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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군산·서천 55코스 제2부
진포시비공원-금강체육공원-진포대첩 기념탑-
금강배수갑문교-김인전공원-음식문화특화거리-
송내천-장항산업단지-동백대교-용당리-장항도선장
20230628
1.진포대첩 기념탑과 장항 도선장의 추억
진포시비공원의 여러 시비들을 살펴 보았다.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시 작품들이 가슴에 메아리친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박목월의 윤사월, 이육사의 청포도,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박두진의 해 등을 비롯하여 김소월의 산유화,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수영의 풀, 구상의 초토소묘, 김춘수의 꽃 등의 국내 시인들의 작품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 헤르만 헷세의 안개 속에서,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나의 노래, 월레 소잉카의 평화의 비전 등 해외 시인들의 작품들이 시비공원을 나즈막하게 울린다. 내게는 이육사의 청포도가 가슴에 파고 든다. 학창시절 선생님이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 주신 이육사의 청포도, 그 시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이 시를 내 아이들에게도 암송하도록 한 지난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내가 바라는 손님이 청포를 입고 금강을 건너오는 모습이 상상된다.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李陸, 1904~1944)의 '청포도(靑葡萄)' 전문>
내가 좋아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없었다. 그러나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있어 반가웠다. 이 원시를 암송하여 읊던 시절은 추억 속에서 행복하고 이제 원문은 외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진포시비공원의 무지개 번역시가 마음에 들지 앟는다. 그래서 다른 번역시를 찾아 보았다. 김형태 박사가 번역한 시를 읽으며 내 가슴은 벅차게 뛴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삶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러했고/ 어른인 지금도 그러하고/ 나이가 들어가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생의 나날이/ 자연의 숭고함 속에 고이 있기를.”(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내 가슴은 설레고' 전문)
금강 하구는 진포와 기벌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다. 진포는 군산 쪽 포구를, 장항 쪽 포구는 기벌포라고 이르는 것 같다. 진포는 최무선이 화포를 사용해 왜선 500척을 대파한 고려말 1380년의 진포대첩 역사로 빛난다. 진포에서 패배하여 잔존한 왜구들이 전라도 운봉과 인월,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 약탈을 일삼자 이성계 장군이 이들을 궤멸시킨 운봉 황산대첩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중요한 전기가 된다. 그래서 이성계 가문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에도 이 역사를 노래한다. 진포대첩 기념탑, 군산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여 1999년에 세웠다고 한다.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날개가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는 모양의 기념탑이 솟아 있고, 그 아래는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발사하는 모습과 그 옆에 평화로운 시민들의 모습의 조형물이 있다. 오늘의 평화는 어제의 고통과 희생을 극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금강하굿둑 금강갑문교를 건넌다. 서해랑길 52코스 김제에서 만경강을 건너 군산에 들어와 서해랑길 55코스에서 금강을 건너 충남 서천으로 들어간다. 군산, 얼마나 체험하였을까? 만경강변 대야들녘, 회현면 금광들녘, 청암산 자락의 군산호수, 드넓은 석교들, 새벽의 은파호수 별빛다리와 물빛다리, 금강기맥 산길, 월명공원길, 근대시간여행거리, 진포해양테마공원, 째보선창, 서래포구마을, 경암동 철길마을, 구암동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등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훌쩍 내려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군산의 지리적 위치는 어떤가? 군산은 북쪽으로 금강을 경계로 충남의 서천군과, 동북쪽으로는 익산시와, 그리고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있다.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서 동쪽 내륙에서 서해 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군산 반도(옥구 반도)'라고 이른다고 한다. 군산의 역사적 지명 유래는 어떤가? 군산은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가 마한을 합병하면서 '마서량현', '부부리현이라 칭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옥구현이 되었는데, 현재의 군산 지역에는 당시 옥구현, 임피현, 회미현이 있었다. 1406년 조선 태종 때에 고군산도에 있던 군산진을 이전하고 군산창을 두었다. '군산'이라는 지명은 고군산에서 진(鎭)을 이전해 오면서 과거 군산진이 있었던 선유도 지역을 '고군산'이라고 하고 새로 이전한 곳을 '군산진'이라고 부르면서 붙여졌다고 한다.(향토문화대전 참조) 군산과 헤어지면서 군산 탐방지를 추억하고 군산의 지리와 지명 유래를 겉핥아 보았다.
금강갑문교를 건너 충남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로 넘어갔다. 하굿둑 사거리에서 동쪽은 서천군 한산, 강경, 논산, 부여로 이어지는 내륙길, 서쪽은 서천군 장항, 보령군 대천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이다. 사거리 입구 건너편에 금강하구둑 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도삼리를 빛나게 하는 금강 하구의 관광지라고 한다. 해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명은 장산로, 장항과 한산모시로 유명한 한산을 잇는 길이라서 장산로라고 명명한 것 같다. 장산로 옆 금강 변에 김인전 추모공원과 그 안쪽에 서천국민여가캠핑장이 조성되어 있다. 김인전 선생은 군산 3.1운동의 근원지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3.1운동을 이끌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서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그 분의 흉상과 건립기비, 공적비가 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제부터 서해랑길 55코스는 종점인 장항도선장 입구까지 계속 장산로를 따라가는 길이라 몹시 지루하다. 장산로는 장항읍 원수리 장항산업단지와 이어지는 길이라서 원수산업도로라고도 이른다. 산업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이 굉음을 낸다. 길을 걷기는 따분하지만 차량 소리에 정신이 든다. 그럼에도 장산로를 아름답게 하는 풍경이 있다. 금강 변의 갈대습지 그리고 금강 남쪽의 군산 시가지와 주변 풍경은 가슴을 흔든다. 특히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세워져 있는 오성산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금강 남쪽의 산줄기 금남정맥의 끄트머리 산봉인 오성산 산행의 추억에 가슴이 들떴다.
오성산은 근처에서 웅봉(雄蜂?)입니다. 남으로 바라보면 개미집 같은 임피읍과 남산(南山)을 넘어 그야말로 일망무제한 김만경평야가 만경강의 좁다란 띠를 띠고 바라보입니다. 이 평야가 다다른 곳은 그림 속의 병풍같이 암암한 전주·남원 등지의 봉만(峰巒)들이고요. 북으로는 충남 일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韓山·舒川은 거짓말을 조금만 보탠다면 농가에서 저녁을 먹는 보리밥 그릇에 쌀이 몇 알 섞였는지 보일 만큼 바로 발 아래로 바라다보입니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군산 앞에서 확 퍼진 금강의 강 어귀가 망망한 바다처럼 내려다보입니다. 오성낙조의 파노라마는 여기서 벌어집니다.(채만식의 ‘五聖落潮’에서, 1932년)
채만식(1902~1950) 작가가 1932년 군산 오성산에 올라 조망한 기록의 일부이다. 지난 시절 채만식의 '군산 기행'을 읽고 작가 흉내를 내서 서울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장항역에 내려 장항역 근처 장항도선장에서 군산행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군산에 가서 월명공원을 살폈다. 그 이후 금남정맥 마무리를 지으면서, 오성산에 올라 채만식님처럼 사방을 조망했었다. 그때는 이곳 지리에 밝지 않아 가까운 곳 저 너머를 넘어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일러서 낙조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동서남북 사방을 살펴보았으며, 남동쪽의 익산 시가지와 그 너른 들판을, 금강 건너의 충남 서천 지역을, 금강 상류와 군산 나포 들녘을, 그리고 군산 앞에서 쫙 퍼진 금강 하구와 햇빛에 반짝이는 흙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트이고 군산이 새로 사귄 여인처럼 풋풋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그 추억의 오성산이 금강 남쪽에 선연히 능선을 이으며 금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장산로를 걷는데 서천군 마서면 일대 풍경은 막혀 있고 금강 건너 군산 지역 풍경이 열려 있다. 퍼붓는 소낙비를 우산으로 받치고 탐방한 째보선창과 금암동 일대, 경암동 철길마을, 그리고 방금 걸었던 구암동에서 내흥동으로 이어지는 금강 강변길, 진포시비공원과 금강체육공원이 분명히 확인된다. 물 위를 희롱하는 왜가리 두 마리가 보이는 듯, 갈대습지의 갈매기들과 그 틈에서 친구가 되고 싶은 왜가리와 백로, 채만식 문학관과 진포대첩 기념탑이 닟설지 않다. 미지의 길에서 낯설었던 풍경이 이제는 낯익은 풍경으로 정답게 가슴에 새겨진다.
