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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최제우 1824~1864)이 창시한 동학(동학:천도교), 소태산(박중빈 1891~1943)의 원불교등과 함께 홍암(나철 1863~ 1916)의 대종교도 근세 민족의 고난기에 생겨난 민족종교이다. 다만, 그 창시자에 대하여 대종교는 나머지 종교들과 다르다. 단군을 모시는 신앙 내지 종교는 수천 년 전부터 면면히 이어오다 고려 중기 이후 몽고의 침략과 지배로 맥이 끊겼는데 그것을 나철 대종사(大宗師)가 1909년에 약 700년 만에 다시 살려내어 일으켰다. 대종교에서는 중광(重光, 거듭 빛내다)이라고 하는데 해마다 음력 1월 15일을 대종교를 ‘거듭 빛낸 날[重光節]’로 삼아 기념한다. 따라서 대종교는 나철 대종사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 낸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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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서는 영고(迎鼓), 고구려에서는 동맹(盟), 백제에서는
교천(郊天), 동예에서는 무천(舞天), 그리고 신라와 고려에서 거창하게 벌어졌던 팔관회(八關會)같은 제천의식을 통해 단군, 곧 하느님을 모시고 기렸던 흔적이 있다. 이러다가 불교, 도교, 유교 등 외래종교가 위에서부터 젖어 내리는데다 국난을 당하자 단군은 본색을 잃고 한 동안 잊히다시피 하였지만 20세기 벽두에 시대의 부름에 따라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라고 우리 대종교인들은 그렇게 배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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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 벌교의 나주 나씨 양반 가문에 태어났다. 본 이름이 두영(斗永)이었는데 나중에 고쳐서 인영(寅永)이 되었다가 다시 철(喆)이 되었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여 스물아홉에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를 지내다 서른세 살인 1895년[고종 28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벼슬아치 자리에 연연할 마음이 없었다. 이후 1916년 구월산에서 조천할 때까지의 한살이는 오로지 항일투쟁과 종교를 통한 구국운동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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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의 구국 행적을 보려면 첫머리에는 일본의 신의를 기대하며 외교전을 펼치다 그들의 정체를 깨닫고 실망하여 의열활동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닫고는 종교에 호소하여 인간과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에 바탕한 이 세상의 근본적인 사태해결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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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께서는 나이 마흔한 살이 지난 1904년, 강진의 오기호(1863~1916), 부안의 이기(1848~1909), 최전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비밀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며 구국운동에 시동을 건다. 그리하여 을사늑약(1905) 직전인 1905년 6월에 오기호, 이기, 홍필주와 일본에 건너가 한ㆍ청ㆍ일 세 나라가 친선동맹을 맺고 착한 이웃이 되어 서로 돕자고 일본 정객들에게 호소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최초의 ‘동양평화론’이다. 나철은 일왕의 궁궐 앞에서 사흘 동안 단식 농성도 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맺는다는 소식을 듣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없애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단도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응징의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대문역 근처에서 자신을 불러 세운 백전(佰佺)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백전은 후일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전해주고 사라진다. 그러나 당시 마음을 크게 이끌지는 못했는지 나철은 받은 채로 그냥 간직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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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인 1906년, 나철은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맞서던 오카모토, 도야마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역시 별 무소용이었다. 그는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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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은 1907년 1월, 을사오적 처단을 위하여 단독이 아니라 암살단을 꾸렸다.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의치 못해 단원인 서창보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 지도(智島)에서 유배 중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에 대한 사형집행 중지와 함께 고종이 잘 한일중의 몇 안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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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특사로 풀려난 나철은 동지의 권유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마지막으로 외교전을 펼쳤다. 외교전은 여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생각지도 못한 큰 소득이 있었으니 동경에서 한 노인을 만난 것이다. 노인은 백두산의 백봉(白峯)이라는 신사가 보낸 단군교 신도 두일백 (杜一伯)이라고 하였다. 이미 단군교가 작게나마 교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철은 그에게서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받았으며 단군교 입교의식도 받게 되어 추후 자신이 단군교를 중광하여 교단을 조직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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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은 노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외교를 통한 이때까지의 독립운동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나라는 망해도 정신이 살아남으면 된다[國亡道存]’는 사명으로 단군교를 널리 펴는 일이 자신에게 떨어진 마지막 사명이요 기회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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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은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춘식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檀君敎)를 공표하였다. 