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작고 호젓한 커피집
바삐 먹는 '나이'에도 탈이 나는 듯, 서른 넘어서는 온 몸이 묵적하고 습관처럼 지끈거렸다. 펜잘 따위를 주머니에 담아두고 다닌 지도 오래다. 그래도 20대완 달리, 컴퓨터 따위는 끄고, 제주섬 걷기에 재미를 붙인 참이기도 했다. 외로움이 아직은 덜 여물었던지, 견딜만 했던 걸까. 기억에 설탕 가루라도 뿌린 건지, 홀로 호젓한 섬길 추억이 달달하게까지 맘에 젖어들 즈음이면, 나는 매번 인터넷을 열어 비행기표를 샀었다.
"바삐 먹는 나이에도 탈이 나는 듯"
다행히도 주머니 얇은 비슷한 처지의 여행객이 많아서 좋았다. 제주는 어느새 값싼 게스트하우스나 저가 운임 항공사들 덕에 서울 문턱에 있는 듯한 가까운 섬이 되었다. 덩달아 나도 짬을 내 섬을 찾는 일이는 빈번해졌다. 목돈 나갈 일 없는, 단편소설 같은 경쾌한 걸음이 어울리는 여행이다. 짤막한 연휴면 짧은대로, 길게 마음먹고 떠날 때는 편도비행기에 기약없이 몸을 실었다. 그렇게 매번 열심히 걷고 둘러보는 여행길. 걷는 일도 탄력이 붙고, 재미가 는다. 좋았다. 이 즈음 '올레길'이라는 제주도 걷기코스도 각광받던 찰나였다. 그렇게 나는 짐 보따리 짊어진, 오름이며 바닷가 갯바위길 위의 객들 중 하나였다.
"생각보다 사람들의 취향은 일사분란한 경향이 있다."
생각해보면, 누가 선도하듯 이런 여행풍을 주창한 게 아녔다. 싸구려 수필에서도 요즘은 '걸음'을 다루지 않는다. 문학적 감흥이 다 고갈될만치 흔하게 다룬 소재가 걸음, 느림의 미학 같은 류다. 이 정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 또 어딨겠어. 그런데도 신기할만치 사람들은 비슷한 감흥을 목말라 하는 듯 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열의로 말이다. 가만보면, 사람들의 취향이나 감각은, 생각보다 '일사분란'한 경향이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특정한 시대에는 특정한 기호, 특정한 고민이 움트게 마련이다. 그래서일런지, 익숙한 듯 여전히 낯선 이 섬을 걷는 유랑객들 가운데는, 유난히 나와 비슷한 또래가 많다. 같은 세대인지라, 무언가 엇비슷한 목마름을 해갈(解渴)하고픈 것인지도.
공항에 당도하자 마자, 짐가방을 등판에 붙여매달고, 바닷길을 따라 도심을 빠져나온다. 특별할 것 없는 한가로운 걸음이다. 길의 끝에 길이 연달아 이어지며, 반나절쯤 지나면 지대가 낮은 바닷마을 돌담길에 맞닿는다. 바닷가 짠내도 익숙해져 더는 코끝에 느껴지지 않을 즈음이다. 이 근방에 닿을 때면, 나는 마을 노인정 평상에 앉아 부은 발을 새 양말로 감싸거나, 가방을 풀고 아이스크림을 까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이 동네어귀도 마침내 벗어나면, 나는 그제야 확 트인 시퍼런 수평선을 목격케 된다. 붓으로 펴바른 듯 힘이 넘치는 풍경. 너른 청색 운동에너지들이 이 내 시선에 쏟아진다. 바다는 그야말로 광활한 여백(餘白)이요, 그득 찬 공백(空白)이다. 이 청빛띠 바다 곁을 따라 걸으며 길의 끝자락에 닿을 때면, 이윽고 내가 항시 찾는 커피집이 나타난다. 굳이 장단지가 땡기고 발바닥에 노곤이 배기지 않아도, 꼭 들르는 곳이다. 겨울에 찾아도, 혹은 여름녁이어도 늘상 그 자리에 있는, 낯선든 친밀한 바닷가 커피집. 풍란(風蘭)이 흐드러진 해변가 민가를 개축해 만든.
