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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스크랩 누가복음 강해-1
에스라 추천 0 조회 15 10.04.07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누가복음 강해-1


내용 목차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누가복음 강해-2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하였다.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 215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터툴리안(160-220년경)은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누가의 복음 조차도 바울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썼다는 것은 2세기에 일반적으로 용납되어진 사실이었다고 한다.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 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나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기독교 신앙의 확실한 내용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되었는데,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볼 때 누가복음은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 31). 누가는 누가복음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 등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하였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장과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나 탕자의 비유(15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다섯째로, 누가복음에는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고 한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본절은 누가복음의 내용에 대해 증거한다.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원어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완전히 확정된 일들'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초대 교회 안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며 완전히 확정된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의 창작물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에 근거한다.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본절은 누가복음의 참고 자료들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할 일꾼들에 의해 전달된 내용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 22).


뿐만 아니라, 이런 목격자들과 일꾼들이 전하여 준 대로 예수님에 관해 글을 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도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 자료들이 되었다. 이와 같이, 복음서를 씀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다. 많은 증인들과 많은 기록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것들을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정확한 사실을 증거할 한 책을 넉넉히 기록할 수 있었다.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본절은 누가복음의 서술 방식에 대해 증거한다. 본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들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본서에서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반드시 시간 순서를 의미하지 않고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아마 그 당시의 어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익명으로 사용된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본서 저자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 귀한 복음서를 썼다.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본절은 누가복음의 특별한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데오빌로 각하가 이미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었다. 즉 누가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다. 그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후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얻을 수 있다.



5-25절,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함


[5-7]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유대 왕 헤롯'은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36년간 통치했던 인물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다 아론의 자손들로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행하는 자들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세상에 의인은 아무도 없지만(롬 3:11, 20),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들은 항상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덕법들을 다 지키지는 못했으나, 그들은 짐승 제사를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은 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애썼다.


그런데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두 사람의 나이도 많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큰 결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결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특별한 복과 같았다. 그들은 이 부족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던 것 같다.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를 만날 것이다. 성경에 보면,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며 살았던 것 같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다.


[8-12]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17]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음에 틀림 없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수십 년 동안 낙심치 않고 기도했을 것이다. 고대에 의인이었던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오래 기도했다는 말인가?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적어도 25년간 기도했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약 20년간 기도한 셈이다. 이렇게 오랜 기도 생활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단련되었음에 틀림 없다.


천사는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말한 후 그가 큰 자가 되고 포도주나 독주를 들지 않을 자, 곧 하나님께 헌신할 나실인이 되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었다(출 20:6).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그는 천사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왜냐하면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음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어떻게'라는 원어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24, 25]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엘리사벳은 천사의 전해준 말대로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인간적 부끄러움, 곧 여성으로서 가졌던 부끄러움을 제거해 주셨음을 고백하였다. 과거에 오랫 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분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신다(시 135:6).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 27]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엘리사벳이 요한(세례 요한)을 잉태한 지 6개월 후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사건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순결한 처녀이었다(34절).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정조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전통 사본에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말 다음에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마리아 자신의 의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 출생한 그리고 출생할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일지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가 하실 일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포스)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한 메시아의 잉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될 일이었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야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그의 무죄성과 신성은 더 믿기 어려울 것이다.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다시 번역하면, "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계집종'이라고 겸손히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믿음과 순종을 잘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혹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이것이 마리아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심이었다.



5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을 요약하면, 첫째로, 경건한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종 요한(세례 요한)이 잉태되었다. 그들이 평생 자녀가 없었던 것이 도리어 그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였던 것 같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잉태되실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한 일에 겸손하고 진실한 믿음과 순종심을 가진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 교훈은, 첫째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항상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복되게 하여 거룩한 일에 사용하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늙도록 자녀가 없었던 사가랴가 항상 기도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과 부족 중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한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처녀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믿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진실하고 겸손한 믿음과 순종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39-45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 40]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위치한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남쪽의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엘리사벳이 잉태한지 6개월이나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1-45]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었을 때 아이가 뱃속에서 기쁨으로 뛰논 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가랴 뿐 아니라,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음에 틀림 없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네가 여자 중에 복이 있다고 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밴 태와 먹인 젖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셨다(눅 11:27, 28). 귀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엘리사벳은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혹은 잉태될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의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46-56절, 마리아의 찬송


[46-49]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마리아는 자신을 '계집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겸손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가 또 하나님을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라고 부른 것은 그의 초월성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도덕적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이러한 그의 존재적 초월성 때문이다.


[50-56]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에게는 그의 긍휼하심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의 길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능력은 공의롭고 주권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들을 내리치셨으며 부자들을 빈 손으로 보내셨고, 다른 한편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능력을 찬양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일어나 사람들을 판단하실 때 공의의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그들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 같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이모이었을지도 모른다.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엘리사벳은 해산할 날이 되어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함께 즐거워하였다. 그 아이를 할례할 날이 되었을 때,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 때 사가랴의 입이 열렸고 혀가 풀어져 말을 하게 되었다.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가지게 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무엇이든지 다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신앙은 고난 중에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69]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을 찬송했다. 찬송은 하나님을 아는 자, 그의 하신 일을 아는 자,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적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기 때문이었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원자'를 가리킨다.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에는 능력이 필요하다. 성도의 찬송은 특히 구원에 대한 찬송이다.


[70, 71]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하나님의 구원은 오래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이었는데, 그 내용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그 원수들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주위의 이방 나라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들은 사람을 범죄케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죄와 악령들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72, 73]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무능력해졌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을 언약의 형식, 맹세의 형식으로 나타내셨고 그것이 구약과 신약이 의미하는 바이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74, 75]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지심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담대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그 곳에는 불결과 불의와 죄악이 전혀 없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다.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아직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 77]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의 사명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가랴가 성령의 감동으로 한 이 말씀 속에 구원의 방법과 참의미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인간의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이었으므로, 죄사함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바로 죄사함의 사역이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결코 얻을 수 없다.


[78, 7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본절은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함을 다시 증거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심정 때문이라'이다.


'돋는 해'라는 원어(아나톨레)는 '(해의) 돋음, 여명, 새벽'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영육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가리킨다. 구주께서 오셔서 무지와 부도덕의 어두움과, 영육의 죽음과 지옥 형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지식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구원의 결과는 평강이다. 그것은 위험 대신에 안전을, 싸움 대신에 평온을, 불안 대신에 안정을, 파탄 대신에 번영을 의미한다. 구원은 좋은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인생들에게 정말 안전과 평온과 안정과 번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그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구원을 통해 그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으로(프뉴마티) 강하여졌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었다. 그것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성경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된 시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쓰시기에 더 적합할 것이다.



39절부터 80절까지의 본문은 구주와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먼저 마리아는 구주의 잉태가 능하신 이의 큰 일임을 증거했고 그를 잉태한 자신이 복된 여인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본문은 구주께서 우리의 '주'이시요(43절) '구원의 뿔'이시며(69절) '돋는 해'(78절)이심을 증거한다.


본문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그것은 우리의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로부터의 구원이며(71, 74절)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로부터의 구원이다(79절). 구원은 궁극적으로 사탄과 악령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인류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가두어 두려고 한다. 구원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세력으로부터, 그들이 준 어둠과 죽음의 그늘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원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뿐이다(72, 78절; 50-55절).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구원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사함을 통해서이다(77절). 죄가 인간과 세상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고후 5:21; 갈 3: 13).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는 삶을 위해서' 즉 거룩과 의 안에서 영원히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해서이다(75절).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며, 또한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후의 지상에서의 삶이다.


구원의 결과는 평강이다(79절). 하나님께서 주신 죄사함의 구원 안에만 참된 안정과 평온과 안전과 번영이 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아직 받지 못한 자들은 그의 구원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이미 받은 자들은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찬송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며, 그가 주신 평안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마리아의 출산


[1-5]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이었다. 그는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통치하였다. 그가 호적하라고 영을 내린 '천하'는 물론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정혼한 마리아'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와 정혼한 아내'(혹은 여자)라고 되어 있다. '정혼한'이라는 말은 '결혼을 약속한'이라는 뜻이다.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갔을 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 중이었고 해산일이 다 되었다.


[6, 7]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맏아들'이라는 원어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서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잘 나타낸다. 전통 사본에는,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지나치게 미화시킨 거짓된 사상이다. 천주교회는 그밖에도 마리아가 죄가 없었으며 하늘로 승천했고 지금도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고 오히려 성경 진리에 위배되는 심각한 오류들이다. 인간을 그릇되이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다.


'구유'는 소나 말의 먹이통을 가리킨다. 구주의 탄생은 심히 낮아진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신적 구주의 탄생이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의 성육신(成肉身)과 구속 사역의 깊은 뜻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가장 비천한 일인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실 것이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하나님의 천사들은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천사들은 존재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기를 원한다고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무서워 말라'는 말 다음에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그것은 무서워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목자들이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여 주기 때문이다. '온 백성'은 가까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지만,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주의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좋은 일은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구원은 사람에게 매우 좋은 일, 곧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구주의 탄생이야말로 사람에게 기쁨 중의 기쁨의 일, 곧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11, 12]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원문에는 11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와서 천사의 전하는 말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이유를 보인다. 본문에 구주는 '그리스도 주'이신 분으로 증거되어 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뜻으로서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의 일을 하실 것을 암시한다. 이 세 가지 직분의 일을 합친 것이 구주의 사역이다. '주'라는 말은 구주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13, 14]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찬송은 본래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찬송하는 것은 악이다.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오직 부수적으로만 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만 홀로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오직 그에게 의존하며 인간의 영광은 오직 그의 은혜이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즉 '셋째 하늘' 혹은 '낙원'(고후12:2- 4)을 가리킨다.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서 우주의 어느 한 곳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지극히 높은 하늘의 어느 한 곳에 자신의 영광의 세계를 두셨다. 그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른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선택된 자들을 암시한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 중 일부가 지상에 파견되어 일하지만, 다수의 천사들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거주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땅에서 임무를 다한 후에는 하늘로 올라간다. 본문은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해 준 말을 확인하였음을 증거한다. 본문에는 '보자'(15절), '보고(17절), '본'(20절)이라는 단어가 반복하여 나왔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마리아의 출산, 천사의 증거와 찬송, 그리고 목자들의 확인 등 세 가지이다. 본문에서 우리가 묵상할 수 있는 세 가지 진리는, 첫째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증거이다. 그는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이시다. 그는 바로 구약 성경에 약속되었던 그 신적 구주이시다.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께서 어떻게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는지에 대해 듣는다. 신적 구주께서는 비천한 세상 환경 속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오시는 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성경 전체에 비추어 대답할 수 있다.


셋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구주의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듣는다. 구원은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구주의 탄생은 기쁨 중의 기쁨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죄와 불행과 죽음의 문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가? 인간에게 의와 평강과 영생은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와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복이다.


여러분은 이 신적 구주를 통해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인 구원의 복을 얻었는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인 구원의 복을 얻었는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일을 발견하고 체험했는가?



21절, 할례를 받으심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로서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 23]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 아이의 경우는 출산 후 7일과 33일, 도합 40일이 지난 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또한 율법의 교훈대로 첫 남자 아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가정은 복된 가정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오늘날도 성경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고자 힘쓰는 가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가정이다(시 1편; 119편).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요셉과 마리아가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인 제물은 어린양과 비둘기 각각 한 마리씩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한 쌍으로 그것들을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였다(고후 8: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와 영생과 천국을 얻었다.


비둘기 한 쌍 중 하나는 번제물이고 다른 하나는 속죄 제물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에 속죄 제물을 바치게 한 규정은 아마 원죄 때문일 것이다. 즉 여인이 죄 없는 자녀를 출산한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자녀를 출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출생은 신비하고 귀한 일이지만, 출생된 생명은 날 때부터 죄악되므로 출산한 여인은 속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부패된 당시의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들이 더러 있었다. 신앙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그 당시에는 일차적으로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곧 궁극적으로 신천 신지의 도래를 의미할 것이다. 그곳만이 슬픔의 세상에 사는 자들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 혹은 계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뜻일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성령이 그와 함께하셨던 시므온의 이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 즉 주께서 보내신 구원 혹은 구주이시며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증거되었다. '만민 앞에'라는 말은 '모든 백성들 앞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포함한다. 또 '이방의 빛'이라는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예수 그리스도는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예비된 구주이시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부도덕하며 죽음의 그늘 아래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을 위한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의 빛이시다.


33절의 '그 부모'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요셉과 그의[그 아기의] 모친'이라고 되어 있다. 43절의 '그 부모'라는 말도 전통 사본에는 '요셉과 그의 모친'이라고 되어 있다. 엄격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는 모친만 있고 요셉은 단지 법적인 부친에 불과했다.


[34, 35]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면, 하나님의 보내신 저 의인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수 있었는가! 인간은 실로 심히 죄악되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마리아가 결례 의식을 행하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또 하나의 신기한 사실은 여선지자 안나의 증거이었다. 그는 나이가 매우 많은 자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그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었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매우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예루살렘에서 구속됨을 바라는'이라고 되어 있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기 예수는 바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오셨던 것이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결례를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도록 어느 정도 허용하셨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9절까지의 내용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시므온의 증거이다. 그는 예수를 '주의 구원'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만민을 위해 예비된 자'이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위해 예비된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고 이 세상에 보내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택한 백성들은 모든 민족들, 모든 종족들, 모든 나라들, 모든 언어들 가운데 있다. 우리 한 민족 가운데도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로 그들을 위한 구원자이시다.


출생하신 지 40일만에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을 통해 증거된 이 신기한 증거가 복음서의 대주제이다. 예수--그는 만민을 위해 준비된 구주이시다.


여러분은 그를 통해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무지와 부도덕과 죽음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의 빛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새 세계, 곧 영생의 세계를 발견했는가? 우리 모두 복음서의 진실한 증거를 통해 예수님을 확인하고 확신하자! 그리고 그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참 제자들이 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과, 열두 살 때의 사건과, 그 후에 그의 성장에 대해 간략히 증거한다.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본절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본절이나 앞에 27절의 '아기'라는 원어(파이디온)는 말 그대로 '어린 아기'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본절은 네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아기 예수는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자랐다.


둘째로, 아기 예수는 강하여지셨다. 전통 사본에는 '강하여진다'는 말 다음에 '심령으로'라는 말(프뉴마티)이 있다. 이것은 정신적인 성장을 가리킨다. 아기 예수는 몸만 성장하신 것이 아니고 연약한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는 지혜가 충족하셨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특이한 점이었다. 이것은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의 증거이었다.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 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지혜와 능력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 지혜가 충만하신 것은 그가 가지신 신성의 당연한 표이었다.


넷째로, 아기 예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하게 그 위에 있었다.


[41-43]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 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1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열두 살 때의 한 사건을 증거한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3대 절기 때마다 즉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예수께서 열두 살 때에도 그러하였다. '아이'라는 원어(파이스)는 '아기'라는 말(파이디온)보다 큰 나이의 아이를 가리킨다. 43절의 '그 부모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요셉과 그의 모친은'이라고 되어 있다.


[44-47]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아이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그가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삼일 후에 요셉과 마리아가 아이 예수를 발견한 것은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다. 본문이 증거하는 중요한 점은, 그 선생들이 다 아이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이었다.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소피아)과 비슷한 본절의 '지혜'라는 원어(쉬네시스)는 '총명'(understanding)이라는 단어이다.이와 같이, 본문이 증거하는 바는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어린 아이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48-50]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본문의 증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리아는 예수께 '아이야'라고 부른다. '아이야'라는 이 말(테크논)은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마리아는 또한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 외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나시지 않았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탄생하신 분이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이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 예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어에는 '집'이라는 명사는 없고 정관사만 있다. 그 구절을 직역하면, '내 아버지의 것들에 있어야 할 줄을'이다. 생략된 명사는 우리말 번역대로 '집들'(오이코이스)이나 혹은 옛날 영어 번역대로 '일들'(에르고이스)일 것이다. 문맥상,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씀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그 자신의 증거이다. 12살까지 침묵하시던 아이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었다. 그 후에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또 다시 침묵하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아이 예수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시고 단순히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었다.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한가지로'라는 말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는 계속하여 순종하심을 보인다. 아이 예수께서 순종한 대상이 누구인가? 그것은 요셉과 마리아이었다. 아이 예수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했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아이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말세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한다.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에 있어서 자라셨다.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활동들은 영혼의 활동들이다. 특히 지혜는 영혼의 주요 활동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갔다. 40절에서는 '지혜가 충족하며'라고 말씀했는데, 본절에서는 '그 지혜가 자라가며'라고 한 것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가 더 드러남을 나타내는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는 십대의 소년에서 20대의 청년으로 자라셨고, 마침내 공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실 30세가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약간의 증거를 가진다. 첫째로, 예수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는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특히 그는 지혜가 충만하셨다.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셨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하여, 그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하여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시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마리아도 아이 예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오늘 본문의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믿어야 한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누가복음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그를 믿게 되고 그를 확신하게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본받을 것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하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어야 하고,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절부터 20절까지는 예수님보다 먼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20절부터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과 예수님의 인간적 족보에 대해 증거한다.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 2]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 혹은 29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으로서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총독직에 있었다.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스인데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통치했다. 그 동생 빌립(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으로서 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통치했다.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서 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통치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말 직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군이 될 자는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하며 그 말씀의 참뜻에 사로잡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요한에게 왔다. '빈들' 혹은 광야는 세속 사회에서 분리된,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 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그 곳은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빈들에서,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빈들은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곳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런 환경을 즐거이 이겨내야 한다.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의 선구자이었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그가 전파한 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었다. 즉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증거한 것이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 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필요하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 사람의 죄를 사하실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 그의 긍휼하심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긍휼하심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회개를 명령하신다. 또 그는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 1:16-20,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세례'는 회개의 결심을 나타낸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하나님의 긍휼로만 우리의 죄가 용서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를 받을 수 있고 또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4-6]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5절의 말씀과 같이,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본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로서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시다. 기독교 진리는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의 하나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여러분은 이 구원을 받았는가?


셋째로,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 불신앙과 회의주의,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자는 자신의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죄를 회개치 않고 죄를 품고 사는 자는 멸망과 불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그 멸망으로부터, 그 불로부터 구원함을 얻는다. 여러분은 참으로 회개했는가?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본문은 세례 요한이 한 설교의 내용과 무리들의 질문에 답한 교훈의 내용을 증거한다. 세례 요한의 설교 내용의 요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다.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마귀에게 속함을 나타낸다. 창세기 3장에 증거된 대로 마귀가 사람을 범죄케 한 후,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요한복음 8:44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마태복음 23:33에 보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강하게 책망하셨다.


요한일서 3:8에서, 요한 사도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했다. 요한일서 3:10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와 같이, 성경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곧 의를 행치 않고 이웃을 사랑함이 없는 자들이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귀와 악령들에게 속하며 그들의 속성들을 가지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행위들을 한다.


세례 요한은 또한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격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홍수 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욜 3:2, 12).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대전제이다. 로마서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2:5, 16,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죄인들의 죄악들로 인하여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온 세상에 임할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참된 회개를 하라'는 뜻이다.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참회개와 거짓 회개의 차이가 무엇인가? '회개'라는 원어(메타노이아)는 '사고방식의 변화,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 혹은 돌아서는 것이다. 그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다. 그러므로 참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함과 거짓으로 얼룩진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함과 진실의 변화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참회개를 하라고 외친 것이다.


세례 요한은 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그런 헛된 생각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 확신을 가진 사람을 멸망케 한다.


세례 요한은 또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한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일이었다.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나무에 비유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 즉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혹은 이제(에데)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 앞에 작정되어 있다. 가치 없는 나무들을 찍어 땔감으로나 쓰듯이, 가치 없는 죄인들은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그 곳은 사탄과 악령들 그리고 회개치 않은 죄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처소이다.


[10, 11]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요한의 설교를 들은 많은 무리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회개의 구체적 행위에 대해 물었다. 요한은 무리의 질문에 대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행위의 변화이다. 자기 자신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변하여 남들을 돌아보고 없는 자들과 나누는 것이 회개의 증거이다.


[12, 13]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세리들 즉 세금을 받는 관리들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 그들도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대답하였다. '늑징하다'는 우리말은 '강제로 징수하다'는 뜻이다. 세금을 받는 관리들에게 필요한 의는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하지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군인들도 회개하기를 원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며 물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사람들에게 강포하지 말며 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봉급을 족한 줄로 알라'고 대답하였다. 군인들에게는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이 불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진실과 선함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그 어떤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진실, 선함이 요구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악된 삶에서 돌이켰다면 공의와 정직, 진실과 선함을 행위로 나타내어야 한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가정과 직장과 기타 삶의 현실에서 공의와 정직과 진실과 선함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회개한 자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7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에서 몇 가지 교훈을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에게 혹시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생각, 헛된 확신이 있다면 다 버리자.


둘째로, 우리는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이 버리움을 당하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항상 경각심을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와 비슷하게,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 사도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다(롬 8:13). 이 말씀들은 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성도들도 이 말씀 앞에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본문은 세례 요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그 때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더불어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던 것 같다.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 그리고 육신적 건강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리들은 혹시 세례 요한이 그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무리들의 생각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에 대해 분명하고 솔직하게 증거하였다. 그는 무리들에게 잘못된 존경과 섬김을 받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이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일 것이다. 사람들 간의 능력의 차이는 비슷하다. 물론 기술이나 기능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 늙고, 병들거나 다치기 쉽고, 또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입지 않으면 춥고 그리고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실 것이다.


특별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요한은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지만,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의 기적들, 다양한 종류의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각종 질병들을 고치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으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고 말씀으로 폭풍을 잔잔케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영혼들을 변화시킨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요한을 통한 회개 운동도 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응답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 운동, 믿음 운동, 중생(重生) 운동 곧 구원 운동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었다.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차이는 한마디로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 운동은 하나님의 능력의 운동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사람의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전 4:20).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는 많은 능력을 행하셨고 또 제자들에게 능력으로 함께하셨다. 능력의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에(마 28: 20), 제자들은 고난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며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후에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증거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7-12).


또 그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도 이렇게 증거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4-10절).


둘째로,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심을 증거하였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한다. 물 세례는 죄씻음을 단지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인간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례 요한이나 오늘날 목사들이나 물 세례를 베풀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성령으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의 죄를 씻어 중생(重生)케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일이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성령과 불은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하는 것을 비유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사야 4: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말라기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죄악된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重生)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주 예수께서는 언제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는가?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된 오순절 사건에서이었다. 그 때 성령께서 주의 제자들에게 처음 내려오셨는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보내신 것이었다.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주께서는 과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셋째로,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가 심판자이실 것을 증거하였다. '키'는 타작할 때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자기 타작마당'이라는 표현은 주께서 자신의 소유지인 타작마당에서 심판하실 것을 보인다. 사람이 타작할 때 남의 집 타작마당에서 하지는 않는다. 각각 자기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한다. 주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며, 이것은 이 세상이 주의 소유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권한이 있으시고 과연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요한은 주께서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라고 말했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쭉정이는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없는 자들, 즉 진실히 회개치 않고 주의 뜻에 순종치 않은 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다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의 장소, 곧 영원한 형벌과 고통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세례 요한은 백성의 죄를 지적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그의 뒤에 오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좋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분봉왕 헤롯이 그 동생의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과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들을 책망하자, 헤롯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악한 왕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왕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 앞에 엎드려 회개하였다. 오늘날도 악한 사람들은 헤롯같이 행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실한 성도들은 다윗같이 회개할 것이다. 그러나 참 선지자의 길은 요한이 갔던 것과 같은 고난의 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15절부터 20절까지에서 우리는 요한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사람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그는 능력의 구주, 신적 구주이시다. 곧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둘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영혼들을 하나님께 의탁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셋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어야 한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쭉정이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알곡이 될 수 있는가? 회개와 믿음과 성실한 순종을 통해 그렇게 될 수 있다.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으나, 회개하고 주를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이어받게 될 것이다.