서천군 도삼리에서 당선리로 넘어와 계속 장산로를 따라간다. 금강, 이제는 바다인 듯 강물인 듯한 물 위에 배들이 떠있다. 항구처럼 보이지 않는 물 위에 배들이 정박한 모습 때문에 항구의 풍경이 상상된다. 서천음식문화특화거리로 들어섰다. 조형물 그림판에 '라온제나'라고 적혀 있다. '라온제나'라니? 무슨 뜻일까? '즐거운'을 뜻하는 토박이말 '라온제'에 '나我)'를 합성한 낱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라온제나'는 '즐거운 나'를 뜻한다. 음식문화특화거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금강 풍경도 감상하면서 '라온제나'가 되라는 홍보문구인 것 같다. 평일이어서 음식문화특화거리는 썰렁하다. 대규모 어떤 음식점은 폐허처럼 솟아서 탐방객의 가슴에 찬바람을 일으킨다.
마서면 당선리에서 송내천을 건너면 장항읍, 갈대만 무성했던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장항읍(長項邑)이다. 장항읍 원수리로 넘어왔다. 송내천이 금강에 합수하는 원수교에서 금강 건너편이 활짝 열려 있다. 군산 시가지를 탐방한 곳이 반갑게 추억된다. 저곳을 지날 때의 감정까지 분명히 솟아오른다. 장산로 원수리 지역에는 카페 건물과 음식점 건물이 줄서 있다. 그런데 원수리라는 지명이 마음에 긴장감을 일으킨다. 元水里, 으뜸 물 마을, 금강(錦江) 때문에 이 지명이 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동명의 怨讐 때문에 복수심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마음이 곱지 않아서일까? 마음이 고으면 元首나 元帥를 떠올릴텐데. 원수리는 1리에서 4리까지 있는데, 장산로를 따라가면 4리부터 1리로 이어진다. 원수4리 장산로를 따라가면 원수4리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 길 건너편에 임해아파트와 원동교회가 있는 원수4리 중심지에 이른다. 버스정류소 안내판에 '서래야' 문자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래야'라니? '라온제나'에 이어 '서래야'까지, 서천에 들어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를 2번이나 만나니 외국에 온 느낌이 든다. '서래야'는 서천군 농산물 브랜드로서 '서천에서 온 좋은 농산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서래야 뜻을 몰라서 지금까지 서래야를 못 먹은 것 같다.
원수4리에서 장산로 장항산업단지 입구를 지나면 동백대교 못 미쳐 동백공원이 있는 새멀부락 입구에 이른다. 이곳이 원수3리로 백제왕이 제사를 지냈던 왕제산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이르는 동안에도 장산로에서는 금강 남쪽 군산 내항과 월명공원 지역이 손바닥 손금처럼 내다보인다. 원수삼거리를 지나면 동백대교 원수교차로, 그 왼쪽의 금강 쪽 강변 지역은로 예전 용당리였던 곳으로 현재는 원수2리에 속한다. 장산로에서 마을 안쪽을 살피니 동부교회 건물이 특이하게 솟아 있다. 동부교회 아래쪽 금강 강변에 용당나루가 있엇을 것이다. 채만식 소설 <탁류>의 정주사는 가산을 탕진하고 용당나루에서 배를 타고 대처 군산으로 넘어와, 군산 미두장을 기웃거리며 미두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으로 큰 딸 초봉이의 일생을 망치게 한다.
원수교차로를 지나 장산로 고개를 넘으면, 장산로 건너편에 원수1리 마을이 펼쳐져 있다. 원수1리 마을은 장항의 중심지 창선리와 이웃하여 마을 표석도 위엄있게 세워져 있다. 송내천을 건너 장항읍 원수4리에서 시작하여 힘겹게 장산로를 따라 원수1리까지 오니 긴장이 풀어지고 지금까지 빠르게 걸은 탓에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장항에서는 무너져 내리다가도 일어서야 한다. 긴 목을 빼들고 희망으로 견뎌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 장항중학교가 보이는 등기소 네거리를 지나 장산로를 계속 따라간다.
장산로 왼쪽에 기벌포횟집 상호가 보인다. 아, 이곳이 기벌포(伎伐浦)로구나. "장항은 금강의 문턱으로 백제의 기벌포의 한을 되살리고 있는 항구, 기벌포를 안 보고 장항을 볼 수 없고 백제를 알 수가 없지."(구인환의 소설 '기벌포의 전설'에서) 이 고장 출신의 소설가 구인환(1929~2919)은 기벌포를 백제 멸망의 한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 기벌포에는 백제 멸망의 통한이 서려 있다. 그럼에도 또 하나 기벌포(伎伐浦)에는 외세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성하는 작은 기쁨도 있다. 660년 7월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은 백강전투에서 이겨 기벌포에 상륙하여 부여를 공격하여 백제는 멸망한다. 기벌포에는 백제 멸망의 통한이 스며 있다. 676년 11월 신라는 기벌포에서 당나라 설인귀의 해군을 대파하여 당나라의 야욕을 물리치고 원산만 이남의 삼국을 통일한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외세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는 기쁨이 기벌포에 숨어 있다. 이 두 개의 복합적 감정이 장항 기벌포에서는 교차한다. 역사는 과거를 바타응로 미래의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벌포에서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평화를 외치면서 여전히 전쟁을 찬미하거나 지난 시절의 비극의 상처를 터뜨리는 일을 자행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다시 험난해질 것 같다.
장항읍(長項邑)의 중심지 창선리(昌善里) 기벌포를 걷는다. 장항도선장 입구로 가는 길, 나는 자꾸 허청댄다. 백제의 꿈도 아니고 신라의 현실도 아니요 고구려의 주체성도 아니다. 꿈과 현실과 주제성이 통합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감정이 자꾸 흐려진다. 그렇지만 저곳에 가야 한다. 장항도선장, 추억이 스며있는 곳, 지난 시절의 주체성과 현실과 꿈이 꽃피는 곳, 그곳에서 서해를 건너 금강 기벌포로 오르는 무수한 당나라 병사들, 그 무리를 헤치며 저 곳으로 가야 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나태주(1945~)는 이렇게 노래했다. "욕심을 내면 보이지 않네/ 마음이 어두우면 보이지 않네/ 햇빛이 내어주는 가느다란 길/ 바람이 비껴주는 비좁은 길/ 그 길을 따라 끝끝머리/ 은행나무 한 그루/ 오두막집 한 채/ 노란 은행잎 떨어져 눕는 곳/ 익은 은행알 떨어져 숨는 곳/ 따뜻한 눈길이 아니면 보이지 않네/ 햇빛과 바람이 놓아주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고 건너서."(나태주의 '막동리를 향하여' 전문) 고향마을을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처럼 저곳에 갈 수 있을까? 이제는 뱃길이 멈춘 장항도선장에서, 욕심을 버리고 밝은 마음과 따뜻한 눈길로 저곳에 갈 수 있기를, 물결 일렁거리는 금강 하구 서해 바닷물에 퍼붓는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5.3km
전체 탐방 시간 : 3시간 49분
군산시 회현면 원당마을 출신의 두재표 시인의 '옥잠화' 시비가 2022년 5월 20일 진포시비공원에 건립되어 공원에는 모두43점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 같다.
