이 그 말을 암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후에 암기한 말을 기억할 수 있게 하듯이,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천을 지향하게 하고 실천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맺으면서
지금까지 거룩한 독서의 기초적인 요소들을 살펴보았다. 필자의 의도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유다이즘의 깊이 뿌리내린 독서의 한 방법을 새롭게 맛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성무일도와 전례. 그리고 기도와 함께 거룩한 독서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던 교부 전통과 수도 전통을 짧게나마 한번 돌아다 보았을 따름이다.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따르는 신앙인은 저마다 자기한테 맞게 일을 수용함으로써 이콘 화가와도 같은 일면을 지니게 된다. 이콘을 그리는 것은 말하자면 이미지로 드러난 가시적인 거룩한 독서라 할 수 있다. 마치 성서 본문에서 그러하듯이 이콘을 그릴때에도 관상 중에 뵙는 빛과 영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으로 빛을 뵈옵는다. 아우구스티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많은 말씀을 하시는 곳은 우리의 마음이다. 그분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실 때 마음에 그윽한 침묵 속에서 다음과 같은 커다란 메아리가 울린다. 나는 너의 나는 구원이로다.” 거룩한 독서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바로 이 목소리를 듣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님인 내가 너의 구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