21, 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그 자신이 죄인이시거나 죄사함이 필요하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죄인들의 구주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짊어지심을 나타내셨던 것뿐이다. 이러한 행위는 청년으로 다 성장한 인간 메시야께서 자신의 사명의 일을 시작하시기 위한 준비의 첫걸음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사명, 자신의 사역을 증거하였다.


그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가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그렇게 되었다고 증거했다. 인간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일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의 일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다. 그 때 하늘이 열리는 일이 생겼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사건이었다. 후에 스데반도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행 7:56).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 성령은 영이시므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이 때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이것은 인간들을 위한 특별한 계시적 사건이었다. '비둘기같이'라는 상징은 성령의 순결함을 나타낼 것이다. 마태복음 10:16에서, 예수께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비둘기를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메시야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여기에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삼위일체의 진리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의 강림은 필요하였다. 그것은 능력의 보증이기도 하였다. 요한복음 3:31, 34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 . .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그 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음성이며 그가 친히 하신 증거이었다. 인간 예수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즉 신적 본질 곧 신성을 가지신 자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또 한번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 31).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 아들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했다.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원문을 직역하면, 옛날 영어성경처럼, '그런데 예수 자신은 약 30세가 되기 시작하셨고,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되신 예수님은 그 때 약 30세가 되기 시작하셨고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다.


[24-27]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본장에 증거된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음을 고려하여,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 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많은 주석가들이 추측하는 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도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28-31]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 시대에, 그리고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거한다. 구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증거하였다. 몇 구절만 인용해 보자. 예레미야 23:5, 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30:9,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33:15, "그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32-34]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또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창세기 12:2, 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35-38]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더욱이, 누가는 메시야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야 예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어린 아이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내셨고 청년 시절을 지나 이제 30세가 되셨다. 그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신 사람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셨다. 그는 구약에 예언된 대로 아담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셨던 것이다.


여하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성취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셨던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행하셨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야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 그는 항상 그러하시다. 그는 우리에게 하신 약속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었다. 모든 사람은 이 증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놀라운 진리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 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아니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웁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를 우리를 위해 주셨다. 그것은 실상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주저되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차례이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깨닫자.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며 진리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실하고 신실한 자들이 되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확고하고 우리의 소망도 확고해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예수께서는 세례받으신 후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다. 신성(神性)에서 보면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본체이시지만, 인성(人性)의 면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전도 사역에 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전도 사역을 위해 성령의 충만을 받으셨다면, 오늘날 말씀의 봉사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복음 전도의 일은 성령의 지혜와 힘과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본절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성령 안에서[혹은 성령에 의하여] 광야로 인도되시며 사십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신 성령께서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신인양성(神人兩性) 1인격이시며, 또 삼위일체에서 보면 예수님과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지만, 그 두 분 사이에는 인격적 구별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표현했다.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는 실제로 존재한다. '마귀'라는 원어(디아볼로스)는 '중상하는 자, 훼방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악하게 비난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으로,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리운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며(엡 2:2),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주께 청구했듯이(눅 22:31) 성도들을 시험하여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범죄케 하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죄인들을 위한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과 세상의 가장 근본적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주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것을 이기시는 것이 필요했다.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귀의 첫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시험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먹을 양식을 위해 일하고 싸우고 전쟁도 하고 죄도 짓고 죽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바로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우선,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 즉 신성(神性)을 가진 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실 수 없다.


예수께서는 과연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지신 자이시다. 신약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드시지 않아 몹시 시장하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행하신 어느 기적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도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했고, 이런 목적 때문에 그 모든 사실들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기록하기를'이라는 말(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은,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며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한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시편 119:105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증거했다. 또 에베소서 6:17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오늘 우리도 성경 말씀으로 인생을 살며 성경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 전통 사본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될 이유는 사람이 육적 존재만이 아니고 영육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떡은 육을 위해 필요하나,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영이 있다. 떡은 사람의 영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영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떡은 그 죄의 결과인 불행과 죽음을 막지 못한다. 사람은 살기 위해 또 행복을 위해 먹으나,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고 만다. 그러므로 떡으로만 사는 자는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의 몸에 법칙이 있듯이, 사람의 영에도 법칙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법칙이다. 사람이 이 법칙대로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행과 죽음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더욱이, 죄로 인하여 불행과 죽음 아래 처한 인생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 곧 구주 예수에 대한 말씀은 영생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5, 6]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전통 사본의 5절 전반부는 '마귀가 그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라고 되어 있다. 마귀의 두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다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라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잡은 자'로 표현했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했다(요일 5:19). 또한 이 세상의 권세와 부귀, 영광이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지극히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또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다(딤전 6:9, 10).


요한 사도도 말씀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다(요일 2:15-17).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이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 권세가 다 하나님께로 나며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씀했다(롬 13: 1).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 36).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예수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했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한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한 것이다(요일 2: 15). 또 야고보서에도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다(약 4:4). 세상을 취하려는 자는 하나님 대신 마귀를 따르게 되고 그 결국은 멸망이다.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전통 사본에는, '기록하기를'이라는 말 앞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이 있다. 마귀가 노골적으로 하나님 대신에 자신에게 절하라고 시험했을 때,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셨다. 우리의 종교를 부패시키는 시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사탄은 물론, 마리아도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다면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도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전도서가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과 상관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특히,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 추구, 혹은 거짓된 또는 과장된 기적 체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10, 11]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을 전체에 비추어 해석할 때 그것을 바르게 적용할 수 있으며, 성경의 한 부분의 말씀을 다른 부분의 것과 충돌시켜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불변성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외적인 기적 현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예수님을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 우리가 그 시험에 넘어지면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마귀의 존재와 그의 시험을 인식하고 잘 대처해야 한다.


둘째로,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마귀의 시험의 내용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는 떡 문제인데, 거기에 대한 해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의 문제이며 그것은 사탄에게 절하는 것을 포함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문제이며 그것은 잘못된 기적 추구를 포함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교훈들대로 떡으로만, 물질과 돈으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 바르게 섬겨야 하며, 또한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추구하는 잘못된 기적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본문은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자신을 증거하신 내용과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고 죽이려 한 일을 기록한다.


[14, 15]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권능 혹은 감화력으로라는 뜻이겠지만, 또한 기적의 행위들을 뜻할지도 모른다. 본문 23절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셨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리 온 사방에 퍼졌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겼다고 생각되는 곳으로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모여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며 공적 문제들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번째 요소이다.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칭송하였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누가복음 2:39은 나사렛을 예수님의 '본동네'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기 위해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자기 습관대로'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습관이 있으셨음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어릴 때부터 회당 예배에 참석하신 습관을 가지셨다. 사람은 게으름의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부분이었다. '책을 펴서'라는 말은 두루마리를 펼쳤다는 뜻이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혹은 책)'이라는 말은, 이사야 40장 이하의 내용이 이사야의 글이 아니고 포로 귀환 후 익명의 저자의 글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본문은 이사야 61장의 말씀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분명히 증거한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은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 사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11: 28에 보면,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야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야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래서 요한복음 1:17은 증거하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면, 바울 사도도 증거하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다.


[20, 21]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책을 덮어'라는 말은 두루마리를 말으셨다는 뜻이다. '그 맡은 자'란 성경책 관리를 맡은 직원을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혹은 성경, 그라페)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친히 선언하신 대로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오셨다. 그는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바로 그 메시야, 곧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이신 것이다.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 사람들은 그의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증거하였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도,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에,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되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 2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는 이미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면, 14절의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라는 말씀은 그런 내용을 포함했을 것이다. 또 주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예수께서는 우선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과연 나사렛 회당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불쾌히 생각했다. 예수님에 대해 기이히 여겼던(22절) 그들은 분이 가득했고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그를 밀어뜨려 죽이고자 하였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미움은 살인이다. 상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아직 살인의 행위까지 진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지만, 먼저 형제에 대한 미움의 생각과 감정부터 버려야 한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예수께서는 권세가 있으셨고 또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택하실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4절부터 30절까지의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본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자신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읽으신 이사야의 예언은 치료의 복음,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하여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사역을 의미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 곧 인류의 구주이시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따르고 있는가?


둘째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으며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39-42절). 우리 모두는 나사렛 사람같이 예수님을 배척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같이 그를 믿고 영접하자.


덧붙여,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면모나 인간적 약점만 보고, 혹은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딤후 4:3, 4) 배척하기 쉽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13의 말씀대로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즉 '그들의 일 때문에) 그들을 가장 귀히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 그들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성경적 사상과 분별력과 입장을 가지고 믿고 살면서 바른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와 성경적 교훈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은 목사들의 인간적 면모만 보지 말고 그들의 일, 곧 그들의 말씀 사역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 32]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에 놀랐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 29, ". . .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하나님의 힘과 권위이셨다.


[33, 34]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가버나움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한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런데 그 더러운 영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르게 알고 있다.


[35-37]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막으시며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으셨다.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또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다. 그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에게서 나왔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의 말씀에 다 놀랐다. 그 소문은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셨다.



38, 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 39]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본문은 시몬 베드로 사도가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임을 증거한다(고전 9:5도 참조). 천주교회가 성직자의 독신 서약을 주장하는 것은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비성경적이다.


마태와 마가의 증거를 종합하면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고 그의 열병은 떠나갔다(마 8:15; 막 1:31). 누가는 그가 열병을 꾸짖으시니 그 병이 떠나갔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나 혹은 물질적 작용이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의 만물이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었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그리고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병고침의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40, 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해 질 적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온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은 각종 병환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마가복음은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표현하였다(막 1:33). 예수께서는 일일이 각 환자 위에 손을 얹어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 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역시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다. 전통 사본에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 본문이 확실함은 예수께서 그 귀신들을 꾸짖으신 이유에서도 드러난다. 이와 같이,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사람됨을 전한다.



42-44절, 전도하심


[42-44]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막 1:35).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 동네에 머물기를 요청했을 때,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증거하셨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즐거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근래에 영어 성경들이 몇 개의 고대 사본들에 근거하여 '갈릴리'라는 말 대신에 '유다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는 본문을 택한 것은 잘못이다. 특히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4:23과 마가복음 1:39의 증거를 비교해볼 때 '갈릴리'라는 전통 다수사본의 본문이 옳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



결론적으로, 31절부터 44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보인다. 첫째로,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믿거나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주를 믿거나 그를 통해 구원을 받는 길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증거만은 진리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시요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35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39절),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40절).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비인격체이게 보이는 것을 향해서도 명령하신 것이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의 명령과 그 명령으로 인한 병고침들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시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여러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고 있는가?


셋째로,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귀신들이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금하셨다(마 8:4; 9:30).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다른 데 있으셨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43절). 오늘도 참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확대하여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완전한 해결 곧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그 구원은 죄문제의 해결을 통해 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셨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전도의 사명을 다하자. 개인적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전도하고 전도지를 나누고 교회적으로 수요전도대에 참여하고 또 국내외에 전도자들을 파송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 2]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1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밀어닥쳤을 때,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이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 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특히 두 배에 있으셨다. 그것들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이었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들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이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를 귀찮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그와 아마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예수께서는 말씀 전파의 일에 있어서 형식을 크게 중시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의 강단은 시몬의 배이었고, 그의 청중은 아마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이었고,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4, 5]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주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씀은, 전날 밤 밤이 ?도록, 즉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잡은 것이 없었던 상심한 시몬에게 고기를 잡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 그 일을 통해 그를 제자로 부르시기 위함이셨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시몬 베드로는 이미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 42). 그는 이 기적의 사건을 체험하기 전에 벌써 주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마음 속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순종심이 있었다.


[6, 7]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시몬 베드로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시몬 베드로뿐 아니라 또한 그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증거한 사건이었다. 밤새도록 잘 잡히지 않던 고기들이 그물에 몰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찢어지다'는 원어(디에레그뉘토,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고 잡힌 고기들이 그 두 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두 배가 거의 잠기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8, 9]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이렇게 기적적으로 고기가 많이 잡힌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본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죄악됨을 크게 깨닫고 주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을 떠나시기를 요청했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10, 11]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결과적으로 보듯이,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목적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또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고 시몬은 그의 말씀에 응답하였다. 시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본문은 '저희가' 그러했다고 증거한다. 즉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의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한 전임전도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진정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자가 되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이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세계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을 참된 복으로 인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귀한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아마 바닷가에 앉아 있었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특히 그는 시몬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께서 택하신 영혼들과 부르실 종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심을 믿는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복음서의 일차적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데 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가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느끼며 주께서 자신을 떠나주실 것을 요청했다. 기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았던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놀라운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드릴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부수적으로 그들이 장차 사람들을 구원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해야 할 것을 보인다.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는 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힘과 도우심으로 행할 때 그들은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께 고침 받기를 소원하여 고침을 받았다. 예수께서 다른 동네에 계실 때에는 그가 그런 소원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동네에 오셨을 때 그는 소원을 말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에게 말했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문둥병'은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하며,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을 변색시키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문둥병'이 오늘날의 나병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의 악성 피부병일 것이라고 한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사람이었다. 이미 그 병은 심각히 그의 온몸에 퍼져 온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 46). 본문의 이 사람은 나병 때문에 불행해진,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보고 그에게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고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주의 백성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했다.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께서는 즉시 그의 소원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과 같았다. 그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지 않았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나병 환자가 되었던 누나 미리암의 치료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여 응답받으신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의 뜻을 따라 신적 능력을 나타내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나병이 곧 떠나니라'는 말씀은 그의 치료가 즉각적이었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예수께서 병고침 받은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병고침 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으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이며, 나병 환자가 정결케 되었을 때 행해야 할 바에 대해 율법에 규정된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가 그 병에서 나으면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병 나은 여부를 확인받아야 했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깨끗한 새 두 마리를 가지고 오게 하여 그를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해야 했다.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하고 다른 새는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취하여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은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고 선언하고 살아 있는 그 새는 들에 놓아주어야 했다. 그런 후 그 병에서 나은 그 사람은 어린 수양 하나로 속건제를, 또 다른 어린 수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또 고운 가루 에바 10분지 3에 기름 섞은 소제물로 소제를 드려야 했다. 이상과 같은 율법의 규정은 그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


[15, 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 그에게 선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도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모여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병고침도 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에 힘쓰신 것은 교회의 모든 일꾼들과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또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무엇을 기도하셨으며 또 왜 기도하셨을까라고 질문해 볼 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이 거기에 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참으로 신비하다. 그러나 여하튼 하나님의 아들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사람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더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능력을 공급받기를 원하는 자마다 기도하는 한 시간을 사모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생활 속에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 예수께서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세상에 이런 치료가 가능한가? 사람이 나병 환자를 이렇게 말 한 마디로 고칠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이심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둘째로,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고침받은 그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었다(14절). 또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다(16절). 예수께서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환자들을 치료하시는 정도의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 곧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써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고 또 그것은 우리에게 모범과 교훈이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길이며 또한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는 길이요 그의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넘치게 누리는 길이다. 그러므로 모든 봉사자들과 성도들은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다. 로마서 12:12, "기도에 항상 힘쓰며."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하는 성도와 일꾼은 그 임무와 사명을 다 이룰 것이다. 그의 심령은 결코 메마르거나 연약하지 않을 것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아보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 모인 사람들도 그 네 종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와 유대의 각 동네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노모디다스칼로스)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노미코스)나 '서기관'(그람마튜스, 본문 21절 참조)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며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문 것 같다. 참된 경건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이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빠지게 한다. 참된 경건과 바르고 분별력 있는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 곳에서 예수님께는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하셨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주의 능력이 그들을 고치기 위해 있었더라'이다. '그들'이라는 원문의 말은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 병환자들이 많았음을 보인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 19]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로 인도되었다. 중풍병자는 신체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 앞에 모인 무리들이 그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문제만 생각했지 이 불쌍한 병자가 예수께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지 못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 땅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린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不治)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했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에폴림),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죄 없는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 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의논한다'는 원어(디아로기조마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reason)'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마가복음은 그들이 '마음 속으로' 의논했다고 증거한다(막 2:6, 8). 본문 22절에서 예수께서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고 질문하신 말씀에서도 그 뜻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 속으로 은밀하게 하는 의논까지도 아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은 마땅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 24]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병을 고치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이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물론 쉬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예수께서 더 어려운 말을 하신 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셨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자주 사용하신 말로서 자신이 사람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은 신적인 사역으로서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예수님은 사람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본절의 말씀은 사람이신 그가 곧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는 것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인격이 아니시고 한 인격 곧 한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25, 26]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셨다. 그 사람은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났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저희 앞에서'라는 말씀은 저희가 이 사건의 증인들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본 많은 사람들은 다 그 일에 대한 목격자적 증인들이었다. '곧 일어났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치료 받은 그 병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일을 본 모든 사람들도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운다. 무엇보다 첫째로, 우리는 중풍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고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야 할 것이며, 또 진리를 구하고 영생을 찾는 자마다 이 사건을 확인하고 예수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부수적으로,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중풍병보다 더 근본적인 죄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죄와 병과의 관련성을 배운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법적으로는 병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천국에서 그 완전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또 우리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 야고보서 5:16에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깨닫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즉 죄의 징계로 병에 걸리지 않도록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본문은 예수께서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세금을 받는 관리]를 제자로 삼으신 일과, 또 자신이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말씀하신 내용을 증거한다.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레위라 하는 세리를 부르셨다.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불성실하지 않고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지키고 있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예수께서는 레위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좁은 의미에서 성도들 중에서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특별한 부르심 곧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님은 이전에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런 부르심으로 부르셨다(마 4: 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또 성실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전임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바울 사도도 전임사역자 디모데에게 말씀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딤후 2:3, 4).


세상적, 물질적 면에서 세리 레위의 경우는 베드로나 야고보의 경우와 달랐을 것이다.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매우 부유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런 안정된 직업과 부유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베드로나 야고보 등도 세상적 손실을 감수했겠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레위는 그들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였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으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 곧 그를 통하여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바르게 배우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사명의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하였다. 그것은 부잣집의 큰 잔치이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기뻐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다 함께 잔치상에 앉아 즐거이 음식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그 잔치에서, 레위의 친구들은 예수가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거나 그들이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고 그 잔치에 참여하여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전통사본에는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라는 말의 순서가 '저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다. '저희 서기관들'이라는 말은 '유대 백성의 서기관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적 지도자들이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였다.


그들의 비난의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경건한 자들이 악한 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5:11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셨기 때문이다(32절).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잘못 알고 잘못 판단하면서 비난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서는 차라리 남을 비판하지 말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보류해 두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 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할 것이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교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접촉할 수 있으나, 그들이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론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러한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은 되어도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27절부터 32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즉 죄인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영혼 구원의 전도는 그의 사명이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사명도 영혼 구원의 전도이어야 한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사명을 바로 깨닫고 이 일을 연구하고 이 일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위해 다 포기하였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명예와 행복이 예수님보다 더 귀하지 않다는 것을 참으로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그 영원한 천국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것 때문에 예수님을 작게 여기지 말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는 것을 바로 깨닫고 그를 믿고 충성되이 그를 따라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그릇되이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올바르게, 진리대로 판단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잠언 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그러므로 상대방의 말을 듣기 전에는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잘못 판단하고 잘못 비난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본문은 '당신의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서 단지 금식 문제뿐 아니라 신앙 생활 전반에 대한 어떤 원리를 보인다. 그것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들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4절). 그러므로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도 있었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했던 것 같다.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한다'고 말했다고 묘사하였다(12절).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두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평소에 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던(마 11:18) 그들의 선생님을 본받아서 그리고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아마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했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형식주의와 외식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금식도 힘썼던 것 같다. 물론 혹시 그들 중에는 그리고 그 외의 진실하고 경건한 유대인들 중에는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예를 들어, 스가랴 8장에)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회복을 사모하며, 또한 당시의 로마 제국의 통제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갈망하며 금식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보았던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었다(눅 2:37).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자들'로 묘사되었다. 마태복음 11:18, 19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즐거이 먹고 마셨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무엇인가? 아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예수님의 명성을 낮추려는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또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구별하고 금식의 행위에 있어서 자신들과 함께 분류함으로써 자신들의 그 종교적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기를 좋아했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경건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모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셨음을 알았더라면,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얼마 전에 밝히 증거했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더불어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먹고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하지도 또 이해하지도 못했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 잔치집의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찌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3:29에 보면, 그는 말하기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다. 인간의 많은 일들 중에 크게 중요하게 여기는 두 가지의 큰 일이 있다면, 하나는 결혼이요, 다른 하나는 장례일 것이다. 전자는 기쁜 일이요, 후자는 슬픈 일이다.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쁨의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에 제자들이 금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 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도는 한편으로는 구원으로 인하여 그리고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제이 씨 라일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다: "우리 앞에 있는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음식의 절제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애통과 자기 비하(卑下)의 시간이어야 함을 예언하는 것 같다. 그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살아야 할 마음의 상태를 묘사한다. 지금은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자신을 부정하고 죽여야 할 시간이다. 배부름과 만족의 시간은, 우리가 신랑을 우리 가운데서 다시 뵈올 때까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 16, 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대처하고 극복해야 함을 가르치신 적도 있다. 마태복음 17:21(전통사본), "그러나 이런 류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또한 초대 교회는 특별한 때에, 예를 들어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의 장로들을 선택하여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 사도행전 13:2, 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오늘날 교회들의 관습과 달랐다. 오늘날 교회들은 직분자들을 세울 때 잔치하며 임직자들을 축하한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일반 성도들보다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이어서 옷과 포도주의 두 비유를 하셨다. 이 두 가지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어울리지 않고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새 생활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는 메시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합당하였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들'(원문)에 적합하지 않고 '새 가죽부대들'(원문)에 적합하다는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암시하는 듯하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었다. 그것들 중의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복음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우리가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사실상,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이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었다. 로마서 2:28, 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 혹은 성령]에 있고 의문(儀文)[글자,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물론 형식도 중요한데 그것은 단지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이라는 일반적 원리에 맞아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다시 직역하면, '또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이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러하다. 율법 아래서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21 :21-26)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적 기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결론적으로, 33절부터 39절까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귀한 진리를 교훈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들도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했다(빌 4: 4).


둘째로, 우리는 인간의 전통적,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새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질이 아니고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진실하게'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오직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의 원리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 2]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안식일에'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두번째 첫 안식일에'라고 되어 있다. '두번째 첫'이라는 말(듀테로프로토스)의 뜻은 불분명하다. 옛 영어성경(KJV)은 '첫번째 후 두번째 안식일에'라고 번역했다. 본서를 쓴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하였다(눅 4:16, 31). '두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혹시 그것들 중 두번째 안식일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구약의 안식일은 십계명에 규정된 대로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이었다. 그 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 육신적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했고(출 20:8-10) 거룩한 집회(성회)로 모여야 했다(레 23:3). 그들은 심지어 밭을 가는 시기나 거두는 시기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출 34:21). 그 날에는 물건을 팔거나 사지 말아야 했고(느 13:15-22), 또 자신을 즐겁게 하는 오락을 행치 말아야 했다(사 58: 13, 14).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로 간주되었다(출 31:14, 15).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첫째로 인생의 수고로운 삶에 정신적, 육신적 휴식을 주신 것이며(출 23:12), 둘째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예배하게 하심이며, 셋째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참된 안식의 때를 바라보게 하심이었다(히 4:3, 9-11). 그것들은 다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여 안식일 없이 살거나 안식일을 범하지만, 인간은 안식일 없는 삶에서 결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과 안식으로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행위는 일반적 상황에서가 아니고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특별한 상황에서의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즉 '안식일에 하기에 합당치 못한 일'로 규정하였다.


[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 경건한 다윗이 특별한 상황에서 했던 한 일을 언급하셨다. 그것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되어진 일이었다. 다윗은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진설하였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매우 시장했을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은 것을 예외적으로 용납하셨다. 그렇다면 너희도 제자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해야 하지 않을까? 제자들이 얼마나 시장했으면 이삭을 잘라 비비어 먹었을까 하고 너그러이 생각하지 못하고 정죄만 하려는 너희의 태도가 과연 옳은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17세기 초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명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히 성별되어야 한다. 그 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 초기의 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미 지켜져 왔다."


