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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 14 졸업40주년 영주지역 수학여행 감상문
지난해부터 대고14 동창회 집행부는 졸업 40주년 행사에 대한 구상을 계획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지난해 1월 14일경 서울 김장진이가 경영하는 두부마을에서 장소를 추천해달라는 전종욱 총무의 제안에 나는 여주와 풍기를 추천했다. 그게 본격적인 역사문화탐방의 시발점이 된 것같다.
2011년 수원화성 탐방에 42명이 참가 한적도 있지만, 지난해 6월 여주지역(영릉, 신륵사, 고달사지, 파사성) 역사문화탐방을 대구 서울 동창회에서 동시에 62명(가족 포함) 참가하였다. 그때도 비교적 성공리에 끝나고 대고14산악회의 산신제를 통하여 동기생의 안전과 무사무탈을 기원했었다.
올해는 집행부를 다시 바꾸어 동기생 중 탁월한 리더쉽과 신망이 두터운 역대회장 중 서울에서는 방태조회장, 대구에서는 양근식회장이 다시 컴백했다.
올해 2월초에 수원지역의 대고 14소풍팀(유인성, 오주한, 박익희, 전종욱, 이순락)이 영주지역 코스를 답사하여 무섬마을, 정도전생가,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을 최종확정하여 집행부의 재가를 얻고 추진해왔다.
숙소는 영주 청소년수련관을 결정하고 해설사는 소수서원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근무하는 이용극 3회 선배, 영남대객원교수이며 영남불교미술원 원장인 6회의 김재원박사, 동기생인 이종문, 이상필에게 의뢰하기로 했다.
입학 43주년 졸업 40주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지만 언제나 고교동창생들은 삶의 중심축에 있고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만남이 시작이고 끝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 만남이 좋을 때는 인생이 서로 꽃피고 나쁜 만남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6.25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우리는 조국의 가난과 폐허로 부모님들의 엄청난 고생과 희생으로 자라났다. 초.중을 거치며 모두 2차인 대구에서 제일 좋은(?) 대구고에 입학했다. 再修 .3修하고 입학한 친구와 대고에는 못다니겠다며 중퇴한 친구들이 있다. 그 중에 정치인 중에 김부겸은 후자에 속한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못 바꾼다는 진리 앞에 서게 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우리는 지나온 과거의 발자취를 회상하게 된다.
아무튼 소풍날이 가까워지자 수원의 대고소풍팀은 몇 차례 회합을 갖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성공적인 수학여행을 구실로 영주로 답사를 다시 한 번 더 가고 지혜를 모았다. 전종욱총무가 나에게 축시를 하나 지어오라고 했다.
대규모 야외행사의 성공여부는 첫째는 날씨가 좋아야 한다. 둘째는 참가인원이 많아야 하고 셋째는 진행이 매끄럽고 짜임새가 있어 참가자들의 호응이 좋아야한다. 이를 위해서 각 반별로 담당을 정해 연락도 하고 참가를 독려하고 회비와 찬조금을 모아야했다. 아마도 이번 행사를 위해 전종욱 총무가 엄청 수고한 덕택에 와인컵까지 구해졌다.
이번 120명(가족 포함) 가량 참가한 수학여행에 졸업 후 한 번도 못 만난 동창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내 경우에는 경남지방에 사는 조태호, 천기욱, 강현석 등이 영주수학 여행이 아니면 영원히 다시 못 만났을 것 같다. 영어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 란 말이 있듯 눈앞에 없으니 먼 친척처럼 이웃보다도 못한 경우이다. 그런데 이웃마저 서로 모르고 지내는 요즈음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세태가 이상하고 웃긴다.
여태까지는 성공지상주의로 빨리빨리에 매몰되고 돈과 재물을 중시하여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고유한 美風良俗과 仁義禮智信을 등한히 하여 성장위주로 살다보니 친구도 잘 못만나고 처자식 부양과 회사일에 충실히 해온 쌍팔년(단기 2333+1955) 우리들의 세대이다.
지나고 보니 인생무상을 느끼고 점점 추억으로 회귀한다. 이제 마누라도 혼자 놀라하고 자식은 출가를 하고 내 인생은 무엇일까?