"청빛 띠 바다 곁을 따라 걸으며, 길 끝자락에 닿으면"
2. 유배지
정말 손바닥만한 커피집 안. 겨울엔 그나마 화로까지 들여놓아 앉을 자리도 찾기 어려웁다. 사업자 등록증이나 있는 걸까. 무허가 느낌이 나는 커피집 안은 이국(異國)적인 소품들로 그득하다. 선반 위엔 러시아에서 구해온 듯한 마트로시카 인형, 멋스러운 양탄자가 펼쳐있다. 아기자기한 각종 소품들로 이 좁다란 카페는 여느 이국의 엔틱한 운치를 채우고 있었다. 나같은 여행객들의 적적한 감흥에 군불을 지피듯, 단조풍의 클래식 독주곡 가락이 가게를 채울 때면 커피집은 더 멋스럽게 느껴진다. 가게 사장은 젊었다. 내 또래 남자였고, 제주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여기 새로 자리잡은 커피집이 대개 그렇듯, 뭍의 번화가 바깥에 피난민처럼 여기 조용한 터를 잡은 걸테지.
그는 손님이 문을 열어도, 반기는 기색이 없다. ‘나. 돈 욕심 없어요.’라는 웅변같다. 앉을 테이블도 두어개 뿐이다. 하루 매출은 얼마나 되려나. 커피를 주문하면, 그야말로 한약 달이듯 느긋하게 시간까지 달여 내놓는다. 이 만성적 느림 때문에, 안그래도 서정적인 창 밖 풍경은 이제 거의 정물화 속 정지화면이 되어버린다. 사장은 이 느린 커피를 내 자리에 톡 떨구어놓고, 다시 한가로운 표정으로 창문가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유리창 정면은 시퍼런 파도가 그득하다. 커피집으로 당장 쏟아져 닥칠 듯. 젊은 사장은 창문 한 켠에 나름 계몽된 사회의식을 뽐내는 듯, 평화, 반전같은 히피 용어나, 레게가수 포스터를 붙여두었다. 한창 시끌벅적한 해군기지에 관한 이런 저런 신문기사도 오려둔게 보인다.
언제 찾아도 창가의 남자는 변한게 없다. 젊은 사장은 늘상 유리문 밖 파도 일렁이는 풍경 위에, 희고 풍성한 담배 연기를 풀어 놓는다. 그는 손님 주문 받느라 잠시 끊긴 전화통화를 한가로이 다시 이어 간다. 뻐끔뻐끔 뿜어지는 흰 연기. 담배를 참 좋아하는가 보다. 느긋하고 정적인 정물화의 색과 결을 닮았다. 모노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 나는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이 유유자적을 가만히 관람한다. 부럽다. 사장이.
"나는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이 유유자적을 가만히 관람한다."
보기 좋았다. 이 여행가의 섬이 부러웠고, 그 안에 은거한 청춘이 멋스러워 보였다. 잠실대로나 송파 사거리에 어지러이 불빛을 번뜩이는 신호등이 없는 곳. 빽빽하게 줄지어 선 대형마트의 분주함이란 뭍의 먼 나라 이야기인 곳. 이 고요한 공간은 만성 피로에 축쳐진 내겐 그야말로 축복의 은둔지였다. 전자파 같은 도시의 유독(有毒)을 떠나, 조그많지만 여기 제 작은 커피집 하나를 내놓곤, 스스로 정물(靜物)이 된 청년. 그 앤틱(antique)한 네 평 공간 안에서, 세계의 모든 소음과 사건들에서 스스로를 유폐(幽閉)시킨 그 이. 이 젊은이 사장을 부러워할 또래가 한 둘이 아닐게다. 사장이 몰두하는 건 엑셀 파일에 빼곡한 숫자나 함수, 처리가 밀린 공문서들이 아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거나,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한가로운 여담을 나눌 뿐이다. 나랑 비슷한 연배인데, 어찌 저리도 사는 게 단조롭고 은은할까. 탄식이 흘러나온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세상의 가장 외딴 유배지에 방 한켠 내어놓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이 소소한 적막이 부럽다. 그렇다고 그의 일상이 마냥 축 늘어뜨려진 ‘플랫(flat; ♭)’이기만 한 건 또 아니다. 내가 그를 관찰한지는 수차례인데, 이 청년은 어딘가 바삐 통화할 때 만큼은 정력적이고 스테미너가 넘친다. 불꽃이 아궁이 밖을 내뿜는 듯 하다. 단편적 인상들로만 엮인 기억이지만, 그는 분명 여러 면에서 나보다 나아보였다. 부러워서 애가 탈 지경이다. 그 옛날 ‘카프카(Franz Kafka)’는 있음직하지 않은 세계를, 가히 있음직한 서술로 그려놓곤 하는 재주를 가졌었다. 그래서 그 허구는 손에 잡힐 듯 더 애가 탄다. 나는 이 지상 위의 작은 커피냄새 그득한 유배지가 꼭 카프카적 허구, 현실 저편의 몽롱한 우화 속 세계 같이 느껴졌더랬다.
