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포"영화에 대한 생각
공포영화는 작년인가, "장화홍련"이후 보지 않는다. 재미도 없고, 무섭지도 않아서다.
귀신이 하도 나와서 나중에는 친숙해지기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게 만드는 공포영화가
무슨 공포를 주는가?
관객이 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극장 싸운드에 기대서 악지르거나 하는 '공포'
영화에서 진짜 공포는 '저렇게 해서라도 돈벌어야 먹고 사는가'하는 삶에 대한, 한국영화에
대한 공포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하여간, 요새 한국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나, 저주는 차라리 진지한 포즈로 귀괴한 자세를 취하는
코메디물에 가깝다.
그런점에서 차라리 <시실리 2K>란 영화에 출연하는 귀신은 새롭고 귀엽다.
그 영화속에 귀신은 '한'을 품고 죽었어도 이 세상에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무덤을 덮는 나무 토막에 관심이 있고, 자기 구역 침범하는 것에만 촉각을 몰두한다.
사투리를 여전히 쓰긴 하지만, 세상사 별로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무릅을 딱 친다. 맞다.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라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머할라꼬 이 세상에 관심을 두는가.
귀신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증오는 무관심일터.
괴로운 '이'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저'세상, 혹은 다른 세상속에서 열심히 살겠지.
만약, 귀신이 이 세상에 개입한다면, 그건 귀신으로 품위가 떨어진다.
내 이 가설은, 유영철이란 살인마를 생각하면 더 명확해진다. 그렇게 살인을 해놓고도 귀신이
놔둔 것은 귀신은 한을 품고 죽어도 인간에게 나타나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귀신으로 상징되는 공포란 기실 바로 '인간'자체에 내재한 어떤 것이다.
스스로 인간은 그를 통해 두려워하고 오싹해하면서 악을 질러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몇 년전 <여고괴담>은 공포를 통찰한 영화다.
같은 학교에 수년씩이나 달라도 출석부를 봐야 이름을 알수 있는 '학교'체제야 말로
우리의 소름을 짜악 끼치게 하는 주범이다.
오로지 '서울대'를 향한 무서운 집념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치가 '입시의 정치경제학'속에 편입이
되어 "인간"이 사라지는 세태. 신문에서 끊임없이 아이들이 목숨을 끊는 '현실'의 공포가 영화를
통해 잘 표현되었다고 느꼈다.
불행히 이 영화를 보고 선생님들은 자기들을 너무 무시했다고, 엉뚱한 '감상'을 하는
오싹한 공포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하여간, 어찌되었건 공포영화의 매력은 바로 '귀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적 요인이 '귀신'이 되어가는가에 대한 통찰에 있는 셈이다.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왕따(한을 맺히게 하기)를 시키거나,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귀신'이란 모습으로 보여줌
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어다본다.
그리고 그 '한'을 품은 피해자(공부못하는 아이? 부모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않은 사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 것.
2. 아오자이 처녀의 눈물
<알포인트>란 영화를 지금 보고 와서 오자마자 쓰는 중이다.
너무 무서워서 이글을 쓰지 않고서는 잘수 없을 듯 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어떤 츠자(20대 초반. 쌩머리를 했는데, 계속 만지작 거리면서 남자친구로 보이는 건달프스러운 친구에게 말함)가 말한다.
"그라믄, 귀신이 왜 설명도 안하고 저라고 죽인데?"
그러자 건달프스러운 남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그 예리한 질문에 답하기 힘들겠다는
표정으로 아무말이 없다. 어찌되었건 무서웠으니까...
나는 말하고 싶었다.
"아니, 이 영화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실은 말이지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바로 대~~한민국....따이한 국군이 귀신에게 왜 죽었는가, 그리고 그게 진짜 실화인가, 아닌가 하는게
아니에요. 대~~한민국, 따이한 사람이 거기서 한짓을 설명해야 하는거에요.
귀신한테 설명해줘야 하는것이지요"
귀신이 무섭게 나와 쫘악 나는 이런저런 슬픔으로 죽었응께, 너도 잔혹하게 죽어봐라는 영화문법에
익숙한듯한 그 처자도 내 이 장황한 이야길 알아 들었으리라.