이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며 이로써 단군의 가르침은 명실공히 700년 만에 다시 섰다. 그리하여 서기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개천절’이 대종교에 의하여 최초로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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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교의 중광과 함께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홍암 나철 대종사는 밀계(密誡)와 5대 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다듬어 간추리고 교단의 얼개를 짬으로써 교세를 펼치도록 애를 썼다. 당시 흰옷 입은 뭇 사람들이 이를 기꺼이 반겨 1910년 6월, 서울에서 2748명, 지방에서 1만8791명이 교인이 되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군교가 중광된 한 해 뒤 나철은 단군교의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는데 이는 동지였던 정훈모의 친일과 등돌림 때문이었다. 정훈모는 나철이 거세게 항일투쟁을 하는데다 시교(施敎)의 눈길이 나라밖으로 쏠리는 것을 꺼리더니 패거리를 모아 단군교란 이름에 매달리며 따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그는 나라안에 남아 일제에 빌붙으며 구구히 목숨을 이어갔지만 훗날 마침내 그 일제의 해산령으로 인해 발붙일 종단 자체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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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조적으로 나철은 꿋꿋이 항일의 자세를 지키지만 국내는 점차 일제의 억누름이 더해가자 설자리가 줄어든다. 그런 서슬에도 1911년 1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세검한몸[三神一體]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펴내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둘러보고 만주 화룡현(和龍縣) 백두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를 이룩한다. 그리고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1914년 5월, 마침내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기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펴기에 힘쓰는데 짧은 기간 안에 30만 명의 교인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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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교세의 빠른 퍼짐에 놀란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한다. 대종교는 이제 노골적인 말살작업의 대상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다다르자 나철은 마지막 결심을 한다.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은 뒷날 북한의 초대 국가수반이 된 김두봉(배못, 백연 김두봉 1889~1961)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여섯 명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세 시부터 사흘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이고는 수도에 들어간다. 그러나 16일 새벽 인기척이 없었다.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홍암 대종사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인 ‘순명삼조’를 남기고 8월 15일(양력 9월 12일) 폐기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스스로 숨을 멈추는,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죽음이었다. “지금 조선땅에 나를 묻을 곳이 없으니 한밝메 밑 대종교 총본사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청파호 언덕에 묻혔다. 홍암 대종사가 조천한 날[가경절]은 대종교의 4대경절의 하나로 기려지고 있다. 1962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대종교 종사님들은 모두 독립장을 추서받았는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치고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여러차례 보훈처와 관련기관에 서훈 상향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현재까지도 나의 능력 부족인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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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침략의 촉수를 뻗치면서 능란하게 앞잡이들을 부리던 잔혹하고 간특한 일본 제국, 어리석고 만만하며 아둔한 조선 왕조와 온 백성을 냉큼 삼켜 버린 그들의 야비하고 끔찍한 폭정 앞에서 이 땅의 종교인들은 어떻게 몸을 사려 살아남았던가? 비록 조선 5백 년의 유례없는 짓밟음을 견뎌 왔다손 치더라도 합방 당시 그나마 최대의 종교다운 세를 지닌 채 민중 속에 뿌리박고 있던 불교는 어떻게 처신했던가? 일제에 일부 저항도 타협도 하였으나 끝내 왜색불교로 거의 떨어지고 말았으니 물러나 숨어 입을 다문 채 때를 기다리던 몇몇 뜻있는 스님들 말고는 거의가 살기에 급급하거나 일부는 앞장서 협력하였으며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혼자만의 세계에 푹 잠겨 세상만사 나몰라라 하였다. 이는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저 콧대 높고 쟁쟁하던 이 땅의 유학자들은 몇몇 한말 의병장들과 목대 꼿꼿한 나홀로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 본 채 대동학회(大東學會) 등 사이비 어용단체에 휘둘리며 가뭇없이 지난날의 영광을 퇴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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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라고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서구의 뒷배를 믿음인지 구교든 신교든 한 동안은 제법 버티기도 거스르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이는 소수였고 이들은 불교와는 달리 해방 후에도 끝내 주류에서 밀려난 모양새가 된다. 일제 당시 많은 사제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제에 꺾여 들며 동방요배(東方遙拜)를 예배순서에 끼워넣는 등 협력하였으며 일부는 심지어 신도들에게 일제에 복종함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함과 마찬가지라는 요설을 베풀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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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친일로 돌아선 이용구(1868~1912)의 시천교(侍天敎) 때문에 애는 먹었지만 천도교(天道敎)는 주어진 조건에서 힘겨운 저항을 하면서 차차 개량주의로 나아갔다. 그리고 대종교는 아예 본진을 나라 바깥으로 옮겨 본격적인 싸움, 그것도 총칼을 맞부딪쳤으니 막강하고 잔악한 제국주의 군대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그 참담한 희생을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를 무모한 도전이었다고만 감히 비웃을 수 있는 자 없을 것이다. 