3. "오빠 지금 한가한데…"
지난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여독과 바닷바람을 피해, 나는 이 커피집을 다시 찾았다. '게으름'에 관한 내 안의 이상(理想)이 아직 건재함을 확인해려는 듯. 그런데, 그날 나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지극히 낯선, 감각적 경험들이 터뜨려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달리보이는 듯, 이 안온한 공간 속 청년 사장의 행동들이 달리 해석되고, 또 낯설게 떠밀려드는 느낌은 묘했더랬다.
사장은 그날도 어김없이 낯선 내게 커피를 한잔 툭 내어놓고는, 얼른 창가로 돌아가 한창 떠들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건지. 그의 입은 달아오른 아궁이 같다. 꼭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날 따라 느리고 한가로운 그의 일과가 대체 뭘로 가득차 있는지 궁금함이 밀려오는 거였다. 나른한 그가 유독 수화기 너머로 집중감 있고 활기 넘치게 주고받는, 그 ‘무엇’이란 대체 뭘까. 호기심이 떠밀려오던 찰나였다.
“오빠 지금 무지 한가한데 언제 올꺼야.”
“술 살께 와라 좀.”
두 시간째 그 소리였다. 그 밖의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에도 없고, 또 굳어 뇌리에서 건져낼법한 건더기도 없었다. 정감 넘치는 시어(詩語)같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전화기 속 언어들은, 한결같이 전화기 저편의 여자들에게 애닯게 추근대는 것 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이게 전부였다. 청년 사장의 길고 나른한 영업 시간을 채우는 건, 그 나른한 시간만큼이나 더 길고 더 나른한, 너절한 언어들 말이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사장은 항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던게 생각났다. 나는 잘못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적인 정물화 속에서 도리어 그 평온을 잠시도 가만히 견디질 못하고 있었다. 그 청춘은 여기저기 전화로, 아는 여성들에게 수작거는 것으로 나긋한 시간들을 채우는데 몰두 중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여백을 찾아 목돈을 내고 찾은 이 여행지와 작은 커피집인데, 막상 그곳에 은거한 한 청년은, 이 공터, 존재의 여백을 뭐라도 채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서정(抒情)의 외피(外皮) 아래는 기실 애욕이 들끓고 있었다. 그 때였던 것 같다. 우아하고 멋스럽던 해변카페의 낭만적 느낌이 대뜸 벗겨진 순간이. 아주 솔직한 표현을 덧대자면, 그때 내 마음은 개운치 않은 역한 감정들으로 휩싸여있던 것 같다. 불편한 이물감, 역한 감정들.
그리고 남은 여행의 몇 일, 나는 온통 그 젊은 커피집의 청년 사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고민하며 걸었다. 무어든 혐오하거나 예찬하기는 쉽지만, 이런 류의 내밀한 혐오의 원인과 그 인과를 이해하는데는 다소 시간과던 노력이 필요하다. 밥을 먹으면서도, 게스트하우스 침실 불을 끄고서도, 계속 그 부박(浮薄)했던 풍경이 마음에 선했다. 이건 그동안 내 안에 가득했던 청년 사장에 대한 ‘동경’. 게으름과 나릇한 삶에 대한 기대감의 실체와 현실을 해부해보는 작업이었다.