도르트 신경의 진술과 같이,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폐지되었다(골 2:16, 17).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안식을 예표하였다. 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충만히 이루어질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부터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그 날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안식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토요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 곧 일요일로 변경되었고 그 날은 '주님의 날' 혹은 '주일'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일요일 곧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이 되었고,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의 공적 예배일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사도시대부터 나타났다. 사도행전 20:7, "안식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들의 제자들인 소위 속사도들은 주일 집회에 대해 보다 밝히 증거하였다. 주후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에는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지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후 107년경의 익나시우스 서신에는 "이상한 교훈에 속지 말라. 새 소망에 이른 자는 [토요] 안식일을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후 150년경의 저스틴 마터의 글에는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주 안에서 성취되고 폐지되었을지라도,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히 10:25).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이제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 우리의 모든 시간과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또 이 날 곧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만일 내가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나머지 6일도 주께서 거두어 가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날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그에게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저는 저의 믿는 친척 가운데 주일을 범하고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다 날려 보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신약의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보다 덜 엄격한 점이 있다. 우리는 예배당에 오기 위해 부득이 버스나 전철을 이용한다. 우리는 주일예배와 집회를 위해 전기나 수도 등을 사용한다. 또 교회 식당은 점심식사를 위해 주일에도 음식을 만들고 제공한다. 또 주일에 불가피한 직장 근무도 있다. 의사나 경찰이나 군인은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다. 또 성도들이 주일에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들은 다 부득이한 경우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의 성도들도 할 수 있는 대로 주일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 공적 예배를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날에 시장을 보거나 너무 많이 빨래를 하거나 음식을 사먹거나 자동차 주유를 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토요일에 할 수 있는 일을 주일에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는 주일에 과도한 운동이나 텔레비젼 시청이나 오락 등을 삼갈 것이다.


구약성경 이사야 58:13, 14은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복이 될 지를 잘 증거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이 두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일과 대조하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달아야 하겠다. 이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또한, 구약의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날에는 물건을 사고 팔거나 세상적 오락을 즐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께서는 열 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밤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밤이 ?도록'이라는 말은 '밤새도록'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막 1:35), 또 본절의 증거와 같이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본문에 증거된 사건에서와 같이, 특히 그는 사도들을 선택하여 세우시는 것과 같은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가셨다. 산은 비교적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그러하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실상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6절).


예수께서 왜 기도하셔야 했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뿐 아니라 또한 인성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7-11; 요 14:13, 14). 바울 사도는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성경은 우리가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한다(빌 4:6, 7; 약 5: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교회가 예배당 증축 같은 일을 하고자 할 때 모든 성도는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슨 큰 일,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기도함으로써 그 일을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13-16]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밤새도록 기도하신 주께서는 그 다음날 아침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셨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사도'라는 원어(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들과 같았고 후에 교회에 세울 목사와 장로들과 같았다(벧전 5:1). 주께서는 공적인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셔서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고 그들에게 특별한 임무와 권위를 주셨다. 주님의 일들은 그들을 통해 계속 수행될 것이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증거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했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된 복음 진리를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고(딤후 1:13, 14) 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다(딤후 2:15).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와 장로된 자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장에서 분명히 증거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16, 17절). 목사와 장로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선한 일을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 1편과 119편에 보면,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형통함과 큰 평안이 있다고 말씀했다.


다른 한편, 성경은 또한 일반 성도들이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씀했다(12, 13절). 또 그는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말씀했다(17-19절).


히브리서 13장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가르쳤고,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했다(벧전 5:5, 6).


예수께서 택하여 세우신 열 둘 중에 특이한 한 사람은 '예수를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도 교훈을 받는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깨끗함 곧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예수께서 뽑아 세우신 열 둘 중에 포함되었는지 의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신할 이 제자를 포함하심으로써 그리고 그로 인한 배신의 고통까지 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셨다.


열 둘 중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은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열매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은 결코 교회의 직분으로 만족하지 말고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든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배당 증축의 일도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성도들의 진지한 기도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에 불과한 우리들은 얼마나 더 자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둘째로, 주께서 사도들을 이어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특히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하여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 행위를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참된 종들을 존중히 여기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힘있게 진행될 것이다. 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의 바른 원리 안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증거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증거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여지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제자란, 어떤 사람을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에게 훈련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그 외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모여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 모두가 성경에 증거된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에게 훈련을 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 19]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실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을 당하던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는 말씀은, 그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 여러 종류의 병들로 고생하던 자들이 고침을 받았음을 말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실은,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 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0절 이하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내용이다. 그가 가르치신 대상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가 가르치신 첫번째 내용은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 가운데는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거나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기쁠 때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자신들의 죄악됨과 빈곤함과 무력함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육신적 가난과 슬픔은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 안에, 제자들 중에 세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과 자신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천국 백성으로서 영육의 영광스런 부활체로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 23]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육신적인 가난과 슬픔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종종 있었다. 그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받는 어려움들이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며 그의 진실한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어려움은 그들에게 복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그렇게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이다. 주 예수와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 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24, 25]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복 있는 자들과 대조적으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는 화가 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연약성은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를 화 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며 영원히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교훈하셨다. 그것은,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제자는 진리의 사람의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 시대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평강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과 상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후 6:8). 또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그는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15-18절).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증거의 내용을 발견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은 의학적인 방법이나 심리적인 방법으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여러분은 그를 진실히 믿고 있는가? 아직도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세상의 가르침과 달랐다. 세상의 선생들은 세상적 행복 즉 먹고 입고 사는 복을 가르치지만,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과 배척과 모욕과 비난을 당하는 것이 복되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화라고 가르치셨고, 또 내세의 상급에 대해 가르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 중심, 현세 중심, 세상 중심, 물질적 부요나 명예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 천국 중심이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섬기지 않는 데 있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와 무능력을 모르고 교만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요보다는 가난이, 배부름보다는 주림이, 웃음보다는 우는 것이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된다.


여기에 참 제자의 길이 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결단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된다. 그는 항상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도 복 있는 자가 있고 화 있는 자가 있다. 우리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나 쾌락만 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아무런 지식도, 믿음도, 사랑도 없는 자는 화 있는 자다. 비록 그가 부요하고 배부르고 기뻐하는 자이지만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는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한다. 여러분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지금 주께로 나아오라.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 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 마음가짐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과 마음가짐은 원수를 대적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자기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 중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같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 30]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그에게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제이 씨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 투쟁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했다.


사회적으로는 법과 범죄의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때에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라일의 설명대로,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주의 말씀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나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 아니다. 주의 말씀은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복음 22:36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셨다. 로마서 13:4에서, 바울 사도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경우에라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거나 하지 말고 그를 비인격적으로 학대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적 전쟁이 아니고 평화우선주의적이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라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상대방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적인 생활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과 싸움 대신에 양보와 손해와 희생을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하며 우리의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이삭의 행위는 이러한 태도의 한 좋은 예이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땅에 내려가서 얼마 동안 살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모든 우물들을 흙으로 메웠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우물들을 팠고 이렇게 세 차례나 옮기며 우물을 팠다.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삭의 온유함과 양보와 오래 참음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사실, 세상의 악한 자들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26:52에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 원리를 로마서 12장에서 잘 교훈하였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본문에 분명히 증거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경 다른 곳에 밝히 증거된 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로마서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그를 미워하고 때로는 저주하고 모욕하고 있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이미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며 죄인을 위한 구원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더욱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곧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는 대답 외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다. 비록 이 명령이 크고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주의 교훈대로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주께서는 친히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 34). 최초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행 7:60).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은 일은 주의 명령을 실천한 한 예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우리는 오히려 맞고 들어온 아이를 야단치고 다음에는 친구를 싸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쳐 주님의 명령을 행하자.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너희가 원하는 대로, 너희도 그와 같이 그들에게 하라"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그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됨을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를 최선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구하여 분주하게 일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고 성경책을 읽을 마음과 시간이 없고 기도할 마음과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땅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의식주의 요소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우리가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정성껏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대인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칭찬과 사랑과 선대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남을 이해하고 남의 장점을 인정하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선대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32, 33]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우리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없다. 도대체 우리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원이 정말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면,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신다(마 5:13-16).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한다.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 간에 있어서,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가능한 한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교제는 순수하게 신앙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를 사업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서 가난한 형제에게 부득이 돈을 빌려줄 때는 이자를 받지 않는 정신으로 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서도 분명히 규정된 바이었다. 출애굽기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레위기 25:35, 36,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신명기 23:19, "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지니 곧 돈의 이식, 식물의 이식, 무릇 이식을 낼 만한 것의 이식을 취하지 말 것이라."


또 신명기 15:7-8, 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안식년의 빚 면제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배려하셨는지를 잘 보이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여유를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그의 필요한 대로 이자 없이 꾸어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다.


[35, 36]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마지막으로,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킬 것이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상에 대한 이러한 말씀은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는 요소가 된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특히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렇게 될 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댓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이렇게 살자.


37-49절, 용서와 구제의 생활


[37, 38]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 정죄치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다. 디모데전서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매튜 풀의 묵상과 같이,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 여부에 대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치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사로이 혹은 성급히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다 부족이 많은 자들이며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 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38절,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들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또한 우리에게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고 남을 후대해야 할 것을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원칙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보상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자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을 보인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모습을 상상케 한다. 그것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한 것이다.


[39, 40]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우리가 거짓 교사들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은 교리적 탈선과 윤리적 해이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라는 말씀은 문맥적으로 볼 때 제자가 그 선생에게 영향을 받고 그 선생의 잘못된 사상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온전케 된 자'라는 말은 '다 배운 자'를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에게 배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조금 배워도 그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고, 많이 배울수록 그 영향이 클 것이고, 다 배우면 그는 거짓 교사처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교사를 분별해야 하며 배우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41. 4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했고 '들보(혹은 통나무, beam, log)'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했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를 지적하시고,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제거한 후에야 남의 작은 부족을 지적해줄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고 고칠 것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할 것이다. 잠언에 가르친 대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나, 단지 자신의 큰 부족과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과 권면이 덕을 세울 수 있다.


[43-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에 대해 말씀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이처럼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된 좋은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거룩하고 선해야 할 것이다.


[46-49]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또 다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그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주님으로 인정했다면, 그의 가르치신 바를 성심으로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개인적, 사회적 환난과 재난을 상징한다. 평소에 말씀을 실천하며 신앙 생활했던 자는 환난 날에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홍수가 날 때 무너져 심한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행위가 중요하다. 야고보서 2:17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사람이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선한 행위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를 수반한다. 선한 행위란, 진실하고 의로운 행위, 경건한 행위 곧 회개에 합당한 행위를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37절부터 49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구제하고 후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적 문제, 진리의 문제, 혹은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정당하고 때때로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대신 서로 용서하고 후대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 교사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을 작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은 적지 않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작은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을 지적하고 고쳐줄 자격자가 될 것이다.


넷째로, 주께서는 좋은 나무, 튼튼한 집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말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의 말과 행위를 돌아보자. 우리의 말과 행위를 작게 여기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선한 말과 선한 행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에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이 가버나움에서 어떤 백부장의 병든 종이 고침을 받은 사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 종은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엔티모스)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그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충성인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나음을 얻었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 속에서도 그가 로마 사람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9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인물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던 것 같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 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 주인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 5]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둘째로, 그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회당을 짓는 것은 물질이 들고 시간과 힘도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물질을 사용한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를 위해 물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셋째로, 이 백부장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예수님과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고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크심과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 고백이었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 것 없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넷째로, 이 백부장은 또한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인간적 주인 정도가 아니고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뜻이 있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는 원문의 전통사본은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이다. 8절에 자기가 군인으로서 아랫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가 그대로 순종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칠 수 없다. 병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 병을 지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빛을 창조하셨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다.


[9,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예수께서는 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고 그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만한 믿음은'이라는 원어는 '이렇게 큰 믿음을'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외적 영광을 보고 경탄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백부장의 이 큰 믿음을 보고는 놀라셨다. 더욱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찾지 못하였다'는 그의 말씀을 보면, 그는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인 그가 이렇게 큰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시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중심 인물은 백부장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시다. 본문이 증거하는 바는, 예수님이 백부장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내용이 되시는 바로 그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병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과연 고치셨던 신적 구주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집에까지 가시지도 않았다. 그는 그 백부장의 소원대로 단지 말씀만 하셨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종은 그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그 충성된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강건하여졌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확인한다. 한마디의 말씀으로 그 종을 죽을 병에서 고쳐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실하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런 병고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신적 구주이시다! 이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악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셔서 영광스런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주님을 믿고 찬송하자.


둘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적 구주로 바로 깨닫고 믿고 따르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의 말씀 한마디가 생명의 능력임을 믿고, 그의 모든 말씀의 진실함과 가치를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존중하며 믿고 행하며 그를 따르기를 원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오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바른 믿음, 큰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셋째로, 우리는 부수적으로 이 백부장의 인품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의 동정심과 인간애를 본받아야 하겠다. 그는 자기의 종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자기 며느리를 사랑하고 자기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주위의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자기 사업체의 피고용인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 백부장이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준 일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도 예배당 짓는 일을 짐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기회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저 이방인 백부장 이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자.


또한 우리는 백부장처럼 우리 자신의 부족과 무자격함과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 겸손한 인격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결코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사람 앞에 자랑할 것들이 많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 후에는 우리가 그 앞에서 죄악된 작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안 후에는 우리의 모든 세상적 자랑거리들은 다 무가치한 것들이 되었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하나님뿐,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든지 교만치 말고 항상 겸손히 살아가자.



11-17절,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나인성은 갈릴리 지방 남부 이스르엘 평원의 한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몇 킬로미터 남쪽에 있다. 전통 사본에는 '제자'라는 말 대신에 '그의 많은 제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로' 표현한 것은 그 둘을 구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예나 오늘날이나 예수님 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그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구하는 관심을 가지고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께서 나인성 입구에 가까이 오셨을 때 한 장례 행렬이 있었다. 죽은 자는 청년이었는데, 그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과부이었다. 이 장례는 인간으로서 심히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그 외로운 과부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고 의지가 되었던, 하나 밖에 없는 그 귀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긍휼과 능력을 지니신 예수께서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장례식에 참여하여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일들 중에서 장례식은 큰 일이며 엄숙한 일이다. 특히 이 슬프고 고통스런 장례식에 사람들은 동정하는 마음으로라도 더 많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았고 그 기적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을 '주께서'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행하실 기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권자, 주관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는 참된 신성을 가진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슬프게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이다.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형벌로 왔으나,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께서는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로써만 그를 위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었다.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인간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 당시의 관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아마 일종의 침대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한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 관 혹은 침대에 손을 대시자 그것을 멘 자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응답으로써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 증거된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그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 살아난 청년이 '말도 하였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살아났음을 증거한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그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이런 기적을 말씀 한마디로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16, 17]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두려움을 가졌다. 흔히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름과, 여인의 태와, 무덤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만 있다고 했다고 한다. 죽은 자가 말씀 한마디로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불렀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말했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은 즉시 온 유대와 사방에 퍼져 나갔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 죽은 청년은 일어났다. 죽음을 지배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죽은 자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인간 가운데서는 아무도 없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많은 중환자들을 고쳤던 훌륭한 의사도 자기 병을 못고쳐 죽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죽음을 지배할 자가 아무도 없다. 말씀 한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그 분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우리의 구주, 우리의 주로 굳게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 되셨다. 그는 죽은 그 청년에게서 죽음을 내쫓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인간이 죽은 후에 과연 다시 살 수 있는가? 인간의 가장 큰 불행처럼 보이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는가?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 보이는 질문이지만,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질문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소원이 있다.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대해 성경에 약속하셨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주일마다 고백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고 친히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장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다고 증거한다(고전 15:20).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고 친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마지막 날의 우리의 부활도 확실하다! 우리도 어느날 죽을 것이지만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날의, 우리의 몸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소망하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신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심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과부에게 큰 기쁨과 위로를 주셨다. 구원은 좋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원이란, 물에 빠져 죽을 자를 건져내는 것이요, 불에 타서 죽을 자를 건져내는 것이다. 구원은, 굶어 죽을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얼어 죽을 자에게 입을 옷을 주거나 추위를 피할 거처를 주어 살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병에 걸려 죽을 자를 치료해 주거나, 차에 치어 죽을 자를 건져내는 것이다. 구원은 좋은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와 슬픔과 불행과 허무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어 주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복을 받았다. 슬퍼하며 우울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무기력했던 우리는 주 예수님 안에서 큰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기쁨, 나의 힘, 나의 위로, 나의 소망, 나의 복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큰 구원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자들이 되자!



18-23절,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심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예수께서 백부장의 종의 죽을 병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등을 다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다. 마태는 같은 사건을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라고 증거했다(마 11:2).


[19, 20]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예수님께 물어보라고 말했다. '오실 그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이 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의심어린 질문을 했는지 잘 알 수 없다. 유력한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이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려고 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이 두 번이나 분명하게 반복된 것과 또 22절의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는 말씀과 23절의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 등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보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요한은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의심이 생겼던 것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를 통해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지체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예수께서 속히 심판을 행사하시고 자신을 옥에서 건져내시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야가 확실한 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이런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들 외에도 수없이 많았음에 틀림 없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요한복음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2, 2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보고 들었던 것들, 곧 예수께서 소경, 앉은뱅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이런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들보다 더 크고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구원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24-30절, 요한에 대해 증거하심


[24, 25]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문자적으로 갈대를 가리킬지도 모르나, 문맥상 마음에 확신이 없고 의심하는 인물을 의미한 듯하다. 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라는 말은 그 다음에 주께서 곧 말씀하신 바와 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 즉 외모를 치장하고 자랑하는 류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자는 남에게 무엇을 보이기를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과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다.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곳으로 나아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었다. 그 때의 요한은 확신이 없거나 의심하고 요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확신에 넘친 자이었다. 또 그는 외모를 치장하거나 남의 칭찬을 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고 지낸 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옥중에서 잠시 연약하여져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난의 현실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다.


[26-2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세례 요한이 참 선지자이었음을 증거하셨다. 그는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곧 큰 선지자라고 하셨다. 그는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야 앞에 보내실 그 사자이었다. 전통 사본에는 '요한보다 큰 이'라는 말씀이 '요한보다 큰 선지자'라고 되어 있다.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선지자이었다. 특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했고 그에게 세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 등을 생각할 때 그는 구약 시대의 다른 선지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권을 가진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마태복음 11:12, 13,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마 13장) 등에 비추어볼 때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신약 교회의 지극히 작은 한 성도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신약 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밝히 듣고 배우고 믿고 확신한다.


[29, 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평범한 일반 백성들과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당했던 세리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임을 부정하고 그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이었다.



31-35절, 이 세대의 사람들에 대해 증거하심


[31-35]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32절의 처음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도다'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의 말의 내용에 비유하신 것이 아니고,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그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부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는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며 부당한 비난이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 그런 부당한 판단과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비난만 일삼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여기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하는 자의 행위를 가리킨다. 실상 예수님은 잠언 8장에 예표된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자기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 교회의 진실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35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본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은 그런 자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한 때 예수님을 믿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 마음과 믿음이 약해졌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확신이 없는 자들이다.


만일 이런 자들이 돌이켜 예수님께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그들은 주의 경고와 같이 실족하는 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실족하는 것은 구원의 상실, 영생의 상실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마지막 지옥에 던지울 자들 중에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이다. 주의 말씀대로,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가지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했고 진실하게 따르고 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들은 장터에서 친구들에게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들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비난을 쏟아놓은 자들이다. 그들은 항상 불평과 비난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영생은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무지와 완악함,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그를 우리 주와 구주로 확신하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겸손히, 성실히 순종하자.



36-50절, 많은 죄를 사함 받은 한 여인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청을 거절치 않으셨다. 식사 초청을 할 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행동이다. '앉으셨다'는 말은 '기대어 누우셨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는 우리와 달리 비스듬이 기대어 앉는 것이라고 한다.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여자는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향유'는 값비싼 기름을 가리킨다.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 여자는 예수의 뒤로 왔다. 물론 식사 중이니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겠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기를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신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께 감사하는 표시이었을 것이다. 또 눈물로 적신 주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단순한 인간 관계에서는 이런 행동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의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구주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고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이런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님을 청했던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참 선지자로도 여기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는 그의 표현은 예수님을 평범한 한 인간으로 낮추어 보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그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했다.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은 당시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디다스칼레)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아직 주님으로 깨닫지 못하고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 계셨다. 물론 그는 그 여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은밀한 마음과 숨은 동기를 아시는 참 선지자이셨다.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예수께서는 사람의 죄를 빚에 비유하셨다. 또 어떤 이는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어떤 이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죄의 정도 혹은 크기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모든 죄가 다 사람을 지옥에 들어가게 하지만, 죄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무지해서, 부주의해서, 연약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레 4:2, 22),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가 있다(민 15:30). 죄 중에는 심지어 용서를 받지 못하는 죄 혹은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마 12:32 ; 요일 5:16).


[42, 43]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비유 중의 사람들이 다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우리는 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았다. 빚의 정도에 따라 탕감의 정도도 다르듯이, 우리의 죄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 우리의 받은 용서의 크기와 정도도 다르다. 또 우리의 용서의 크기와 정도가 다름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와 정도도 달라질 것이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 빚을 탕감해준 사람을 더 크게 사랑하듯이,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더 크게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인간편에서의 느낌의 차이이고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던 우리를, 그가 구원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의 값을 그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44-46]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시몬과 그 여자를 비교하신다.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고도 당시에 손님을 존중하는 방식대로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시몬은 초청된 예수님께 존경의 표로서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 여자는 주께서 들어와 앉으셨을 때부터 그의 발에 계속 입맞추었다. 시몬은 초청된 예수님께 그 흔한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주의 발에 부었다. 시몬과 그 여자의 행위는 그 차이가 너무 컸다.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본절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죄사함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다. 그 여자가 주님을 향해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표시이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하나님과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죄사함 받는 원인이나 이유가 되지 못하지만, 그가 죄사함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다. 죄사함의 선포는 주께서 내리시는 가장 아름다운 사역이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또한 죄인의 연약한 심리도 있다.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기쁨도 평안도 용기도 힘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죄의 선포가 필요하다. 사죄의 선포는 죄인에게 큰 복이다. 사죄의 확신은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과 성화(聖化)의 기초와 원동력이다.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심과 의문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고유의 일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자가 받은 구원에 대해 증거하신다. 그것은 곧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죄는 불행과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준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구원의 이치이다. 그 여자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구주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그토록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을 그토록 낮추도록 하였고 하나님과 구주를 지극히 높이며 사랑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36절부터 50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사람이 예수께 진정 나오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을 식사 초청했던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해 불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정성과 사랑도 빈약했다. 그러나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한 여자는 오히려 예수님을 바로 알았고 믿었고 그를 신적인 구주로 높이며 사랑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자들은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을 것이지만, 죄인들은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


둘째로,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5:24,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요한복음 8:34, 36,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 .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은 구주이신데, 구원의 핵심은 곧 죄사함이다. 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사람들의 불행을 행복으로 회복시킨다. 죄사함의 구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생의 복을 가져다 준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사함의 구원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신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이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를 사할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 죄사함의 크기와 정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의 크기와 정도에 비례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우리가 큰 죄인이 되기를 소원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서 6:1, 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단지 우리의 죄악의 실체, 죄악의 심각한 실체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고 했다(요일 3:15). 또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곧 간음이라고 했다(마 5:28). 탐심이나 불순종은 우상숭배라고 했다(골 3:5; 삼상 15:23). 탐심은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다.


또한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모든 죄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죄사함의 깊이와 크기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던 저 여인과 같이, 우리도 우리가 받은 죄사함의 구원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자! 또 우리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자!




