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기해박해 (己亥迫害) 헌종5년 서기 1839년 (순원왕후,이정희,성직자3분,정하상,유진길의 참수) 5. 병오박해 (丙午迫害) 헌종12년 서기 1846년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6. 병인박해 (丙寅迫害) 고종3년 서기 1866년 (흥선대원군, 병인양요,8천-2만여명 순교)
| ||
영 조 |
|
탕평책 |
사도세자 |
|
임오사건, 홍봉한 ,김구주 (흑산도) |
정 조 |
을사추조 적발사건 신해박해 주문모 신부 입국 |
황사영,강완숙,동정부부,정약종, 백정출신 황일광 알렉시스 1800년 6월 28일 정조 제위 34년만에 승하하심 |
순조/11살 정순왕후 |
신유박해 1807 1월10일 박해령 바포 |
김대비,오가작동법,주문모신부,권철신,이가환,정약종 동정부부 황사영,강완숙,이경도(가를로)........ |
헌종8살 헌종5년/12년 |
기해박해 병오박해 |
앵베르주교,모방 샤스땅 신부 김대건 신부,현석문 가를로 |
철종 |
|
은언군의 (강화도령) |
고종 |
병인 대 박해 |
홍선 대원군 이하응/ 베르뇌 주교.... |
◈원주 - 배티 성지, 배론 성지, 풍수원 성당
◈청주 - 연풍 성지
◈대전 - 성거산 줄무덤, 솔뫼, 무명 순교자 묘, 해미 성지
◈전주 - 나바위 성지, 전동 성당, 풍남문, 치명자산, 전부 숲정이,
◈대구 - 한티 성지, 대구 관덕정 등
◈부산 - 울산 장대벌, 언양 성당, 살티 김영제 베드로 묘
◈배티, 신나무골, 이선희 엘리사벳 묘, 한티, 부산 오륜대,
수영 장대벌, 태종대, 김범우 묘, 천호 성지
◈배티, 배론, 연풍, 성거산, 해미, 치명자산, 풍남문, 전동성당
◈제주 피정 및 성지 순례
◈배티, 배론,연풍,신나무골,이선희 엘리사벳묘,한티,대구 관덕정
◈나바위,여산동헌,천호,치명사산,전동성당,풍남문,전주 숲정이◈공세리,구합덕,솔뫼,이존창생가,해미,미리내,죽산 이진이터
◈수리치골,공주황새바위,나바위,치명자산,전동성당,전주숲정이
천호 성지, 여산 동헌, 여산 숲정이
◈제주관덕정, 정난주 마리아 묘, 황사평 묘, 라파엘호 표착지
◈공세리, 구합덕, 솔뫼, 최경환 생가터, 공주 황새바위
◈여산, 나바위, 천호, 치명자산, 전동성당, 전주 숲정이
◈신천동, 신나무골, 이선희 엘리사벳, 한티
◈제주관덕정, 정난주 마리아 묘, 황사평 묘, 라파엘호 표착지
◈담배골, 은이 공소, 골배마실, 미리내, 죽산 이진이터, 윤유일 묘
◈ 배 론 :
◈ 성거산 :
◈ 연 풍 :
연풍성지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루까)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매입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매년 2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함께 순교 현양비가 건립돼 있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제관을 비롯한 기념관 건립이 진행되었다
나바위 성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김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
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킬로미터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여산 동헌 성지
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 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으 가진 '솔뫼'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은 1946년에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기념비를 세웠고 생가 터를 매입했으며 성인의 동상과 탑이 건립됐다. 탄생 장소와 생가 터에는 아직도 300여 년의 연륜을 지닌 소나무들이 무성하고 오른편 숲 속에는 김 신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솔뫼의 역사를 굽어보았던 소나무들이 30여 그루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있는 우물터에는 아직도 지하수가 솟아나고 있다.
공세리성당
한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창고가 있던 곳이다.
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안장돼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행적이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은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위치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원주-제천 간의 탁사정(濯사亭)은 배론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하나이다.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3천3백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여진다.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신태보(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을 이룬 당사자들이다.