왜? 그녀도 영화속에 나오는 그 가엾은 하이얀, 너무나 눈부신 하이얀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영상으로 보았기에. 그렇다. 그 눈물, 공포영화에서 항상 그렇듯, 피눈물이다.
피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그러나 설명이 없다. 왜 '피를 묻힌자, 돌아갈수 없다'라는 것에 설명을 해야 할까?
이건, 참 곤란한 질문이다.
남편이 부인을 때린후에 "당신이 왜 맞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해"주라고 요구한다면 곤란하기에.
나는 몰살당한 '프랑스'군과 '양키', 따이한들 자신이 이제 귀신에게 설명해야 할때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무릅을 꿇고 겸허히 향을 피워 백배,천배,만배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귀신의 눈에 흐르는 피눈물...그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배트남 처자, 알포인트에 거주하는 그 여인네의 눈물,
그걸 공포스럽게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이는 말한다.
어쩔수 없지 않았냐고. 경제 성장을 위해서 우리 '박'통이 대담한 결정아니냐고.
그 결정이 없었으면, 지금 네가 인터넷 두들기고 있겠냐고.
나는 사실 이런 반응을 하는 분들이 무섭고 두렵다.
영화는 내내 사람을 두렵고 힘들게 만들었는데, 영화바깥은 '여전히'다. 옴살바못지사다야사바하...
3. <알포인트>가 보여주려고 하는 귀신의 얼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그것이다.
따이한 용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베트콩 머리 두 개를 들고 찍은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따이한 용사들은 날라오는 탄환에 응사하여 적군을 죽였다.
비록 그 적군이 평상복을 입은 아리따운 처자라도, 죽여야 한다.
왜? 전쟁이니까.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매춘을 한다. 능욕을 한다.
아, 그러면, 우리 베트남 참전에 관한 영화구나, 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것만은 아닌 듯 싶다. 이 영화의 '귀신'은 상당히 보편성이 있어 보인다.
따이한 병사만이 아니라, 프랑스군대가 전멸했고, 양키가 참혹하게 그 지역에서는 죽는다.
왜? 그들은 '피'를 묻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그 '피'를 묻힌자는 누군가의 보복에
의해서 그렇게 죽을까? 아니다.
바로 그들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총질을 하고, 부하가 상관에게 총질을 한다.
정체성을 찾으려는("관등성명을 대!")유능한 지도자의 노력도 부질없다.
왜? 그들은 '피'를 보았으니까. 설사 눈이 멀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엄마가 못알아볼거야. 내가 너무 변해서"정도로 미칠지경이니까.
베트남 아오자이 처녀는 복수하지 않는다.
능욕당한 베트남 민중은 복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귀신이 될 리가 없다.
실은 우리 자신, 소위 강대국(?)이라 이름 불리워지면서 '전쟁'에 개입한 이들 자신이 귀신이 되어 있으니까.
음악이 나오자 미친 듯, 흔들어대면서 좋아하던 '전우'들도 한순간에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죽일수 있는 상황
이야 말로 공포스러운 장면 아닌가?
아니, ...실은, 바로 우리와 비슷한 고민..."딸과 창경궁 가는 것이 꿈"이거나 하는
비슷한 사람끼리 죽이기 위해 총질하는 현실, 소위 '전쟁'에 참여하는 인간처럼 참혹한 귀신이 어디있는가.
4. 숨을 내쉬고, 불안을...숨을 마시면서, 미소를...
"폭력은 결코 먼데 있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과 행동 속에서 폭력의 씨앗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폭력이나 전쟁을 시작과 끝이 있는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속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쟁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간에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그 씨앗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비움>>에서.)
위 글은 틱낙한 스님의 글이다.
틱낙한 스님은 바로 눈앞에서 그 아오자이의 피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편도 서지 않았고, 자기를 박해한 양키와 공산당 모두를 뛰어넘는
어쩌면 "알포인트"지역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
그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 그는 '전쟁'의 본질을 핵심을 찌른다. 알포인트란 영화도 상당히 이러한 관점과 비슷하다.
우리 내면에 가장 어두운 면에 자리한 것들. 무엇보다 "죄책감"은 공포의 원천이 된다.