인생 60세에 영육이 건강하고, 가정이 있고, 아직 직업이 있고,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터가 수원인 나는 대구로 내려와 아내를 대동하고 출발지인 모교로 향했다. 동기생을 만난다는 설렘과 반가움에 새벽부터 깨어나 마치 소풍날 일찍 깬 소년같이 내 마음은 푸르렀다.
이석대에게 전화를 하니 가는 중이라고 한다. 도착할때가 되어도 안왔다. 그때 전화가 왔다. 문자를 보냈는데...그 친구가 염치가 없어 안 오는구나 싶었다
이석대가 보낸 문자 전문
여러가지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그렇게 좋아해주고
배려해주고 서원해줘서 너무 고맙소
그런데 아무리 용기를 내어 옛 친구를 두루 만나보고
싶었지만
40년동안 전화도 한번 안하고
지낸 내가 무슨 체면으로
이제사 불쑥
나타나겠는가 싶어
도저히 못가겟네.
그러니
얼굴은 보면 알겠지만 이름은 가물거리는 친구들
세월흘러
이제 모두 환갑이 되어버린 친구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모두 뜻깊고 유익한 여행되길 빕니다
멀리 있지만
형제처럼 든든하고
고마운 친구 박익희
잘다녀오소
고맙소
오기로 한 친구들이 타자 모교인 대구고에서 출발 버스도 영주를 향해서 시동을 걸었다.
홍병각 총무의 김밥과 물한병을 공급받고 양회장의 인사가 있고 난 다음 나는 특별하게 모신 김재원박사를 소개했다.
불교와 역사문화의 전설적인 김재원 박사가 시간상 조금 남으니 가현리 불상과 암각화를 보고 가자고 권하여 수행비서역을 맡은 나는 양근식 회장에게 재가를 얻었다.
큰길가 바위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은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얼마나 남자아이를 낳고싶었으면 부처님의 코와 눈을 쪼아 갈아마셨겠는가? 옆에 청동기시대의 뜻모를 문양이 새겨져있는 임각화가 뚜렷이 남아있는데 연대를 알 수가 없다. 서울 친구들은 불행이도 여기는 못갔다.
다음 간곳은 물섬마을 수도리인데 지형이 태극모양으로 회룡포를 닮았는데 이곳은 양반촌이라고 했다. 긴 S자 모양의 나무 외다리가 유일한 통로였고 모래사장이 너무 좋아서 시간되면 어항에 된장풀어 물고기 잡아서 도리뱅뱅이 만들어 소주한잔 하면 좋은 곳이리라. 큰 규모의 한옥집에서 점심으로 먹은 소고기국밥은 고기 건더기는 없고 황소도강탕이였다.
이용극 선배님께서 어떻게 소개를 하였기에 영주시문화관광과장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고 인삼비누 선물세트를 가져왔다.
그 다음 코스는 부석사이다. 태백산의 끝 소백산의 시작인 부석사는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일주문에는 태백산부석사로 표기되어있고 , 부석사 안에서 봉황산부석사로 되어있고, 내려올때 보니 일주문 안쪽에는 해동화엄종종찰 이라 표기되어있다.
화엄사상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으로,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법칙이다. 요즈음 잣대로 말하면 전세계 만물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부석사는 고려시대 목조건물인 無量壽殿(국보 18호)과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등 국보와 보물이 가장 많은 사찰이다.
안양루에 걸린 浮石寺 현판은 이승만대통령이 쓰고 無量壽殿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 지역으로 피난 올 때 썼다고 한다.