8장: 기적들을 행하심


1-3절, 예수님의 전도 활동


[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예수께서는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다. 그것은 동네들을 구경하러 다니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 위해서 다니신 것이었다. 전도는 모여 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찾아가서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어느 한 곳에만 머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 두루 다녀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의 중심 주제이었다. 마태복음 4:17에 보면, 예수께서는 처음 설교하셨을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이 인정되고 실현되는 나라를 가리킨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우상들을 섬기고 음란하고 부도덕한 일들을 많이 행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왕이시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를 통해 시작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땅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것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다. 사람은 돈이나 명예나 세상의 신분이나 가문이나 학벌을 가지고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나라는 오직 각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선포를 '그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나라보다도, 미국보다도 좋은 나라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의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다(롬 14:17; 벧후 3:13). 거기에는 죽음과 두려움과 눈물과 고통이 없다(계 21:4). 거기에는 죄가 없고 마귀의 시험도 없다. 세상에서의 깡패와 살인자 같은 악인들이 구원받고 변하여 의인이 되고 선한 사람이 되어 들어가는 곳이 그 나라이다. 이 좋은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 어떠한 죄인이나 악인도 이제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아 그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나라의 소식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께서 전도 활동을 하실 때 열두 제자들이 그와 함께하였다. 열두 제자들의 임무들 중 첫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마가복음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친히 보고 듣고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제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행위를 잘 본받는 자이다. 둘째로,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행하신 일들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어야 했다. 셋째로, 그들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와야 했을 것이다. 주께 모여든 많은 무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질서 유지의 일도 그 중 하나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주의 제자된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성경책을 자세히,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과 함께 있는 길이다. 또 건전한 신앙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할 것이다. 건전한 신앙 서적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 증거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서적들은 성경에 비추어 분별하면서 읽어야 한다. 일반 성도들은 무엇보다 건전한 교회의 공적 집회들에 성실히 참석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지름길이다. 성경적 설교와 훈련이 있는 바른 교회는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그러나 그런 교회들은 세상에 많지 않은 것 같다.


[2, 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과 함께한 자들 가운데는 귀신 들림과 병들로부터 고침 받은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이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악한 영들과 병들로부터 고침을 받은'이다. '악한 영들'은 악한 천사들 곧 귀신들을 가리킨다. 이 악령들은 사람들에게 직접 정신적 질환들을 일으킨다.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이런 정신병들을 일으키는 악령들의 활동이 많이 있다. 또한 이 악령들은 사람들에게 육체적 질환들도 일으킨다.


성경은 모든 육체적 질병들이 다 악령들의 활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구절에서 악령과 질병의 관계가 증거되어 있다. 마가복음 9:17-29에는 '벙어리 귀신(영)'(17, 25절)과 '귀먹은 귀신(영)'(25절)이라는 표현이 있다. 누가복음 13:11에는 '18년 동안을 귀신 들려 앓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18년 동안 질병(혹은 연약)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이다. 또 13:16에는 주께서 그 여자를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표현하셨다. 악령과 그 여자의 질병과는 관계가 있었다. 또,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7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육체에 주신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주께서 그의 몸에 주신 어떤 질병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모든 여자들이 다 주님을 따라 다니며 그를 섬긴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고침 받은 사람들의 환경 처지가 다 각기 다를 것이다. 주님을 따르고자 해도 집안에서의 의무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나병을 고침 받았던 10명의 사람들 중에 사마리아인 외의 9명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후 주님의 전도 활동에 동행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막달라인인 마리아는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자이었다. 그 여자의 과거가 얼마나 악하고 더럽고 난폭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예수님을 따른 여자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다. 그는 당시에 고위 관리의 아내 즉 귀부인이었다. 또 그 외에 다른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그 여자들은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과 신발 등을 공급했을 것이다. 그 여자들은 주의 전도 활동을 물질로 후원한 전도 후원자들이었다.


전도 활동을 위해 물질을 쓰는 것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했다. 성경은 그런 물질을 하늘 나라에 저축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마태복음 6:19, 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헌금이 또한 주께 대한 믿음과, 주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라고 말씀한다.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린도후서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우리가 우리를 죄악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또 우리가 구주 예수님과 또 그가 피흘려 사신 주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일을 위해 즐거이 물질을 바치며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참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풍성한 헌금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또한 헌금을 믿음의 열매라고 말씀한다(빌 4:1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원하신다. 풍성한 헌금은 바로 그 열매들 중 하나이다. 또한 성경은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한다(빌 4:18).


전도자들을 위한 물질적 후원은 후원자 자신의 믿음에도 유익이 많다.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6:21).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입는 일 등 땅의 썩어질 일들만을 위해 물질을 사용한 자는 땅의 것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물질을 많이 드린 자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천국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물질을 많이 드린 곳에 사랑과 애착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교회와 복음을 위해 물질을 많이 드린 자는 그의 믿음에 많은 유익이 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복음 전도는 성경에 밝히 증거된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단지 한 가지 부족이 있다면, 진리와 오류, 선과 악이 섞이는 일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선교 활동들은 성경적 신앙과 비성경적 사상들을 구별하는데 부족이 있어 보인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구별되지 않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구별되지 않고, 성경 신앙과 은사주의가 구별되지 않고 있다. 진리와 더불어 오류가 심어지고 선과 더불어 악이 심어지고 있다. 이것은 혼돈이요 혼잡이며 불성실과 타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열심을 내되, 바르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바른 내용을 전하며, 바른 전도자들을 세우며, 바른 방식으로 이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열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배운 제자들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전도자 양성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우선 정규 집회 시간을 통해 성경을 바르게 배워야 할 것이다. 전도의 사명을 느끼는 자마다 주일 오전과 오후뿐 아니라, 수요일 밤과 금요일 밤에도, 또 매일 새벽마다 말씀을 배우기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신학 연구반은 말씀의 봉사자들을 위해 개설된 시간이다. 이 시간에 참여하여 말씀을 좀더 체계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강해나 교리서 등의 건전한 신앙 서적들을 읽기를 힘써야 한다.


전도자들은 사상적 훈련뿐 아니라, 인격적 훈련을 위해서도 힘써야 한다. 신앙의 성장은 단지 사상만의 성장이 아니고 전인격적 성장이다. 그래서 성경은 감독의 자격 요건을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3:2-7 ,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셋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을 후원해야 한다. 자기의 소유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처럼, 우리는 교회 전체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참 전도자들을 살펴 정성껏 도와야 할 것이다.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심정으로 이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리고 극한 가난 중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였었다(1-3절).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언급한 후에 헌금에 대해 가르치기를, 풍성하게 하라(고후 8:7), 미리 준비해서 하라(고후 9:5),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하라(고후 9:7)고 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리고 장차 전도자들을 훈련하고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을 위해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4-15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8]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모여든 큰 무리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다. 귀머거리 외에는 들을 귀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러나 참으로 듣는 것은 단지 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말의 뜻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지 않다.


[9, 10]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이 진리가 일반 사람들의 관심이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로 이 세상의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 즉 세상의 부귀와 영광, 명예와 권세에 관심을 둔다. 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만 깨달아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 사람들에게 비밀이다. 더욱이,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선택의 진리를 가리킨다. 선택의 진리는 우선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선택의 진리는 또한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증거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셔야 인간이 받을 수 있다.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인간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 선택의 진리는 또한 우리의 구원이 값비싼 구원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구원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이 크다. 그것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고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구원이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다(마 16:25, 26).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다. 씨는 신기한 비유물이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씨가 땅에 심길 때 그 속에서 생명 있는 싹이 나서 자란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고 생명 있는 말씀이며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물론, 아무 말이나 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씨가 된다. 인간의 말은 아무리 감동적일지라도 참 생명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밝히 증거된 복음 진리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전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갈라디아서 1:8, 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른 성경적 교훈만 씨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중요하다. 아름답고 듣기 좋은 인간의 말보다 바른 성경적 설교가 귀하고 중요하다.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마귀가 그 말씀을 그 사람에게서 빼앗아가는 경우이다.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라는 말씀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 진리를 믿음으로 얻어짐을 보인다.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을 빼앗기는 것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인간의 구원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구원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세상의 것보다 크게 여기지 않고 잊어버리고 만다.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진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 일시적으로 믿으나 뿌리가 없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넘어지는 경우이다. 일시적이고 기분적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닌,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일시적 믿음은 어려운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은 잘못된 생각과 판단 혹은 이해 부족에서 생긴 마음의 동요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핍박 등을 가리킨다(마 13:21).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며 결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 3: 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진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경우이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가시들이다. 이 가시를 제거해야 한다. 이 가시들을 끊어버려야 한다.


세상 생활의 염려는 신앙의 큰 방해물이다. 세상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육신적 생활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 사도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했다(빌 4: 6).


재리, 재물, 부, 돈도 신앙의 큰 방해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더욱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태복음 19:23, 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다. 또 성경은 말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 디모데전서 6:9, 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육신의 쾌락도 신앙의 심각한 방해물이다. 육신의 모든 즐거움이 악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도 있다. 우리에게는 먹는 즐거움이 있고 결혼과 가정의 즐거움이 있다. 전도서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그러나 모든 즐거움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절제 있게 누려야 한다. 그렇지만 육신의 쾌락 추구는 하나님의 정해주신 경계선을 넘기가 일쑤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술취함과 마약과 음행으로 더럽혀져 있고 원조 교제니, 미성년자 매매춘이니 하는 부끄러운 지경에까지 와 있다.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씨가 좋은 땅에 심어진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심기워 열매를 맺는 경우이다. 그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했다(렘 17:9). 그러므로 이 세상에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마음, 곧 가난하고 자신의 죄악성을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마 5: 3-6), 그래서 복음의 말씀을 잘 받는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 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한다는 뜻이다. 인내로 결실한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실천하는 것이 어려움을 암시한다. 말씀의 계속적 실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현실에는 때때로 시험거리도 있고 고난과 핍박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아는 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바로 아는 자는 인내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실천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말하며 떠나갔을 때, 베드로는 주께 고백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요 6:68).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씨가 두루 뿌려지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예수께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 또 그는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어떤 이의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대답하셨다(눅 13:23, 24). 또 그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도 말씀하셨다(마 22:14).


둘째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말씀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의 심령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적이다. 성경에 밝히 계시된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1:8, 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교회는 오직 이 복음을 성실히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땅에 문제가 있다. 사람의 심령에 문제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깨달음이 없다. 에베소서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것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과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다. 그것을 성경은 패역한 마음, 강퍅한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 기쁘게 받되 성경에 근거하여 진지하게 살피고 묵상하는 가운데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기까지도 하지만,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신앙의 실패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 참으로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고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다.


셋째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만 그 말씀을 실천하며 선한 일들을 힘쓰는 친 백성이 된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다. 참된 회개도, 믿음도, 성화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진지하게 말씀을 듣고 깨닫고 확신하고 자기를 부정하여 세상 염려와 재물과 쾌락을 다 버리고 인내하며 그 말씀을 실천할 것이다. 우리는 다 이런 자들이 되자!



16-18절, 등불의 비유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평상'은 '침상'을 말하고, '등경'은 '등잔걸이' 혹은 '등잔대'를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같다. 시편 119: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요한복음 1장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다(9절). 진리는 빛이요, 거짓과 악은 어두움이다. 요한복음 3:20, 21,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빛이다.


빛은 어두운 세계를 밝히며 큰 유익을 준다. 밤에 빛이 꼭 필요하듯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지(無知)에서 구원을 받으며 죄악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세상에 참으로 큰 유익을 준다. 우리는 다 그 유익을 받은 자들이다.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빛의 성격은 또한 그것의 공개적 성격을 포함한다.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데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기독교 진리는 몇몇 사람들 안에서만 은밀하게 비전(秘傳)되는 내용이 아니다. 비록 그 내용의 참뜻과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보배로운 진리를 짓밟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긴 하다(마 7:6).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해졌고 가르쳐졌던 것들이었다. 요한복음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은밀하게 주신 교훈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장차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땅끝까지 널리 전파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이 빛된 진리의 말씀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떻게 듣는가'라는 표현은 듣는 내용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내용이 얼마나 진실하고 확실한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2:1-4,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행함에 관계된다고 본다. '있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 곧 믿음과 행함이 없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다. 여기에 말씀의 실천적 성격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 수 없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21절,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옴


[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하지 못하니.


'그 동생들'은 예수님의 친 동생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로마 천주교회의 성경 학자들을 포함하여 역사상 많은 주석가들은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녀들을 낳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여기에 '그 동생들'이 그의 사촌들을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증거들을 볼 때 예수님께 친 동생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마태복음 1:24, 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마리아]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전통 사본에는 '아들' 대신에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 2:6, 7,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태복음 13: 55, 5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도행전 1: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갈라디아서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21]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육신적 가족보다 영적 가족을 더 중시하셨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가족들도 잘 보살피고 돌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다. 출애굽기 20:12, [십계명 중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그러나 우리는 '내 가족', '내 식구'라는 육신적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서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거대한 가족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을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라고 부르셨다. 이 말씀은 이러한 영적인 대가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그의 가족들이며 서로 간에 형제, 자매들이다.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원어 는 '하나님의 가족들, 하나님의 식구들'을 가리킨다. 육신적 가족 관계는 100년 정도에 제한되지만,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이 영적인 가족 관계는 영원하다.



결론적으로,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몇 가지 성격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갈 길을 보인다. 그것은 세상에서 모든 무지와 부도덕을 추방한다. 이 빛된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공개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전(秘傳)되는 내용이 아니고, 만인들을 위해 공개된 내용이다. 성경은 그것을 사모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될 말씀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이론이나 지식에 머물 수 없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의 말씀을 듣지만 말고 그것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 가족을 이루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며 식구들이다. 이 하나님의 대가족은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거대한 사랑의 공동체의 존재와 가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천국에서는 성도들의 이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의 교제가 있을 것이다.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빛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자. 또 우리는 이 말씀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들이 된 사실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도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자.



22-25절, 광풍을 잔잔케 하심


[22, 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는 도중에 잠이 드셨다. 그것은 그의 피곤한 생활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잠이 부족하시도록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셨던 것 같다. 마가복음 6장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던 것을 보면(막 6:31), 예수님은 얼마나 더 바쁘셨을지 상상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가 인간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참으로 인간이셨다.


예수께서 잠들어 계셨던 그 때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고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였다. 광풍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다. 바람은 때때로 이리 불기도 하고 저리 불기도 하며 때때로 약하게 불기도 하고 강하게 불기도 한다. 또한, 마귀의 장난으로 광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대로 마귀의 존재를 믿는다면 마귀의 장난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욥기가 증거하는 대로, 옛날 욥에게 내린 재앙들은 마귀의 장난들이었다(욥 1, 2장). 마귀는 말세에도 이런 악한 장난들을 많이 일으킬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세상의 자연 현상들이나 마귀의 장난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만 일어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사야 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한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마치 옛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듯이, 우리의 삶 속에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때로는 큰 광풍이 일어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없지 않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요 16:33). 바울 사도는 전도 사역을 하면서 죽을 고비들을 많이 경험하였다. 그는 고린도후서 서신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8-10).


성도들에게 고난과 위험의 어려운 일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그들에게 언제나 유익을 준다. 성도의 고난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케 하는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시 119:67, 71), 또한 인간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케 하며,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며, 또 신앙의 담력을 얻게 하는 유익을 준다.


[24, 25]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본문에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일어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바람과 물결은 잔잔케 되었다. 그 일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랐다. 그들은 말하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라고 했다.


예수께서 광풍을 잔잔케 하신 이 사건은, 예수님의 다른 많은 초자연적 기적들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으나 그 이상이셨다. 잠을 자시는 분은 분명히 사람이시지만, 바람과 물결의 격동함을 꾸짖으실 때 그는 사람 이상이셨다.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바람과 파도를 향해 명령하여 복종케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다. 하나님만이 바람과 파도를 주장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그는 우주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사람 이상이심,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이유이었다.


광풍과 파도에 대처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주여'라고 번역된 원어(에피스타타)는 '선생님이여'라는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여하튼 그들은 심히 불안하여 선생님을 야단스럽게 불렀다. 예수께서는 깨어 일어나셨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셨다. 그런 후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했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고 믿음 없는 모습을 나타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정도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은 광풍과 물결의 격동 속에서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어야 했다. 옛날 모세는,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애굽 군대의 추적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었다(출 14:13, 14). 또 시편 62편 저자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고백했다(시 62:1). 이와 같이,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을 보며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이긴 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그들을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극악한 위기의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즉시 평온한 환경으로 변화되었다.


성경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을 말씀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얻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또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서신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가르쳤다(빌 4:6, 7).


결론적으로, 22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선했는데도 광풍을 만났다. 이 세상에서는 성도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심지어 극한 위기의 상황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성도들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것들은 다 성도들에게 유익을 준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셨다. 바람과 물결을 명하여 순종케 하신 분은 결코 단지 사람이실 수 없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그 이상이시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셋째로, 본문은 광풍을 대처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 암시한다. 우리는 광풍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실지 생각하며 그의 구원하는 손길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 믿음과 인내와 간구, 오직 그것만이 이 세상의 광풍에 대처하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두려움과 염려는 결코 성도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26-39절,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26, 27]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거라사인의 땅'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가다라인의 땅'이라고 되어 있다.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얍복강 부근의 마을이었다. 갈릴리 맞은편에는 '가다라'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도시 사람으로서'라고 했으니 그가 가다라 마을 사람임을 가리켰다.


가다라 마을 사람으로서 오랫 동안 귀신들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다. 전통 사본에는 '오래'라는 말이 '옷을 입지 아니하며'에가 아니고 '귀신들린'이라는 말에 걸린다. 그 귀신들린 자의 특징들은, 첫째, 옷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치 않았다. 둘째, 그는 집에 거하지 않았다. 즉 안정이 없었다. 인간의 삶에 가족이 중요하며 집이 휴식과 사랑의 장소인데, 그는 그런 정상적인 삶을 저버렸다. 셋째 , 그는 무덤 사이에 거했다. 산 자가 살 만한 곳이 아니고 죽은 후에야 갈 곳인 무덤이 그의 거처이었으니, 그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사는 자와 같았다.


[28, 29]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넷째, 그는 힘이 셌고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들었다. 마태복음 8:28에는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고 그들은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했다고 했다. 또 마가복음 5:5에 의하면,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다. 이성이 감정과 의지를 적절히 지배하는 자를 인격자라고 할 터인데, 그는 전혀 이성에 지배를 받지 않고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참으로 불쌍했다.


이러한 특징들에 더하여, 두 가지 내용이 더 첨가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다. 또 하나는 그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에게 간구했다는 점이다. 28절뿐 아니라, 또한 31절과 32절에도 그가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구원을 받지 못할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그가 그렇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은 그 귀신이 증거한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도 귀신에게 그런 명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다. 그는 귀신들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귀신들도 그의 권세와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


[30, 31]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無底坑)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그 귀신들린 자의 이름은 '군대'이었다.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로마 군대 조직의 군단을 가리켰다. 그것은 수백명의 기병과 5,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이름이 그러한 것은 많은 귀신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통 귀신들린 사람과 달랐다. 그래서 그렇게 무덤에 살며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이 사나웠고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지 마시기를 간구했다. '무저갱'(無底坑)이라는 원어(아뷔쏘스)는 '밑바닥이 없는 곳' 곧 지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증거하신 대로,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귀신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다(마 25:41).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지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장차 거기에 던지울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2-34]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마가복음에 보면, 거기에 있었던 많은 돼지 떼는 '거의 2천 마리'이었다(막 5: 13).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그 돼지들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시기를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그것들의 값은 상당했을 것이다. '치던 자들'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그 돼지들이 여러 사람의 소유이었던 것 같다. 그 날 2천 마리 돼지의 주인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공의로운 재앙을 통해 악한 자를 징책하시고 세상에 도덕 원리를 교훈하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높으신 뜻 가운데 인생에게 세상 재물이 헛됨을 일깨우시는 때도 있다. 그런 경우, 사람에게 물질적 큰 손실이 있어도, 반면에 물질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이 허무함을 깨닫는 큰 유익도 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다(잠 23:4, 5).


그러나 귀신들린 한 사람의 가치는 그 돼지들의 가치보다 더 컸다. 불멸적 영혼을 가진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가 있다. 특히, 인간 구원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와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16:25, 26).


[35, 36]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귀신들린 자는 고침을 받았다.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와서 그를 보고 두려워했다. 그가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은 사람들에게 그 일에 대해 말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거되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의 성격이었다. 예수님에 관한 사건들은 어느 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것들을 본 목격자들이 증거한 진실한 증언들이었다. 여러분은 성경의 이 진실한 증거적 성격을 깨닫고 성경의 모든 증거들을 믿어야 할 것이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본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구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탐구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속에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한 여자의 증거를 받고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께 나아와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었다. 요한복음 4:39-42,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38, 39]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그 지방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귀신 나간 자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구했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다. 그 대신, 그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큰 일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주의 말씀대로 돌아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큰 일을 온 성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증거자가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26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귀신들린 자는 참으로 불쌍하였다. 그는 단정치 못하여 옷을 입지 않았고, 안정이 없어 집에 거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자들처럼 무덤 사이에 거하였다. 그는 거칠고 사나워 통제하기 힘들었고 심지어 자신을 해하였다. 그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다.


둘째로, 예수님은 신적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귀신에게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지셨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무엇을 간구하였다. 그는 신적 능력과 권세로 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고, 또 귀신들의 간구를 허락하셔서 돼지 떼에 들아가게 하셨다. 이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 이들은 이 사건을 확인하고 그를 믿으라.


셋째로, 인간의 구원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 물질적으로 돼지 약 2천 마리의 손실이 크지만,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은 그보다 더 귀한 일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크게 여겨야 한다. 인간이 돼지 2천 마리보다 귀하고, 그 어떤 보화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온 세상을 가지고도 나의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구원의 큰 가치를 알아야 한다.


넷째로,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우리를 떠나소서'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와 함께 있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비록 '주와 함께 있게 하소서'라고 요청한다고 주께서 다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 요청이 바른 요청이다.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인가? 저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예수여, 우리를 떠나소서'라는 반응인가? 아니면 저 군대 귀신들렸다가 고침 받은 사람처럼 '주와 함께 있게 하소서'라는 반응인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 되심을 알았다면, 우리는 주와 함께 거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가 되기를 바란다.



40-56절, 두 가지 기적들


본문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외동딸을 살려주신 일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일을 증거한다.


[40-42]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회당장'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던 집회소인 회당에서 가장 높은 책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회당장이었던 야이로는 자기의 열두 살 먹은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간청하였다.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큰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 회당장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겸손히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그를 도우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의 간청의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다.


[43, 44]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에 가시는 도중에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자가 예수께 나아온 사건이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출혈병이다. 전통 사본에는,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라는 말 다음에 '의사들에게 그 가산(家産)을 다 허비하였으되'라는 말이 있다. 그는 참으로 불쌍한 병자이었다. 시간적으로 12년의 투병 생활를 하였다. 경제적으로 병 치료를 위해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정신적으로 심각한 열등감과 좌절과 낙심 속에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오랜 질병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찾고 구하는 겸비한 심령이 되었다. 이제는 세상에 대한 소망과 의지도 없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그를 믿었고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그의 열등감과 수치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 앞에 나올 용기 조차 없었다. 그는 예수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그 여자의 믿음의 표현 방식이었다. 믿음의 표현 방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 같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 자신들의 소원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조용히 예수님 뒤로 와서 단지 그 옷 가에 손을 대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여자의 출혈이 즉시 그쳤던 것이다. 12년 동안이나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그 몸의 출혈이 즉시 멈춘 것이었다. 불치의 병이 놀랍게 치료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신적 능력이 이와 같이 나타났다.