군산시 내흥동에서 2007년 6월에 개장한 진포시비공원(鎭浦詩碑公園)은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비석에 새겨 전시한 문화 공간이자 휴식 공간이다. 진포시비공원은 진포 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좀 더 나은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진포시비공원은 1.5~2.5m 안팎의 자연석과 화강석의 시비에 신석정[부안], 이병훈[군산], 고은[군산] 등 전라북도 출신 세 명을 포함한 국내 유명 시인 14명과 외국 유명 시인 6명의 작품 등 국정 교과서나 세계 시인 사전에 수록된 시 작품을 새긴 42점의 시비를 구비하고 있다. 군산시에서 조성한 구불길의 1코스 비단강길은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과 인접한 채만식 문학관, 금강 철새 조망대, 오성산, 나포 십자들 등을 둘러보는 코스로 해당 코스에 진포시비공원이 조성되어 구불길을 여행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휴식의 공간이자 군산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워즈워스의 'My heart leaps up' 詩는 대체로 '무지개' 제목으로 소개되는데, 위 번역문은 원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 볼 때마다/ 어릴 적 그랬듯이/ 내 가슴 뛴다./ 어른 된 지금도 내 가슴 뛰거든/ 이윽고 내 늙어도 그러리라,/ 그러지 않고 어이하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다가오는 나의 하루 하루를/ 모두 다 자연에의 경건으로 이어가게 하라.
나의 이 노래는/ 다정한 사랑의 팔처럼 내 아기여,/ 너의 주위를 음악으로 휘감을 것을./ 나의 이노래는/ 축복의 입맞춤처럼/ 너의 이마를 어루만질 곳을./ 내가 혼자 있을 때/ 그것은 네 옆에 앉아 네 귀에 속삭여 주고/ 네가 뭇사람들 속에 끼어 있을 때/ 그것은 고고함으로 네 둘레를 울타리 쳐줄 것을./ 나의 노래는/ 네 꿈에 한쌍의 날개처럼 되어/ 너의 마음을 미지의 땅으로 데려갈 것을./ 어두운 밤이 너의 길에 덮였을 때/ 그것은 머리 위 믿음 깊은 별처럼 되어줄 것을./ 나의 노래는/ 네 눈의 동자 속에 스며 있어/ 만산(萬象)의 가슴 속으로 네 시선을 인도할 것을./ 그리고 내 목소리가 죽음으로 침묵할 때/ 나의 노래는/ 살아 있는 네 가슴 속에서 이야기할 것을.
내 고향 앞바다에는/ 아주 궁금하게/ 여기저기 섬들이 잠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그마하게/ 노래섬이 잠겨 있습니다// 서해 난바다 큰 바람이 닥쳐오면/ 으레 그 섬 둘레에서는/ 어김없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먼 예로부터/ 큰 바람에 죽은고기잡이 혼령들이/ 큰 바람때마다 어김없이 나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며칠이고 밤낮으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런 노래섬을 바라보며/ 자라난 나에게도/ 황공하올 혼령이 늘어붙어/ 오늘에 이르도록 노래하는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간혹 숙연한 세월임에도/ 어설프게/ 어설프게만 노래하는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생명은/ 갈라졌던 힘들을 다시 합치고 태양의/ 눈꺼풀은 처음으로 깜빡이고/ 흘탕물 일으키며 춤추는 강은/ 뿌리와 조응한 나뭇잎 속/ 수액의 흐름을 따른다// 현자들은 이 순간을 알고 있다/ 모래 언덕과 열대의 숲, 바위와 진흙이/ 뜨겁게 태우지 않는 평화로운 빛으로 덮여 있는 이 순간,/ 태양이 그저 다가오는 새벽의 발치를 밝히는/ 우주의 불꽃에 불과한 이 순간을// 현자들은 신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 시간을 알고 있다/ 대양의 역류가/ 지느러미의 차가운 번쩍임으로 변하고/ 안개의 다리가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고/ 이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섞여/ 신들이 물러나며 붓을 내려놓는/ 신비로운 팔레트로 변하는 이 시간을('평화의 버전' 일부)
군산시 내흥동에 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장항선 군산역이 왼쪽 뒤에 있을 것이다.
구불1길 '비단강길'을 따라 금강 하굿둑 방향으로 올라간다. 오른쪽에 금강체육공원 보수&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금강은 군산시에 접한 하구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생태 관광지로서 탈바꿈하고 있다. 금강 철새조망대가 중심이 되어 매년 군산 세계 철새축제가 개최되고 있고, 철새체험과 철새생태를 위한 다양한 친환경 시설들이 들어서고 있다. 금강 하굿둑이 개통된 199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하굿둑 유휴 부지에 금강호 관광지가 조성되었고, 채만식 문학관, 구불길 등이 만들어져 과거 내륙 수로라는 한정된 기능을 벗어나 다양한 기반 시설을 갖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과 장항을 잇는 동백대교가 금강 하구에 놓여 있고, 왼쪽 전북 군산시에 장계산과 월명공원, 군산 내항이 어림된다. 금강 북쪽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과 장항읍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져 있다.
오른쪽 군산시 장미동 진포해양테마공원에서 출발하여 중동 서래포구마을, 경암동 철길마을을 거쳐 금강 강변으로 나와 구암교회와 진포시비공원을 지나 구불1길 '비단강길'을 따라 금강 하굿둑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내흥동에 장항선 군산역이 신설되었고, 금강체육공원에 리틀야구 전용구장, 제2야구장, 축구장, 제1야구장 등이 조성되었다.
금강 하굿둑 오른쪽에 금강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진포대첩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왜가리 2마리가 날아간다.
금강 하굿둑은 전라북도 군산시와 충청남도 서천군 사이에 놓여있는 둑으로, 교통로와 용수 확보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의 용수 공급과 홍수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1990년 완공되었다. 2007년 철도 교통로로서 군산선과 장항선이 하굿둑을 통해 연결되었다. 전라북도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를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를 따라 군산 내항으로 흘러드는 금강의 하구에 건설된 둑이다. 총연장은 1,841m이며 1990년에 완공했다. 연간 3억 6천만 톤의 담수를 공급하며 금강 하굿둑 위로 왕복 4차선 도로와 군산선 철도가 지난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원에 하굿둑을 통해 확보한 담수로 농업 용수와 공업 용수, 그리고 일부 식수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금강 상류의 토사 이동을 제한하여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밀물 때의 염수 역류를 차단하여 농지의 염해를 차단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체육공원을 돌아와서 뒤돌아 보았다. 축구장이 한 곳, 야구장이 세 곳이나 있어 군산이 야구의 도시임을 알 수 있다.
금강체육공원을 돌아나왔다. 채만식 문학관이 앞에 있고, 왼쪽 뒤에 군산스테이 관광호텔과 그 뒤의 돌산이 보인다. 돌산 뒤의 오성산은 돌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채만식 문학관은 작가 백릉 채만식의 문학 업적을 기리고 창작 저작물과 유품 등을 수집하여 상설 전시하고자 1998년 12월 채만식 문학관 건물을 착공하여 2001년 3월 10일 개관하였다. 소설 「탁류」의 무대인 금강 주변에 자리한 채만식 문학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채만식에 관한 각종 자료 및 친필 원고, 개항 100주년 자료 등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질 높은 문학의 향기를 제공하고 문화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쓰고 있다. 더불어 시민, 청소년과 호흡을 함께 하는 다양한 문학 행사를 마련하여 문학 교육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으며, 대지 면적 9,887㎡에 연면적은 533㎡, 지상 2층 규모이다. 지상 1층은 전시실 및 자료실, 지상 2층은 50명 정도의 문학 강좌와 세미나, 영상물 시청이 가능한 강의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실에는 연대기 순서로 따라가며 채만식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관련 유품과 작품 등이 소개글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파노라마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실을 따라가 보면 일제 수탈의 역사가 서린 군산의 모습과 함께 작가 채만식의 삶과 문학의 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 작품 구상 및 집필 시 향을 피웠던 향로, 그래픽을 활용한 작품 속 배경 코너, 영상과 음향 자료들이 함께 있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시 내흥동에서 성산면 성덕리로 넘어간다. 금강 하굿둑 아래 갈대습지가 형성되었다. 앞쪽에 금강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에 진포대첩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 채만식 문학관, 그 뒤에 돌산과 군산스테이 관광호텔이 보인다.