安養樓는 극락세계를 의미한다는 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다. 불교는 너무 오묘하고 너무 무겁고 어렵게 느껴진다. 다만 산중의 스님의 생활이 부럽기는 하다. 산 좋고 물 좋은 풍광속에서 근심걱정 없는 구도자의 삶일 것 같다. 남의 떡이 더 맛있고 커 보이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김 박사님의 안내로 무량수전 안에서 소조여래좌상 부처님(국보45호)을 바라보니 크기가 엄청 크고 우견편단의 금빛 법의가 아름답다. 북서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乾坐巽向(건좌손향)부처님이 안치된 뒤쪽도 김 박사의 안내로 돌아다보는 기회를 가졌다. 기둥에만 주심포를 올려쌓은 건축법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당당했다. 9개의 배흘림기둥은 거대하지만 안정감이 있어보였다. 닷집은 색을 칠하지 않아 의외로 소박하고 불상 뒤의 광배는 불꽃이 타는 듯 부처님의 가피가 활활 타오는 것 같았다.
부처님이 바라보는 방향이 석굴암 본존불, 갓바위 부처님, 창녕의 관룡사 용선대 석불과 같은 방향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보는 방향의 무량수전 밖에는 3층석탑이 비보탑으로 서있는데 그 앞의 석물조형물은 옥개석만 있어 어찌 보면 삐닥한 반항아가 모자를 삐뚤게 쓴 멋스러움이 있는데 알고보니 중간의 석등 부분이 없어져서 그랬다.
조사당(국보 19호)은 정면 3칸, 측면1칸 건물로 단순했으나 의상스님이 심었다는 골담초가 유리와 철망 속에 갇혀서 보호를 받고 있어 답답해 보였다.
구법을 위해 신라에서 온 의상 스님을 짝사랑한 중국인 선묘랑자의 의상을 향한 거룩하고 무한한 러브스토리에 넋을 잃고 들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랑자는 부석사의 100평 크기의 돌을 들었다가 놓으니 그 당시 신라를 반대하고 싫어하던 저항세력의 유민들이 모두 도망을 가거나 의상스님의 대덕에 교화되어 순한 신라백성으로 되었을 것 같았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3국이 땅따먹기로 치열한 쟁패를 벌일 때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나라가 문제였다. 당나라는 백제땅에 웅진도독부, 신라땅에 계림도독부, 고구려땅에는 안동도후부를 설치했으며 부석사 창건 1년전에 나당전쟁을 치루었다. 신라는 당군을 축출과 교통의 요충인 소백산 죽령을 확보하여 지역의 안정과 백성의 안심시켜 내나라 백성으로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유학을 다녀온 낙산사에 있던 의상을 불러 이곳에 사찰을 짓게했다.
오를 때 일주문 편액에는 태백산부석사로 걸려있어 이상했으나 이곳이 태백산의 끝자락이고 소백산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福善之地의 땅인가 보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올 때마다 사찰의 규모가 커지고 자연과의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옛 건축물은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를 기본개념으로 지었기에 자연과 건축물이 보기에 편하고 조화롭다. 그런데 지금의 건축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고 최대, 최고, 최상을 추구하여 자연과 조화를 안이루고 있어 인간의 교만과 기술을 자랑한다. 사고가 났다하면 대형 참사이다.
또한 안양루에서 본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소백산 아래 영주땅은 산첩첩 福善地로 순흥면 풍기땅에 언제 다시 오리오. 2년전 이곳에서 본 저녁노을이 너무 황홀하여 빨리 떨어지는 해가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버스운전기사가 청소년수련관까지 못간다고 했지만 지난번에 봐둔 나의 눈썰미로 버스를 곧장 영주청소년수련관까지 안내했다.
이곳에 특별이벤트를 위해 미리 온 레인보우 악단의 정동현이가 반갑게 맞는다. 강당에 들어가는 무대가 그런대로 차려지고 대구고 14회 졸업40주년 수학여행 현수막이 멋지게 걸려있다.
어떤 모임이든 회원은 참가할 의무가 있고 회부납부의 의무가 있다. 그 다음이 권리주장이고 기여할 책임이 있다. 사실 동기회 회장과 총무는 많은 수고를 하지만 때로는 힘들고 절망을 하기도 한다. 시거든 떫지나 말지 참가도 하지 않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뒷말이 많아 애쓰는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식순에 따라 행사를 진행하는데 최성해 동양대총장(11회 선배)가 난데없이 나타나 또 나는 의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선배님은 나와 2개의 포럼을 같이한 적이 있는 분이다. 아무튼 후배가 영주를 왔다고 직접 찾아와 격려와 선물을 주고 가는 최 선배님의 마음씨가 염치와 도리를 아는 선비답다.