한편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754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 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 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는다.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鐘三, 1817-1866년)이 살던 묘재가 있다. 이 곳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종삼 성인과 그 부친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흐른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원교이나 어려서 종숙부인 남상교 슬하에 아들이 없자 그에게 양자로 갔다. 남상교가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충주 목사 등을 역임하게 되자 남종삼은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부패된 관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국가 지정 기념물 제288호로 지정돼 있는 전동 성당은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유항검과 동정 부부 기념상 그리고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기념 동상도 볼 수 있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구합덕 본당의 전신은 양촌 성당(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인데 1890년에 설립, 초대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 1899년 현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에 준공된 것으로 제7대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가 6․25때 납치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현재 성당구내에 있는 페랭 신부의 묘소에는 그의 유해는 없이 유물만이 묻혀 있다.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을까. 그래도 죽음은 모면하여 급기야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구나. 30여 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 없건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 다 어디로 가 버렸기에 하나도 볼 수 없던 말인가!"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 시초부터 끝까지 장엄한 신앙 고백의 피를 이어받았다. 조선 땅에서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권상연은 공주에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고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1784년 권일신으로부터 영세 입교한 후 충청도 지방을 전교할 때 공주 지역은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보령, 진잠, 유구, 직산, 천안, 공주, 비인,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전라도의 전주, 광주, 경기도의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들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왔고 이들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 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됐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최인주가 슬하에 둔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는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 후 다시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 보낸다. 1839년 최경환은 가족 및 교우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구산성지(龜山聖地)는?
김 성우(안토니오)聖人의 고향(故鄕)이고 묘소(墓所)가 있는 곳으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 입니다.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이곳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聖地(성지)입니다.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 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산은 한강변 미사리 조정 경기장 옆에 위치해 있으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200여 년 동난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서울에서 불과 20분 거리 내에 있으며, 시원스레 뚫려있는 강변도로와 중부고속도로, 구리 - 판교 고속도로를 이용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이 구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구산 성지가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해도 카페촌으로 유명한 미사리와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거기!"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 - 10번지에 위치한 구산 성지는 한국성인 103위성인 중 71번째 나오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하여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성지라는 데서 교회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신앙의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입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群波)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집(萬集), 문집(文集),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을 입교시켜 구산을 지금의 교우 촌으로 만들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유방제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고,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구산에서도 그 여파가 밀려와 그는 공소의 회장으로서 사학(天主學)의 괴수로 지목되어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곤장과 치도곤을 맞으며 배교 하라는 재판관의 강요에 아무런 굽힘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말로 오늘날 우리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는 그의 굳은 신앙심을 표현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성인은 다시 형조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월9일(4월29일) 그를 교수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난 시기였으며,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두어져 이곳 구산 성지에모셔졌습니다.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결국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하여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 되셨습니다.
현재 급격한 도시화의 이농현상에도 불구하고, 이 곳 구산 마을은 전통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의 얼이 살아있는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성지입니다.
이곳 구산 성지가 평화의 은혜가 충만한 이유는 성인과 순교를 모신 곳이지만 피 흘림의 순교지는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서울에서, 8인의 순교자들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후에 이곳 구산에 모셔졌습니다.
천상의 얼을 받으신 성인과 순교자들을 모신 곳이기에 그분들의 전구로 평화로움이 가득한 성지가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 성현들의 진리탐구 정신과 천주공경 신앙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내일의 후손들에게 계승발전 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현들의 업적이 지닌 경신예절의 종교적인 측면과 진리탐구의 학문적인 면을 발전시키기위하여 이곳 구산 성지에 순교 기념 성전과 기념관이 건립될 계획으로 있습니다.
▲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 상
이곳 구산성지에 세워진 성모상은 구산성지와 구산성당 초대신부(1979-1984)이며 성모님에게 특별한 신심을 갖고 계시던 故 길 홍균(이냐시오 1931-1988)신부님이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님의 모습을 당시 서울 대학교 미대학장이신 김세중(프란치스꼬)화백에게 작품을 의뢰,김세중 화백이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작품입니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손에 지시봉을 들고 계시는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기리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중한 성모상입니다.