갈대습지에서 갈매기들이 휴식을 취한다. 그들 틈에서 백로와 왜가리도 친구가 된다. 오른쪽에 금강 하굿둑, 금강 건너편에 충남 서천군 마서면 일대가 자리한다. 왼쪽 산봉에 금강 하굿둑 전망대가 보인다.
금강 시민공원 남쪽 출입구 안에 진포대첩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금강 시민공원은 금강호 관광지에 포함된다.
군산시 금강호 관광지는 금강에서 철새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1990년 하굿둑이 완공된 후 백제 시대 관문이었던 금강 하굿둑과 금강 변을 찾는 많은 시민을 위하여 관광지를 조성하였다. 1992년 금강호 일대 37만 2천㎡를 관광지로 지정받았으며, 1999년에 60만 5천㎡로 확대시켰다.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금강호 관광지는 연안 도로에 인접해 있는 공원이다. 수변 공원, 금강 랜드, 채만식 문학관, 철새 조망지, 군산 리버힐 관광호텔 및 구불길의 1코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민과 관광객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993년부터 시작된 금강호 관광지 조성 사업 부지가 4대강 사업으로 일부 편입되면서 16만㎡가 개척되고 새로이 30만㎡가 추가 확대됨에 따라 예전보다 더 체계적이고 쾌적한 관광지 조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진다. 금강호 관광지와 군산 내항 사이의 공유 수면 매립지와 자연 녹지 25만 4천여㎡에 수변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금강호 관광지 금강 시민공원에 진포대첩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380년 금강 하구에서 있었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 건립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17.9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이용한 함포로 왜구 500여척을 무찌른 최무선의 진포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금강호 시민공원의 중앙 광장 옆에 높이 17.9m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진포대첩비가 서있다. 진포대첩이란 고려말 우리고장 군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1999년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인데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우왕 6년 8월 왜선 500여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이때 침입한 왜구는 최소 25,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의 장군들로 하여금 최무선이 설계한 80여 척의 병선과 역시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적을 소탕하였다.(대한민국 구석구석)
군산시는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여 진포대첩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위대한 시민정신으로 승화시켜 세계로 웅비하는 진취적 기상을 가꾸어갈 것을 다짐하며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9년 5월 1일 군산시장
최무선 장군의 화포 발사 모습, 오늘날 시민들의 평화로운 모습, 그 앞에 진포대첩 안내판과 진포대첩 기록비가 있다.
금강 시민공원 진포대첩 기념탑 앞에 진포대첩 안내판이 있다. 진포대첩 기념탑 규모와 재료, 작품 제작 기간과 작품 디자인 개요와 개념도, 진포대첩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진포대첩과 최무선의 죽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기록과 번역문을 진포대첩 기념비에 적어 놓았다.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4월 19일(1395년) 임오 1번째 기사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의 졸기
원문 : ○壬午/檢校參贊門下府事崔茂宣卒。 茂宣, 永州人, 廣興倉使東洵之子。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茂宣每見商客自江南來者, 便問火藥之法。 有一商以粗知對, 請置其家, 給養衣食, 累旬諮問, 頗得要領。 言於都堂欲試之, 皆不信, 至有欺詆。 茂宣積以歲月, 獻計不已, 卒以誠意感之, 乃許立局, 以茂宣爲提調官, 乃得修鍊火藥。 其具有大將軍、二將軍、三將軍、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等名。 旣成, 觀者莫不驚嘆。 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 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至國初, 以年老未見用, 上念其功, 授檢校參贊, 及卒, 上嗟悼, 賻以厚。 歲辛巳, 追贈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 子海山。 茂宣臨卒, 以一卷書屬其夫人曰: "待兒長, 以此與之。" 夫人藏之甚密, 及海山年十五稍識字, 出而與之, 乃火藥修鍊之法。 海山學其法見用, 今爲軍器少監
번역문 :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 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 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013)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진포대첩 기념탑 앞에 진포대첩 사적비가 있다. 진포대첩 사적을 기록한 빗돌이다.
진포대첩은 고려 우왕 6년 1380년 군산 앞바다 진포에서 고려 수군이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사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1380년(우왕 6) 8월 진포에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군산 방면으로 침입해 왔으며, 군사의 규모는 대체로 1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심덕부, 나세,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출동시켜 왜선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화전과 화통, 화포를 사용해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또 대왜구 투쟁에서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이기도 하였다. 진포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다. 지금까지 세계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격침시킨 해전으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포대첩은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 이른 것이다. 둘째, 진포대첩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포대첩으로 왜구의 기세가 크게 꺾였던 것이다. 셋째, 진포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 진포대첩으로 이성계의 황산 대첩이 가능하였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 조선왕조 개창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진포대첩은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진포대첩은 조선 수군 전술의 모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역시 진포대첩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즉 진포대첩의 전술은 200년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선진적 전술이었고, 또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 시민공원의 진포대첩 기념탑을 보고 강변로 하굿둑사거리로 나왔다. 금강로 성산육교가 금강갑문교로 이어지는 방향을 따라 왼쪽 길로 진행한다. 오른쪽 직진하는 철새로는 금강휴게소와 금강 철새조망대로 이어진다.
금강 하굿둑에 놓인 국도21호선 금강로의 금강갑문교를 따라간다.
금강 하굿둑 위에 놓인 도로는 금강로이고, 철로는 장항선 철도이다. 장항에서 왼쪽 군산역으로 이어진다. 금강 위쪽에 군산시 내흥동, 구암동, 경암동 일대가 조망되며 그 오른쪽에 장미동 군산 내항이 가늠된다.
금강로의 금강갑문교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금강 하굿둑에 가두어진 금강호가 펼쳐져 있다. 맨 오른쪽에 군산스테이관광호텔과 돌산, 그 뒤에 오성산 기상레이더관측소가 보이며, 금강변 언덕에 금강 철새조망대가 솟아 있다.
금강호는 1990년 전라북도 군산시와 충청남도 서천군을 잇는 금강 하구둑이 축조되면서 조성되었다. 금강호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큰고니 및 고니, 제325호인 개리, 제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와 기러기 등 약 15~20만 마리의 겨울 철새들이 월동하는 곳으로 철새들이 수백, 수천 마리씩 무리지어 다니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40㎞의 금강 하구를 막아 둑을 건설하였고, 방조제의 총길이는 1,841m로 1990년 완공했다. 금강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조성된 금강호는 연간 3억 6천만톤의 담수를 공급하고 있다. 금강호를 따라 조성된 공원에는 조류 관찰대·달빛 광장·금강 전망대·햇살 광장·팔각정·생태 습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하며, 금강을 따라 걷는 구불길이 조성되어 있다. 금강호는 1억 3천만 톤의 담수량을 가진 담수호를 조성하고 이 물을 충청남도 서천군, 부여군과 전라북도 군산, 익산, 완주, 김제 등 2도 3시 3군 52개 읍면 5,650㏊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를 잇는 교량 역할도 겸하고 있어 서해안 일대의 농업·공업·상업 등 산업 발전과 생활 환경 개선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로 금강갑문교를 따라 전북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에서 충남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로 넘어간다. 왼쪽 뒤 산봉에 서천 금강 하굿둑 전망대가 보인다.
국도21호선 금강로의 금강갑문교에서 금강호와 금강호 관광지를 뒤돌아보았다. 금강호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금강호 관광지의 금강 철새조망대가 보인다. 중앙 맨 뒤의 오성산과 기상레이더관측소가 분명히 들어온다.