[45-4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전통 사본에는, '베드로가 가로되'라는 말이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자신의 병고침 받은 일을 숨길 수 없어서 예수님 앞에 떨며 나아와 엎드려 자신의 행한 모든 일과 병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 고백하였다.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라는 말은 이 사건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 앞에서 확인되었음을 증거한다. 이 사건에 대해 증거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항상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성격 전반이 그러하였다. 기독교 복음은 많은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전통 사본에는, '딸아'라는 말 앞에 '안심하라' 혹은 '힘을 내라'는 말(다르세이)이 있다. 주께서는 또 그 여자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구원하였다'는 말은 '병을 고침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원의 이치도 그러하다. 그 당시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겠지만, 이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한 자만이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께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의지하고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받는다.


[49, 50]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혈루증 여인이 고침 받는 기쁘고 감격한 일이 있은 후에, 슬프고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들에게 주신 귀한 교훈이 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도 성도는 때때로 슬프고 두려운 일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주권자, 우리의 목자 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워 말고 오직 그를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51-53]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그가 '잔다'고 표현하셨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죽음으로만 아니까 슬퍼하고 있었다. 그 죽음이 자는 것임을 안다면 그들은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깰 수 있음을 알고 또 그의 깰 날을 소망하고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죽음이 자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실 때 그들은 다 깨어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도, 그의 신적 능력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비웃었다.


[54, 55]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靈)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예수께서는 그 아이에게 '아이야(혹은 '소녀야', 헤 파이스),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가 어찌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죽은 소녀의 영이 돌아와 그 소녀는 살아났다. 주의 말씀은 곧 전능(全能)이었다. 마치 죽은 아이가 그의 음성을 듣듯이, 그가 말씀하시자 곧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었다. '곧 일어나거늘'이라는 말씀은 그 소녀가 살아난 것이 즉각적이었음을 나타낸다. 사람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그 생명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즉시 이루어졌던 것이다.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이나 고쳐주고 죽은 자들이나 살려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인간과 세상의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친히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 5:32; 마 20:28).



결론적으로, 40절부터 5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세상에는 슬프고 불행한 일들이 많이 있다. 열두 살 먹은 회당장의 외동딸의 죽음은 큰 슬픔의 일이었다. 한 여자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 당했던 것도 참 불행스런 일이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열등감과 좌절과 낙심의 한 예를 본다. 물론 세상에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슬픔과 불행이 많다.


둘째로, 구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과 신적 영광을 나타내셨다. 12년 동안 많은 의사들의 치료를 통해서도 고침을 받지 못했던 그 여자의 혈루증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즉시 고침을 받았다. 그 불치의 병이 즉시 치료된 것이었다. 또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그 죽었던 열두 살 외동딸을 잠을 깨우시듯이 살리셨다.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그 아이가 일어났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하나님께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거되었다.


셋째로, 불치의 병의 치료나 죽은 자의 살아남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졌다. 주께서는 그 치료 받은 혈루증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의 딸이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길에서 전해들었던 그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기적들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기적들을 체험한 그들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인정하고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넷째로,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구원의 복음 원리를 암시한다. 세상에는 슬픔과 불행의 일들이 많이 있다. 그 근본 원인은 죄요 그 절정은 죽음이다. 더욱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죄씻음과 의(義)와 생명을 주셨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구원의 복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 원리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은 구주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과 새 생명을 받았는가?




9장: 제자의 길


1-6절, 열두 제자들을 보내심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예수께서는 전도하도록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입혀 보내셨다. 모든 귀신들을 제어하고 병들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은 단순히 인간의 말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役事)가 필요하였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했다(고전 4:20). 또 그는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고후 10:4, 5).


열두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도 주께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았고 또 그것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주를 믿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체험은 중생한 믿음 없이도 가능한 것 같다. 주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하셨다(마 7:22, 23).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일차적 임무, 곧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라'(바실레이아)는 왕국(kingdom)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 국가가 아니다. 흔히, 민주 국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라고 표현된다. 주권(主權)이 국민에게 있어 국민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 그래서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국가가 민주 국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민이 스스로 존재하여 모든 권한을 다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적(自存的) 존재가 아니고 누구에게 의존하여 존재하는 의존적(依存的)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케 된 존재이다. 또 인간은 부모에게서 출생되었고 학교, 친구, 가게, 병원, 사회와 국가 등 이웃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여기에 민주 국가의 관념 속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 민주 국가는 마치 인간이 자존적 존재인 것처럼 가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결코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인본주의적인 민주 국가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王國)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神政) 국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국가이다. 물론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하여 물질적인, 영적인 바른 법칙들을 주셨고, 인간이 그 법칙들을 따라 살 때 행복과 평강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을 깨닫고 인정하고 거기에 스스로 복종하는 나라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고 그에게 감사치 않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것을 한마디로 영적 어두움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과 악령들 혹은 귀신들이 활동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주권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겸손히 순종하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번째 임무는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왜 중요한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 회개와 구원, 정신적 깨우침--이것들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인간의 몸의 건강도 부수적으로, 그러나 세상 사는 동안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사람은 영육으로 구성된 존재이므로 영육으로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의(義)로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의(義)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아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일도 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살기도 한다. 몸의 건강은 영혼의 구원과 더불어 인간이 땅 위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의사들이 많이 되면 좋겠다. 전도하는 전도자들 다음으로 꼭 필요한 일은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한 자들을 먹일 수 있는 재력가들도 필요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을 돌보아 주면서, 영혼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 좋을 것이다. (비록 신자들로서 이 세상에 필요한 직업은 그것들 뿐만이 아닐 것이다. 양심적이고 유능한 정치인들도, 국회의원들도, 법관들도 필요하고, 참 인간 교육의 사명을 가진 교육가들과 교사들도, 양심적이고 성실한 공무원들도 많이 필요할 것이다.)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주께서는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씀해주셨다. 무엇보다, 그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그는 구체적으로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열거하셨는데, 첫째는 지팡이이다. '지팡이들'이라는 원어는 길 갈 때 의지하는 지팡이와 자기 몸을 방어하는 데 쓰는 호신용 막대기를 포함하는 것 같다. 둘째는 주머니(페라)이다. 그것은 물건들을 집어 넣을 수 있는 가죽 가방이나 지갑을 가리킨다. 셋째는 양식이며, 넷째는 돈, 다섯째는 두 벌 옷이다.


누가복음 22:35, 36에 보면, 후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때의 부탁을 기억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 말씀을 보면, 주께서 처음에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게 하신 것은, 평생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고, 전도 활동을 할 때 세상의 염려나 세상의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전도자는 세상의 염려나 세상의 물질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바울 사도도 말씀하기를,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딤후 2:4).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주님의 말씀은 전도자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만족하며 활동해야지 더 나은 집, 더 편한 집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전도자가 세상적, 물질적, 환경적 조건을 찾아다닌다면 전도자답지 못하다. 세상에서도 직장인이 가능하면 한 직장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조금 더 대우가 좋다고 이리 저리 옮겨다니면 그의 인격에 흠이 될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한 우물을 파고 한 곳에서 인정을 받도록 힘쓰는 것이 일반적으로 좋다. 전도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세상의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나선 자가 세상의 조건에 마음을 쓴다면 중심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어디에서나 항상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5, 6]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지 않고 거절하는 자들이 있다. 전도자는 그런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곳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여러 곳에 두루 행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신을 영접지 않는 곳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주께서는 전도자가 그를 영접지 않는 곳을 떠날 때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엄하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복이 그들과 상관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열두 제자들은 주님의 교훈대로 각 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쳤다.



7-9절, 헤롯의 당황함


[7-9]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전통 사본에는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라는 말이 '헤롯이 그의 행하신 이 모든 일을 듣고'라고 되어 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심히 당황했다. 그는 특히 자기가 목 베어 죽였던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소문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는 편안하게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성경은 말하기를,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했다(잠 28:1).



10-17절, 5병 2어(五餠二魚)의 기적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보냄을 받았던 제자들은 돌아와 주님께 전도 보고를 하였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예수께서는 전도하고 돌아온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전통 사본에는 '따로 벳새다라고 불리우는 성에 속한 한 한적한 곳으로 떠나 가셨으나'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들을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쉴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도 종종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무리들의 열심은 대단하였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부흥을 주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고 내버려 두시면 사람들의 마음은 냉냉하고 거칠고 반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무디어 있고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교회의 부흥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찾아온 사람들을 영접하셨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셨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다. 세상 나라는 다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는 영원하며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아래 처한 세상에 남은 소망과 기대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육신의 병들도 고쳐주셨다. 세상에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병도, 고통도, 죽음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영육이 건강하게 영원히 살 하나님의 예비하신 세계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가장 확실한 소망이다.


[12-17]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약 5천명, 그러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명 이상의 무리를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갈릴리 호수 부근 벳새다 들판에서 날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일어났던 일이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그것도 요한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요 6:9).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리를 50명씩 질서 있게 앉히게 하셨다. 무리의 숫자는 대략적으로라도 금방 파악될 수 있었다. 주 예수께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무리들은 그 기적의 떡을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과 부스러기를 열두 바구니나 거두었다. 이 놀라운 기적 사건은 사복음서들에 다 증거되고 기록되어 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사건은 다른 모든 기적 사건들과 함께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즉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유대인으로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셨고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인간이셨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들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신 일이었고 제자들이 각 곳에 두루다니며 수행한 일이었다. 세상 나라들은 마침내 다 멸망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루어지는 그 나라, 거기에 그리고 오직 거기에만 우리의 행복과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뿐이다. 교회가 지상에서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 같은 일들은 그것에 비교할 때 오히려 작은 일들이다. 지상 교회가 힘써야 할 큰 일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모으며 다 바치자!


또 교회는 부차적으로 사람들의 질병과 가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물론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병환자들과 모든 가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는 어렵고 또 주께서 그것을 교회에 요구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적어도 모여든 사람들 중에 병든 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은 힘써야 한다. 병자들의 방문과 가난한 자들의 구제는 복음 전파와 더불어 교회가 힘써야 할 일들이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행 2:44, 45).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들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증거하였다(갈 2:10). 교회는 국내외에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과 더불어 교회 안에 연로한 분들과 가난한 자들과 병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신도들도 하나님의 주신 세계 전도라는 큰 사명을 위해 세상 일을 작게 여겨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고 입을 것과 거처할 곳이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교훈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다(딤전 6:7, 8).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입혀 주셨다. 주께서는 친히 떡 기적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셨고 또 그가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자이심을 증거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산다면 무엇이 걱정이며 염려이겠는가?


주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1- 33). 바울 사도도 간증하기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다(빌 4:11-13).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만 믿고 의지하며 맡겨진 사명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18-27절, 주님을 따라가는 길


[18, 19]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따로 자주 기도하셨다. 그는 기도의 본을 많이 보여 주셨다. 그는 새벽, 아직 밝기 전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셨고(막 1:35), 산으로 가셔서 밤이 ꁹ도록, 즉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고(눅 6:12), 따르는 무리들을 보내신 후에 따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마 14:23).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 모두에게 모범과 교훈이 되고, 특히 복음의 일꾼된 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에게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들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한다고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심히 부분적인 견해들, 예를 들어 세계적 종교의 창시자나 역사상 뛰어난 성현(聖賢) 정도의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격히 말해 잘못된 견해들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라는 뜻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또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인간의 본질을 가지신,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라는 뜻도 가졌을 것이다.


특히,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 밝히 예언되어 있는 바이었다. 다니엘 9:24-26,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垓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이 예언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를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이해했던 것 같다. 즉,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또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건져내어 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야의 참 사명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왕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함을 가질 것이지만, 문제의 해결은 정치와 경제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데서부터 풀어져야 하였다. 즉 메시야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메시야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내시는 구주로 오셨다. 영속적인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함은 인간들의 죄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메시야의 사명을 이해시키는 데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부르셨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가지신 동시에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예수님은 신성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동질(同質)이시고 동등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 한 분이시므로 예수님은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성으로 우리와 동질이시고 동등되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는 평안을 누리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실 자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대로 고난의 종으로 오셨다. 예수께서는 특히 자신이 구약 교회의 직분자들이었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다. 이 예언은 교회가 부패되고 종교가 부패될 때 가장 종교적이게 보이는 사람들, 즉 종교 지도자들 혹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역사상 자주 그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이 죽임을 당한 지 제3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이 예수님 자신이 예언하신 바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니고 거짓 예언자일 것이며,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고 사람들을 속이는 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연 자신이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셨다!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후 제자들 모두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셨다. '무리'라는 원어(판타스)는 '모두'라는 뜻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 . '이라는 주의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 이것은 교회의 주요 직분자들이나 목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교훈이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 곧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되는 교훈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첫째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본래 갖고 있었던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이 허무하고 죄악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가졌던 것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따라서 올바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영원한 삶의 소망이 없는 허무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둘째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라는 말은 변덕스럽게, 기분적이게, 감정의 굴곡이 심하게 하지 말고, 꾸준히, 성실히, 변함 없이 주를 따라야 할 것을 가르친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얼마 후에 어떤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암시하는 바가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이었다. 그 당시의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의 사형 방법이었다.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야 했고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기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보인다. 그 십자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실,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과 같이간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함이 없이는 결코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결국 죽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고 죽기까지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의 삶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 없이 죽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행복만 추구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가 그 믿음 가지고 죽고, 하나님 위해 살고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죽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생의 길이다.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왜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목숨만을 위해 산다면 결국 우리는 영원한 참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위하여 이 세상의 목숨을 잃는다면 영원한 참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은 '나 때문에'라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예수님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믿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예수님의 교회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살고 믿음을 위해 죽기까지 해야 한다.


여기에서 주께서는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 곧 이 세상의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목숨, 곧 내세의 생명,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육신적 생명만을 위해 살려고 한다면 그는 영원한 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위해 심지어 이 세상의 육신적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영원한 참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 자신께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거쳐 부활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이제,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과정은 그를 믿는 제자들 모두의 삶의 과정인 것이다.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를 계속적으로 강조하여 보인다. 특히 이 말씀은 참 생명의 가치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가를 증거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이 세상 전부와 바꿀 수 없는 불멸적 영혼이 있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서 영생의 영광을 누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복된 영생을 얻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이 세상의 것을 다 얻었다 해도 영혼의 구원을 잃어버린 자의 불행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지 말고 영생의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생명을 얻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위해 이 세상의 생명까지도 포기하고 잃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서 참 생명의 길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즉, 24절과 25절과 26절에 거듭하여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사용됨으로써 주를 따르는 길 곧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이 가치 있는 길임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 곧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니며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충성의 태도도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목숨을 위해 영원한 참 생명을 포기한 자의 모습이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다시 오실 때 그를 부끄러워하겠다고 경고하신다. '부끄러워하겠다'는 말씀은 그를 인정치 않고 그를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서 제외하실 것이라는 경고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증거하신다. "인자(人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인자'의 재림은 다니엘서 7장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며 심판 권세를 가지실 것을 예언한 예언의 성취이다. 또 '인자'의 재림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영적 재림이거나 신성으로서의 재림이 아니고 인성을 가지신 주님으로서의 재림일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고 만국 교회가 믿고 기대해 온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의 영광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라고 묘사하셨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왕권과 심판권을 가지신 위엄 있는 영광의 모습이실 것이다. 또 재림 때의 그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이실 것이다. 또 그는 많은 천사들을 동반하실 것이므로 더욱 영화로우실 것이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다음에 나오는 산 위에서의 변화의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예표요 미리 맛봄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 본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며 바른 견해이다. 그 증거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의 기적들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가?


둘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 자신이 가신 것과 같이,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각오하는 길이며 죽도록 믿음을 지키고 주님 앞에 충성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셋째로, 주님을 따르는 길의 가치는 무엇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참 생명의 길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참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사는 길, 영생하는 길, 영광의 길이며, 참 자기를 잃지 않고 얻는 길, 영생하는 참 자기를 얻는 길이다. 우리 모두는 이 길로 인내하며 충성되이 달려가야 한다!



28-36절, 용모가 영화롭게 변화되심


[28, 29]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주 자주 기도하셨다. 우리는 그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 중에 용모가 영화롭게 변화되셨다. 옛날 모세는 호렙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고 내려올 때에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다(출 34:29, 30).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씀했다(고후 4:18).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기도의 교통을 통해 조금씩 그의 거룩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또한 그의 옷도 희고 광채가 나는 옷으로 변화되었다. 흰색은 성결함을 나타내고 그 광채는 그 성결함에서 나오는 영광일 것이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입을 옷도 성결과 그 영광의 옷일 것이다.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으로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을 보내어 주셨다.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참 생명, 천국의 생명, 영원한 생명의 실재(實在)를 실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잘 믿고 돌아가신 우리의 부모님께서 천국에서 영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보았다면 가졌을 감동과 같았을 것이다.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모세와 엘리야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은 영광 중에 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한 대화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일에 대한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대속(代贖)을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32, 33]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세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 주의 영광을 보았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 할 때 예수님께 한 가지 일을 제안하였다. '두 사람이 떠날 때'라는 말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제안하기를,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자'고 하였다. '여기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은 주의 영광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나온 고백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너무 좋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세상에 있는 것보다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빌립보서 1:23에 말하였다.


제자들이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한 것은 아마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 하였기 때문에 한 말인 것 같다. 여하튼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세 분이 함께 자신들과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자신이 하는 말이 타당한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정신 없이 얼떨결에 말을 하고 있었다.


[34-36]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베드로가 이런 정신 없는 말을 하고 있었을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종종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시기도 했고 또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도 했다. 제자들은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 무서워하였다.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이 들려졌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는 예수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더 귀하고 확실하고 시원한 증거이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하신 내용은,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라는 구절은 전통 사본의 본문에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고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둘째로, 하나님 자신의 증거하신 내용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그 음성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는 말씀을 포함한다. 음식은 골라먹어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골라먹지 말아야 한다. 실상 음식도 골라먹으면 건강에 나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달든지 쓰든지 다 받아야 한다.


후에 베드로 사도는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 -18).



결론적으로, 28절부터 3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친히 보여 주셨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친히 하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으로 불안해 하고 낙망했을지도 모를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 제자들은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증거해 준다. 영광 중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의 주제는 바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실 일에 관한 것이었다. 주의 영광은 바로 이러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후에 오게 될 것이었다. 그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 후에 올 것이었다.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악들은 속량함을 얻었다. 이와 같이, 주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주의 교훈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 장차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의 증거하신 내용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믿고 확신하고 그를 따르며 그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자!



37-45절,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이튿날'이라는 말은 성경의 기록들이 증인들의 증거들을 담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은 어렴풋하거나 막연한 내용들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큰 무리가 맞았다'는 말씀은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되어진 일들임을 나타낸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에 대한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증거적 성격을 가진 책이다.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나 8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의 경우와 같이, 이 경우에도 어떤 사람에게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곧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에게 재난과 불행의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취하여 가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헛됨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신다.


[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귀신'이라는 원어는 단순히 '영'(靈)이다. 이 아이의 질병은 한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태복음에는 그 아이의 병을 간질(셀레니아조마이)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은 자주 질병과 악령의 관련성을 말한다. 이 경우도 그러하다. 이 아이의 간질병은 악령의 활동이었다. 오늘날도 악령의 활동에 기인하는 병들 즉 정신적 원인을 가진 병들이 많이 있는 줄 안다. 이 아이의 병은 영이 그 속에서 활동하면 소리를 치며 부르짖고 거품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자기 몸을 심히 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17:15에 보면, 그는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진다고 했다.


[40, 41]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산 아래 있었던 제자들은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제자들도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지만 이 아이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에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7:20). 귀신의 활동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귀신을 내어쫓거나 병을 고치는 권세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 없는 일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지만, 제자들도 믿음이 굳센 자들이지는 못했다.


[42, 43]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가복음의 기자인 누가는 그 아이를 괴롭히는 그 영을 '귀신'(토 다이모니온)이라고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원어는 '그 더러운 영'이다. 왜 그 귀신은 더러운 영인가? 귀신은 범죄하여 타락한 천사이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거룩하고 깨끗한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의 생각은 항상 깨끗하고 선하다. 그러나 악령과 귀신은 죄악된 영이다. 그것은 음란하고 속이고 사악하고 미워하는 영이다. 그것은 더러운 영인 것이다. 이 더러운 영이 그 아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더러운 영을 꾸짖으심으로 그 아이를 낫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악령들의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셨지만, 그가 뜻하시면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 활동을 중단시키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악령의 활동을 중단시키셨다. 그는 그 더러운 영을 그 아이에게서 나가게 하셨다. 그 일은 곧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 곧 그의 놀라운 능력의 치료의 일을 목격하고 놀랐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또다시 그의 신적 영광을 드러내셨다.


[44, 45]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이 능력의 일 후에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었고 이 세상에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또 그것이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셨던 차원 높은 생활 원리이었다.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그 고난의 길을 깨닫고 본받아야 했다. 그들도 이 세상에서 평안과 부요를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 희생과 고난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했다.



37절부터 45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의 교훈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한다. 본장 앞 부분에 기록된 5병 2어의 기적이나 변화산 위에서의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에 추가하여 예수께서 어떤 사람의 귀신 들린 외아들을 고쳐주신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이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시고 영계를 주관하시는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처럼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분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처럼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꾸짖어 병을 고치신 분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는가? 그가 과연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대로 그러한 분이시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의 구주, 곧 신적 구주가 아니신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그를 따르자.


둘째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많은 육신적 질병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들의 많은 영적, 정신적 질병들도 고쳐주셨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영혼은 곧 사람의 정신 활동의 주체요 그것은 마음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영혼이 죄악으로 병들고 상함으로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고 또 그것이 몸의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많은 병들이 정신적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보여진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병들이 생긴다. 흔히 신경성 원인의 병들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을 주셨고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셨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또 성경에는 '사람의 심령 즉 영이 병을 능히 이긴다'는 말씀도 있다(잠 18: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신다. 오직 우리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한가? 성경 말씀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진실한 믿음 안에서 영육의 건강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고 그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말씀하셨고 그 길을 가셨다. 물질의 복이나 건강의 복이나 사회적 평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 성경의 인물들인 이삭도, 욥도 물질의 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세상적, 물질적 복을 약속하셨다(신 28장). 그러나 주의 제자들에게는 한 차원 높은 삶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삶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삶을 사셨다. 바울 사도도 고난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빌립보서 1:29에는 말씀했다.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삶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평안과 행복만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천국의 소망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심지어 순교의 자리에까지라도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나아가겠다고 각오하는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다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겠는가?



46-48절, 누가 더 크냐?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더 크냐(메이죤) 하는 변론이 일어났다. '누가 더 크냐?'는 생각은 인간의 명예심에서 나오는 경쟁심이다. 그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악성인 교만에서 나온다. 그것은 결국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시기심과 싸움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기 위해 섬기는 자, 곧 종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너무 다르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많은 말씀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 제자들 속에는 인간적 연약성이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을 본받는 제자가 되기에 부족했다.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의 변론을 아셨다. 비록 그들이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의 욕심과 복잡함을 그는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다 아신다. 요한복음 2:24, 25,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문제점을 고쳐주시기를 원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온전함을 원하신다. 그는 그것을 위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어린 아이 하나를 사용하여 중요한 교훈을 주신 것이다.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


'내 이름으로'라는 원어는 '내 이름에 근거하여'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어떤 어린 아이를 영접하든지, 아니면 그 어린 아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우리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신 후에, 그는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앞부분에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자신을 가장 낮추는 그 사람이 가장 큰 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작은 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곧 큰 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서는, 자신을 낮추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를 즐거이 감당하는 자가 큰 자이다. 모든 종류의 명예심과 경쟁심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주님을 섬기며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자가 큰 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 봉사자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49, 50절, 금하지 말라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3:17에는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고 증거했는데,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 본절과 54절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자기 생각에 아니라고 생각되면 즉시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의 이름으로'라는 원어는 '당신의 이름으로'이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 일을 허락하셨던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일은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금지하였다.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 또 왜 그가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제자들이 그의 행위를 금지할 권한은 없었다. 그가 비록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그를 제재할 권한은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에게 자기들을 따르라고 강요한다면, 그들은 종파주의적 좁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될 것이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를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원문에는 그 이유로(가르)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전통 사본에는 '너희'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고 되어 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여기에 관용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물론 관용에는 한계선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라는 한계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을 향해서 '우리 교회에만 속해야 한다'는 종파주의적 좁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을 향해 관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1-56절, 사마리아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음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승천하실 기약'이라는 원어는 '그의 승천의 날들'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표현은 그의 인간적 모습을 잘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죽음의 길을 향하여 기꺼이 나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길을 가셔야 했다.