순교자의미
<죽음도 생명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39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협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를 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FRANCISCO -XAVIER
-한국에서는 '방지거 사베리오 동방의 사도'라 부름.
1541년 인도 고아지방에 상륙. 인도, 마락카, 세일론등 각지에 카톨릭의 씨를 뿌렸다.
이후, 1549년에는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 일본 땅에 천주교의 시작을 열어주었다.
이후, 명나라에 전교하자 중국에 건너갔으나 불행히도 병사하시고 품었던 큰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동방의 사도 .
그 후 일본에서는 계속 입국하여 전교하는 열성적인 전교신부들의 노력으로
1559년에는 신학교를 설립하고 1605년 경에는 신자수가 75만명에 달할 만큼
발전하였으며, 한편 중국에서는 명의 신종(神宗)때 마태오 릿치(Matteo-Ricci)
신부가 북경에 들어와 교회를 설림한 후(1601년) 10년간의 노력으로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같은 대감도 있었다.
(이씨 조선,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그리고 선조 초에 해당하는 셈 이었다)
1. 이땅에 처음 발을디딘 신부
1593년 12월 27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거느린
군인들을 위해 파견된 포르투칼인 세스페데스(cespedes) 군종신부 였다.
최초로 이땅에 발을 디딘 신부이나 한국 교회를 위해 남긴것은 하나도 없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간 한국인은 약5만명이며 포로수용소에서 2,000여명이
천주교에 입교였고 그 중 21명이 순교, 순교자중 9명은 일본 복자 205명중에
당당히 포함되어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것입니다." (야고 2.17)
2. 신앙의 빛 (한국가톨릭의 시작)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서
40일간 머무르는 동안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로부터 그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아마도 이땅에 초석이 되라는 뜻에서....)
하느님의 복음이 이땅에 처음 선포된 것은 이승훈(베드로)가 교리책, 십자가,
성화, 로사리오...... 그 밖에 귀중한 성물을 갖고 옴으로써 시작된다.
이승훈은 이벽.권일신에게(요한세자,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이벽으로부터 당대 대학자 정약용은 세례자 요한)으로
그의 형 정약종은(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또한 당시 작은 공동체 모임이 잘 이루어져 명동에 있던중인계급 출신인 김범우
집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정조9년) 당시 형조에게 발각이어 모두들 잡혔다.
당시 잡혀간 대부분이 양반이어서 훈방 조치 되었으나 역관이었던 김범우만이
고문(태형)끝에 충청도로 귀향갔다가 귀향하던 길에 옥고로 숨을 거두었으니
비록 작은 규모였으나 한국 천주교에 최초로 가해진 박해이며 이를 일컬어
"을사 추조 적발(乙巳 秋曹摘發 事件)" 사건이라 한다 .<추조:관아 형조벼슬>
3. 가성직 제도의 시작 (한국 가톨릭의 박해)
이승훈은 북경에서 주교 신부들이 미사를 주례하고 고해성사를 행하는 것을 보고
주교와 신부가 없는 이땅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자신과 유항검, 최창현, 이단원
등 몇몇 사람을 신부로 뽑아 가성직 제도를 만들고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도 행했다
참으로 어리석고 우수운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1787년 - 1789년)
교리 연구중 미심쩍은 생각을 품게된 그들은 일단 성무집행을 중지한뒤, 그 당시
북경 주귁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하게된다.(유항검)
1790년 북경으로부터 회답은"세례성사 외 다른 성사를 집행할 수없다"
그래서 그들은 가성직제도를 폐지하고 이 땅에 성직자를 모시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리석고 무지에서 나온 가성직 제도는 그들이
얼마나 신앙에 굶주렸음을 알것갖다.....
4. 신해박해 (정조15년 서기1791년)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인점.
둘째, 당파 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이다.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지역 양반이었던 교우 윤지충(바오로) 사건
으로 잘 알수있다.
유교 전통에 의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바쳐야함은
천민까지도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윤지충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 야고보는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천주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르려했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그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관가에서 알게되자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사실을 알고 바오로 와 야고보는
충남 땅으로 피신할수 있었다
윤지충 집을 수색하던 관헌들은 본인들을 찾지 못하자 윤지충의 작은 아버지를 잡아
가두었다.