"그는 정적인 정물화 속에서 도리어 그 평온을 잠시도 가만히 견디질 못하고 있었다."
4. 인큐베이터
저렇게 수채화 같은 근사한 풍경 속에 젖어 살면서, 바다만큼 시퍼런 청춘을 달구고 애끓게 하는 대화와 관심이, 오로지 여자 뿐이라니. 비록 그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있었다. 최소한, 같은 공간 속의 이 청년 사장에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본을 받고 배울만한 ‘가치로움’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그의 현실은 예쁘디 예쁠 뿐, 값어치있는 구석이라곤 눈씻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본래 남의 떡이 커보인다지 않던가. 무언가 쫓기듯 부대끼는 내 도시적 삶 맞은 편, 나는 내 삶과 강력히 대비되는 정반대 인생의 여유로움이 부러울 따름이었던 거다. 하지만 정작 그 여유와 여백을 채우는 나른함과 심각한 무의미성들을, 나는 너무 늦게 발견했다.
그거였다.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청년의 ‘호젓함’은, 기실 ‘널부러져’ 있는 것이었다. 우리 세계 곳곳에 가득한 현실의 가학적인 ‘고단’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스스로를 유폐시켰을 뿐. 나는 이걸 ‘여유’라고 명명했었지만, 정작 그 여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던 거다. 그건 쇠락이고 퇴행이었다. 세상의 고단함, 산 밑 세계의 찬 겨울바람이 밀려들지 않는, 그 바닷가 커피집은 삶의 무풍 지대, 안락한 인큐베이터였다. 내가 꿈꾸었던 평온이 이 인큐베이터 속의 온기였던 말인가. 진심으로 그 담배연기 그득한 인큐베이터 안이 역해서, 나는 뛰쳐나오듯 서둘러 가게를 뛰쳐 나왔다. 내가 기껏 이런 풍을 동경했었다니. 내가 이런 너절함 따위를 목말라했었다니. 스스로가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제서였던 것 같다. 삶에 대한 내 나름의 설명법과 톤에 관해 진지하게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 최소한 저렇게는 살아서는 안되는 거라는 절박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는 인생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허다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날의 가르침은, 인생을 가치롭게 하는 것이란게, 최소한 여유와 안락함 따위는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는 듯 했다. 삶이 추구하여야 할 본질은, 쾌적함이나 안락함 같은 생물학적이고 심리적 위안들이 아니었다. 인생의 표상이 그런데에 있을리 만무했다. 삶을 가치롭게 담금질하는 것은, ‘사명’이요, ‘의미’였다. 한낯 따사로운 레저생활의 한 소절 여유 따위에, 그간 내 관심과 존재의 여백을 채우려했던 시도들이, 역겨울만치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여유와 여백을 채우는 나른함과 심각한 무의미성들을, 나는 너무 늦게 발견했다."
5. 프로이트와 아들러와..
힘든 세상이다. 모두에게 고단한 날들이다. 청춘에게도 이런 생의 풍파(風波)는 더했으면 더했지 작지가 않다. 최소한 나같은 부류의 청년들에게, 그 젊은 사장의 안온한 하루하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일게다. 로또 당첨되어서 재벌처럼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청년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세대의 현실적 목마름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다들 목돈으로 카페 하나 차리거나 건물 임대해주고 살겠다는 소소함이 대부분이다. 우리 시대의 동경은, 정복하고 평정하는 대륙적 기상 대신, 바람이 불지 않는 양지바른 누울 자리를 찾는 식물적 '이상'이다. 안락은 우리 청년세대의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기에 우리들은 그런 따사로운 안온함을 선물받아서는 안되는 거였다.