대종교는 그 염원과 정신을 살리고는 팔다리 몸통까지 잘리며 몸을 거의 죽였으니 비록 짓이겨지고 버려졌으나 그 생명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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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홍암 나철 대종사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된 무원 김교헌 종사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었다. 본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까지 오른 구한말의 선비였으나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한 후 쉰여섯 해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그 가르침의 펼침과 항일구국운동에 한 몸을 바쳤다. 그는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현 조계사터에는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그의 거택이 있었으나 모두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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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긴 뒤 제2회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홍범규칙’을 공포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기르기에 힘쓴다. 서일(白圃 徐一 1881~1921)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후원하여 1918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킴으로써 적극적인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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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이 서명하여 1919년 2월 1일에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곧 무오독립선언서에 앞장서 서명하였다. 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이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앞서 도쿄(東京)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보다도 더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분명히 명시했다는 점에서 기미독립선언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외독립 운동가들은 이 선언서에서 밝힌 대로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국내에 남아 극렬히 저항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3·1 독립선언에는 대종교 지도자들이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는데 만약 직접 참여하였더라면 그 선언서의 무저항주의 기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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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개천절은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국경일로 채택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국무위원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고 독립운동의 가장 큰 인적 물적 기반이 대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이를 이어받아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하고 그때까지 경축식전에서 부르던 대종교의 <개천절 노래>는 다시 대종교인 위당 정인보가 작사한 노래로 바뀌어 국경일로서의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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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으며 이동녕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이 그 핵심 인물들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일제의 마지막 몇 해를 빼면 1910년대부터 1940년대 광복 때까지 해외에서 강력하게 무장독립투쟁을 펼쳤던 각 단체들마다 평균 70~80%를 대종교 출신이 채우고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던 이상설, 이회영, 정인보, 주시경, 지청천, 홍범도, 김좌진, 신채호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위에 열거한 몇몇 인사들의 이름만 대충 들어 알고 정작 대종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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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국적인 3·1운동의 결과, 그 이전까지 해외 각지에서 저절로 생겨났던 임시정부들이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는데 각지의 무장단체들도 일단은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형식상이나마 일정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북간도의 경우 김교헌 종사의 의지에 힘입어 무장투쟁이 조직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찌감치 중광단을 만들어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한 또 하나의 인물 백포 서일의 공로가 아주 크다. 서일은 함북 경원에서 나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0년 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교육 사업에 투신하는 한편 1911년 비밀 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여 서른한 살에 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1912년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였는데 짧은 기간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인물로 아주 열성적으로 신앙하고 시교하여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며 대종교의 핵심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김교헌은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했지만 서일은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기로 해서 5년간 미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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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단은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했으며 1919년 군정부로 개편되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고쳐 불리며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의 기지가 된다. 북로군정서 총재로 부임한 서일은 총재부를 담당해 그 사령관 김좌진이 지휘한 청산리 전투(1920.10.21~26)를 지원하여 대첩을 이룬 것이다. 