모진 고문속에 작은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을듯고 윤지충과 권상현은 관가에 나가
자수하였다.
당대 최고재공은 남인들의 보호를 위하여 사형 명령을 내렸고 정조 또한
사형을 명했다 사형취소 칙사를 보냈으나 이미 둘은 순교한 뒤였다
그해가 바로 1791년 12월 8일
전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바로 정조15년인 서기 1791년의 일이다.)
5.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정약종,최인길,최창헌 등)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중국 소주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품행이 단정하고,온순하였다
나이가 차자 결혼을 하었으나 3년만에 부인이 자식없이 사망하였다.
이를안 주교님께서 그의 품행을 보고 추천 함으로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설립된 북경신학교 학업을마치고 제1회 졸럽생으로 신부가되었다.
1794년 12월 주신부는 동지사 틈에 끼여 간교우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을
만나서 23일 밤중에 역부차림으로 얼어붙은 압록강 얼음을 타고서 무사히
입국에 성공했다.
서울에 도착한 주신부는 역관 출신 최인길(마티아)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며
성무집행을 하였으나 그때 배교자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을 관헌에
고발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를 미리알고 야고보 신부님은 무사히 최인길 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님은 강완숙 골롬바 집에 머물게 된다 (양반집 딸).
강완숙 골롬바는 홍지영의 후처로 살다가 이혼한 뒤 였다
강완숙은 그의 시어머니와 본처의 아들 홍지철도 강완숙을 따라 함께살고 있었다.
강완숙이 과부라는 사실 때문에 검문을 피해 성무집행을 할수있게되었다.(6여년 동안)
한편, 지황과 윤유일은 체포된 뒤 고문끝에도 주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고
1795년 6월 25일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최인길 역시 장살로 순교함)
주신부는 자신 대문에 박해 당한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으금부로가
자수를 하였고 새남터에서 칼을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심.(군문효수)
당시 주신부과 초대 여회장(강완숙 골롬바) 크게 활약하던 당시 천주교 신자수는
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홍필주와 시어머니를 입교시킴.
6. 신유대박해 (순조1년 서기1801년 - 1802 1년)
(초대 교회지도자들의 순교)
정조가 24년간의 재위끝에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대통을 잇게된 분이 순조였다.
그러나, 그는 열한살의 어린나이어서 궁중에서 가장 어른은 경주 이씨 가문의
김대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됨으로써 천주교회사의 피비린내나는 박해가 시작된다.
또한 조정에는 남인, 북인, 소론, 노론 등의 당파 싸움이 치열하였다.
김대비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의 정식호칭은 정순왕후로서 영조의 계비로서 열다섯살때 입궁한 분이었다.
순조에게\는 계증조모에 해당하는 분이다.
그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대권을 장악하고 5년간의 수렴정치를 시행하였으며
그동안 어린 군주의 후견인으로 정치계에 영향을 미쳤다.
영조말 1762년에 임오사건이라 하여 영조가 유일한 뒤주속에 재왕으로 알려진
사도세자를 참살한 일이 생김으로써 당쟁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당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 시파에 속한 분이었다.
김구주는 바로 홍봉한을 제거하려고 공작하다 오히려 화를 입어 김상로는 죽음을
당하고 자신은 흑산도로 년간의 귀양끝에 겨우 복귀의 은사를 입게 되었으나,
나주에 옮겨와서 궁벽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바로 그의 여동생이 정순왕후는 벽파와 손을잡고 그 반대파인 시파를 몰아 내려고 했다.
그때 마침 시파를 이루고 있는 남인 계통에 천주교 신자나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대비는 그점을 이용해서 1801년 10월, 이른바 사학
"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한다.......". 등의 반역죄인으로 다스려 오가 작통법
(다섯집씩 반을 만들어 그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관에 고발하도록 한 제도)
을 실시해서 뿌리째 없애려고 하였다. (사학엄금 서울이나 시골 할것없이)
이로 인하여 전국에 300여명이 순교하게 되는 대박해였다.
