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한국의 기도 도량 / 설악산 오세암
관세음보살 가피로 성불한 5세 동자의 동심이 머물다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해
관음 진신 친견 뒤에 불사
설악산 기암바위 속 위치
김시습·만해 스님과 인연
▲오세암 천진관음보전 처마 끝에 설악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청명한 하늘이 삿되지 않다. 삿됨 비우자 가벼워진 가을 하늘이 사뿐 앉은 게다.
길은 외길이었다. 그러나 넉넉했다.
반보 옆으로 살짝 틀면 설악에 오르는 이 내려오는 이 모두 너끈히 비껴갔다.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는 생면부지의 남남이 설악 품에서 인연으로 맺어지는 고마운 순간이었다.
길은 본디 외길이었으나 이쪽저쪽 모두를 품고 있었다.
몸만 돌리면 오르막이 내리막이 되기도 하고 내리막이 오르막이었다.
설악을 등진 사람이나 안은 이나 길 위에 놓인 객일 뿐이었다.
내설악으로 길을 잡았다. 백담사서 영시암을 거쳐 오세암으로 드는 길이었다.
백담사서 영시암까지 3.5km. 1시간 좀 넘게 걸음이 이어졌다.
길은 휘어지고 굽이치는 수렴 계곡을 곁에 두고 있었다. 계곡은 깊었고 물은 투명했다.
녹음 속 곳곳엔 때 이른 등장으로 쑥스러운 단풍이 얼굴을 붉혔다.
영시암에 이르자 지친 몸이 휴식을 청했다. 맑은 감로수 한 모금 마시고 돌아서려니,
공양주 보살님이 붙든다. 텃밭서 재배한 배추와 콩나물, 깻잎이 찬이었다.
기도객 공양미에 암자서 만든 된장 조금, 배추로 쌈을 싸니 설악의 1년이 입안에 퍼졌다.
겨우내 언 땅 속을 뚫고 나온 봄 새싹이 여름 태양을 흡수해 단비 머금고
암자 대중의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객 안에 들어오니 감사할 따름이다.
주린 배만 채울 요량이 부끄럽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제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겠습니다.”
공양게로 합장하고 공양주 보살에게 고마움을 전한 뒤 오세암까지 2.5km를 다시 걸었다.
지도상으론 1시간 10분 코스라는데, 2시간 30분이 넘게 걸렸다.
오세암 1.1km 전, 염불소리가 들렸다. 염불은 가파른 길을 올라선 까닭에 무뎌졌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진관음보전 귤색 등 아래 앉은 비구스님의 기도가 홀로 청량하다.
오세암 천진관음보전이 가을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아니, 처마 끝에 설악의 하늘이 내려앉았다. 청명한 하늘이 삿되지 않았다.
삿됨 비우자 가벼워진 가을 하늘이 사뿐 천진관음보전 처마에 앉았을 게다.
객 마음 가득 파란 하늘이 담겼다. 설악의 오세암이 기도객 마음을 잘 담는 이유가 아닐까.
오세암은 조계종 제3교구본사 신흥사 말사 백담사의 부속 암자다.
경내 오세암 연혁 푯말에 따르면 오세암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됐다.
푯말은 건봉사 본말사기 오세암편을 간추렸다.
오세암은 백두산 정맥으로부터 금강산 줄기 따라
한반도 명산의 정기가 한 곳에 어우러진 설악 품에 자리했다.
자장율사가 관음조의 인도를 받아
관음봉 아래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도량을 일으켜 관음암이라 칭했단다.
앞은 사자봉이요 뒤는 칠성 병풍암이다. 오른쪽 오세폭포와 만경대,
왼쪽 마등령과 나한봉이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면 연꽃이 활짝 핀 모양새였다.
연꽃 안에 가만히 암자 하나 덩그러니, 오세암이다.
김시습이 삭발출가한 곳도 오세암이고 만해 한용운 스님이 39세였던
1917년 의심 덩어리를 푼 곳도 오세암이었다.
오세암의 원래 이름은 관음암이었다.
오세암(五歲庵)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1643년(인조 21) 설정 스님이 중건한 다음부터라고 했다.
여기엔 다섯 살 아이가 관음보살에게 온 마음 공양한 얘기 한 토막이 전해진다.
마을은 폐허였다. 설정 스님은 경악했다. 마을은 속가 형님의 터전이었다.
스님은 황망한 맘 다잡고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품에 거둬 관음암에서 함께 지냈다.
겨울을 날 식량 준비로 스님은 암자를 비워야 했다.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기 전 혼자 있을 조카를 위해 며칠 먹을 밥을 해놓았다.
그래도 맘이 편치 않았다. 네 살 배기 아이를 혼자 두고 암자를 떠나는 게 못내 맘에 걸렸다.
“이 밥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 관세음보살)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줄 게다.”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암자를 떠났다. 장을 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조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신흥사에 이르자 밤새 폭설이 길을 막았다.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암자로 돌아가려했으나 대중들이 뜯어 말렸다.
눈은 좀처럼 녹지 않았고 스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듬해 3월,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스님은 모든 걸 체념한 채 힘없는 걸음으로 암자에 들어섰다.
그 때였다.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법당으로 달음박질쳤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며,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향기가 감돌았다.
아이는 웃었다.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줬다고 했다.
순간, 백의여인이 관음보살로부터 내려와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성불의 기별을 전하고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해 창공으로 날아갔다.
스님은 놀란 가슴을 가다듬고 부처님 전에 큰절을 올린 뒤 조카를 안아보려 했다.