북로군정서를 주축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몇몇 무장 단체가 연합한 독립군의 군사는 5,000명이 채 안 됐는데 30,000 명 이상의 왜적을 맞아 싸운 이 싸움에서 아군 피해는 사망 9명에 부상 6명, 적군 피해는 자그마치 사망 1,200명에 부상 3,300 명이었으니 대첩이란 말이 절대 무색하지 않다. 서일은 독립군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승전보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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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청산리전투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1921년 ‘경신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대종교도들이 다수인 수많은 조선인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만주 한인촌들은 그야말로 눈 뜨고 못 볼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김교헌은 통분한 끝에 병이 나서 1923년 단애 윤세복(1881~1960) 종사에게 교통(敎統)을 넘기고 나이 쉰여섯에 숨을 거두었다. 항일투쟁과 더불어 김교헌의 종교적 업적은 시교와 저술을 통하여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그 역사를 고증하여 확립시킨 데 있다. 이렇듯 저항세력을 뿌리뽑고 그 텃밭이 되는 민간인 촌락의 가옥이며 인축까지 싹쓸이하는 일제의 수법은 몇 해 후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잡는 간도특설대로 전수되는데 여기에 자원입대한 어느 조선청년은 뒷날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논란 속에 국립묘지에 묻히게 된다.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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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소만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시킨 뒤 다시 연해주로 옮겨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하지만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각지에서 모여든 독립군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안 되는 등 혼선이 있더니 일시 통합된 부대에서 지도부가 밀려나 떠나가게 되었다. 남은 부대원들은 노령인 이만(일명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自由市)으로 건너갔다가 공산계열의 한인 무장세력들 사이에서 알력이 빚어져 어처구니없는 동족상잔의 전초전이 일어나니 이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 6. 28)으로 만주의 항일 무장세력들은 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대타격을 받아 궤멸된다. 뿐만 아니라 이 참담한 기억은 추후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있어도 괜찮을 법한 사상적 차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더욱 틈을 벌리며 서로를 믿지 못하게 작동한다. 이는 결국 겨레의 열망을 갈라치고 틀어 민족분단의 막다른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게 떠미는 작지만 돌이킬 수 없는 물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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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은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아 변을 피했고 밀산으로 돌아와 참변 소식을 듣고서는 몹시 낙담했지만 따르는 군사를 추슬러 재기를 위한 군사훈련을 하던 중 뻔히 눈 뜨고 마지막 참화를 겪는다. 1921년 8월 26일 난데없는 토비(土匪, 마적단)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진중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청년병사들이 어이없이 학살당하고 마는데 서일은 동지와 부하를 일시에 잃은 죄의식과 함께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보고 어느 골짜기를 찾아가 홍암과 마찬가지로 조식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종교에서는 종사로 추존하여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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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3대 교주가 된 단애 윤세복 종사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대구에서 교편을 잡다 1910년 서울로 올라와 대종교인이 되었다. 입교한 다음해 수천 석의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사재를 들여 환인현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만주 각지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다.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대종교를 모태로 하는 흥업단(興業團), 광정단(匡正團), 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몸바친다.
윤세복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 일본 군부의 압력을 받은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은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을 체결하는데 그 부대조항에 의해 대종교 시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겨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대종교인 남파 박찬익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한 번 해제되었으나 다음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곧 대종교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1932년 본거지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오족협화(五族協和: 만주족ㆍ한족ㆍ일본족ㆍ조선족ㆍ몽고족)라는 낯간지러운 슬로건을 걸고 기어코 세워지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다시금 수많은 대종교인이 죽고 갇히고 쫓겨 다녔으며 대종교 자체도 비밀 결사화 했다. 만주군도 잇따라 창설됐는데 상당수의 조선 청년들도 여기에 가담하여 동족말살을 훈련받아 총칼을 들고 앞장섰으며 훗날 그 중에서 한국의 대통령도 나오고 국무총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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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성립에서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대종교는 그야말로 직접적인 완전박멸의 대상이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간신히 남아 있던 남도본사마저 문이 닫히는 등 극히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윤세복은 이를 무릅쓰고 초인적인 힘으로 교세 확장을 위해 떨치고 일어섰다.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한배검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으며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敎籍) 간행사업을 밀어붙이는 한편 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1942년, 일제는 대종교를 마저 죽이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두 달 사이로 일으켰다. 