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에서 『천부경』을 경전(倧經)으로 수용한 때는 1975년이다.
『천부경』 출현 후 거의 50년이 지난 일이다. 비록 대종교가 『천부경』을 종경으로 인정한 시기가 늦었다 할지라도 중요한 사실은 일제강점기의 대종교에서 『천부경』을 민족의 경전으로 이해하면서 민족주체성과 정체성을 확인했었다는 점이다.
대종교의 『천부경』 유통경로 역시 단군교당으로 보낸 계연수의 편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형래는 1925년에 대종교 남도본사의 총 책임자인 강우의 「정해 천부경(正解 天符經)」을 『천부경』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확인하고 있다. (마니산에서 제천 후에 저술했다는 강우의 ‘정해 천부경’을 지었다는 기록은 『독립운동사자료집』과 『대종교중광60년사』 두 군데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대종교중광60년사』에는 강우가 종리문답(倧理問答), 천산도설(天山圖說), 제천혈고사(祭天血告辭), 일삼경 一三經(天符經解說) , 애오가(愛吾歌) 등의 유서를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우는 천부경을 풀어 ‘一三經’이라 했던 것이다. 「정해 천부경」자체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즉 『단탁(檀鐸)』이 발간된 후 대종교에 전래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4년 앞서서 1921년에 대종교의 천부경 주석이 나왔다. 즉 『단탁(檀鐸)』이 발행된 날짜보다 열흘 앞서서 ‘한별’ 필명의 ‘단군천부경해(檀君天符經解)’가 『계명(啓明)』제 4호(1921년 11월) 2쪽에 걸쳐 소개되었다. (한별은 대종교 신도로써 천부경을 주석한 첫 번째 인물이다. 계명구락부는 1918년에 최남선, 박승채, 오세창, 이능화 등 지식인 33명이 민족계몽과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이다. 기관지 『계명』은 1921년 5월 1일에 창간하여 1933년 1월 17일까지 통권 24호를 발행했다.
한별은 국어학자이면서 역사가로 활동했던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1890~1950)의 필명이다.
권덕규라는 본명 외에도 ‘한별’, ‘권한별’, ‘桓人한별’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권덕규는 대종교 남도본사 청년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권덕규는 사망할 때까지 대종교 신도로써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 그가 사망하기 한해 전 1949년에 윤세복은 한글로 번역된 『역해삼일신고(譯解三一神誥)』를 편찬했는데 이때 김백주, 신백우, 권덕규가 한글번역을 맞추어 검열 작업을 했다. 『譯解三一神誥』의 한글번역은 보기 드물게 빼어난 한글문장으로써 『삼일신고』 뿐 아니라 해방 후 한글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신문과 잡지에 주로 한국어와 한국사에 관련된 계몽적인 글을 100여 편 발표했다. 특히 1920년 5월 『동아일보』에 실린 「가명인두상에 일봉(假明人頭上에 一棒)」이라는 논설은 유림을 통렬히 비판한 글로써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된 글이다.
권덕규의 단군천부경해가 발견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드러난 천부경해제는 전병훈, 김택영, 김영의 것과 함께 모두 4개이다.
출간순서로 보자면 권덕규의 천부경 해석은 전병훈의 해석 다음이다. 『계명』지에 『천부경』이 소개됐다는 것은 『단탁(檀鐸)』에 공개하기 전에 이미 세인에게 회자되어 일정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종교에서 『천부경』이 유통된 시점도 1921년 이전으로 보인다. 권덕규의 천부경 해제의 특징은 우선 국한문 혼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최남선, 이능화 등 지식인 중심으로 결속된 계명구락부에서 『천부경』을 소개했다는 것은 그들 역시『천부경』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권덕규의 천부경 주석이 대종교의 천부경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1920년 『동아일보』의 창간 당시 개최했던 단군 캠페인(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창간을 기념하면서 ‘東亞’의 뜻에 대한 해석을 한 것인데 “통고기족을 고에 배달족이라 하니 그 始祖檀君의 我(1925語를 취함”이라며 배달민족을 논하고 “우리 족보제일장(族譜第一張)에 이른바 홍익인간(弘益人間) 그것이 더 자세히 설명하면 널리 세계를 구제할”것이 라고 하면서 홍익인간의 정신을 주장했다.
1920년 4월 12일자에 「단군영정현상모집(檀君影幀懸賞募集)」이라는 광고가 실리면서 권덕규는 ‘桓民 한별’이라는 필명으로「伽明人頭上에 一棒」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사대모화에 젖어있는 유학자들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동아일보』를 통해 단군을 선양하려 의도적인 활동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처럼 주로 권덕규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과 그가 대종교 남도본사 안에서 젊은 혁신파를 주도한 열렬한 대종교 신도였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그의 주석이 대종교의 천부경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부경』이 대종교 교단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후 1925년에 남도본사 총책임자였던 강우가 『정해 천부경(正解 天符經)』을 남긴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대종교 남도본사의 총 책임자였던 호석 강우는 을축년(1925)에 마니산 의암단에서 각 절일(節日)에 천제 및 산제문을 지어 제사 드리고 기와 찬과 시를 지어 『삼일진리서(三一眞理書)』 3편과 『정해 천부경(正解 天符經)』 1편과 『종리문답(倧理問答)』 217장을 저술했다.