나는 마음으로 쓴 졸작인 축시를 낭독하고 돌아오니 친구들과 동기생 부인들이 칭찬을 하기에 몸둘바를 몰랐다.
뷔페식 식사를 하고 전문 사회자의 진행으로 몸도 풀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각 반별 대표가 노래와 장기자랑을 하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섹스폰은 이제 대중화되었는지 박회국이 부인도 잘도 불엇다. 부산에서 섹스폰 공연을 마치고 온 윤상진이 혜성처럼 나타나 최헌의 ‘남자의 마음’을 부르고 404번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계속 불러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언제 홀연히 사라지고 없어서 걱정이 조금 되었다.
청소년수련관의 알바생의 시간제재로 밤 12시 30분경 끝내고 3-7반방에서 옛날의 회상하는 추억여행은 계속되었다고 입심 좋고 사람 좋은 배성광은 죽령고개에서 고백하여 말마다 요절복통하게 만들었다.
각반 별로 취침한 것은 고교수학 여행 이후에 처음이다. 3반은 10여명이 동침을 했다. 새벽 5시에 고운 새소리에 잠을 깨어 일어나 7명 가량이 청소년수련원 뒷편 솔밭길을 산책하며 소백산 아래 풍기의 새벽공기를 마셨다.
20여명이 선비촌을 단체로 구경하고 7시경 소수서원 입구에서 이용극선배의 해설로 소수소원에 대한 의미와 유학의 가치에 대해 경청을 하며 들었다.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숙수사 주지가 도저히 더이상 못해먹겠다며 면역을 조건으로 절을 포기하여 이곳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열었다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안향. 주세붕, 퇴계 등 우리나라의 유교의 명맥은 계속 이어져오는 현재진행형이다. 인의예지신을 바탕으로 수신제가하고 충과 효를 알아야 인간의 도리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야 우리들의 공동체인 가정, 사회, 국가가 유지되지 않겠는가?
금성대군과 단종복위 운동에 대한 기밀 누설 얘기와 권력을 향한 형제도 조카도 처단하는 무섭고 잔인한 역사는 생략한다.
아침은 어제밤에 과음으로 속을 달래려고 해장국이 나온 것 같다.
나는 김재원박사님과 동행하며 죽령고개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마음에 새겼다. 영남의 선비가 입신출세를 위해 과거길은 문경새재길은 택하고 죽령고개는 피했다고 한다. 죽령을 넘으면 바로 단양이다. 단양은 충주와 가까워 홍수가 났을때 큰물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물자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죽령고개는 보부상과 소와 말을 이용하여 국내 최고 689m 높이의 재이다. 교남제일관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김박사는 영남의 다른 이름이 교남이라고 설명했다.
죽령재누각에서 방태조 부인은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혀주니 이 또한 부창부수의 헌신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건너편 죽령주막에 막걸리 한잔 마시러 간 친구가 올 생각을 아니한다. 몸이 약한 아내는 겨우 죽령고개를 올라왔다. 양근식 부인과 아내를 먼저 내려보내고 나도 지남철에 끌리듯 주막에 가니 이헌재가 술과 안주를 자꾸만 주문한다. 노오란 조껍데기술은 목마른 남자들이 마시기에 주저함이 없다. 알고보니 죽령주막의 사장이 헌재의 막내 외삼촌이라며 성공한 생질인 이헌재가 크게 한턱을 내는 중이었다.
산나물전과 두부김치는 금방 금방 먹어치웠다. 시원한 산바람에 우리들의 술과 우정이 익어 갈 즈음 양근식 회장은 술값의 반은 동창회에서 부담하라고 총무에게 지시를 하고 버스를 2대를 죽령고개마루로 불러올렸다.