2003년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에 조성한 금강 철새조망대는 회전식 조망센터로, 해마다 겨울이 되면 철새들이 날아오는 서해안의 넓은 갯벌과 갈대밭에 건립되었다. 금강 철새조망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철새 관찰시설이다. 철새가 깃들어 더욱 아름다워지는 금강의 경관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과 대형 P.D.P.가 설치된 철새조망대를 비롯해 생태체험 학습시설을 갖춘 금강 조류공원, 새의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철새신체 탐험관, 부화 체험관, 생태학습 체험관, 식물생태관 등을 갖추어 겨울철 자연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기획하였다. 2004년부터 금강 철새조망대 일원에서 군산 세계 철새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군산 세계 철새축제는 겨울철 금강호를 찾아오는 국제 보호종인 가창오리를 비롯해 큰고니, 개리 등의 천연기념물과 청둥오리, 큰기러기 등 50여 종 80여만 마리의 겨울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철새관찰 및 체험축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금강로 서천군 도삼리 하굿둑사거리 입구에서 왼쪽 장항 방향으로 꺾어 '장산로'로 진입한다. 오른쪽 방향은 서천군 한산과 부여군으로 이어지는 장산로, 직진 방향은 금강로를 따라 국도4호선 서천IC로 이어진다. 왼쪽은 장항선 철도이다.
장산로로 들어오면 금강하굿둑 사거리 입구에 금강 하구둑 관광지가 보인다. 오른쪽은 장항선 철도이다.
충남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에 위치한 금강하구둑 관광지는 해마다 금강하구둑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볼 수 있는 명소다. 금강하구둑은 장엄하게 흐르는 금강이 바다를 만나 품을 넓히는 곳에 만들어진 대규모 수리시설로,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잇는 교량 역할도 하고 있다. 사계절썰매장과 바이킹, 회전목마 등 놀이시설이 있는 드림랜드와 게임월드, 자동차극장으로 이루어진 금강하구둑 관광지는 식당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잘 갖추어 금강하구둑을 돌아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특히, 뒤편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면 금강 하구와 건너편 군산이 한눈에 들어와 일대를 조망하기에 그만이다. 금강하구둑 관광지 앞 강변 산책로에는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김인전공원이 있어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에게 인기 있다. 나란히 이어지는 자전거길을 따라 하이킹을 즐기는 여행자도 많다. 금강 하구를 따라 조성된 긴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햇살에 반짝이는 강변 풍경을 감상하고 조금 더 걸어 조류생태전시관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서천 국민여가캠핑장은 김인전 추모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김인전 추모공원 입구에 한반도 지도 모형에 갓을 쓴 김인전공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 뒤에 김인전 흉상이 있다.
하구둑이 개통됨에 따라 어느 마을보다 눈부시게 발전한 마서면 도삼리(道三里)는 금강하구둑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도삼리는 조선말 서천군 동부면의 지역으로 뒷산에 세 봉우리가 솟아 있다 해서 도사미 또는 도삼리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리, 대한리, 모군리 일부와 마길면 신리, 쌍연리 각 일부, 한산군 남상면의 선소리, 신아리 각 일부를 합쳐 도삼리라 해서 서천군 마동면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마서면이 되었다. 윈도삼은 도삼리의 본래 마을로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원도삼 마을 북쪽 야산 지역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는데 자세한 유적현황을 파악할 수 없으니 바닷가에 접한 야산 구릉지대라는 입지적 환경으로 보아 유적의 존재가 추정된다. 또한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도 보고된 바 있다. 여러 전언과 유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도삼리 일대는 일찍부터 바다와 관련된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예상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서천군지)
한마음 나라사랑 : 한반도 지도 상단의 갓과 장죽은 조상의 얼, 한민족을 상징. 민족 정서 함양으로 화합, 부흥 통일을 기원하면서. 장산로 건너편에 금강하구둑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경재 김인전(1876년 10월 7일~1923년 5월 12일) 선생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유지강화 등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한국 노병회를 발기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시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역에 안장하였으며, 2004년 3월 김인전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흉상을 건립하였다.(설명안내판)
군산 영명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던 김인전(金仁全, 1876-1923)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서 민족운동을 하면서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중앙에 흉상, 오른쪽에 애국지사 경재 김인선생 공적비, 왼쪽에 흉상 건립기비가 있다.
1.애국지사 경재 김인선생 공적 : 서천이 낳은 김인전 선생(1876-1923)은중국의 고전에 통달하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30대 초에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는 시기에 평양신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완포(完浦) 교회를 세워 목회자로 시무하며 구국 투쟁에 전념하였다. 그는 서천을 비롯하여 군산, 전주 등지의 학생들을 고무하여 3.1만세운동에 막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충남, 전북 일대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극심해지자 그는 1919년 이후 가산을 정리. 상해로 망명, 이곳에 있던 이동녕,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와 함께 입법, 행정 업무에 진력하는 등 광복정책을 착실히 펴나갔다. 1920년 이후 임시정부의 정원의원, 전라대표 의원, 부의장, 전원위원장과 1922년 4월 4대 의장에 선임되어 국공채발행, 인구세의 징수, 재정단 조직, 군사선전대와 무관 양성 등을 실천하였다. 행정부에서는 재무부 비서국장, 임시공채 관리국장, 재무차장, 학무총장대리차장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 임시정부지원외곽단체인 태평양회외교연구회, 대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하였고, 종교인들을 모아 대한야소교진정회, 국제연맹 만국장로교연합총회도 결성하여 구국기독교인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선생은 임시정부후원단체인 중한 호조사(中韓互助社) 시사책진회(時社策進會) 한국노병회 등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만이 유일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기관임을 강조하고 광복정책을 펴 큰 업적을 이룩하시던 중 격무와 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상해에서 1923년 48세로 순국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의 지도자 이동녕, 김구, 이시영, 김규식, 조소망, 신익희 등이 큰 인재로 평가한 바 있다. 우리 정부는 1980년 그에게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1993년 환국하여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고향 서천에 유지들의 뜻을 모아 기념비와 상을 세우고 애국과 신앙의 일생을 기리고자 한다. 2004년 3월 일 순국 8주기 국사편찬위원 문학박사 李炫熙 짓다
2.건립기 : 민족의 개화기에는 위대한 교육자요 종교인이었고 독립운동기에는 온 겨레의 정신적 지주요 등불이던 경재 김인전 선생의 순국 여든한 돌을 맞아 그의 높은 인격과 빛나는 업적을 현양하여 영원히 번창할 우리들의 표상으로 높이 모시고 행복한 미래를 책임질 모든 이에게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위대한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기 위하여 선생이 망명 전에 활동하시던 무대의 중심지인 이곳, 고금을 통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 변에 상을 세워 영세불망의 징표로 기리고자 한다. 서기 2004년 3월 16일 김인전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회
장산로 길가에 고려해도원수나세진포대첩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 건너 300m 전방에 있다고 한다. 나세 장군을 알아본다.
나세(羅世,1320년(충숙왕 7)~1397년(태조 6), 원나라의 귀화인이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였던 공적을 기록하면서 1363년 그 공적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판도판서(版圖判書)가 되었다. 1374년에는 제주도의 목호(牧胡: 말을 기르던 몽고인)들이 말의 공출을 거부하자 동지밀직사사로서 부원수가 되어 최영(崔瑩) 등과 함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교동만호(喬桐萬戶)가 되었으나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도망한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갇혔다. 그러나 다시 1375년(우왕 1) 밀직부사로서 서해도상원수 겸 도순문사(西海道上元帥兼都巡問使)가 되어 심왕(瀋王)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소식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上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는데, 이때 부령현(扶寧縣: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뒤이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 그 뒤 강화 등지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1380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전함 100척을 이끌고 진포(鎭浦, 금강 하구)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를 실전에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척을 쳐부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문하평리가 되었다가 1381년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가 되고, 1383년 해도원수를 거쳐 다시 경상도조전원수(慶尙道助戰元帥)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참찬문하(參贊門下)로 치사(致仕)하였으나, 1393년(태조 2) 다시 연해등처병선조전절제사(沿海等處兵船助戰節制使)가 되고, 1397년에는 경기풍해도서북면등처도추포사(京畿豐海道西北面等處都追捕使)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장산로에서 고려해도원수나세진포대첩비(高麗海道元帥羅世鎭 浦大捷碑) 가는 길을 올려 보았다. 진포대첩비 비문을 옮긴다.
