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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에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확정 짓자
오동춘<흥사단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애국가를 지은 순국애국자이다 남북 칠천만 겨레가 존경하는 짚신겨레의 스승이다 열여섯 살 때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 나서 일본과 청국이 우리 나라 평양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왜 이 두 나라가 우리 한국에서 싸을까? 우리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도산은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힘 있는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애국심과 주인정신이 강한 도산은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1978년 11월 9일 평양 강서에서 태어나 어러서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엄한 유교교육을 받으며 서당 한문을 배웠다 15세까지 농촌 생활하고 16세에 서울로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밀러학당>에 입학했다
기독교 신자가 되어 신학문을 익히며 밀러 선교사에게 노래짓는 법을 배웠다 학교릏 졸업하고 할아버지가 정해 준 신부 이혜련과 제중원<현세브란스>에서 결혼하고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며 하와이 근처에 배가 갈 때 배 갑판에서 산봉우리를 보고 조국독립을 바라는 신념과 희망을 깊이 느끼며 스스로 아호를 도산<島山>.이라 지었다 24세 천년 때 일이다
1902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미국사람집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한국교포들이 너무도 무지하여 교포교육을 하며 교육학을 전공하려던 유학의 꿈은 포기했다 스스로 노동현장에 뛰어 들어 과수농장에 귤 하나를 따도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고 교포들에 가르쳤다
미국인 일본인보다 더 교양이 있고 잘 사는 한국인을 만들기 위해 도산은 청소지도를 하며 교포들의 단결과 안전생활 그리고 교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1904년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었다 이어 대한인국민회도 만들어 교포지도에 힘을 쏟았다
도산이 미국에 5년 있는 동안에 나라는 1904년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공사 하야시와의 사이에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나라에 고문정치가 생기고 보호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터 놓았다 이듬해 을사늑약이 일제와 체결되어 나라는 외교권을 뺏기고 사실상 나라의 주권도 상실 상태였다 이런 나라의 위기를 본 도산은 1907년 2월 20일 나라를 건지는 애국비밀단체 신민회 조직차 인천항을 통해 귀국햇다
도산은 먼저 경의선 철로변에 일제에 의한 민간피해를 살펴보고 선천 민심도
살필겸 1907년 3월 경칩무렵<3월 7일> 선천 예배당에 들렀다 그 때 예배중에 “백두산과 두만강이 마르고 닳도록‘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곡의 찬미가 노랠 듣고 애국가 창작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 길로 평양에 올라가 이틀씩 금식 기도해가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배경으로 기승전결법 구성으로 4절까지 <애국찬미가>를 지어 선천예배당에 보냈다 교회는 물론 선천일대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것이 도산이 지은 애국가 원형이 된다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미국에서 온 안창호씨가 서서 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과 3월 18일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도산이 지은 애국가를 합창한다는 기사가 나 있다 도산은 1908년 자신이 교육으로 나라 건지기 위해 세운 대성중학교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열심히 가르치고 우렁차게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꿈 푸른 청소년들에게 도산은 교장으로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는 말씀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삶에 대한 교육을 했던 것이다
도산은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있을 때도 매 조회때마다 다른 애국지사들과 함께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상해에서 큰아들 안필립에게 애국가를 잘 부르라고 편지도 했다 그리고 1913년 5월 13일 8도대표를 모아 애국단체 흥사단을 조직하고 행사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다 2013년 5월 13일로 흥사단 창립 100주년을 맞는 흥사단은 “민족을 위한 100년 세계를 향한 100년”으로 표제를 정하고 그 행사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흥사단은 창립 100년을 맞은 지난해까지 애국가를 경건하게 불렀으며 2014년도 101주년 흥사단대회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경건하게 불렀다
1955년 주한 미대사관 요청으로 문교부는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작곡자 안익태로 통보해 주려다가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애국가 지었다는 사람이 많이 나와 정부는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밑에 액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그해 4월 4일부터 두 달간 조사했다조사위원 19명 주에 친일파가 절반이 넘었다 그 결과는 안창호,윤치호,최병헌,김인식,민영환 등 다섯 사람을 애국가 작사설 후보로 내세우고 모두 결정적 증거가 없으므로 애국가 작사자는 작자미상으로 결론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간 일제 내선일체에 적극 협력한 윤치호 친일인사가 애국가 작사자로 결정적 근거도 없이 선전해 왔다 흥사단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흥사단에서 애국가작사자를 조사 연구해 보니 독립운동가 윤형갑<1904-1961>청취증언 및 선천예배당 김정수<1894-1976>권사의 목격증언의 채록CD에 의하면 도산이 애국가를 창작한 동기와 상해에서 도산이 애국가 원작자는 도산 자신으로 밝힌 도산 말씀의 증언 공개로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이 밝혀졌다 도산은 애국가는 한동안 원작자도 밝히지 말고 자유롭게 민중이 가사를 바꿔가며 민요로 정착될때까지 가만 놔 두라는 도산의 말씀을 윤형갑이 직접 상해에서 들었다 미국의 민요 클레멘타인 민요처럼 민중 속에 널리 불러지게 가만 두라는 말씀이 도산 안창호선생의 당부였다 애국가에 대한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도 내렸다 윤형갑 독립운동가나 김정수 권사는 1957년 여름 윤정경<1936년생> 종손에게 말하여 애국가에 대한 증언이 채록되어 있다