대표적인 순교자는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안, 최창현,황사영 등이 바로 10월 8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베여 죽이고 이가환, 권철신은 감옥에서 죽었다.
기타 많은 분들이 순교와 생명을 바쳤다.
주신부는 자기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희생된다고 생각하여 1801년 4월 24일
의금부에 놨 31일 노량진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효수 당하였다.
이 박해는 지방까지 퍼졌는데 특히 전라도 박해는 극심했다.
특히할 사항은 이순희 루갈다 동정부부 (치명자산) 순교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는 서로 동정을 지키기로 약속하고
1797년에 결혼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의 주례>
4년 동안의 동정생활을 마치고
요한은 전주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이 루갈다는 전주 옥중 생활중 20세의 청춘으로 사형되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던 그들은 한국 수도자들의
모범이라 할수 있겠다. (또한 조 베드로 동정부부도 1819년 5월 21일에 순교했다.)
그 외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순교자 중에는 왕족들도 있었는데.
왕족 이경도(가를로)의 아우 이경연(바오로)도 1827년 5월 4일에 전주감옥에서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참다운 진리를 위해 파스칼은 말했다.
"진리는 우리에게 신념을 줄 뿐 아니라 진리를 구한다는 자체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다."
독일 문학가 괴테도 적절한 진리를 말하는 데는 두가지 방법이있다.
민중에게는 늘 공공연히, 왕에게는 늘 비밀로 말하는 것이다.
7. 정해교난 (순조27년 서기1827년)
정해교난이란 순조27년 음력 2월부터 5월말까지 전,후 넉달에 걸친 교회박해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 박해는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는 나오지도 않으니, 그만큼
이 박해에 대한 인식이 적고 또 알려져 있지 못한 박해이다.
1826년에 일본정부는 우리 나Ç 엄중한 천주교도 탄압정책
밑에서 허덕이던 천주교도들 가운데 6명이 배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도망하였으니
이 사건으로부터 정해박해는 시작된다.
이 교난의 특생은
첫째, 시간적으로 비교적 단시간에 종식되었다는 점,
둘째, 중앙정부의 직접적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
셋째, 중앙정부가 사형선고의 집행을 가급적, 천연시킨 점,
넷째, 검거된 수에 비해 순교자의 수가 많지 않은 점,
다섯째, 전국적인 것이 아니라 전라도와 기타 일부에 한해졌다는 점 이다.
정해교난 당시 정계는 순조의 건강이 좋지 않아 바로 정해년 초 (2월 9일)에
세자'대'가 대리청정케된 때로써 종래 30년간이나 내려오던 안동 김씨인
김조순의 세도가 무너지고 그대신 세자의 장인인 풍양 조씨 출신인 조만영의
세도 정치가 등장하게 되면서 김씨와 조씨의 세력 투쟁이 음양으로 격심한
때였다.
그런데, 정해박해가 일어나게된 동기는 1815년 을해박해 후 천주교도 탄압의
손길을 늦추고 있었던 당국자들에게 새로운 탄압의 자극을 준 것은 일본이다.
배교자의 비율이 어느 박해때 보다 많았던것이 특징인 것.
4개월간의 박해가 1827년î 검거 소동은 없어졌다.
8. 기해박해 (헌종5년 서기 1839년)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 )
1834년 재위 34년 만에 순조가 돌아가시고 불과 8세의 어린 몸으로 왕위에 오른
분이 바로 헌종이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 순조비였던 순원왕후의 수렴정치가 시작되었고, 처참한
박해가 시작된 것은 1839년 이지연이 집권하면서 부텨였으며 이 때 바로 79위
복자중 70명의 순교 복자를 낳게 되었다.
그만큼 박해는 계획적이리 만큼 엄하고 잔인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기해 박해라 하여 반드시 기해년(1839년)에 벌어진 것은 아니다.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여년에 걸친 박해이다.
헌종 5년에 우의정 이지연을 중심으로 대박해가 착수케 되는데 이때 소위
묘당회의가 있었다. 순원왕후 김대비를 모시고 어전회의가 열렸을때,
좌포장 남헌교가 사교금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우의정 이지연이 이를
저지하여 엄벌을 내세웠다.