나세(고려 충숙왕 7년·1320년~조선 태조 6년·1397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장군으로 본관(本貫)은 나주인(羅州人)이다. 나세(羅世) 장군은 고려 공민왕 12년 (1363년) 홍건적을 격파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공민왕 23년(1374) 제주도 목호(牧胡)들이 말(馬)의 공출을 거부하자 부원수(元帥)가 되어 최영(崔) 장군과 함께 제주도 목호의 난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우왕 3년(1377년) 왜적(倭賊)이 서해(西海) 강화江華), 신주(信州), 옹진(甕津) 등 연안을 침범하였으나 심덕부(沈) 등과 함께 왜적을 격파하였다. 특히 우왕 6 년(1380년) 8월 왜선 500척이 진포(鎭浦, 지금의 금강 하구)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나세 장군은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심덕부, 최무선(崔茂宣)과 함께 화포를 써서 왜적을 모두 수장시키는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서천군은 역사적인 진포대첩(鎭浦大捷)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6년 이 자리에 비(碑)를 건립하였다.
갈대습지 금강 변에서 동남쪽을 조망한다. 금강 하굿둑과 금강 철새조망대, 군산스테이관광호텔과 맨 뒤에 오성산이 보인다.
오성산은 군산시 성산면 여방리와 둔덕리에 걸쳐 있고 금강 하류에 인접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성산(五聖山)은 현의 서쪽 18리[약 7㎞]에 있다. 오성산 봉수는 서쪽으로 옥구현 점방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함열현 소방봉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오성산은 오성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지금까지도 다섯 노인의 무덤인 오성묘(五聖廟)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오성산은 성산면 성덕리와 나포면 서포리 경계에 있는 산이라는 기록과 함께 전설을 전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오성산 밑에 이르자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 나타난 다섯 노인에게 길을 묻자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주겠느냐,”라고 했다. 소정방이 이들을 죽인 후 군대를 거느리고 떠나려다 뉘우치고 다섯 노인을 산에 장사지내 주었다는 것이다. 오성산이라는 지명은 다섯 노인의 무덤을 쓴 데서 유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갈대습지 금강 변에서 군산 지역을 조망한다. 왼쪽에 금강 철새조망대, 그 오른쪽에 군산스테이 관광호텔, 그 뒤 돌산 뒤에 오성산, 중앙에 채만식 문학관, 그 왼쪽에 진포대첩 기념탑, 그 오른쪽에 금강체육공원, 맨 오른쪽에 진포시비공원이 확인된다.
오성산(五聖山)은 해발 고도 227m이며, 금강 하굿둑에서 5㎞ 정도 떨어져 있다. 군산 지역에서 비교적 높은 산으로, 다섯 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 서면 금강 하굿둑 완공으로 조성된 금강호를 조망할 수 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서천군이 정면에 보이고, 오른쪽으로 멀리 전라북도 익산시의 미륵산까지 보인다. 오성산 정상에 가면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목숨을 잃은 다섯 노인들의 무덤인 오성묘(五聖廟)가 있으며, 매년 다섯 성인을 추모하기 위해 오성 문화 제전이 열린다. 오성산 주변에서는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오성산의 동쪽 능선에는 백제식 돌방 무덤이 많이 발견되었고, 군장대학교 뒷산인 도진봉에는 조선시대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오성산 봉수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성산 봉수는 서쪽으로 옥구현 점방산에 응하고, 동쪽으로 함열현 소방봉에 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성인의 무덤 북쪽 봉우리에 오성 산성이 있다. 오성산은 정상까지 차량으로 이동이 기능하다. 정상에는 오성산 기상 레이더와 카페, 매점 시설이 운영되고 있으며, 패러글라이딩장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남 서천군 도삼리에서 당선리로 넘어왔다. 장산로 건너편에 당선리 버스정류소가 있다.
당선리는 백제 때 설림군이었다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서림군, 조선 초에 서천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조선 말 서천군 마길면의 지역으로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 해서 당산 또는 당선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쌍현리·신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당선리라 해서 마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서천군 마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선리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을 중뜸이라 하고, 중뜸 서쪽에 있는 지역을 서뜸이라 한다. 또한 중뜸 동쪽에 있는 마을을 동뜸이라 한다. 당산 남쪽에 두못치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에 마을 앞에 연못 두 개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쌍연 또는 쌍연리라고도 한다. 두못치 북쪽에 있는 지역을 당선이라 하는데, 이 마을의 이름을 갖게 한 지역으로 마을 뒤에 당산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서천군지)
충남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 장산로 금강변 갈대습지에서 남쪽 전북 군산시 일대를 조망한다. 맨 오른쪽이 구암동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과 구암교회가 있는 곳으로 구암산이 보인다. 중앙은 군산시 내흥동 역세권 아파트 단지이고, 그 앞에 진포시비공원이 있으며 왼쪽에 금강체육공원 축구장과 야구장이 있는 곳이다.
맨 오른쪽은 군산시 내흥동 역세권 아파트와 진포시비공원, 중앙은 금강체육공원, 그 왼쪽 흰 색 건물은 채만식 문학관, 그 왼쪽은 성산면 성덕리 금강 시민공원의 진포대첩 기념탑, 맨 왼쪽은 군산스테이관광호텔이다.
갈대습지 금강 변에서 동남쪽을 조망한다. 금강 하굿둑, 오른쪽 맨 뒤에 기상레이더관측소가 있는 오성산이 분명히 보인다.
이 도로명이 장산로이다. 왜 장산로일까? 서천군 장항(長項)과 한산(韓山)을 잇기에 長山路라고 명명한 것 같다. 금강 건너 왼쪽에 군산시 구암산과 구암동일대, 그 오른쪽 아파트 단지 뒤에 경암동 철길마을이 있다.
서천 음식문화특화거리로 들어간다. 그런데 '라온제나'는 무슨 뜻일까? 라온제(즐거운)+나='즐거운 나'를 뜻한다고 한다.
서천 음식문화특화거리 강변횟집 옆 레스토랑 '백악관'은 폐점된 듯 페허처럼 솟아 있다.
보스포러스는 수제돈까스와 꼬마볶음밥으로 유명한 서천맛집이라고 한다. 바로 앞에 카페촌 쉼터가 있다.
카페촌 쉼터 표석 앞에 전북 김제시 청운사 하소 백련지 백련 축제를 홍보하는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2023년 8월1일~12일까지 전북 부안군 새만금에서 개최된다.
장산로 길 옆에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공원에 월남참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평화의 의미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참전용사 조각상 발 밑에 월남참전 기념기 그리고 오른쪽에 참전부대의 문장(紋章) 명패가 그려져 있다.
월남참전기념기 :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열대의 나라 월남 땅에서 세계평화와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몸바친 명령이여, 이억 만 리 월남전에 참전하여 백전불굴의 투혼을 불태워 민족의 긍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우리의 자랑스런 전우들이여, 여기 유유히 흐르는 금강 변에 님들의 일을 위로하고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대에 길이 빛내기 위해 이 탑을 세웁니다.
비종교인으로서 신앙과는 상관 없이 '창빛' 단어가 곱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친다.