민족혼 교육과 조선어 교육을 말살해야 조선독립운동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조선말과 한글을 지키는 지사와 학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영악한 일제는 한글과 조선어에 체계를 세우는 자들은 주로 대종교인이라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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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의 한 달 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의 독립군 단체로 지목하고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교주 윤세복 등 25명의 핵심인물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치안유지법을 걸어 실형을 선고한 뒤 대부분을 만주의 액하 감옥에 가두었다. 단애 윤세복 종사는 무기형을 받았다. 대종교 간부들은 이곳에서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에 시달리다 죽어나갔다. 임오교변이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고문으로 숨진 열 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기리는데 삼가 작은 예를 지키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여기에 올리자면 다음과 같다.
권상익 · 이정 · 안희제 · 나정련(나철의 맏아들) · 김서종 · 강철구 · 오근태 · 나정문(나철의 둘째 아들) · 이창언 · 이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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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십현에는 나철의 두 아들과 더불어 이 가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가 있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무역으로 큰돈을 모은 거부로 독립운동에 비밀 자금을 대며 유학생들을 키웠는데 이들 중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 (훗날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 독립자금의 6할을 백산이 대었다고 하였다.) 자금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거금을 지원해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개발하였다. 발해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우도록 했다. 하지만 일제의 마수를 피하지 못해 임오교변의 희생자가 되어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난 지 한 해 만에 쓸쓸히 목단강을 바라보며 숨을 거둔다. 일찍이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ㆍ이시영(省齋 李始榮 1868~1953) 일가와 함께 혜택 받고 가진 자의 베풂과 되갚음을 잘 보여준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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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계를 위해 대학도 설립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다 남의 손에 넘어갔다. 국학대학은 초대 이사장부터 초대교장, 초대학장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1967년 우석대학교에 흡수되었고 우석대학교도 고려대학교에 흡수되어 없어졌다. 홍익대학교는 대종교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인 이흥수(1896~1973)가 사재를 털어 설립하였으나 자금난으로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대종교를 떠났다. 단국대학교는 대종교인이며 원로원참의를 지낸 독립운동가 장형(梵隱 張炯 1989~1964)이 조희재 여사와 공동으로 설립했는데 한참 전부터 대종교 색은 거의 바랐고 교명에만 남았다.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어서 설립된 것으로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 역시 당시에는 대종교 인사였지만 경영난으로 재단은 조영식(美源 趙永植 1921~2012) 박사에게 넘어갔고 교명도 바뀌었다. 이들 대학교의 연혁에도 대종교 관련 기록은 희미하게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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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되었으며 정부 수립 뒤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한뫼 安浩相 1902~1999) 박사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 받았다. 당시에는 살아남은 쟁쟁한 대종교 인사들이 정계와 학계 등에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대종교는 머지않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대종교는 항일무력투쟁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하였고 희생이 컸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지도급 인사들이 살아남아 환국했지만 경신참변등으로 인한 교인들의 희생이 막심하였다. 만주에서의 기반은 물론 초토화되었고 국내에는 어디에도 당장 발붙이고 성장할 만한 최소한의 근거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혼란한 해방 후 정국에서 친일인사들이 부활하여 이승만(1875~1965) 정권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로 부와 권력을 차지해 간데 비하여 대종교 인사들은 위험한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되어 일회용 간판으로 정권에 이용당하고는 권력에서 일거에 밀려났다. 적수공권으로 돌아와 맞은 아수라장 같은 천민자본주의 태동기에 그 흔한 적산 하나 못 챙기고는 물적인 토대가 될 폭넓은 민중의 지원이나 스스로 재력을 키울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극심한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대종교의 명망있는 많은 인사들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인적 물적 토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냉전세력의 뒷받침을 받은 정권은 특히 민족주의자들을 경원시하여 국가보안법 등으로 좌우 이념투쟁의 애꿎은 희생물로 만들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급속한 서구화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 특히 새로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동양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은 뒤떨어진 볼품없는 것으로 각인되도록 제도교육과 대중문화, 외래종교에 의하여 지속적인 세뇌를 당하였다. 이는 대종교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바는 없다. 비록 70년대를 즈음하여 복고적 민족주의가 일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그 국격을 살리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황금 같은 시간을 물흘려 보냄으로 생긴 세대차, 인식차의 골짜기는 여전히 메우기 버겁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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