그 결과, 김대비는 '사학을 일삼고 있는 천주교인들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울뿐 아니라 온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라고
명을내렸고 양력4월20일에 정식으로 박해 법령시 천하또한, 박해령이 내린 후
최초로 순교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정 쁘로따시오이다.
그는 1839년 4월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견디다못해 배교를 함으로써
풀려났으나, 즉시 뉘우치고 스스로 관가에 출두하여 배교를 취소하고 처벌을
요구 하기도했다.
또한
15세의 어린나이에 순교한 복자 이정희 발바라,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고아의
몸이었으나 열심한 교우였던 그의 아주머니 순교자 이 막달레나와 이 발바라의
훈도로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다 그만 검거되어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비위생적인 감방에서 그만 염병이 옮아 1주일동안 병고에 시달리다
귀천하였다.
기해 박해때 순교하신 세분의 성직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가
순교하였다.
순교하신 세분의 성직자는 군문효수의 선고를 받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집행하였다. 20여일이 지난후에 삼성산에 모셔졌고 명동성당(1901년)을 거쳐
지금은 양화진 성당에 모셔져있다.
1839년 9월 21일 3분의 성직자가 순교하신 다음날 정하상,유진길 참수 당하심
9. 흥선 대원군과 병인 박해 (고종3년 1866년)
병인 박해란 고종3년 즉, 1866년에 벌어진 교난을 말하는 것이다.
고종8년인 1871년까지 전후 6개년간의 박해이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 수만도
2천여명이나 되며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신자 수까지 합하면 8천여명의
희생자를 낸 대 박해 사건이며 우리 교회 사상 일대 시련 이었다.
대원군 아니, 흥선 대원군 그 정식 이름은 이하응 이라는 분이다.
집권케 되는 것은 1863년 말에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게 되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나이 불과 12살에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다.
이 국왕이 바로 고종이며 국왕이 유소하매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이후
민비를 중심으로한 민씨 일파의 공작으로 양주( )로 하야( )할 때까지
전후 10년간 집권자로 행세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두가지 추측
<호감을 가졌다고 추측되는 내용>
첫 째 : 승지 남종삼과의 문답 즉 천주교회에 관해 문답할때 그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받음. (제사에 관한 문제에만 의심을.......)
둘 째 :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 대부인의 천주교 동경자였다는 사실
셋 째 : 그 유모가 일찍부터 천주교인 이었다는 사실
넷 째 : 대원군의 맏딸인 이씨부인이 천주교도였다는 그 자손들의 주장
<포악한 탄압령을 내려 8천의 생명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일반적인 사유>
선참후계 (先斬後啓)= 먼처 참하고 후에 보고하라는( 한티성지)
첫째 : 보수적이며 포악하고 잔악한 성품이 그릇된 정세를 판단한 점
둘째 : 러시아 세력 남침에 따른 외교정책의 난 문제
셋째 : 대원군의 면회 신청에 즉응하지 못했던 교회의 사정
넷째 : 유고적 양반 세력과 조 대왕대비 일파의 음모공작.
다섯째 : 청국에 있어서의 천주교 박애 운동
대원군이 후세에 가장 비난받은 이유는 천주교인의 대량 학살은 그가 교리에
대한 몰이해나 천주교에 대한 반감보다도 제정 러시아의 남침이 중요한
동기가 된다. 대체로 대원군이 천주교회측과 교섭을 가지게 된 것은 러시아
남침에 대비키위한 셈이었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초래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이 대패로 끝나자 대원군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도인의 색출은 더욱 격심해 졌다.
그런 흥선 대원군도 정계에서 물러난 후로는 점차 천주교에 대한 심경에
변화가 생겨나 그의 말년인 1896년 10월에 괼아라는 영명으로
영세할때 반대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이 땅에 정식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된 것은 정조 18년 (서기 1784년)에 입국한
주문모(야고보)신부님 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겠다.
박해로 인한 조선 자치적 교회의 시작
먼저 이승훈(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으로 영조32년(서기 1756년)에 출생하여
그의 나이 24세에 진사에 급제한 남인으로서 정약종의 매부형이었다.