안온함을 동경하고, 그런 삶에 베팅하며, 그 여유로움을 마치 인생 속 ‘행복’의 동의어로 여기고 사는 삶. 이건 기실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삶이다. 아무 것도 돌파할 의향이 없는 인생이다. 그런 삶은 결국 무언가를 추구할, 여남은 내적 동력마저도 소진하고 없을거다. 봉쇄된 청춘. 그 앞길이 눈에 선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박한 가치, 목숨도 인생도 걸법한 소명(召命)이 있어야 한다. 그 고상한 사명을 단념한 인생은, 결국 원시적인 감정들로 내면의 여남은 공터와 여백을 대신 채우게 마련인거다. 사람의 내면은, 배의 평형수 같다. 그래서 무의식이라도 의지적으로 내면의 내적 총량을 균형 맞추려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생의 소명을 단념한 자는, 존재의 멀미를 잊어보려는 듯, 그만큼 여타의 감정, 욕구, 리비도들을 쏟아 붇고 채우게 마련이다. 청년 사장의 우스꽝스레 들끓는 전화통화처럼. 그 옛날 '구원 대신 오르가즘을!'이라 외치던, 정신 밑둥까지 타락한 70년대 어느 미국 히피(hippie)가 문득 생각난다.
근대 오스트리아의 1세대 심리학자들은 이런 류의 원시적 감정에너지를 성욕, 리비도라고 보았고 (프로이트, 융), 다음 세대의 학자들은 그 원시감정의 밑둥을 열등감, 우월의지 같은 용어로 설명했다. (아들러) 글쎄. 사람 마음의 밑둥에 대체 무엇이 은둔해있는지는 더 논해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영혼을 간절히 채우는 ‘사명’을 놓치면, 우리는 훨씬 저열한 동물적 감각과 감정들로 내면을 채우는 인간군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6. 홍상수
홍상수 감독은 오늘날 한국 영화 평단에서 가장 주목받고 호평을 받는 영화인 중 하나이다. 홍상수는 누구도 쉽게 그려낼 수 없을만치, 엉클어진 인간 내면의 구석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실력자다. 그래서 그이의 인간 묘사는 경탄할 구석이 많다. 홍상수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결코 낯선 자들의 의뭉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캐릭터들은 낯뜨거울만치 일상적이고 현실적이다. 하나같이, 우리의 삐뚤어진 밑감정을 옮겨놓고 있다. 꺼내어놓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낯익은 초라함과 허무한 사악, 시기심이며 찌질한, 마음의 그늘이 그득하다. 영화는 거울에 비취듯 그런 류의 안쓰러운 내면들을 정색하고 비췬다. 이게 불편한데 또 재미있다. 우습지만 개운하게 웃을 수는 없는, 쓰라린 구석이 있는 작품들이다.
이 홍상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늘상 특정한 톤(tone)이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제법 어렵지 않은 생활수준의, 대학교수, 예술가, 화가 같은 자들이다. 나름 고상한 이야기들로 한두시간은 썰을 풀 수 있는 지식인 계층들. 그들은 늘상 술집에 틀어앉아 그득히 취해 있다. 거기서 이성 후배나, 제자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예술 이론이 어떻고, 철학이 어떠하며, 대학사회가 어떻게 썩어 있는지를 웅변한다. 비장한 신념가나 근본주의자의 톤(tone)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다가 술기운이 생각에 퍼지면, 이 고상한 식자들은 제 마음의 밑둥을 드러내 놓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쓰러운 인생들이다. 불안하고 후미진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참 작은 일로 예민해져 있고, 우스꽝스러울 만치 사소한 일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되고 싶은 인생과, 실제 살아가는 현실 속 인생의 너절한 거리감. 그 사이에서, 멀미하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식인들. 그들은 불안한 내면을 채우려는 듯, 절박하게 연애나 바람피는 것 따위에 매달린다. ‘이상(理想)’은 본래부터 없었던지, 아님 어렵게 맺히려다 싹 틔우길 실패한 것인지. 관념은 뇌리에 화석같은 형태만 남았고, 입에서만 살아 가득하다. 감독은 이상(理想)없는 자가 무엇으로 인생을 채워 사는가를 스케치한다. 충동, 시기심, 허세, 외로움. 이같은 낯부끄러운 원시 감정만이 영화 화면 속에서 꺼졌다 피워오르길 반복한다.