[52, 53]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기며 낮추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육신적 혈통이나 종교적 전통은 순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전통 사본에는 '주여'라는 말 다음에 '엘리야도 했듯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구약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자기를 잡으러 보낸 50명의 군인들에게 저주하므로 두 차례나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게 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은 몹시 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엘리야의 일을 기억하면서, 주께 묻기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한 것이다.


[55, 56]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전통 사본에는 '꾸짖으시고'라는 말 다음에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도다. 이는 인자가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음이니라' 라는 말씀이 들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구하러 오셨지 멸하러 오시지 않았다. 제자들은 주께서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벌써 잊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쳤다(롬 12:17, 21). 또 범죄한 자들을 온유함으로 바로 잡으라고 가르쳤다(갈 6:1).



결론적으로, 46절부터 56절까지의 말씀은 겸손과 관용과 온유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누가복음 9장은 제자들의 길을 가르쳐준다. 겸손과 관용과 온유는 그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9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 봉사자들은 명예심, 경쟁심, 교만, 편협하고 좁은 마음, 보복심 등을 다 버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본 보이셨던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은 모든 자들은 주의 가르침대로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단장하여 주를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57-62절, 고난 각오, 가족 관계 초월


본문에는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세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세 사람의 부족한 점들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것은 주의 모든 제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전통 사본에는 본절 끝에 '주여'라는 말(퀴리에)이 있다. 첫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다. 그것은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고백이다. 이것은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그러나 주께서는 그 사람을 격려하는 대신 매우 부담되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들짐승이나 날짐승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안정된 거처가 없다는 말씀이다. 과연 주께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하신 집이 없었다. 그는 공적인 전도 활동의 마지막 때에 가지신 제자들과의 유월절 식사도 어떤 사람의 다락방에서 하셨고 그 밤의 휴식도 감람산에서 하셨다. 주님의 전도 사역에는 세상적, 물질적 안정이 없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주를 따르려는 제자들이 육신적, 물질적 가난과 고난을 각오하고 주를 따라야 할 것을 의미하였다. 주를 따르려는 자들은 주의 가신 길을 따라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주 앞에서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말한 이 사람에게는 그런 각오가 부족했다. 그래서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가난과 고난과 비천함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는 것이다.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전통 사본에는 본절 후반부에도 '주여'라는 말이 있다. 두번째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고 주를 따르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가서 그의 부친을 장사하도록 허락해 주기를 예수님께 구했다. 그의 요청은, 그의 부친이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으나 돌아가실 때까지 그를 보살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든지, 혹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면 그 장례식의 지루하고 미신적인 행위들, 예를 들어, 7일 애곡이나 1년간의 애도 등을 포함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요청은 하나님의 일과 명령보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인간의 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처음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두번째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 곧 장례를 행해야 할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죽은 자들'이라는 말을 보면, 이 사람에게는 형제들과 친척들이 있었다. 주님의 말씀은 부친을 장례하는 일이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를 공경하며 섬기고 그들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잘 행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주님의 말씀은 단지 더 높은 명령이 있고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21:10, 11에 보면, 관유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아야 했고 심지어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고 또 성소에서 나오지 말아야 했다. 세상에서도 전투중인 군인이나 임무 수행중인 소방관은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에도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2:4).


주께서는 전임사역자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일이 세상의 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의 기본적인 일 때문에라도 방해받지 않고 지장되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이 세번째 경우도 비슷하다. 이 사람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고 그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귀한 결심이며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는 앞의 사람과 비슷하게 '먼저'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주께 요청하였다. 사람이 자기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주님의 대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우선순위에 대한 혼란한 상태가 문제이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 속의 문제점을 보고 계셨다. 주께서는 밭 가는 자가 앞을 주목하며 밭을 갈아야 할 것이라는 뜻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만일 밭 가는 자가 밭을 갈면서 뒤를 돌아보면 이랑이 비뚤어지고 말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과 같다. 또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즉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런 자는 마치 옛날 롯의 아내와 같다. 창세기 19:26에 보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것은 세상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다. 복음의 일꾼된 자들이 세상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천국의 직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것을 가장 크게 여기고 그 직분에 지장되지 않도록 처신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세상 염려와 걱정 때문에, 세상 애착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직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첫째로, 본문에서 말씀한 내용은 일차적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전임사역자들에게 적용된다. 모든 신자가 넓게는 주의 제자들이지만, 그 가운데서 전임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따랐다(19-22절). 이와 같이, 전임사역자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욱 주께서 가신 길을 따르려고 결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근본적 원리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모든 신자들은 세상의 일들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크고 가치 있게 여기며 주를 따르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둘째로, 주의 제자들은 특히 주님을 믿고 섬기며 따를 때 물질적 가난과 불안정과 육신적 고난과 비천함을 각오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되며 전임사역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에서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위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세상에서는 가난과 비천함과 고난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이 감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우리를 위해 가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 9:23, 24).


셋째로, 주의 제자들은 심지어 가족관계의 기본적인 일들까지도 초월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그것은 가족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의 말씀이다(출 20:12). 또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했다(딤전 5:8).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긴급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들은 세상 일 때문에, 심지어 가족관계 때문에 그 일이 지장되거나 방해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특히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부름을 받은 그들은 세상 염려나 걱정을 버리고 세상 애착을 끊어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6절,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께서는 12제자들 외에 또 70인 전도자들을 세우셨고 그가 가시기를 원하는 각동 각처로 보내셨다. 전도 지역에는 좋고 나쁜 곳이 없다. 구원받을 영혼이 있는 곳은 어디나 전도할 지역이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원시적 부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 예수께서 전도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증거하고, 또 후에 서로의 사역도 증거하고, 또 전도하는 동안 서로를 위로, 격려 혹은 권면의 말로 붙들어주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전도를 추수에 비유하셨다. 구원얻을 영혼들은 다 익은 곡식들,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에 비유되었다. 씨는 이미 뿌려졌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졌다. 씨가 심겨지고 자라 추수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구원얻을 영혼들, 회개할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꾼이 적다고 그는 또 말씀하셨고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셨다. 구원얻을 영혼들은 많은데 그들을 구원할 전도자들이 적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그는 천국 백성의 씨를 뿌리게 하셨고 그것을 자라게 하셨고 또 그것을 추수하게 하신다. 하니님께서는 부족한 전도자들을 보내어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을 많이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하자.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똑같다. 아니 오늘날은 세상의 종말이 더 가까운 때이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전도의 사명을 다 이루기 위해 전도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100년 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복음 전파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요구된다. 그래야 또 100년 전의 우리와 같은 형편에 처한 자들이 우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이 구원의 큰 복을 받을 것이다.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께서는 3절 이하에서 전도자들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복음의 모든 일꾼들에게 지침이 된다. 첫째로, 전도자들은 가야 한다. 주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세계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정된 고향을 떠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각곳으로 가야 한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둘째로, 전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마치 어린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짐과 같이 이 거칠고 악한 세상으로 보내진다. 세상에는 이리들과 같이 악한 자들, 핍박자들이 많다. 사탄과 악령의 종들이 많은 것이다. 전도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으로 파송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평안을 위해서 이 일을 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이 사명의 직분을 구해야 한다.


[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셋째로, 전도자들은 물질적 염려를 버려야 한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 등은 물질적 염려나 걱정 또는 생활 문제에 대한 염려를 의미한다. 그런 염려는 우리를 전도자로 부르신 주님께 다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주인, 우리의 파송자이시므로 그가 그 모든 문제를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전도자들은 오직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길에서 아무에게든지 문안하지 말라'는 주의 교훈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중도에서 이 일, 저 일에 관여하지 말고, 혹은 이 사람, 저사람에게 관계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전도자들은 오직 자기에게 부여된 전도의 일에 충실하고 그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5, 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다섯째로, 전도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기원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평안은 평안을 받을 만한 자들에게만 임한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평안을 받을 만한 자들이 거기에 있으면 그들이 기원한 평안이 그에게 임할 것이다.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여섯째로, 전도자들은 한 집에 유하며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고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전도자들이 더 나은 곳,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안다. 전도자들은 자신의 평안과 유익을 위해 헌신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청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는 초월하는 태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8-11]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일곱째로, 전도자들은 그들을 영접하는 동네에서든지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서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자들이 전해야 할 전도의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주제요 성경의 대주제이다. 그것은 죄인들의 현재의 구원의 문제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장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영생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범죄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치 않고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고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70인 전도자들에게 전도자들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신 후, 그들의 전도에 대한 두 가지의 반응에 대해 미리 말씀해 두셨다. 전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영접 아니면 거절이다. 어떤 이들은 영접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거절할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 줄곧 그러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러했고 또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참된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영접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께서는 특히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고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엄히 경고하셨다. '저 날에'라는 말씀은 14절에 언급하신 대로 '심판날'을 가리킨다.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쉽다는 말씀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소돔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 심판을 받을 것을 뜻한다. 악인들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요한복음 5:29,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견디기 쉽다'는 말씀은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이 받을 형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을 보인다. 악인들의 형벌은 다 똑같지 않고 큰 형벌이 있고 작은 형벌이 있을 것이다. 각각 자기가 범한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도 다를 것이다.


[13, 14]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께서는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주의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치 않았고 믿지 않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과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고,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못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다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들이 받을 형벌과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의 받을 형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많은 증거들을 보고 듣고도 믿지 않은 자들의 죄와 형벌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죄와 형벌보다 더 클 것이다.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도 마음이 높아 하늘에까지 곧 천국에까지 이를 것 같이 생각했지만, 주께서는 그들이 오히려 음부 곧 지옥에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악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교만하다. 그러나 교만한 자마다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을 받고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밝히 증거하셨다. 마지막 심판이 있어야 세상이 공평할 것이다. 악인들이 의인들을 핍박하고 해치고 그 악에 상당한 벌을 받음이 없이 죽는 세상은 도덕 질서가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상은 그럴 수 없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 세상에는 도덕 질서가 세워질 것이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전도자들의 전도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자들은 곧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요, 그들을 저버리는 자들은 곧 주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들이다. 또 주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저버리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거나 저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이 있다.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말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고 그들의 말을 저버리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전도자들의 필요성이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절실하다. 세상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주께서 명하신 세계 복음화의 일이 끝나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많은 전도자들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다. '오 주여 전도자들을 많이 일으켜 주소서, 보내어 주소서.' 또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이 바쳐지는 복을 하나님께 간구하자!


둘째로, 전도자들의 임무에 대한 지침이다. 전도자들은 어디든지 보내지는 대로 가야 한다. 전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물질적 염려, 세상 문제에 대한 걱정을 버려야 한다 전도자들은 오직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구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한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고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셋째로, 전도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다. 하나는 영접이며, 다른 하나는 거부이다. 영접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거부하는 자들은 심판과 멸망을 면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주의 복음을 진심으로 다 영접하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보다 못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많은 증거들의 말씀을 신약 성경에서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를 거절하고 저버린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된 그 심판과 형벌의 경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과연 성경에 밝히 증거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가? 그렇게 하라!



17-20절, 70인 전도인들의 보고


[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본문은 70인 전도인들의 보고의 내용이다. 그들은 기뻐 돌아왔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귀신들도'라는 표현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했던 것 같다. 즉 많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다는 뜻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예수님은 그들의 보고의 내용을 들으시고 대답하시기를,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 . .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증거의 말씀이었다. 사탄은 그 때까지 하늘에서 활동하였다. 욥기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선한 천사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서서 의로운 성도 욥을 비난하고 있었다(1, 2장). 또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하나님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 가운데 땅에 내려가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 하는 영을 넣을 자가 있었는데, 그는 악한 천사 같다.


하늘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요한계시록 12:7 이하에는 이렇게 증거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전도 사역의 중요한 의미를 증거해준다. 즉 전도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하늘에서 내어쫓기고 근본적인 실패를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을 범죄케 하여 죄인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무지하고 부도덕하게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만든다. 그러나 전도는 그 사람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여 새 사람을 만들고 그로 하여금 지식이 있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탄의 계획을 파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으로 귀하고 복된 일이다.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주었으니'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주노니'라고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의미를 가지며 주께서 주신 권세가 현재 효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뱀들과 전갈들을 밟으며 원수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사탄과 악령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질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에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었고, 이제 사탄과 악령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권세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천지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다(마 28:18).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는 말씀은 영적인 의미이다. 육신적으로는 성도들도 죽으며 심지어 순교의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구원과 천국과 부활과 영생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0:28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0:28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 생명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또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귀신들'은 원어에 '그 영들'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은 그 악한 영들, 즉 악한 천사들 곧 그 귀신들을 가리킨다. 그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복종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참된 기쁨의 이유는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기적 체험보다 더 큰 일이다.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된 것보다 더 크고 더 복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자기 이름이 천국 백성 명부, 곧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지옥]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사람이 어떻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그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피가 그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으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귀한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전도는 사탄의 일을 패배시키는 사역이다. 사탄은 사람이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전도는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이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다. 또 전도는 긴급한 일이다. 많은 영혼들이 지옥의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가서 저들에게 전도하여 구원하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둘째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는 말이다.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받았다. 이것이 구원이다. 죄사함은 이런 큰 특권이다. 곧,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다(요 11:25, 26). 성도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14, 15절).


셋째로, 성도의 참 기쁨의 이유는 그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으로써 가능하다. 학생들이 건성으로 학교 다니다가 졸업 못하는 일이 있듯이, 평생 교회는 다녔지만 천국 명부에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면 그처럼 슬픈 일이 있을까? 여러분의 관심과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참 기쁨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구원의 큰 가치를 깨닫고 있는가?



21-24절, 구원 지식의 신비와 복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70인 전도자들의 전도 보고를 들은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그의 기쁨은 단순히 인간적, 육신적 기쁨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쁨이었다. 성령은 기쁨을 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앞절의 말씀을 볼 때 그는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제자들의 구원을 기뻐하신 것일 것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 때문에 항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지식을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셨다. 구원 지식의 신비와 복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면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부르신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또한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물질 세계의 일들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일들도 주관하신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물론,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근원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회개하고 믿게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지식을 결코 더 잘 그리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순진한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구원의 지식을 더 잘 가진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의 나이 든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호산나' 하고 찬송하였다.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유치부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배우고 또 배운 대로 잘 믿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세상 노래나 춤 추는 것이나 배우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해야 한다.


여기에 '어린 아이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연령적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영적으로 어린 아이같이 순진한 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어린 아이같이 순진한 자들에게 구원의 지식을 더 잘 허락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인데, 그가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누구든지 그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지식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치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고린도전서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26-29).


이것은 세상에 지혜 있는 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혜 있는 자도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이 선포하신 구원의 소식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지식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씀했다(고전 1:21).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거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도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의 말씀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만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흔히 불신앙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풍성히 증거되어 있으나 마태복음부터 누가복음까지의 소위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증거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이 본문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과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들이신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신 후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에게 이런 권한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그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그는 말씀하셨다(마 28:19).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혹은 주시는] 자들'로 표현하셨다(요 6:37; 17:2, 9).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들의 구원자, 구원의 중보자로 세상에 파송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에 달렸다. 그가 소원하여 그 심령에 깨달음을 주시는 자는 다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면, 구주 예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구주라고 부르고(딤전 1:1) 특히 예수님을 구주라고 부르는 것은(마 1:21) 그가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구원의 방법만을 제시하고 구원의 결정권을 사람에게 맡겨두신 것이라면 그가 우리의 구주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구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의 진리를 생각할 때 이치에 맞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21). 오직 주께서 은혜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우리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빛을 창조하심과 같다(고후 4:6).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지식을 얻게 된다.


[23, 24]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종용히'라는 원어는 '따로, 은밀히'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고 그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복이 있다. 구약 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왕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하던 그가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 역사의 가장 절정적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은 복중의 복이요 가장 귀한 복이다. 구원은 죄사함이며 죽음의 극복 곧 부활과 영생이며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감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듯이, 오늘날도 성경 말씀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기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죄 문제를 해결받은 자들이며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구원 지식의 신비와 복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여기에 어린 아이는 연령적으로 어린 아이들도 되지만, 또한 영적으로 어린 아이처럼 순진한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둘째로, 구원의 지식은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게 하신다.


셋째로, 구원의 복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부활을 포함한다. 그것은 영원하고 참으로 영광스러운 복이다.


여러분은 이 구원의 복을 다 받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다른 이들에게 간증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받은 구원을 이 세상의 그 어떤 복보다 더 귀한 복인 줄 바로 깨닫고 있는가?


만일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히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으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 예수님은 오늘날도 신성의 영으로 우리 곁에 계셔서 구원의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 그는 지금도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계시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있다. 여러분도 그 빛을 받고 오늘 구원을 받기를 저는 바란다.


25-28절, 영생을 얻는 길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 질문하였다. '율법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자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하였다.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모든 사람 속에 있는 가장 고상한 질문이다. 전도서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했다(전 3:11).


그러나 시편에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라는 탄식어린 말씀도 있다(시 49:12). 사람이 영생을 사모하지만 세상에서의 사람의 삶이 심히 허무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하는 바이다. 성경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시편 90편에 보면,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 . .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90:3-5, 10).


이스라엘 왕 솔로몬도 전도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세상의 헛됨을 증거하기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라고 했다(전 1:2-14).


세상의 삶이 헛된 까닭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시편에서 모세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증거하기를,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했다(시 90:8, 9 ). 바울 사도도 로마서에서 증거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는데(롬 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은 사람이 본래의 영광스런 삶의 행복을 상실하고 수고와 슬픔의 허무한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이처럼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영생을 사모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26,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가 율법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질문하셨다. 율법은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이든지 구약 성경의 핵심인 모세 오경의 율법을 가리킨다. 그 율법사는 율법의 내용을 두 가지로 잘 요약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첫번째 내용은 신명기 6:5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성품'이라는 원어(네페쉬)는 '영혼, 또는 목숨'이라는 말이다. 두번째 내용은 레위기 19:18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구약의 모든 율법들, 특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열 가지 계명들(십계명)의 요약이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 혹은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만을 합당하게 섬기라는 명령이며, 무신론과 불경건과 이방 종교들과 우상숭배와 마리아 숭배와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와 과학, 물질, 쾌락 등의 현대인들의 우상들을 정죄한다.


제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순결성을 명하는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한다.


제3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신앙 고백이나 찬송이나 기도나 글이나 행동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들을 진실하게 사용해야 하고 위선적이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속적인 열린 예배와 현대기독교음악이 이 계명에 위반된다고 본다.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한 날을 구별하여 그 날을 온전하게 지키라는 명령이다. 6일 동안은 힘써 세상의 일들을 할 것이지만, 제7일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안식하며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다. 안식일에는 모든 세속적 직업의 일들과 매매와 오락 등을 금할 것이다.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에서 질서를 지키라는 명령이며 동일한 원리가 교회와 사회에도 적용된다.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살인뿐 아니라, 미움과 구타와 폭력 등도 금하며 오늘날 편만한 사회악인 낙태와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안락사를 정죄한다.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정조를 존중하라는 명령이며, 온갖 종류의 음란, 매매춘, 음란물 보급, 부당한 이혼과 재혼 등을 정죄한다.


제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성실한 노동의 댓가로 얻는 이득을 인정하나 온갖 종류의 부정당한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정죄한다.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명령이며, 온갖 종류의 거짓말, 특히 거짓말로 남의 명예와 평판을 해치는 행위를 정죄한다.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아내나 소유)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서 음욕과 물욕 등을 다 정죄한다. 이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죄가 아니고 마음에 품은 악도 죄임을 보인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가 율법들을 잘 요약하였다고 인정하신 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깊은 뜻이 있다. 영생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인가? 율법을 행하면 우리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


율법을 행하는 것이 곧 의(義)요 그것이 생명이 된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기본적 원리이다. 신명기 5:32, 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실상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아무도 없다. 로마서 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증거대로 인류의 초기 역사와 특히 이스라엘 역사가 증거한다. 인간의 경험도 자신의 본성이 심히 부패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특히 예레미야는 인간의 부패성과 무능력을 잘 증거하였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율법사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시는 깊은 뜻이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심으로 행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 율법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 율법 속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 제도는 죄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의 피흘려 죽으심을 통해 죄사함을 받을 것을 암시하였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사할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는 제사장이 속죄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바르거나 부을 때 죄인의 죄가 사하여진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려 하는 자들은 제사 제도에서 예표된 메시야의 속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 믿음이 그들에게 의와 구원과 영생이 될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도덕법 즉 십계명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의식법 즉 제사 제도를 통해 의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경에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다'고 표현한 의미이다(계 13:8).


이와 같이, 우리는 구원과 의와 영생을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주의 말씀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제사 제도에 암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자들, 아니 이미 얻은 자들에게도 율법을 행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의무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고 의는 생명이다. 영생을 얻을 자, 아니 이미 얻은 자는 이제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 율법을 저버리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암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확실히 믿자. 우리 모두는 다 속죄 신앙에 굳게 서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고전 1 :30).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 :24). 여기에 영생을 얻는 길이 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 특히 십계명에 나타난 그의 도덕적 명령들을 힘써 행하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자. 사랑은 거룩하며 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친절하다(고전 13:4).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자.



29-37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율법사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었고, 예수님은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었느냐?'고 반문하셨다. 율법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 질문은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당장에 실천할 그의 의지를 보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람해야 하는가? 이 때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었다.


[30-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나 되지만 여리고는 해면보다 390미터나 낮다고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험했다. 그런 길은 강도들이 악한 일들을 행하기에 적합하였다. 강도들은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그 때 우연히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 자기도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자기 일이 바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면서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또한 한 레위인도 우연히 그 곳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도 앞에 간 제사장과 같이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비록 종교적 직분과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지만, 그 죽게 된 자를 돌보아주고 살려주려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33-35]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렀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반쯤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는 자이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그 강도 만난자 자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이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이웃을 긍휼히 여김에서 시작된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그의 상처에 부었다. 그것은 상처를 소독하고 부드럽게 하는 응급조치의 방법이었다. 그리고는 그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또 그는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 사마리아인은 긍휼한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였다.


[36, 37]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 즉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중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시면서 그 율법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 비유는 무슨 교훈을 주는가? 첫째로,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랑을 보인다. 이전에 이 비유를 읽었을 때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이 이상하게 여겨졌었다. 율법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마지막 질문은 '이 세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가 아니었다. 그의 질문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었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가 바로 '강도 만난 자'이며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사마리아인 같은 자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암시하시고 있는 것 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사마리아인 같은 우리의 그 이웃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8:48에 보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이라는 비난을 받으셨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따돌림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우리, 사탄과 악령들에게 강도 만난 것과 같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의 생명과 몸을 우리를 위해 다 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내어 주시는 사랑이었다. 그것은 그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신 참 사랑이었다. 여기에 이 비유의 깊은 뜻이 있다. 이 비유는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히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는 사랑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고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모범이 된다.


둘째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이웃이라면, 우리가 먼저 그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여기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또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말씀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다(롬 14:7, 8). 심지어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주 예수 그리스도--전통 사본]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썼다(고전 16:22).