친구의 카메라가 죄책감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우리는 '폭력'친구가 되고,
폭력과 친구가 되면 전쟁에 미친 아귀가 되고, 그를 당연시하게 된다. 그렇다.
자기가 매춘을 해도 그 죄악을 느낄수 없는,
자기가 누군가를 폭력을 가해도 그 폭력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
그 어둠의 씨앗은 노래가사처럼 암처럼 자라 전쟁으로 변한다.
전쟁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그 씨앗이 있었다.
그 씨앗이 악귀처럼 되어 우리 스스로, 가장 가깝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인간'을 "성"으로, "학력"(학교?)로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문제의식이 없는 이 악귀같은 기운들.
그 기운은 전쟁에 대해서도-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시 하게 되고,
그래서 이라크에 파병을 했건, 혹은 김선일씨가 울부짖으며 "당신은 실수하고 있는거요"라고 외쳐도
그러건 말건...
자, 어떻게 푸닷거리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귀신을, 공포를, 도처에 우리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을 이겨내야 하는가?
역시 틱낙한 스님의 말을 들어보자.
"깨달음에 도달하긴 전날 밤, 부처님은 유혹자 마라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라와 그의 악의 군대는 부처님에게 수천개의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부처님의
몸 가까이에 가자마자 모두 꽃으로 변하더니 그의 발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공격의 화살을 꽃으로 변화시키기.
어쩌면 이글을 읽는 누구는 '부처님'에 인상을 찌푸릴테지만,
부처님을 예수님으로 바꾸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미움, 질투, 죄책감, 폭력의 공격화살을 어떻게 아름다운 꽃으로 변화시킬것인가?
물론 공포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안에 있는 잔혹한 어둠을 드러낼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몫.
틱낙한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도력있는 분들은 귀신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알아차리기'를 하라고 한다.
숨을 내쉬면서, 숨을 들이마시면서 자기안에 있는 공포와 불안마저 인정하고 감싸기.
자기안에 있는 어둠을, 귀신을, 그 울부짖음의 소리를 잘들어주고 인정해줄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가르친다.
나는 물론 솔직히 젊어서 그런지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귀신이 되어 복수하는것도 나쁘지 않잖아,라고 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이라크민중을 대규모로 학살한 미국과 한국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앗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영화속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소대장도, 또 경험풍부한 하사도 어쩔수 없다.
눈을 파버려야 하나?...숨을 내쉬고 숨을 들어마시고...천천히...
5. 감독,주연,조연
어디 잡지에서 읽었는데 감독이 이 영화찍고(캄보디아) 한국에 돌아올 때 공황직원이
"어? 한국말하네?"라고 했고, 딸아이가 못알아봤다고 했다. 첫작품이라고 들었는데,
참 훌륭한 영화를 만든 듯 하다. 성심성의껏, 화면에 비치는 썸뜩한 아름다움도 악조건속에서
찍은 것이 느껴진다.
주연을 맡은 배우는...감우성?인가...
<현정아, 사랑해>라는 드라마에서 멋진 재벌2세로 기억남았는데, 참 근사한 역을 한 듯 싶다.
냉철한, 쿨하지만, 부하에 대한 애정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이성적인 소대장역을 잘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연'보다는 조연들이 인상에 남는다.
특히 장의사 출신이고, 계속 환영을 보는 병사역을 맡은 배우가 인상에 깊다.
마치 실미도처럼 모든 배우가 힘을 다해 찍은 것이 느껴진다.
외국로케이션 촬영작품이 언제나 망했다고 들었는데, 이 영화는 흥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아니 바램을 가진다.
그래서 혹, 이 영화를 통해 자기안에 든 죄책감과 불안, 미움등이 바로 폭력의 씨앗이며
이 폭력의 씨앗으로 지금 이순간에도 이라크민중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길.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 따이한에게 고통받았던 베트남 아오자이 처녀에게는 한없는
사죄를 하는 씨김굿을 하고 지금 업을 짓고 있는 것을 멈추기 위한 자각으로 널리 퍼져나갔으면...
영화를 봤지만 솔직히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은 봐야될 듯...
자기야.. 영화를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봐....
근데 나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 앞자리여서 영화에 지대로 몰입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 담엔 기다리더라도 좋은 좌석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