"홍상수 감독은 이상(理想)없는 자가 무엇으로 인생을 채워 사는가를 스케치한다. 충동, 시기심, 허세, 외로움."
7. 리비도
우리 시대는 선정적인 시대다. 성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시대다. 리비도만이 문화와 생각의 기저에 들끓는.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실존주의 계열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생전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의외의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성적 좌절이 아닌, 실존적 좌절에 놓여 있다.” 의외의 말 같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시대의 풍경 이면을 조망하는 통찰이 담긴 말이었다. 사람들이 성적 강박에 매달리는 외양은 기실 실존적 좌절을 채워보려는 발버둥이라는. 그래서 리비도적 원시에너지로 흔들리는 존재의 평형수를 채우려 골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말이다. 해결되지 않은 영역은, 무어로든 채워야 하는 강박적 동기가 그득한게 사람이니 말이다.
술 마시며 노닥거리다가 이성에게 추근덕 대는게 전부인 홍상수의 캐릭터들. 그리고 호젓한 여행지 커피집에서 젊은 여인들과 노닥거리는 것이 전부인 듯 골몰하는 청년 사장. 이 다른 듯 비슷한, 관찰 속에서, 나는 홍상수 영화 속 풍경들이 오마쥬 되듯 하다.
빛나지 않는, 어둑한 인생도 세상에는 많다. 삶을 추동하는 가치가 소실된, 화재터 같은 삶의 안쓰러움도 세상에는 많다. 하나같이 로고스가 쇠락한 자리에 리비도만이 들끓는, 말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의미과 무가치, 그 이물질들 사이를 떠도는 부유물이 아닐진데. 그렇다면 이 순간부터 우리가 찾아야 하고,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은, ‘소명’이다. 인생이 소명을 잃을 때, 혹은 사명으로 빛나기를 멈추는 순간, 인간은 실존적 좌절을 경험한다. 현대 사회의 가장 거대한 좌절이 여기 있다. 그리고 이 좌절의 고통이 오늘날 인간들을 프로이트적 성에너지나 아들러적 우월 의지 따위로 들끓게 만드는 근본 이유가 아닐까.
옛날 어떤 목회자가 설교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여러분. 소년소녀 가장이 게임중독에 빠졌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날품팔이해서 근근히 가족을 부양하느라 수고하는 가장이 바람났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게임중독도 바람도 한가로운 이들이 벌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의미과 무가치, 그 이물질들 사이를 떠도는 부유물이 아닐진데."
겨우 구서른 즈음의 나이에 자그마한 여행지의 카페 안에서 손님들에게 커피를 팔면서, 남아도는 시간은 오로지 담배를 태우듯, 아가씨들에게 추근대는 일로 일과를 태워가는, 어떤 인생의 풍경을 상상해보시라. 그 젊음은 하나도 빛나지 않는다. 낮게 뜨는 구름처럼 콱 막히고, 온통 매캐하다. 그 어떤 어두움도 밝히지 못하는, 좀 과격한 말일지 모르나, 이런 청춘이라면 닮을 것도 표상할 것도 하나 없는, 안쓰러이 ‘존재’의 시늉만을 반복하는 셈이다. 세상 구석의 어여쁜 정물화 표구같은. 박제된 풍경 한 조각 같은.
구름이 낮게 끼던 날, 그 자그맣고 호젓하던 해변 커피집을 기억한다. 이제 거길 다시 찾을 일은 없겠다는, 내 결심은 여전하다. 하지만, 또 드문드문 그 젊은 날 청년 근황이 궁금키도 하다.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쾌적함과 안락함 저도 매우 좋아해서 너무 나태해지고 게을러질 때가 많은데 공감이 많이되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네요. 누구든지 안식을 바라지만 그것이 사명과 유리된 환경적 풍요로움이나 육체적 편안함이면 안되겠네요. 고단한 삶가운데에 안식을 바라지만 그것은 주 안에서만 가능해요. 우리가 주 안에서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안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