그는 그의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가 영세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영세를 주었으며 조직적이면서도 최초 박해라 할 수있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후 조선교회를 설립.
당시 신부로써 활약 (가성직 제도)중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고 벼슬길에 나가
평택 현암으로 취임하였다.
신해 박해때 당국에 체포됨.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에 감동되어 교회 육성에 열을 올림.
영성체를 준비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예산으로 유배되었고 신해 박해가 일어나자
의금부에 수감되었다가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사형 당하심으로 삶을 맺는다.
"천주교에 관한 지식은 이벽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권일신이 주교로 추대되고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등 수명이 신부가 되어
성무를 맞아보며 신품권을 행사했던 일.
물론 교회 법에 어긋나는 일은 말할것도 없으나 교회적인 면에서 볼때 그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심리적 동향을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 영조,사도세자,정조,<원비>
홍국영 사건으로 인하여 (상계군의 죽음) 은언군 강화로 유배됨
그곳이 바로 폐궁이된 양제궁 이며 은언의 죽음으로 송 마리아와 신마리아와
나인중 조 씨가 입궁하여 가톨릭을 전하였고 주문모 신부님 입국전 신앙을 알게됨
주문모 신부님께 성사를 받고 주신부님 대신하여 강완숙,한신애,윤점혜가 교리를
전해주었다.
* 주문모 신부,유중철(요한),이순이(루갈다) 주 문모신부님 주례
영조 (김대비) | |||
|
|
|
|
사 도 세 자 | |||
홍국영(세도정치) |
혜빈 홍씨 |
영빈 임씨 | |
원빈 (여동생) |
정 조 |
은 언 군 |
(송마리아) |
여동생 양자 상계군(생질) |
|
상 계 군 |
(신마리아) |
전주 숲정이:이순이,유항검의 치명터
전 동 성 당:천주교인 처형하던곳,사형장,윤지충,권상현,유항검
치 명 자 산:유항검과 그의 처 유요한,이 루갈다르 비롯하여 7명 일가족 묘.
(초남이 성지근쳐 제남리에 가매장-1914년 치명자산으로 이장됨)
* 정약현,정약전,정약종,정약용
정재원
정약현,이벽의 누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다산)
| |(육회 회장)
황사영(알렉시오) ,정난주(첫째) 정철상(성 정하상,정정혜 엘리사벳,유소사)
경령군 | |||
|
| ||
|
이수광(지봉유설)
|
| |
유항검(능지처참) |
이윤하 안동권씨 (권일신의 누이) | ||
유중철 (요한)교수형 |
이순이루갈따(둘째) 유배-전주 숲정이 참수 |
베론으로(거지)-백서 1801 11/5서소문 능지처참 (어머이,이윤혜,처,아들 경한,)
* 주문모 신부,강와숙,홍필주
주문모 1794 - 유중철/이순희 주례 -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 - 최인길 - 순교
강완숙 - 양반집 서자로 - 불교 - 홍지영의 후처 - 시어머니와 의 아들 입교 -
박해가 심해지자 홍지영과 해어짐- 시어머니와 홍필주 강완숙따라
주문모 야고보 신부 광에서 6개월- 시어머니의 신앙 재확인(3일밤낮 굶고/이틀더 굶음)
신부님을 집안으로 모시고 6년여 동안 사목활동 하심-
* 주문모 신부,강와숙,홍필주
* 주문모 신부,지황,이윤일,최인길
* 정하상,유진길 조신철
1.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9)
2.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
3.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 15,34)
4. 어머니 이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 이 분은 당신의 어머니요(요한 19,27)
5. 십자가 위에서 극도의 갈증을 느끼시면서 "목마르다"(요한 19,28)
6. 이제 다 끝났다"(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루가 23,46)
경령군 | |||
|
| ||
|
이수광(지봉유설)
|
| |
유항검(능지처참) |
이윤하 안동권씨 (권일신의 누이) | ||
유중철 (요한)교수형 |
이순이루갈따(둘째) 유배-전주 숲정이참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