그러나 당시 대종교에서 『천부경』을 경전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삼일신고』를 중심으로 교리체계가 완성되어 있었고, 또한 정훈모가 단군교 경전으로 천부경을 수용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종교의 입장에선 대종사 나철이 백봉에게서 『삼일신고』를 받아 대종교를 중광시킨 종교적 특수성이 있다. 때문에 『천부경』을 민족고유의 경전으로 인정했지만 『삼일신고』와 같은 의미에서 대종교 의 경전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20년대엔 대개 남도본사 중심으로 『천부경』이 알려졌다면 1930년대는 남도본사와 임정의 독립운동가들과 만주의 대종교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 1934년에 성재 이시영이 저술한 『감시만어(感時漫語)』에 나타난 천부경 인식이다.
감시만어는 중국 혁명파의 중진인 황염배(黃炎培)가 펴낸 『조선』이라는 책에 대해 비판할 목적으로 쓴 책이다. 황염배는 이 책에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여 문물을 발전시켜주었다는 일본학자의 글만 인용하여 한국사를 비하하는 내용을 실었다. 이에 분개한 이시영이 “중국이 문화선국이라 하나 은나라 탕임금(BC1600년대) 이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는 신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탕임금 이후의 역사라야 겨우 믿을만한 것”이라면서 중국역사의 허구성을 비판했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은 나라를 향유한지 사천여년이요 삼국시대 이후부터는 신빙성 있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라면서 유구한 우리역사의 독창성을 주장했다.
이시영은 감시만어에서 단군시대부터 시작되는 배달민족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과 차별되는 주체적인 한민족의 역사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고대의 역사를 지키지 못한 것은 외국 이민족의 침략을 계속 당하여 화액을 입으면서 수많은 역사기록이 모두 잿더미로 화했기 때문인데 이때 소실된 책들이 “신지비사(神誌秘詞) · 대변설(大辯說) · 지공기(誌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상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동천록(動天錄)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 등 다수”라고 하면서 단군시대에 찬술되었다고 하는『천부경』역시 화액으로 전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천부경』은 뜻이 깊고 그윽하여 해득하기 어렵다고 하여 이시영 자신이 직접 해석하기를 피했고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천부경은 처음에 하나라는 이치의 극치를 첫머리에 서술하고 중간에 가서는 만사만물의 설명으로 확산하였다가 말미에 가서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통합하였다. 우주의 전체를 빠짐없이 여기에 기재하였다. 즉 삼라만상과 우주의 은비를 또 성생괴공(成生壞空) 하고 조겁변환(造劫變幻)과 인생본연의 성명원리를 그리고 도문(道門)의 비오(秘遻)와 원각(圓覺)의 묘체에 이르기까지 불비(不備)한 것이 없다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천부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재 신채호의 글을 통해서 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신채호가 『천부경』에 대해 1925년과 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언급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위서와 관련된 글이다.
처음 언급된 것은 1925년에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전 11회를 연재했을 때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 「조선사연구초」「삼국지동이열전교정4」)
그랬던 신채호가 「조선사연구초」를 재정리하면서 천부경 인식을 달리했다.
1931년 6월 18일 『조선일보』는 「조선사」란 제목으로 신채호의 글을 연재했는데, 이글에 따르면 신채호는 앞서 『천부경』을 부정하던 관점에서 긍정론으로 돌아섰다.
즉, 아국은 고대의 진서를 분기한 때 (이조 태종의 분서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지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이 없이 고서로 신인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서적은 各氏의 族譜 중 그 先祖의 事를 혹 僞造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眞僞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접양된 隣國인 支那, 日本兩國은 從古로 交際가 頻繁함을 따라서 우리 歷史에 參考될 書籍이 적지 않다. 그러나 僞書 많기로는 支那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僞書를 辨因치 못하면 認證치 않을 記錄을 我史에 認定하는 誤가 있다.( 『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조선사 8. 이 글이 『조선일보』에 연재될 당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여순 감옥에 갇혀있던 때이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천부경인식이 바뀐 것은 1931년이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일보』사장이던 안재홍이 어렵게 사는 단재의 부인을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연재했던 것이다 .)
신채호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위서를 조작한 적이 없었는데 『천부경』, 『삼일신고』에 대해서 고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를 지적하면서 위서로 말하자면 오히려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신채호는 우리가 비록 진서를 태운 적은 있어도 위서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천부경』과 『삼일신고』 역시 변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서로 몰고 있는 사회분위기를 개탄한 것이다.
1940년대 대종교에서는 『천부경』을 총본사 차원에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대종교 총본사는 교단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金白으로 하여금 『정보 종문지남(訂補 倧門指南)』을 발간토록 했다.(대종교에서 천부경을 공식적인 경전으로 인정한 것은 1975년이다. 그러나 1940년에 대종교 총본사 발행의 종문지남에서 천부경을 별도의 장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단실기』 『신단민사』 이후로 출간된 대종교의 역사서에는 단군과 함께 『천부경』이 반드시 소개되었다. 대종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천부경』을 발전시켜 나갔다.
『단전요의(檀典要義)』(1925년)는 1920년대의 대종교가 역사적 관점에서 『천부경』을 수용했다는 것을, 『도해삼일신고강의(圖解三一神誥講義)』(1935년)는 1930년대의 대종교가 『삼일신고』와 더불어 『천부경』을 중요 경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정해 종문지남(訂補 倧門指南)』(1940년)은 1940년대 대종교가 교단 차원에서 『천부경』을 수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했다.
권덕규의 「단군천부경주해(檀君天符經註解)」(1921)와 단암 이용태의 「천부경도석주해(天符經圖析註解)」(1930)는 대종교도의 천부경 인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삼일신고』가 대종교의 모든 정신적, 체제의 중심이었던 상황에서 『천부경』을 또 하나의 경전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천부경』보급은 단군교에서 시작은 했으되 『천부경』을 통해 민족정신의 근원을 확인하고 독립정신의 구심점으로 발전시켰던 것은 대종교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