경양식집 '올리브'를 지나 송내천의 원수교를 건너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에서 장항읍 원수리로 넘어간다.
송내천 배수갑문이 오른쪽에 있다. 송내천을 경계로 동쪽은 서천군 마서면 당선리, 서쪽은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이다.
송내천은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덕암리에서 발원하여 송내리를 지나 남동쪽으로 흘러 당선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금강권역 서해권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하천연장은 4.67㎞, 유로연장 3.6㎞, 유역면적 4.86㎢이다. 하천 유역의 모양은 가늘고 긴 형태의 세장형(細長形)이며, 하천 유역 대부분은 농경지로 형성되어 있다. 하상경사는 상류부 1/2,778, 중류부 1/4,167, 하류부 1/10,000로 매우 완만한 경사를 나타낸다. 하천의 토양은 실트, 모래,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두산백과)
송내천이 금강에 합수하고 있다. 금강 건너편 왼쪽의 낮은 산은 군산시 구암동 구암산이고, 그 오른쪽에 구암교회가 있으며, 중앙 뒤쪽에 경암동 철길마을이 있다.
장산로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 건너편 오른쪽 경양식당 '올리브' 앞을 지나 송내천의 원수교를 건너왔다.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元水里)로 넘어와 장산로를 따라간다. 앞에 보이는 곳은 원수4리 지역이라고 추정한다.
원수리는 백제 때 설림군 소속, 신라 때와 고려 때는 서림군, 조선초 서천군, 조선 말 서천군 마길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수여리·원모리 굴향리 위포리 용당리를 합하여 수동리라 하여 마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8년 장항읍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원모리와 수여리의 이름을 따서 원수동이라 했다가 원수리가 되었다. 원수리는 4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수4리는 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원수산업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금강 하구둑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원모르리 · 원모노리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 주마탈안(走馬奪鮟)의 명당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순개라 부르는 지역은 마을 지형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위포라고도 한다. 안쪽에 자리 잡았다 해서 안뜸이라 하는 지역과 소치라는 지역이 있다. 건너뜸과 방줏골 또는 신뜸이라 하는 지역은 옛날 방죽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농공단지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업소득이 높은 마을로 대하, 꽃게, 실뱀장어 등이 소득원이다.(서천군지)
장산로를 원수산업도로라고 이른다. 원수4리 지역의 카페 벨리하우스와 현대오일뱅크를 거쳐 금강마리나로 향한다.
장산로를 따라 카페 벨리하우스와 현대오일뱅크를 거쳐 금강마리나를 지나왔다.
금강마리나는 선박계류경사물양장과 금강마리나 센터는 지상 4층 규모로 신축되었다. 1층에는 해양레저용품샵, 보트수리점, 레저교육센터, 레저장비 보관창고, 2층에는 스포츠센터로 헬스장, 핀란드식 최신형 월플욕조, 3층에는 25겹 정통 수제돈까스 전문점 이오카츠와 새우장덮밥, 연어덮밥, 우동 등 일본가정식 덮밥전문점 고캉이 입점하고 있으며 4층에는 한식전문점 한옥마을전주비빔밥과 카페테리아 마리나 등이 있다. 옥상에는 하늘정원이 있어 금강과 서해바다의 야경을 관망할 수 있다.
맨 오른쪽에 군산시 장미동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그 왼쪽에 진포해양테마공원, 중앙에 홍등대와 째보선창이 확인된다.
중앙에 경포천과 서래포구마을, 경포천 왼쪽에 군산 천연가스발전소, 그 왼쪽 뒤에 경암동 철길마을, 맨 왼쪽은 구암동이다.
원수4리 지역 장산로 원수산업도로를 따라 돌아나가면 원수4리 버스정류소가 나온다.
길 건너가 원수4리 중심지가 되는 것 같다. 버스정거장 안내판에 '서래야'가 그려져 있다. '서래야'가 무엇일까? 서천군의 농산물 브랜드로서 '서천에서 온 좋은 농산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수4리 마을 안쪽에 임해아파트와 원동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식품가공제조업체 (주)바다숲을 지나간다.
동백대교 끝에 장계산과 월명공원의 군산 수시탑이 보인다. 맨 왼쪽에 청록색 건물 군산근대역사박물관도 보인다.
지루한 장산로 원수산업도로를 따라가기가 힘겹다. 앞에 장항산업단지 입구가 있다.
장산로 원수산업도로 장항산업단지 입구에서 장항산업단지 방향을 바라보았다.
원수4리는 산업단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원수산업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금강 하구둑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은 원모르리 · 원모노리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 주마탈안(走馬奪鮟)의 명당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순개라 부르는 지역은 마을 지형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위포라고도 한다. 안쪽에 자리 잡았다 해서 안뜸이라 하는 지역과 소치라는 지역이 있다. 건너뜸과 방줏골 또는 신뜸이라 하는 지역은 옛날 방죽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농공단지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업소득이 높은 마을로 대하, 꽃게, 실뱀장어 등이 소득원이다.(서천군지)
수산물 가공 제조업체 안흥수산 앞을 거쳐 장산로를 계속 따라간다.
금강기맥이 장계산과 월명공원 수시탑을 거쳐 동백대교 아래로 이어진다. 왼쪽에 군산시 장미동 내항과 역사문화공간이 있다.
건너편 오른쪽 동백공원 옆에 새멀부락 입구라는 표석이 있으니 이곳은 원수3리이다. 앞쪽에 장산로 원수삼거리가 있다.
장산로 건너편 동백공원과 새멀부락을 살펴보고 지나간다.
수원3리는 구룡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구룡말은 굴항리 또는 구렁말이라고도 부르는데 왕제산 아래 자리 잡고 있으며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 아홉 마리의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룡과 홍룡으로 나누어진 이무기들은 단정하게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용이 될 때는 하늘로 올라가며 청룡 홍룡이 짝을 지어 승천했고, 맨 마지막 청룡이 혼자 남아 승천하는데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승천하는 청룡의 옆에는 선녀가 날고 엄숙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산 아래에 구멍이 나 있다고 한다. 모금애라는 지역은 모금외·가치멀이라고도 하며, 옛날 마을에 모과나무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미내미는 무네미라고 하며, 산줄기가 낮아서 이쪽의 물이 저쪽으로 넘어가게 된 주변에 자리 잡았다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있다고 한다. 세멀은 용당 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역으로, 마을에 세 봉우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삼흘이라고도 한다. 왕제산은 구룡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왕티라고도 하며 이 지역의 가장 큰 산이므로 옛날 백제왕이 내려와서 제사를 지내던 산이라 한다. 마을에 호산나 어린이집이 자리잡고 있다.(서천군지)
장산로 원수삼거리를 거쳐 동백대교 아래 원수교차로를 통과한다.
원수교차로를 통과하여 원수2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고개 아래 지역 전체가 원수2리 용당리에 속하는 것 같다. 장산로 고개를 넘으면 장항읍 원수1리이다. 왼쪽 차가 나오는 장항로 방향의 원수2리를 살펴본다.
원수2리 마을회관과 노인회관이 있는 원수2리 옛 중심지를 살펴 보았다. 동부교회 건물이 특이하게 솟아 있다. 원수2리 마을 아래 금강 강변에 군산과 교류하는 용당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채만식 소설 <탁류>의 정주사는 용당에서 군산으로 넘어갔다.
원수2리는 용당리로 불려지고 있는데, 이는 마을에 용당산이 있기 때문이며, 용당산에는 체육공원이 마련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나루터를 1931년경까지 용당나루라고 불렀다 하고, 그후 이곳에시 군산까지 도선을 운항했었다 한다. 갈바탕이라고 하면 인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민들이 드세었으나 지금은 예전과 달라 안정되고 화합이 잘 이루어지는 마을이다. 전 국회의원 김옥신씨가 이 마을 출신이며, 에베네셀 모자원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서천군지)
서천군 장항읍 원수1리로 넘어왔다. 원수1리 표석이 길 건너편에 세워져 있다. 길 이쪽 금강 쪽은 원수2리 지역인 것 같다.