이 일을 우째노? 힘들어 하는 부인들을 위해 버스 1대를 올리자고 방태조회장에게 제안하여 거절당하여 많은 부인들과 친구들이 내려갔는데. 제일 늦게 올라 온 박진순 부부도 가버렸는데...교통사고로 6개월 간 입원했다가 3주전에 퇴원했다고 한 김 박사에게도 미안하고....하지만 어쩌랴 이것도 운수인 것을~~~
역시 양근식의 융통성있는 결정이 환영을 받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우린 먹거리와 배성광이의 원맨쇼에 빠져들었다.
버스를 타고 간 우리가 먼저 도착하여 미안하고 염치없었지만 인생은 역시 복이 있어야하나 보다.
소백산 한우 비빔밤과 소주로 배를 채우고 우리는 대고교가를 제창하며 모두가 손을 잡고 윤회악수로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서울가는 차에 타고 아내는 대구차에 보냈다.
마음이 그냥 짠하고 미안했다. 영주의 특산품이라는 정도너츠에 잠시 세워 도너츠 맛을 보고 구입하게 배려했다.
생강을 재료로 만든 찹쌀도너츠가 지역특산물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과여 명실상부 명불허전으로 맛이 좋았다.
이번 고교졸업 40주년를 반추하며 그려볼 때 아내들이 남편이 다닌 학교와 친구들에게 신뢰와 공감을 1박 2일 짧지만 긴 감동의 수학여행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며 그날 나의 마음을 담아 쓴 축시를 남긴다. 졸업 50주년에도 이멤버! 리멤버! 이상수 동기의 건배사가 가슴에 남는다.
2014 졸업 40주년 대고14 영주지역 수학여행 축시
운명이 된 대고14 친구야
–박익희-
1971 춘삼월
까까머리 청운의 꿈을 안고 생성된 인연은
쏜 화살 같은 세월로
멈춤도
숨김도
주저함도 없이 흘렀네
졸업 40년의 세월
얼마나 잘 살았느냐 묻는다면
인생 육십 궤적에
처자식 빼고
진짜 친구가 몇이나 되느냐로 되묻는다.
내 인생
오늘처럼 즐거운 소풍 길에
몇 명의 길동무가 왔느냐로 결정된다.
운명이 된 반가운 대고14 친구야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았던
친구의 호출에 한달음에 달려와
얼굴 보며 웃고 떠들면서
대포 잔 기울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 인생 멋진 삶이었다 말하리라
인연 따라 이루는
수연무작(隨緣無作)의 이치를
이제사 알았네.
이제사 알았네.
만날 때 마다 기쁨으로
술잔마다 안녕을 담아
더 진하게
더 참되게
동성상응(同聲相應)하자
반가운 대고14 친구야!
너와 나
우리의 인생을
소중한 만남을 우정으로 버무려
세상에 향기 나는 빛과 희망의 모임으로 거듭나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우리가 되어보자
마음이 부자인 친구가 되어보자
靑馬의 기운으로
나의 마음에
너의 마음에
우리들의 마음에
귀하고 사라지지 않는
신의, 협동, 창의의 교훈을 새기는
대고14 친구로 남아보자
생명의 신비 봄꽃보다
뜨거운 여름날 녹음보다
화려한 가을단풍보다
순결한 겨울눈꽃보다
더 아름다운 우정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의지하는
불멸의 우정으로 남으리라
운명이 된 대고14 친구야
붕정만리(鵬程萬里)길
오래오래 영원한 대고14 친구야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신의성지(信以成之)로
좋은 만남으로 인향만리(人香萬里) 하리라
박익희 두손모음
첫댓글 아무래도 내가 대충이라도 기록해야 할 것 같아 대고졸업 40주년 수학여행기 마구 써서 졸고를 올린다. 용서 바란다
행사 당일 서울에 일이 있어 그 다음날에나 참석했더니먼 자네의 글을 보니 아쉬움이 샘 솟듯...... 죽령 주막에서 성광이의 구수한 입담처럼 50주년에는 싱싱한 몸으로 진한 한 잔의 술을 넘겨 보세. 집행부, 참석자 모두 모두 수고 억수로 했구 10년 뒤엔 아침부터 꼭 보자. 웃음이 넘치는 시간들을 그동안 보내시게들~~~~~~ 참, 수학여행 후기 참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