또 도산의 비서실장을 상해에서 3년<1929-1932>지낸 105세의 구익균옹이 상해에서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말씀을 직접하셨다고 동아일보<2011.10.25>기자에게 밝혔다 이와 같은 결정적인 새 증거에 의하여 애국가는 도산이 지은 것이다 “밥을 먹어도 독립운동 잠을 자도 독립운동 나는 죽을때 까지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제 검사 질문에 대답한 도산은 60 한평생 독립운동만 하다가 1938년 3월 10일 경성제대 부속병원<현서울대병원>에서 순국했다 순국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애국가를 정부는 속히 공식 발표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윤치호의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안민석 의원 김준혁 한신대 교수,혜문 스님 등
일행이 2014년 1월 31일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에머리대학을 찾아 갔다 그 대학 도서관 직원이 보여 주는 윤치호가 쓴 애국가 붓글씨 가사지를 봤다 전면에 윤치호가 1907년에 썼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후면에 이 붓글씨는 1945년 9월에 쓴 것을 윤치호의 세째딸 윤문희가 자기 아버지 모교인 에머리 대학에 기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1955년도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에 윤치호의 사위요 윤문희의 남편인 서울대 정광현 교수는 자기 내자를 포함하여 이 애국가 가사지는 윤씨 가문 기념으로 써 달라는 자녀들의 권면에 따라 권유에 따라 1945년 10월 윤치호의 임종무렵 쓴 것임을 서면으로 밝혔다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인 황의돈 교수가 고서감정법에 의해 밝힌바 10년 전후에 쓴것으로 판명되어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에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치호 애국가 붓글씨가 마치 애국가 원본인냥 대중매체를 통해 선전하고 애국가 작사자가 친일거두 윤치호로 주장해온 것이다
안민석 의원 일행이 도산 안창호 선생 맏따님 안수산 여사와 외손자 커디도 만나보니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이 틀림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찾아간 에머리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애국가 가사지는
1907년에 쓴 것이 아니고 1945년 9월에 쓴 것으로 밝혀져 있었다 혜문 스님이 찾는 우리 문화재는
아니고 에머리대 졸업생의 한 습작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학 도서관에 윤치호가 60년간 쓴 일기
어디에도 애국가를 지었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미국 군인 하지 중장에게 쓴 편지는
한국은 광복을 맞았으나 행정 능력이 없으니 미국 영국 관리를 쓰라고 권면하면서 친일파를 옹호해
달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쓴 편지는 역시 친일파를 고려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더라 했다
1945년 9월 광복 한달도 안되어 친일파 척결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 날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유족들이 80세가 넘은 고령의 윤치호에게 친일 면제부라도 될까 하여 윤치호가 1908년 6월 25일자로
발행한 역술 찬미가 14번의 애국가 가사를 보고 붓글씨 애국가를 쓰게 했을까 그런 행동에 얼마나
애국의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안민석 의원은 2014년 2월20일 국회 제1간담회실에서 말했다
윤치호측은 찬미가 1번 황실가 10번의 무궁화가 14번의 애국가는 윤치호의 역술이 아니고 저술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14번의 애국가 가사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틀씩 금식 기도하고 지은 애국찬미가를 가사 일부를 변조하여 찬미가에 옮겨 실은 것이다 4절에 도산작 "정성을 다하여"를
"임금을 섬기며"로 바꾸어 황제충성가로 고쳐놓았다 도산 안창호의 주권재민 혁명가 애국가를
황제충성가로 바꾼 것이다 찬미가는 역술책이요 거기 애국가는 맞춤법도 틀리고 가사도 변조되어
도저히 윤치호 작으로 볼 수 없다 1896년 10월 21일 독립신문만 봐도 독립문 정초식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무궁화가는 결코 윤치호작이 아니다 1896년도 밀러학당 학생이던 도산 안창호가
노래짓기 공부하며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보도된 윤치호의 국민가도
해외 독립운동 중에 있는 안창호와는 아무 관게가 없다 윤치호는 점진가,거국가 등 100여곡에 가까운 노래말을 지은 안창호의 가사창작 실력을 따라 올 수 없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한일협약에
일제 하야시공사와 고문정치를 펴는 내용을 보고도 서명한 친일의 서곡을 보인 윤치호가 1907년
고종이 유폐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그 어지러운 정국에 윤치호 머리에 애국가에 대한 시적 영감이
떠 올랐겠는가 김인식 선생은 1909년 여름에 1906년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비로소
애국가를 자신을 통해 교육했다고 한다
윤치호가 한 때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사장 등을 잠시 지내며 민족진영 지도자가 되었으나 일제가
윤치호를 변절시키기 위해 105인 사건 주모자로 체포하여 2심에서 6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던 중에
일제의 각본대로1915년 2월 13일 변절을 전제로 윤치호는 석방 되었다 석방 일제 30년 국방헌금을 내가며 일선동화,황민화정책협력,전시동원체제협조 등 일제에 최대로 충성하여 일본 천황이 임명하는 칙선의원으로 일본귀족원 의원의 호사를 누렸다 그의 일본 이름 이토오치카우는 광복 이듬해 7월에 가서야 한국 호적으로 복귀 되었다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이 다가 온다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거론되는 안창호,윤치호,최병헌,김인식,민영환 중에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에 몇년간 연구 결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여러
객관적 자료나 순국애국자로서 심층적 온 겨레의 증언에 의해 도산 안창호로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한글세대가 바른 민족정기를 배우게 해야한다 지난 7월 12일 엣스비엤스<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방영 했을 때 애국가 작사자가 신비에 가려 있지 않고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임을 국민은 시청하고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남은 친일파의 입김이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행위는 없어야 하겠다 이제라도 친일파 후손들은 자성하고 선조의 친일을 국민 앞에 사과하는 것이 바른 도리가 될 것이다 2015년 역사적인 광복 70주년, 흥사단 창립 102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순국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액국가 작사자임을 정부는 나라 안팎에
크게 공인 공포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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