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목 영월문화원장 영월신문 기고문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유성목 영월문화원장
1970년대 중반에 단종문화제의 사무국장으로 단종제에 참여할 때의 일이다. 외지에 나가 있는 출향인사들이 단종문화제 행사 때면 단종제 사무국에 자주 연락을 보내오는 일이 있었다. 어떤 분은 물품을 보내오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금일봉을 정성스럽게 종이에 싸서 보내면서 서신도 함께 동봉해서 보내는 분도 있고, 어떤 한분은 태극기를 해마다 보내오시는 분도 있었다.
초창기여서 그런지 지금보다는 훨씬 주민 참여가 활발했고 적극적이었다. 각급 학교에서는 가장 행렬을 위하여 시내 초, 중, 고 할 것 없이 교사와 학생이 망치를 들고 가장행렬에 필요한 도구나 단종대왕과 정순왕후가 탈 가마를 직접 만들었고, 칡 줄도 동강을 중심으로 동서 주민들이 모여 각기 만들고 서쪽과 동쪽의 주민들이 직접 메고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금일봉과 함께 편지를 보내오는 분 중에 “고향을 지키시는 분들께” 혹은 “고향을 지키시는 고마움에” 라는 글과 함께 고향을 지키고 발전시키느라 애쓰신다는 내용과 행사의 성공을 위하여 수고하여 달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편지 봉투를 뜯을 때 마다 가슴이 설레고 “고향을 지키시는 분들께”라는 용어가 나올까봐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고향에 남아있는 우리들이 과연 고향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가? 고향을 떠난 분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올 때까지 고향을 잘 가꾸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쩌다 도시로 나가 살지 못하고 고향에 태를 버리고 오도 가도 못하고 눌러앉아 버린 것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으로 칭송(?)받게 되다니 하고 여러 번 고개를 저은 적이 있다.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략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진취력이 없어 낯선 곳의 두려움에 외지에서는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고향에 눌러 앉아 있는 형태요, 다른 하나는 조상들 덕에 밥술은 먹으니 굳이 낮선 타지에서 모험과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지(外地)에 나가 있는 분들은 용기와 진취력이 있고 능력과 자신감이 있어 도시로 진출했다는 해석도 나올 만 하다.
영월지형의 풍수설(風水說)로는 초년에 고향을 떠난 사람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운세(運勢)이고 영월의 부자는 삼대(三代)를 거느리지 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는데 정말 그런지 어떤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향이 아름답고 그립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내 고향 영월은 정말 아름답고 포근한 곳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동강에는 뗏목이 길게 줄지어 내려갔고, 양지 바른 금강정 잔디에 앉아 태화산의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계족산의 서릿발 같은 정기(精氣)에 영월에서 큰 인물이 날것이라는 웃어른들의 말씀에 어떤 큰 인물이 날 것인가 하고 꿈을 꾸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내 고향 영월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왔다. 철도는 하송리 중심에서 벗어나 서강 쪽으로 빠져나가 시가지가 넓어졌고, 대학이 세워져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영월군민의 숙원이었던 LNG 발전소도 새로 건립하고 있고, 삼옥 쪽에는 골프장을 비롯하여 콘도 등 위락시설을 설치하느라고 온 산하가 흔들리고 있다. 38국도는 제천에서 영월을 거쳐 동해안으로 뻗치고 있고, 88국도는 서강을 거쳐 하동 쪽으로 놓이고 있으며, 주천으로 가는 뺄치재는 이미 터널이 완공이 되어 개통되고 있고, 상동으로 가는 와석재와 평창으로 가는 원동재도 곧 터널을 뚫는단다.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되어가는 내 고장을 보노라면 가슴 뿌듯하고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고향의 추억거리 하나하나가 점점 퇴색(退色)되어 가는가는 것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 13만의 영월 인구가 이제 4만을 밑돌고 있고, 아는 얼굴이 하나 둘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고 서글픈 느낌을 받는 것은 역시 나이를 먹었다는 징조일 것이다.
경찰서를 새로 신축할 때 변두리로 옮기지 못한 것이나, 의료원(도립병원) 자리도 조용한 곳에 자리 잡았어야 했고 기관 몇 개쯤은 덕포리 쪽으로 분산 발전 시켰어야 했는가 하면, 38국도가 시가지를 관통해 중, 공고 뒤로 빠져 봉래산을 뚫지 말고, 남향 바른 청령포 방향을 거쳐 하동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느껴 고향을 지키지 못한 죄인의 심정이기도 하다.
요즘 스포츠 파크를 짓는다는 동강 제방 쪽의 드넓은 매립지와 성토한 땅에는 각종 체육시설과 공설운동장, 실내체육관을 함께 짓는다고 하더니 공설 운동장만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하여 공설운동장과 실내체육관 두개가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 이용의 효율성을 잃을 까봐 걱정되는가 하면 후손들에게도 두고두고 후회 되는 일이 될까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사재를 털어가며 고향 일에 발 벗고 나섰던 선배님들, 김삿갓을 찾아내려고 전국을 헤매던 분들, 단종 대왕의 영월 유배 내용을 정립시키고자 실록을 뒤적이며 이론을 정립했던 분들, 38국도가 남쪽을 통과해야지 그리 가면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지르던 애향 열성파들, 어쩌면 이런 분들이 진정 고향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온 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그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타계하시고 우리 세대가 “영월을 지키는 원로”로 남아 있기에 더욱 책임을 느끼면서 맡은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란 어떤 특정인들이 아닌 고향에 사는 모든 분들을 총칭하는 것이며, 자기 생업에 충실하며 내 고장 발전을 위하여 진정한 마음으로 협조하시는 분, 다시 말하면 “고향을 빛낸 사람들”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못한 평범한 우리 서민들 전체라는 것이다.
2008.11.14 14:34 입력 / 조회 1,017
http://www.yeongwol-news.com/ywsm/bbs.php?table=news08&query=view&uid=158&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