원수리는 백제 때 설림군 소속, 신라 때와 고려 때는 서림군, 조선초 서천군, 조선 말 서천군 마길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수여리·원모리 굴향리 위포리 용당리를 합하여 수동리라 하여 마동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8년 장항읍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원모리와 수여리의 이름을 따서 원수동이라 했다가 원수리가 되었다. 원수리는 4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수1리는 원래 옛날 장터가 있던 마을이며 6.25 난민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장항중학교와 등기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 거주민이 50%밖에 되지 않아 타지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을 화합이 잘되고 있는 곳이다.(서천군지)
길 왼쪽은 원수2리, 길 오른쪽은 원수1리, 장산로 맞은편에 장항중학교가 보인다. 등기소네거리를 건너 장산로를 계속 따라간다.
등기소 네거리를 횡단하여 장산로를 따라와 건너편 장항중학교 입구를 지나간다.
등기소 네거리를 횡단하여 장산로를 따라 장항중학교 앞으로 와서 뒤돌아보았다. 장항읍사무소는 창선1리에 속한다.
장산로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군산을 조망한다. 왼쪽에 점방산이 솟아 있고, 중앙 뒤쪽에 군산산업단지 공장들, 그 오른쪽에 군산 외항 여객터미널이 있을 것이다.
원수2리 장산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원수1리 지역에 자리한 4층 건물 SGI(국제창가학회) 서해문화회관은 흔히 남묘호렌게쿄라고 이르는 대승불교 단체인 것 같다.
동백대교 왼쪽 끝에 군산 도선장, 동백대교 오른쪽으로 금란도와 그 뒤 해망동을 가늠한다. 오른쪽 끝에 점방산에서 중앙의 장계산능로 이어지는 금강기맥, 하얀 군산 수시탑이 솟아 있는 월명공원을 확인한다.
장항읍의 중심지 창선리로 넘어왔다. 기벌포 상호를 보고서 금강 하구를 기벌포(伎伐浦)라 이른다는 것이 생각난다. 기벌포 지명에는 660년 7월 소정방과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의 아픔과 676년 11월 신라가 당나라 설인귀의 해군을 대파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한 기쁨이 함께 있어 미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백강전투(白江戰鬪)는 660년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나당 연합군의 전투이다. 나당 연합군이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한 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백강(白江)으로 침입하여 백제군과 싸운 전투이다. 당의 고종은 백제 출병을 660년 3월에 명하고, 6월에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13만 군병을 통솔하여 정벌하러 오고,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는 우이도 행군 총관이 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660년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한 당군은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660년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군은 660년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백강 어귀에 이른 소정방은 기벌포 상륙 작전을 펼쳤는데 1차 상륙 부대는 자신이 거느리고 나머지는 군선을 타고 백강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소정방 부대는 갯벌에 버들 자리를 깔아 무사히 상륙하였다. 상륙에 성공한 소정방은 산 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전사한 백제군이 수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백제군은 당군을 맞아 강가에 둔을 치고 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패배하고 수천여 명이 전사한 것이다.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당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하였고, 백제는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군대의 철병을 간청하지만 소정방의 거절로 실패하였다. 이에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태자 효와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망하고 백제의 영토는 나당 점령군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천군 장항읍 창선1리 장산로를 계속 따라간다. 앞에 물양장 사거리에서 오른쪽은 장항버스터미널 방향이다.
창선(昌善)1리는 장항읍사무소가 자리잡고 있는 행정 중심지로 철길과 중앙로를 기점으로 바다 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마을은 백제 때 설림군에 속한 갈대밭이었으며, 신라 때와 고려 때는 서림군에 소속됐었다. 조선 초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에 편입되었다가 조선말 서천군 남부면에 소속되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가 당초 갈대밭이었는데, 1929년에 개척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그 후 1938년 장항읍이 신설됨에 따라 본정(本町) 일정목 (一丁目)이라 하였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창선동(昌善洞) 일가(一街)라 했고, 1988년 동에서 리로 변경되면서 창선1리가 된 마을이다.(서천군지)
물양장 사거리에서 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장항 물양장을 살폈다. 건너편에 군산의 금강기맥 꼬리가 금강으로 이어진다.
서천군 마량포구가 한국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곳이라는 홍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량포구의 특징 : 만과 곶이 잘 발달한 마량포구 일원은 경관도 좋을 뿐만 아니라 국내 최고의 품질과 맛을 자랑하는 서천김 양식장이 위치해 있고, 새벽을 도와 바다에 나간 어민들이 갓 잡아 온 싱싱한 해산물을 경매하는 어판장도 포구에 자리하고 있다. 매년 연말연시를 기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이곳은 오백년 수령의 동백나무 숲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백숲과 함께 연계되는 관광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최초의 성경 전래지 : 좀 더 거슬러 올라 가자면 “1816년 영국 해군 머레이 멕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순양함 Alceste 호와 Lyla 호를 이끌고 서해안 탐사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들러 해도를 작성하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건네주었다.”라는 기록이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서천군은 2004년 학계와 종교계의 고증을 거쳐 사실을 재확인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마량포구 일대를 “한국최초성경전래지로 선포”하고 마량리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와 추모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해바다에서 해가 지고 뜨는 광경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마량포구는 이제 관광지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 성경 전래지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서천군 문화관광)
장항어선 물양장 사거리가 앞에 있으며, 오른쪽은 역시 장항버스터미널 방향이다.
왼쪽은 물양장, 오른쪽은 장항버스터미널, 직진은 (신)어선물양장 방향이다. 건너편에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이 있다.
100m 앞에 장항 도선장 사거리가 있다. 장산로 건너편에 조형물이 있어 건너가 확인한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패러디한 노랫말을 바탕으로 조형화한 작품이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노동자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나/ 아서라 말아라 노동자의 아들이다/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손주 손목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작업복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2018년 마을미술프로젝트 <장항역가는 길 “SUNSET MEMORY"> 작업으로 이상훈 작가가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제작했다.
근·현대 아픈 역사 속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경제발전의 국가적 사명에서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했던 우리 역사 가운데에서도, 그 중심에는 항상 노동자로 살아야만 했던 과거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있어왔다. 본 작품은 우리의 아픈 기억 속 우리의 아버지를 기억하고자 제작하였다. 스텐레스/철/나무/우레탄 도료/ 6300x2200mm
서천군 수협을 지나 장항도선장 입구 옆에 서해랑길 55코스 종점이며 56코스 시작지점이 있다.
서해랑길 56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
거리 14.9km, 소요 시간 5시간, 난도 쉬움. 15.3km, 3시간 49분.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빠르게 걸었다.
서해랑길 55코스 탐방을 마치며 서해랑길 55·56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도선장 입구에 도선장공원이 조성되고 고가보도가 신축되어 있다.
오른쪽 경남식당은 도선장 매표소와 대기소였다. 도선장 안으로 들어가 군산 지역과 서해 바다를 조망한다.
금란도 홍등대와 그 뒤의 군산시 해망동, 오른쪽 점방산, 중앙 장계산, 그 왼쪽 월명공원의 군산 수시탑, 왼쪽에 동백대교와 군산 도선장이 확인된다.
1934년 민간 운수업체에 의해 군산과 장항 간 도선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군산시가 군산에 도선사업소를 설치하고 장항에 도선출장소를 설치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1984년 전북 군산시와 충청남도 서천군이 7:3의 공동 지분으로 금강 도선공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2001년 지방 공기업 민영화 지침에 따라 공개 매각절차를 거쳐 월명토건이 인수해 운항해 왔다. 금강 하굿둑 개통으로 인해 도선 인원의 감소로 2009년 10월 31일 운항이 중단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산업단지와 그 아래 군산 외항 여객선터미널, 서해 바다를 가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