그러자 품에 안기지도 않은 채 아이는 승천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법당 작은 상에 놓여있던 책장에 눈길이 갔다.
스님이 집을 비운 딱 그날만큼 책은 찢겨져 나가 있었다.
그 날부터 스님은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 성불한 다섯 살 동자가 예 있노라며.
고 정채봉 동화작가의 동화 ‘오세암’ 모티브가 된 설화이기도 했다.
동화 오세암은 감이와 길손이 얘기다.
감이의 눈은 엄마가 걸음마도 못하는 동생 길손이를 불길 밖으로 구한 뒤 당신이 타들어 갈 때,
그 때 닫혔다. 앞이 안보여도 감이는 괜찮았다.
늘 손을 잡고 걷는 길손이가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길손이처럼 따듯하게 세상을 말하는 사람도 없어서다.
길손이는 빨간 단풍잎 좋아하는 누나에게 예쁜 누나 손을 닮았다고 말했다.
개똥지빠귀를 만나 슬프게 노래한다며 새들 노랫소리도 전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 향기도 가르쳐준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병아리 가슴털 같이 뽀송뽀송 털이 났어.
저기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보다. 그치?”
문득, 길손이는 수행하러 관음암으로 향하는 스님을 따라나섰다.
마음의 눈을 떠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엄마를 보고 싶어서였다.
떠나는 날 길손이는 뒤를 돌아보며 감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감이 곁 스님이 길손이는 이미 떠났다고 했지만 감이 눈엔 손 흔드는 길손이가 보였다.
감이는 길손이가 어떻게 관음암에서 지냈는지 몰랐다.
다만, 눈이 몹시 많이 내리던 날 길손이와 떠났던 스님만 따뜻한 봄과 함께 돌아왔다.
스님과 관음암을 찾았다. 길손이는 누나보다 엄마를 먼저 만났다.
뺨을 어루만져주고 안아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관음보살 품에 길손이가 안겨 있었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니라.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이 아이의 순수함이 세상을 밝게 비추리라.”
▲동자전 5세 동자상.
길손이가 떠올랐다. 동자전 옆 감로수 위 동자승 조각에 유난히 시선이 갔다.
접은 좌복 위에 얹은 손을 턱에 괸 동자와 엎드려 경전 펼쳐놓고 웃는 동자,
책상위에 경전 쌓아두고 딴청 피우는 동자, 빨래하는 동자, 목탁 치는 동자….
모두 길손이처럼 보였다. 동자전에 올랐다. 연꽃좌대 위에 앉은 5세 동자에게 물었다.
절절함이 무엇이냐고. 염원(念願)이었다. 곧 마음에 품고 익히는 절절함이었다.
무언가를 가슴 깊이 마음을 다해 부름이다. 한 티끌 탁한 마음은 절절함이 허락지 않는다.
길손이가 엄마를 볼 수 있었던 이유이리라.
법당 겸 요사로 쓰이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오세암’ 편액과 마주했다. 합장 반배로 참배다.
오세암은 관음봉과 옛 법당 일직선상에 위치한 삼대 사자봉을 빗대 3명의 부처님이 나온다 했단다.
5세 동자 이후 아직 그 소식이 없다. 길손이의 말이 떠오른다.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그치?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까 부처님은 꼼짝도 않고 있는 걸 거야.”
기와불사 화주 만공심 보살은 가피가 별거(?) 아니랬다.
생활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감사함이 가피라는 말로 들렸다. 그 역시 관음보살 가피를 얻었다.
10년 전, 그는 걷질 못했다. 빨래도 설거지도 밥도 하지 못하고 앓아 누워있었다.
병원에선 목뼈에 이상이 있으니 약을 건넸다. 약으로 버텼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집에서 100일 기도에 치성을 드렸다.
기어 다니면서 관음보살을 부르짖었다.
어느 날 하얀 옷 입은 관음보살이 양손에 주사 6개를 들고 찾아와 그의 몸에 약을 주입했다.
악업이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딱 100일 만이었다.
남편을 출근시킬 수 있게 됐다. 걸을 수 있게 됐다.
평소 설악산 오세암, 봉정암 등지에서 기도를 해왔던 터라 하얀 옷의 관음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오세암 천진관음보전의 백의관세음보살. 그는 오세암에 남은 인생을 부리고자 마음먹었다.
▲ 동자승 조각상들.
천진관음보전 맞은 편 범종각 관음보살이 동자의 합장한 마음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둥엔 환희에 겨운 동자들이 피리를 부르고 연꽃을 들고 천상의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이 일었다. 범종각 풍경도 춤을 췄다.
천진관음보전 백의관세음보살 앞에 무릎 꿇은 한 비구스님이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천수다라니를 독송했고, 관세음보살 정근이 이어졌다.
멀찍이 앉은 한 보살의 염불이 뒤따랐다. 백의관세음보살 앞 촛불이 춤을 췄다.
스님과 보살의 염불공양에 백의관세음보살이 미소짓는 게다.
가만히 환희에 젖는 모습이리라. 흔들리는 촛불에 드나드는 바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오세암 나서 길, 외길이었다. 기도처를 찾는 객 마음도 외길이었다. 그래도 넉넉했다.
비구스님과 한 보살의 염불이 내설악 전체를 너끈히 장엄했다.
오세암, 관음의 품에 안겨 다음 부처님을 기다리고 있는 다섯 살 동자의 천년 세월 기다림이 익어간다.
2012. 10. 03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