셋째로, 이 비유는 우리도 주님처럼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즉 예수님의 하신 것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종교적 직분이나 특권만 구하거나 가지지 말고,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을지라도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마리아인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육적, 물질적 도움만을 주는 사랑이 아니고 또한 영적 도움을 주는 사랑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해주는 사랑이었다. 이것은 영혼 구원의 전도의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웃의 영혼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다 드려서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8-42절, 마르다와 마리아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의 집이 있었던 마을은 요한복음에 보면 베다니이었다(11:1). 그 집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 있었다. 마르다를 '한 여자'(귀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소녀(코라시온)는 아니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이었는지, 그가 결혼하였는지, 그의 남편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요 11:11) 나사로의 나이는 아마 30살 전후이었을 것이다. 또 부모나 다른 가족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 아마 그들 3남매만 함께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었다. 마르다는 자기 집이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아마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고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더욱이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가량의 값이 나가는 지극히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이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한 것은 마르다의 믿음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다. 요한복음은 증거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다(요 1:9-11).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도 그들이 다 영접을 받으리라고 예상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0:10, 11).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영접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곳곳에 다니며 전도할 때 믿지 않는 자들은 그를 핍박하였으나 믿는 자들은 그를 영접하였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했을 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주 장사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듣고 믿었고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바울 일행에게 간청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했다. 그 여자의 강권함으로 바울 일행은 그 여자의 집에 며칠 간 머물었었다(행 16:12-15). 빌립보 옥의 간수도 밤에 바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자기와 그 집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바울 일행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행 16:33, 34). 영접은 믿음의 표시이다.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발 아래'라는 말은 '발 가까이에, 발 곁에'라는 뜻이다. 아마 언니이었던 마르다도 믿음이 깊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마지막 날에 오라비가 부활할 것을 믿었다(요 11:24). 그러나 아마 동생이었던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보다 신앙심이 더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주의 말씀 듣기를 사모했고 또, 아마도 얼마 후에, 값비싼 향유를 주께 부었다.


[40, 41]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식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세상 일이 다 그러하지만, 여자들이 부엌에서 음식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바쁘고 힘든 일이며 마음 쓰이는 일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부엌 일도 그러하다면, 옛날에는 얼마나 더 하였으며 더욱이 손님들이 집안에 들어와 있는 형편에서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스럽게 말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이런 불평스런 말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실상,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 같은 외적인 봉사의 일이 결코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런 외적 봉사의 일을 선한 것으로 장려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소돔성의 죄악의 하나가 식물의 풍족함 중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였었다(겔 16:49).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마지막 심판의 한 조건이 주의 지극히 작은 제자 한 사람에게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표현하셨다(마 25:31-46).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교훈했고(약 1:27),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가르쳤다(요일 3:17).


외적 봉사의 일들 즉 물질적 봉사의 일들은 결코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믿음의 귀한 표현이요 선한 열매들이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교훈대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들을 해야 하며 더욱 믿음의 가족들에게 그러해야 한다(갈 6:10).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구절은 전통 사본에 의하면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다'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는 많은 일들과 한 가지 일을 대조시키시며 이 한 가지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크게 여기신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은 왜 그렇게 가장 중요한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했다(롬 10:13-15). 또 그는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했다(딤후 3:15).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요 3:16; 6:39, 40).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부탁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19, 20).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유언적 부탁을 하기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다(딤후 4:1-5).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다른 많은 봉사의 일들은 육의 양식과 같다. 육의 양식은 먹어도 결국 죽는 양식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육의 양식을 먹으나 그 양식을 아무리 먹어도 육체는 점점 늙어가고 죽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그 양식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우리의 지식과 인격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그 양식을 섭취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더욱 새로워지고 활기를 얻는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4:4). 또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딤후 3 :16, 1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하여지며 겸손해지며 선한 인격자가 되어 간다. 또 시편 1편에는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다(시 1:1-3).



결론적으로, 38절부터 4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그를 믿지 않았고 영접지 않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박대하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담긴 증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그를 환영하고 그와 그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을 영접하자.


둘째로, 마르다가 주님을 대접한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거나 불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 대한 물질적 봉사와 대접을 선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장려하신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3).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선한 일들을 많이 힘써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예수님의 강조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은 모든 선한 일들 가운데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그 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그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관계된다. 그 일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에 관계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일들보다도 그 일을 귀히 여기시고 우리가 그 일에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주께서는 '한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공적 집회 시간에 참석하여 성경적 설교를 듣고 배우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성경 강해서와 건전한 신앙 서적들을 읽기를 힘쓰자. 그것들이 다 주의 발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4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기를 힘쓰셨다. 예수님께 기도가 필요하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된 그 분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했겠는가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기도하셨다. 그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조용한 곳에 나가 기도하셨고 늦은 밤에도 기도하셨으며 또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하셨다. 여기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다. 신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시시 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연약성과 죄악성을 가진 인간뿐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하겠는가! 많은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모범이 된다. 그 기도는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의 것을 구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또 부차적으로 우리가 먼저 요긴한 것들을 기도하고 또 부차적인 것들을 기도해야 함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건강이나 물질 문제나 자녀 문제, 사업 문제 등을 구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의 기도를 부정하시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것들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여'라는 말이 전통 사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 세계를 초월하여 계신다. 주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보호자이시며 공급자이심을 나타낸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낳고 보호하고 의식주의 문제를 책임지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와 같으시다. 세상 만물은 그에게 의해 창조되었고 우리의 존재도 그에게서 근원하였으며, 그는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존하시고 특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영육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우신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31, 3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번째 내용은 '주[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말은 원문에 '주[당신]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이름과 명예를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인생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렸고 지금도 욕을 돌리고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지만,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인간들은 지극히 불결하고 음란하며 불의하고 사악하며 거짓되다. 피조물인 인간들은 도무지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기도의 내용은 피조 세계를 통해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본래대로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범죄치 않음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공의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두번째 내용은 '주[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것이다. '나라이'라는 말은 원문에 '주[당신]의 나라가'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교의 주제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범죄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피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피조물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회복이다. 이것을 신앙의 선조들은 '은혜의 나라'와 '영광의 나라'라는 두 가지 말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면, 영적인 면을 표현한다. 그것은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들의 거듭남(중생)과 구원으로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비록 불완전한 모습으로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단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란 복음 전파의 일, 그것을 통한 영혼 구원의 일,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참된 교회들이 설립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의 나라를 가리킨다. 영광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의 면, 영육의 면을 표현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나라요 의와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나라요 진선미(眞善美)의 완성의 나라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 나라에 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의와 진리와 순수한 복음과 보수 정통적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그 나라에서 기쁨과 위로와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10 -12).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전통 사본에는, 이 기도의 내용 다음에 '주[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내용과 같다(6: 10). 이것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세번째 내용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을 가리킬 것이다. 혹은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성도들을 통해, 교회들을 통해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성경책 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한 가지의 사실이지만(엡 2:8), 거기에는 세 가지의 단계들 혹은 요소들이 있다.


구원의 첫번째 단계는 죄로 죽었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공로로 인하여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重生)과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와 양자(養子)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구원의 두번째 단계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거룩의 열매를 맺고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롬 6:22). 이것이 성화(聖化)의 단계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과 온전함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죄를 떠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지만, 교회적으로는 교회가 배교(背敎)와 타협하지 않고 그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들이 이러한 순수함을 지키는 교회이다.


구원의 세번째 단계는 신자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영광스러운 몸이 되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면과 동일하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의 모든 교훈들을 순종함으로써 점점 더 거룩하여진다. 또 교회들도 성경의 모든 교훈들을 따르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생각들과 방법들을 다 버릴 때 참되고 순수한 교회가 된다.


덧붙여,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복음 전파를 통하여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힘써 순종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어서 속히 이 일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죄 가운데 죽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누가 전도의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칠 것인가?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이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힘써 드려야 한다.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내용으로 먼저 하나님의 일들 즉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우리 자신의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네번째 내용은 우리 자신에 관한 것으로서 우선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영육의 것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영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이 날마다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양식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적인 활기를 얻는다. 또한, 우리에게는 육의 양식도 날마다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신다. 천지 만물을 먹이시고 기르시고 보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드신 인생을 어찌 돌보시지 않겠는가? 인간은 범죄한 후 이마에 땀을 흘리며 성실히 일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얻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거나 하나님 앞에 범죄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여 주실 것이다.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다섯번째 내용은 죄사함에 관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고 영적 죽음을 가져왔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해물이다. 범죄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죄사함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몸에 침투한 병균을 죽이거나 제거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범한 실수와 죄들을 하나님께 용서함 받는 것이다. 물론, 대속의 진리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을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는 다 용서되었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와 죄는 여전히 죄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여전히 회개에 대해 말씀한다. 본문에 기록된 주의 교훈도 그러하다.


주께서 우리의 죄사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기 원한다면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는 우리가 일흔번씩 일곱이라도 서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물론, 용서는 상대방이 진정으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주께서는 또 가르치시기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지 않는 자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다(마 18:17). 잠언에는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같으니라"고 말씀했다(잠 17:15; 25:2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여섯번째 내용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과 악에서 건짐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다. 전통 사본에 보면, 끝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다. 앞에 말한 죄사함도 중요하지만,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죄악이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 육신의 건강이나 병이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파산이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 수 있고 물질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도 물질도 복으로 약속하셨다(출 15:26; 신 28장).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큰 문제는 죄 문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고, 혹시 악에 빠졌다면 즉시 하나님의 구출하심을 얻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생활을 본받아 기도하기를 힘쓰자.


첫째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일들을 기도하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위해,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과 또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굳게 믿고 신앙 생활을 바르게 잘 하는 것과,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하여 순수한 교회가 되는 것과, 또 나아가 이 구원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요긴한 것들, 즉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과 시험에 빠지지 않음과 악에서 건짐을 얻음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되, 먼저 이러한 요긴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자!



5-13절, 기도의 응답


본문은 기도에 관하여 몇 가지 교훈을 준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것은 마치 은행에 많은 돈을 저축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 쓰는 것과도 같다. 우리 하나님은 지극히 부요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며 그의 선하심을 따라 풍성히 받는다.


또 기도는 인생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그의 존재를 더욱 체험하고 실감하게 된다.


[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주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다른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고자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다. 주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간청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밤중에 무엇을 빌려달라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그 사람이 친구의 청을 들어준 것은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끈질기게 졸랐기 때문이었다. '강청함'이라는 원어(아나이데이아)는 '끈질지게 조름'이라는 뜻이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몇 번 아뢰다가 중단하지 말고 끈질기게 조르듯이 아뢰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시며 하나님께는 밤중과 같이 불편하여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기 힘든 때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며, 특히 강청의 기도, 간청의 기도를 드리면 더욱 잘 들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청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간청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해진다. 즉 자기 부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유익이다. 또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굳세게 의지하고 확신하게 된다. 이것도 큰 유익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를 금방 들어주시지 않고 우리가 간청의 기도를 올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시때때로 간청의 기도를 올리자.


[9,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기도하면 응답을 얻는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반복적이고 점점 강해지는 뜻을 가진 이 말씀은 끈질긴 기도를 묘사한다.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이라는 말씀은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1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이유와 근거로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가, 두드리는 이에게'라는 표현은 기도하는 당사자가 응답을 받는 것이며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기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며 증거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을 굳세게 의지하는 자는 힘있게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을 의심하는 자는 약하게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전혀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는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정비례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자.


[11-13]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해 좋은 것으로 응답하심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사람의 예를 사용하신다. 전통 사본에는 '생선을 달라 하면'이라는 말 앞에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소원하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자가 없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없다. 사람은 비록 악하지만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하신데,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좋은 것들을 주시겠는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주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영 곧 성령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 중에 가장 귀한 복임을 증거한다. 성령을 주시는 것이 왜 가장 귀한 복인가? 성령(聖靈)은 거룩한 영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는 죄와 불결을 버리고 떠나게 되며 거룩한 생각과 거룩한 감정과 거룩한 말과 거룩한 행동을 사모하고 힘쓰고 가지게 된다.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주신다. 성령은 또한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얻으며 영생에 이른다. 성령은 또한 '보혜사'(파라클레토스) 곧 위로의 영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힘과 기쁨과 용기와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미 성령을 주셨다. 우리는 비록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지만 성경을 통해 그가 우리 속에 계심을 깨닫는다(롬 8:9; 고전 12:13).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직접 하나님의 거룩과 진리와 생명과 위로를 공급받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직접 동거(同居)하며 동행(同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가장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것들도 다 주실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외의 좋은 것들을 다 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3절까지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교훈이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기도하되 간청의 기도를 하라고 주께서는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케 하시고 믿음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며 복된 길이다.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도하기를 힘쓰자!



14-26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귀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귀신은 악한 영 곧 타락한 천사이다. 이 귀신이 한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벙어리 되게 하였다. 모든 질병이 다 그렇지는 않다고 판단되지만, 많은 질병들이 영적, 정신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런 경우 그 병은 자신의 영의 결함 때문이든지, 아니면 다른 영 곧 귀신의 영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본사건에서와 같이 귀신은 어떤 사람의 뇌신경에 나쁜 영향을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언어 기능이 마비된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벙어리 귀신을 내쫓아 주셨다. 그래서 그 벙어리는 말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심리 치료 방법이나 반복적 언어 훈련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된 것이었다. 이런 류의 병의 치료는 정신적 치료 즉 병든 영의 치료나 악한 귀신을 내쫓음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치료요 회복이다. 특히 귀신을 내쫓는 일은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방법으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마 17:21, 전통사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사실은 그가 천사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영계와 물질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15, 16]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다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기적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근거가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은 예수님의 기적이 놀라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도리어 그를 비난하기를, '저가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다. 마태복음 10:25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바알세불'이라는 뜻은 '더러운 것의 주, 우상들의 주'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구약 성경에 나오는(왕하 1:23)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과 같은 말이라고 보았는데(KJV), 그것은 '파리들의 주' 곧 귀찮은 파리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신이라는 뜻이다. 여하튼 그것은 '귀신들의 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악한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는데도, 그를 믿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귀신들의 왕'이라고 비난하다니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악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인할 만한 기적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미 믿을 만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 이제도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는 표적을 보이셨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신기한 일들을 구한 것이었다. 그것은 믿음의 근거를 구한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호기심을 위한 요청이라고 보여진다. 참으로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표적들을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믿고자 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표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충분하다.


[17-19]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단순히 저희의 말에 대해 대답하시지 않고 저희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주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는 일반적 진리를 들어 말씀하셨다. '분쟁한다'는 원어는 '나뉜다'는 뜻이다. 한 가정이든지 한 나라든지 분쟁하여 둘로 나뉘어 있다면 그 가정이나 그 나라는 견고하고 평안하게 세워질 수 없고 무너지고 황폐하여질 것이다. 주께서는 이런 일반적 진리를 들어, 사탄이 스스로 나뉜다면 어떻게 그 나라가 서겠는가라고 반문하셨다.


또 그는, 만일 내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렇게 하는가라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행하였었다(눅 9:49). 유대인들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 했던 비난과 같은 비난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으나 예수님께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바른 판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0-22]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의 행위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한 것임을 증거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어떤 이들의 잘못된 말들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나타낸다고 증거하셨다. 이스라엘 사회 즉 구약 교회는 심히 타락하여 사탄과 악령들의 지배를 받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두워진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세력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힘이 있는 천사들이다. 그들이 무장을 하고 자기 집과 같은 사회와 교회를 지킬 때에는 자기들의 소유물들이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강한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이기실 때 그들의 무장을 빼앗으시고 그들의 소유물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비난하는 저 악한 자들에 대해 두 가지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저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실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정말 위하는 자들이라면 그와 함께할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뜻이 예수님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임이 드러난다. 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구원하여 모으시려는 사람들을 흐트러뜨리는 자들에 불과하다. 여기에 '헤치다'는 말은 '흩어지게 하다'는 뜻이다. 주님과 함께 영혼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 운동의 방해자들이요 오히려 교회를 흩어지게 하는 나쁜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24-26]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둘째로, 저들이 만일 예수님을 참으로 영접지 않는다면 저들의 마지막 형편은 더 나빠질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사회 곧 구약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과 악령들이 일시적으로 내쫓김을 받았지만, 만일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하고 순종치 않으면 사탄과 악령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들어와 역사하게 되어 그 마지막 형편은 예수님의 사역을 경험하기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의 은혜를 어느 정도 체험하고도 그를 진심으로 영접하지 않고 순종치 않는 개인이나 교회의 마지막 형편은 주님을 알기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으셨음을 바로 알자. 그는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하셨다. 바로 여기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성을 보장하셨다. 예수님이 과연 그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의 행위들로 증거하신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상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자. 사탄과 악령들의 권세는 제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참된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사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죄에게 종노릇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의와 참된 거룩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며 주와 함께하고 주와 함께 영혼들을 모으자.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흩어지게 하는 자니라." 우리는 결코 주를 반대하는 자가 되거나 주께서 구원하시려는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생각과 뜻과 소원에 있어서 주와 함께하고 주와 연합하는 자들이 되자!



27, 28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됨


[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무리 중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모친을 높였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젖을 빨리우며 키웠다니 참으로 여인 중에 복된 여인이로구나'라고 생각하며 칭찬한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과의 혈육적 관계를 자랑하며 뽑낸다.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가지는 이 혈육적 관계를 중시하여 그 여인이 무죄(無罪)하다든지 승천(昇天)했다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 사역과 중보 사역에 참여한다든지 성도들의 기도를 듣는다는 등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그릇되이 높였다.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혈육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수없이 많은 말들과 글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가치는 그렇게 크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말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곧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은 인생의 죄를 밝히 드러내고 정죄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증거하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한다. 그것은 구원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이미 그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은 자로서 그 말씀을 또한 성실히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행함이 있을 때 진실한 믿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 진짜 믿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 곧 진실한 성도를 참 행복자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심지어 예수님의 혈육관계보다 복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혈육관계나 가문을 자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성심으로 행하는 것을 참 복인 줄 알아야 한다.



29-32절,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


[29, 30]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묘사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악 때문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데서 나타났다.


이 악한 세대는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지만, 그것은 진심으로 믿으려는 동기에서가 아니고 단지 호기심에서일 뿐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기를 믿으려는 무리들을 위하여 많은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셨었다. 그러나 이 악한 세대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들을 구하는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오직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가장 큰 표적이기 때문이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신 후에 제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지막 표적이 될 것이다. 믿는 자들은 이 표적으로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31, 3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어서 자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신 자이며 또 요나보다 더 크신 자임을 증거하셨다. 그것은 인간적 교만이나 자랑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한 인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요 사실 그대로인 것이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요나보다 더 크신 주님이시다.


그러나 솔로몬 때에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하여 먼 곳에서 찾아왔었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지만, 이 악한 세대는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지 않고 요나보다 더 크신 이인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려 하지 않으니 얼마나 악한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 때에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증거하신다. 과연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 저들이 다 부활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한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33-36절, 마음 속에 빛이 밝아야 함


[33-3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등불은 사람과 사물을 비추는 곳에 두며 비추는 역할을 한다. 주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의 심신에 적용하신다. 그는 사람의 육신의 눈이 그 몸의 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고 육신의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으니 눈을 등불에 비유할 만하다.


주께서는, 이와 같이 또한 사람의 속에 있는 빛, 즉 심안(心眼), 영안(靈眼), 내면적인 눈, 내면적 지식, 사상, 생각과 깨달음은 인간의 마음에 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등불이 밝은 자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으나, 그 등불이 어두운 자는 방황하며 그릇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마음 속의 빛은 진리의 지식,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과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아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바로 참된 성경 지식이다. 이 지식은 사람의 앞길을 밝히는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성경 지식을 통해 영안이 점점 밝아지도록 힘써야 한다.



결론적으로, 27절부터 36절까지의 내용은 첫째 혈육관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되다는 것과 둘째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이시라는 것과 셋째 우리는 마음 속의 빛이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은 결국 한가지의 교훈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지식, 구원의 지식,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그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참된 행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행복자가 되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롭고 선하신 뜻을 행하고자 힘쓰고 있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자인가? 저는 여러분이 모두 다 참 행복자가 되기를 원한다. 또 이 복된 진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이들에게 또 믿지 않는 모든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원한다.



37-54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심


[37, 38]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예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청을 거절치 않고 받아들이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그런데 그는 음식을 드시기 전에 손을 씻는 당시의 관습을 지키지 않으셨다. '손을 씻는다'는 원어(밥티죠)는 '세례주다'는 바로 그 단어인데, 이 말은 '물에 담그다'는 뜻 외에 '씻다, 깨끗게 하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주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당시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무시했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인간의 전통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백히 가르쳐 주신 것들만 권위 있게 여겨야 한다. 성경에 명백히 가르치시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전통적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다.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께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필요한 것들을 교훈하셨다. 진리의 교훈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유익하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훈할 때도 성경에 가르친 대로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신 6:7) 어디에서든지 해야 한다. 전도할 때도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소개하고 증거하기를 힘써야 한다(딤후 4:2).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 구별만 강조하였고 내면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위생적인 일이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내면적 성결을 소유하거나 힘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외적 불결은 몸에만 해롭지만, 마음의 불결 곧 죄는 영육을 멸망시킨다. 참된 종교, 참된 경건은 바로 이 내면성의 문제이다.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고 착한 것이 중요하다.


[40, 41]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주께서는 사람이 내면적 성결 없이 외적 성결만을 중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영육의 존재이다. 사람의 밖에 보이는 부분은 육체요,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은 영 혹은 영혼이라고 불리운다. 사람의 겉이 아무리 아름답고 단정해 보여도 그 속이 깨끗하고 바르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자요 가치 없는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내면적 문제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주께서는 그 해결책으로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안에 있는 것'이라는 원어(타 에논타)는 직역하면 '네 안에 있는 것'이지만, 옛날 영어성경은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의역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속에 탐심이 가득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줄 모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탐심의 죄를 회개하고 그 증거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구제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규모 없이 살거나 절제 없이 살아서 가난해진 자들 또는 근면하지 않고 게을러서 가난해진 자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규모 있고 절제 있게 또 근면하게 살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은 성경에 강조하여 교훈한 바이므로(신 15:7-11)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중요한 표시가 된다. 옛날 멸망을 당했던 소돔성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였으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줄 몰랐고 그것이 그들의 죄악의 내용 중 하나이었다(겔 16:49). 그러나 탐심을 버린 성도는 구제할 수 있다.


[42,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실천하였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서 성경에 가르치신 헌금의 주요 원리이다. 십일조는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며 물질의 소득이 다 하나님의 복인줄 알고 고백하는 표시이다. 그들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도덕성, 즉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로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 자비)과 신(信, 신실함)'이라고 표현하였다. 십일조와 내면적 도덕성은 둘 다 필요하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둘 중에 내면적 도덕성은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하다. 바리새인들이 외형적 규례를 중시하고 내면적 덕을 소홀히 한 것은 큰 죄요,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명예심과 교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것 역시 큰 죄이므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겸손히 행하는 것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23: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전통사본에는 '너희여'라는 말이 '외식자들인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되어 있다. '평토장한 무덤'은 겉모습은 깨끗하나 그 속은 더럽고 부패된 것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보기에는 경건하고 단정하였으나 그들 속에는 음란과 탐욕과 미움이 가득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내면적 성결과 단장이다.


디모데전서 2:9, 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 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45, 46]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율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말로서 율법 학자를 가리킨다. 율법사들도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패된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지기 어려운 짐들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기들은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혀 행위의 모범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말이 아니고 행함이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원하시며 그 마음 중심은 단순히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의롭고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름다운 말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선하고 의로운 행위와 삶을 원하시는 것이다.


[47, 48]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것 혹은 단장하는 것은 좋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행위와 삶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으며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 했다. 그러한 삶은 선지자들의 삶과 다르고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선조들의 삶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큰 위선이다. 매튜 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이전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을 높이면서 동일한 진리를 가지고 동일한 법칙으로 사는 현시대의 동일한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고 핍박하는 것은 큰 위선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단순히 전시대의 선지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것보다 그들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본받는 것이다.


[49-51]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구약 교회의 역사는 배교와 부패의 역사이었다.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실한 많은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었다.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뜰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의인과 선지자들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할 것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 세대가 참된 의인이시요 선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핍박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악은 인류 역사와 구약 역사의 모든 죄악들의 절정이었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사들은 합법적 교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목사들이나 신학 교수들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지식의 열쇠를 오용하였다. 그들의 지식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지식, 인격화 되지 못한 지식이므로 생명력 있는 참 지식이 되지 못하였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위선자들을 만들어 내며 종교를 부패시킬 뿐이다. 또한 신행(信行) 일치하지 않는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그런 위선은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길을 방해하고 오히려 그들을 진리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53, 54]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전통사본에는 '거기서 나오실 때에'라는 말이 '그들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실 때'라고 되어 있고, '힐문하고'라는 말 다음에 '그를 비난하기 위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37절부터 54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혹은 율법사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선이다. 그들은 내면적 성결 없이 음식 먹기 전에 손씻는 일만 강조했고 내면적 도덕성 없이 십일조 생활만 실천했다. 그들은 겸손함이 없고 명예심과 교만을 지녔고 내면적 단장 없이 겉모습만 단장했다.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바른 지식이 있었고 그들은 상당히 좋은 말들을 하는 자들이었으나 참된 인격과 삶이 없었다. 그들 속에는 탐욕과 거짓과 명예심과 교만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이율배반적인 위선자들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그런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목사들이나 기타 교회 직분자들을 반대하고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내면적 성결, 내면적 도덕성, 내면적 단장, 즉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참된 성도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내면적 악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교만과 명예심과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여러분은 정말 죄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는가?




12장: 절대적 신앙


1-12절,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많은 무리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사람들의 수보다는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앞장에 기록된 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해 책망하셨으므로, 그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는 교훈을 하실 필요가 있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를 무시하는 것 같은 것이 외식이다.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미움과 음란으로 가득한 것 같은 것이 외식이다. 외식을 '누룩'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조용히 많은 심령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외식은 누룩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며, 그래서 교회를 형식적이게 만들고 그 생명력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형식주의와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2, 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주께서는 다른 경우에 제자들이 예수께 사적으로 배운 진리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전파하라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 있다(마 10:26, 27). 그러나 여기에서는 바리새인들의 감추인 악들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감추인 악들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들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바리새인들의 악들 곧 탐심과 미움과 음란 등은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세상에 은밀한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추인 악들을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은밀하게 남을 비난하여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말고 밝은 데로 나아와 정정당당하게 충고하는 것이 옳다.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초대 교회는 핍박과 순교를 각오해야 했던 교회이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이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 죽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몸의 죽음으로 사람의 생명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 단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느냐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는 사람이 어찌 할 수 없고, 오직 심판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무엇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후에 그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악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다. 지옥은 영혼이 불의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에 던지운 부자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눅 16:23, 24). 그러한 지옥에 비하면, 몸의 죽음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단지 사람의 몸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옥의 교리는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옥에 던져 넣으시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다른 곳들에서도 지옥에 대해 확실히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29, 30,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가복음 9:43-49,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뻬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지옥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최종적으로 내리시는 공의로운 형벌이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고 두려움을 싫어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사람을 회개시킨다면 그 두려움은 유익한 것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러하다. 그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정당한 방법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유익하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장소인 지옥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에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는 확실한 사실이며 모든 죄인들은 이 사실로 인해 두려워해야 하고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려야 한다.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앗사리온은 은전인 데나리온의 16분의 1의 값이 나가는 동전의 명칭이다. 참새 한 마리의 값은 5분의 2 앗사리온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값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가치밖에 없는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존재하고 또 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원문에는 '그러나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 . .'라고 되어 있고, 전통사본에는 '세신 바 되었나니'라는 말 다음에 '그러므로'라는 말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아니하시거든 하물며 친히 택하신 성도들을 어찌 귀히 여기지 아니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많은 참새보다 귀히 여기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아시고 잊지 아니하시고 귀히 여기시니 우리는 사람들의 핍박을 두려워할 것이 없고 우리의 장래를 염려할 것이 없다.


[8, 9]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人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특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이 세상 속에서 그를 인정하고 증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필요하고 가능한 일이다. '인자가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 앞에서 저를 시인한다'는 말씀은 현재 천국에서 혹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저를 안다고 인정하실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라는 말 대신에 '내 아버지 앞에서'라고 표현되어 있다(마 10: 32, 33).


우리의 신앙고백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이다.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고백하고 간증하기를 원하신다.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말로 인자(人子)를 거역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단순히 인자(사람의 아들) 즉 한 인간으로 알고 거역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인성(人性)에 가리워져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단순히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알고 거역한다면 그는 사하심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이 때때로 드러나고 그의 하신 일이 명백히 성령으로 된 것임이 드러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곧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을 보고도 그 손길을 대항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도 그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매우 완악한 자들이요 가망이 없는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필경 하나님이 버려두신 자들일 것이다.


[11, 12]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초대 교회 시대는 예수님 믿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나라 역사에서 일제 시대와 같았고 공산 치하의 때와 같았다. 믿는 이들은 유대교 회당들에서도 심문과 핍박을 받고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그러할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 일을 예견하시면서,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혹은 무엇을 변명할 지 또는 무엇을 말할 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때에 마땅히 할 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당하는 이런 심문의 경우들을 통해 무지한 종교인들에게 그리고 세상의 위정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외식을 조심해야 한다. 외식은 속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진실과 반대된다. 이런 외식은 누룩과 같아서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교회 안에 이런 외식자들이 활개를 친다면 그런 교회는 심히 어지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라 하더라도 외식할 때 그를 면전에서 책망하였었다(갈 2:11-14).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외식하지 말고 또 외식하는 자를 보면 충고하고 권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행동하자!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몸만 죽일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시험에 빠진다. 잠언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는 말씀이 있다(잠 29:25).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외식하게 되고 또 심지어 변절자도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그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이었다. 그것이 순교를 각오했던 성도들의 믿음이었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의 공적인 고백이요 간증이다. 이러한 공적인 고백의 시작이 바로 세례 의식이다. 또 작은 것이지만 식사 기도하는 것이나 길 갈 때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나 전철에서나 직장에서 성경책을 읽는 것 등도 그러하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를 시인할 때 주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들이 되자!



13-21절, 탐심을 물리치라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그의 형이 부모의 유산을 다 가지려 했던 것 같으므로, 이 사람의 요청은 이성적으로 정당해 보인다. 비록 장자는 두 몫을 얻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21:17), 부모의 유산은 마땅히 동생과 나누어야 했다. 형은 단지 그 유산의 3분지 2를 가져야 했다. 그런데 그의 형이 그 유산을 다 가지려고 한 것 같으니 그는 탐심을 가진 나쁜 형이었던 것 같다.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셨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산의 정당한 분배 같은 일은 예수께서 하실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그의 사명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 즉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눅 5:32; 막 1:38 ).


예수님의 사명은 오늘날 교회가 받은 사명이다.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 말씀을 성실히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스스로의 인격과 삶이 온전해지는 것 외에 특히 세상을 향해 구원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 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반 학교나 병원이나 양노원을 만들어 경영하는 것과 기타 사회적, 정치적 정의를 위한 활동들은 다 선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교회가 직접 할 일들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사명감을 따라 그런 사업들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도 행하시지 않았고 제자들에게 명하시지도 않았고 그래서 초대 교회도 힘쓰지 않았다. 교회는 오직 교회로서 수행해야 할 고유의 임무와 사명인 전도 사업에 힘써야 한다.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을 주셨다. 원문(전통사본)에는 '탐심을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되어 있다. 탐심이 우리 속에 잠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하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주님께 질문했던 그 사람의 형만 탐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질문했던 그 사람 자신도 탐심을 조심해야 했다. 탐심은 부자에게만 있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마지막에 '탐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탐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와 같다. 그것은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우리가 탐심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신의 생명뿐 아니라 또한 영적 생명과 영원한 생명에도 해당한다. 부자라고 몸도 건강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노동자라도 육신의 생명은 더 건강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더더욱 그렇다. 영생은 물질로 살 수 없는 복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리고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다.


더욱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믿음의 성장을 저해하고 믿는 자로 하여금 온갖 시험에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딤전 6:9, 10).


[16-19]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예수님은 물질적 부요가 헛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비유로 설명하셨다. 그것은 어리석은 부자의 풍년맞이의 비유다. 한 부자가 풍년을 맞았다. 그의 밭의 소출은 풍성하였다. 그는 그 풍성한 소출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비를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풍년 추수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풍성한 소출을 그 곳에 쌓아둘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셨다. 그 부자는 자신과 물질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부자는 물질만 많으면 자신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의 영혼을 그 밤에 불러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영혼 곧 우리의 목숨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렇다! 그 부자가 죽고나면 그의 쌓아놓을 많은 곡식과 열매는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그가 죽은 후에는 다른 이가 그것을 누릴 것이다. 그의 생명은 참으로 그의 소유의 넉넉함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물질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겨우 그에게 유용할 뿐이다.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결론으로,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모을 줄은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자들이 바로 이런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셨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란 어떤 자인가? 그는 물질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믿음과 감사와 사랑과 순종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가 참으로 복된 자이다. 그는 현세와 내세에 복을 얻은 자이다. 그는 영생의 복을 소유한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모은 물질적 부요는 자기의 목숨이 끊어질 때 자기에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것은 자기의 영원한 생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예수님은 세상적 일들, 물질적 일들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 세상적 일들과 물질적 일들은 영원한 생명과 직접 상관이 없다. 예수님은 오직 죄인들의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오셨다. 그것은 영육을 포함한 전인적 구원의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 육신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전도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의 사명을 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에 충실하자.


둘째로, 우리는 탐심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물질이 부요해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자는 허무하고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부요는 결코 우리를 영생케 하지 못한다. 물질의 부요는 심지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자유로이 연장시키지도 못한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육신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에 참된 유익을 주지 못할 물질에 대한 탐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자.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지 못할 허무한 것들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게 하자. 우리는 탐심을 조심하고 경계하자.


셋째로, 우리는 돈이나 물질보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오직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확고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심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는 복된 자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는 자는 확실히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받고 또 확실히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요한 자들이 되자.



22-34절,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22, 23]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예수께서는 먼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단지 음식과 의복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주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수적인 것들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때마다 먹어야 살고 또 철따라 입어야 산다. 사람이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또 추운 겨울에 옷을 입지 못하면 얼어 죽는다.


사람이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는 까닭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보험회사들은 우리가 문제가 생기면 어느 정도 돈으로 공급해 주는 것뿐이지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건강을 보장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의 직장을 보장할 자도 실상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많은 기업체들이 파산하였고 많은 직장인들이 해고와 실직의 아픔을 당하였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유가 인상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감마저 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제 그 이유와 대책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는 먼저 까마귀와 백합화를 예를 들어 그것들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왜 우리가 의식주 문제를 염려치 않아도 되는 지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24-26]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먼저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자. 그 새들은 씨를 심지도 않고 곡식들을 거두지도 않으며 곡식들을 쌓아두는 저장실이나 창고도 없다. '골방'이라는 원어는 '저장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기르다'는 원어(트레포)는 '먹이다, 기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자기 백성을 삼지 아니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새들도 먹이시는데 하물며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자기 백성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우리의 생명의 기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는가? 25절의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는 말씀에서 '키'라는 원어(헬리키아)는 '키'라는 뜻도 있지만, '생명의 기간'이라는 뜻이 있으며 '한 자'라는 원어(페퀸 헤나)는 길이로는 '한 규빗' 즉 약 45센티미터를 가리키지만 시간으로는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키가 한 규빗이 큰다는 뜻보다는 생명의 기간이 조금 연장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의식주 문제를 염려한다고 우리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없으면서 무엇을 염려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며 오히려 우리의 몸만 해롭게 하는 것이다.


[27, 28]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찬가지로, 백합화들을 생각해 보자. 그 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실도 만들지 않는다.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한다'는 원어는 '수고도 아니하고 실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낫다. 자연 만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인간이 자기 지혜로 만든 것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풀들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신다면, 하물며 자기 형상대로 창조된 백성들을 어찌 입히시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가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자연 만물들을 볼 때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시시때때로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염려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주 문제를 염려해서는 안된다.


[29, 30]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식주의 염려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래의 삶의 불확실함과 불안만이 있다. 그들은 오직 모든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염려하며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섭리자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만 주지 않으시고 육신의 필요한 것들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만 주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한 것들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살며 거처할 곳이 있어야 산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세계만 창조하신 분이 아니시고 물질 세계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어찌 나 홀로 미래의 불확실함과 불안을 극복해 보려고 동분서주 하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담담히, 담대히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하심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행복에 대한 모든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없이 세속적이게 살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항하고 대적하며 사는 그것이 곧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요 이유이다. 인간이 하나님만 바로 알고 바로 섬기며 산다면 창조주 하나님 그가 인간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오직'이라는 원어(플렌)는 강한 대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의 나라'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께서는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에는 '이런 것'이 '이런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앞에서 말씀하신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구하며 살면 세상에 필요한 것들도 공급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영적인 것만 강조하시고 영적인 것으로만 만족하며 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단지, 그는 우리가 영적인 것을 가져야 영육이 복됨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육의 세계를 다 만드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영육의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육적인 것, 물질적인 것만 구하며 거기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슬퍼하시고 노여워하시고 책망하시고 진노하시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다. 그것이 본래 창조의 질서이었다.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불경건하고 음란하고 죄악된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마침내 심판하시고 멸망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고 그의 뜻을 즐거이 따르며 그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곳이다. 거기에는 죄가 없고 의만이 충만하다. 거기에는 죄의 결과인 죽음과 불행이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기쁨과 평안만이 충만한 곳이다. 천국은 한 마디로 영원한 복락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바로 그런 곳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셔서 다시 영광스런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며 인류 구원의 대 역사(歷史)이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셨다. '무리'라는 원어(포이므니온)는 '양무리'라는 뜻이다. '적은 양무리!' 그들은 세상에 비해 너무 적은 수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세상 안에서 그들은 위축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물질 만능의 시대에,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오늘 시대에 물질을 초연하며 살려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때때로 위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복되고 가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과 가치를 바로 안다면 우리는 결코 찬란하게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으로 인하여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주께서 '무서워 말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 천국에 대한 확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비롯되었다. 에베소서 1:4, 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택하신 사람들을 불러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을 주시고 그들을 의롭다 선언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의 증표요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라는 보장이다. 참된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33, 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구체적인 한 명령을 주셨다. 그것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너희 소유를 팔라'는 것은 모든 탐심을 다 버리라는 것과 같다. 재산을 자기 행복을 위해 축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성도는 이 명령에 복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탐심을 버리는 자는 이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구제의 대상은 우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다. 초대 교회는 이것을 실천하였다. 사도행전 2:44, 45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하였다. 또 고린도후서 8장, 9장은 교회에서의 헌금의 용도가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위한 것임을 증거한다(8:1-4; 9:1). 갈라디아서 6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물론, 구약성경의 십일조 규례의 모범을 따라 신약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 곧 목사와 전도사들은 세상 직업을 버리고 복음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한 자들인만큼 교회가 그들의 기본적 생활비를 공급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고린도전서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와 구제의 일에 쓰는 돈은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드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그것을 '재물을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참된 교회의 설립과 발전을 위해, 그 가운데 작은 하나의 일인 예배당 건축을 위해, 그리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사용하는 물질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것은 천국에 있는 낡지 않는 주머니에 저축해 두는 것과 같다. 여기에 성도의 물질관이 있다. 성도의 물질관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성도의 생활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천국을 위주로 생각하며 돈을 벌고 돈을 쓴다.


마지막으로, 주께서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렇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물질이 많이 들어갈수록 거기에 마음도 기울어진다. 물질과 마음은 같이 간다. 구제함 없이 이웃 사랑을 말할 수 없고 주의 일에 물질로 참여함 없이 주를 사랑하고 주의 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천국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물질을 많이 쓰다가 하나님이 계신 그 영광스런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22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의 교훈은 단순하다. 그러나 확실하고 철저하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하며,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 우리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주의 말씀대로 복종하며 실천하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천국을 위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자들이 되자!



35-48절, 예비하고 있으라


[35, 36]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기다리는 종들과 같이 예비하고 있으라고 교훈하셨다. 당시 유대 나라의 결혼식은 밤에 행해졌고 따라서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밤 늦게야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제자들이 마치 종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며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즉시 열어주려고 기다리듯이 그렇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깨어 준비하고 있는다는 것은 성실한 신앙 생활과 성실한 봉사 생활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는 주인이 결혼 예식에 참여하고 돌아오듯이 자신이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언급하셨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기는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나라이다. 교회의 소망은 전적으로 주님의 재림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언제 오시든지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실히 그를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한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께서는 자신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을 보시면 우리가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친히 띠를 띠고 우리를 자리에 앉히시고 대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어떻게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런 대접을 하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성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위로의 말씀이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유대인들은 해 질 때부터 해 뜰 때까지의 밤을 넷으로 나누어 일경, 이경, 삼경 , 사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경'은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를 가리키고 '삼경'은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를 가리킨다. 주인이 결혼식에 갔다가 늦어져 한밤중에 올지라도 종들이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복되듯이, 예수께서 사람들의 생각에 이제 안오시는가 하고 느껴질 정도로 늦게 재림하실 때라도 그를 믿고 기다리다가 그를 맞이하는 종들과 성도들은 복되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그 약속은 신실하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에 비록 그가 늦게 오신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를 믿고 따르며 그를 섬기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주께서는 자신의 다시 오심을 도적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도적의 악한 행위에 비유하신 것이 아니고, 도적이 집주인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침입하는 것에 비유하신 것이었다. 도적이 집주인이 알 수 없는 시간에 침입하듯이, 주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돌연히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가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교훈의 요지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고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 생활과 성실한 봉사 생활을 뜻한다. 주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불신앙에 떨어지거나 해이하고 나태한 자리에 떨어지지 말고,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다. 단지 그 시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고 또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가 다시 오신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성실한 신앙 생활과 성실한 봉사 생활을 함으로써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41, 42]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일반 성도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자들에게 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목사들에게 해당한다. 그들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와 같이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태도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목사와 교인들은 함께간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이 목사가 어떠하면 교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보수적인 목사에게는 보수적인 교인들이 모여들 것이며, 자유적인 목사에게는 자유적인 교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성경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씀했는데(딤후 4: 3, 4), 우리는 그런 자가 되지 말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부패되어서 교인들이 부담 없는 신앙 생활,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해이한 신앙 생활이며 세속화된 신앙 생활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다(히 10:23-25).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다 재림의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준비해야 하고 날마다 성실한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해야 한다.


[43, 44]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그는 끝까지 깨어 주님을 기다리면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목사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며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들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주의 소유를 맡게 될 것인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주께서는 자기의 충성된 종들의 충성된 사역들에 대해 결코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의 이 약속을 믿고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45, 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깨어 있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을 학대하고 먹고 마시고 취했던 종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엄히 때린다'라는 원어(디코토메세이)는 '여러 조각들로 자른다, 극히 엄한 벌을 내린다'는 뜻이다.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라'는 원어는 '그의 몫을 불신자들과 함께 주리라' 혹은 '그를 불신자들과 함께 취급하리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그 악한 종들에게 극히 엄한 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불신자들과 함께 취급하실 것이다.


[47, 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은 공정할 것이다. 불성실하고 악한 일꾼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받은 직분의 정도에 따라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자들은 잘 몰라서 행하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큰 직분을 가지고도 충성치 못한 자들은 작은 직분을 가진 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직분이 크면 책임도 크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적어도 자기의 직분에 합당하게 말과 경건과 집회 참석과 봉사와 전도 등에 있어서 일반 성도들보다 더 나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35절부터 48절까지의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재림을 암시하면서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항상 깨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실한 신앙 생활과 성실한 봉사 생활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의심하지 말고 생각지 못한 때에 도적같이 임하실 것을 알고 끝까지 기다리며 성실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복된 삶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있다. 직분자나 일반 성도나 간에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며 성실히 살아야 한다.



49-53절, 불을 던지러 오심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께서 의미하신 불은 무엇인가? 주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오셔서 하신 불의 사역이 무엇인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는 말씀은 그 불이 아직 붙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주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복음의 불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던져져서 불붙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 불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온 세상에 불붙을 것이다. 복음의 불, 성령의 불도 불이긴 하다.


그러나 주께서 여기에서 의미하신 불은 단순히 그런 불이 아니고 문맥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일어나게 될 싸움과 불화의 불을 가리켰다고 생각된다. 진리가 전파될 때 거기에는 싸움의 불이 붙는다. 복음 운동은 또한 나누는 운동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듯이, 복음은 믿음과 불신앙을 나누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나눈다. 그리고 이런 나뉨이 있을 때 거기에는 싸움과 불화가 있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 의와 불의, 성령과 악령의 싸움과 갈등이다. 이러한 싸움과 갈등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많은 경우에 핍박으로 나타난다. 이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단지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이 받으실 세례란 그가 장차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켰다. 성경 다른 곳에서도 예수께서 '세례'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신 예가 있다. 마가복음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의 답답하심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그의 인간적 마음의 고통과 더불어 그 고난을 통해 아버지의 명하신 구원의 일을 이루시려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나타낸다.


[51-53]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물론, 예수께서는 참된 화평을 주려 오셨다. 창세기 49:10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히브리어로 '실로'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안식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9:6에는 메시야를 '평강의 왕'이라고 표현하였다. 주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9). 또한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그러나 이러한 평강, 화평, 평안은 진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주려 왔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분쟁'이라는 원어는 '분할, 분열, 불화'를 뜻한다. 그것은 진리와 비진리가 화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둘을 무조건 화합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이다. 하나님과 사탄, 의와 불의는 화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면 항상 둘로 나뉘게 된다. 그 진리를 따르는 자와 그 진리를 거부하는 자로 나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따르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7:13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구별하셨다. 요한복음 3:36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구별된다. 요한복음 6:66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그를 떠나가는 자들이 나뉜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죄에 종된 자들과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구별된다. 마가복음 16:16에 보면, 복음을 믿고 구원받는 자들과 믿지 않고 정죄받는 자들이 나뉜다. 사도행전 28:23-25에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강론한 바울의 말을 믿는 자들도 있고 믿지 않는 자들도 있어서 서로 맞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그것이 복음의 성격이다. 복음은 분열과 나뉨을 준다.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 그것은 때때로 집안 식구들을 둘로 나누며 신앙 문제로 서로 갈등하게 만든다. 그 나뉨과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다. 52절과 53절에 '분쟁하리라'는 원어는 '나뉘리라, 불화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갈등은 가정 복음화의 시작이요 과정이다. 복음의 불이 마침내 온 가족을 구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가족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며 영원히 나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도행전 16:31, "[바울이] 가로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54-59절, 이 시대를 분별하라


[54-55]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사람들은 삶의 경험이 많을수록 날씨와 기후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점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이 그 시대를 분별치 못함을 책망하셨다. '분변하다'는 원어(도키마조)는 '증거하다, 시험하다, 분별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이 시대를 분별하라는 주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아로 온 것을 깨닫고 확인하고 믿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은 그 당시 이미 확실한 많은 증거로 증거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옥 중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했던 세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요한복음 20:30, 3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거리를 찾았다. 누가복음 11:53, 54,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 시대를 분별치 못한다고 책망하셨고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옳은 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 내용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하고 죄를 떠나야 하며, 또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많은 확실한 증거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바른 진리이다.


[58, 59]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아직 우리의 목숨이 끝나기 전에, 아직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죄값을 완전히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지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49절부터 5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생각했다. 첫째로, 복음은 분쟁과 나뉨을 일으키는 불과 같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편에 서야 한다. 싸움과 갈등이 있지만, 믿고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시대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깨닫자. 그는 믿을 만한 확실하고 많은 증거들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그 증거들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마음을 닫고 있지만 않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직 길에 있을 때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아직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아직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참으로 복음으로 말미암는 분쟁의 불길 속에서 믿음의 편에 섰는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여러분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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