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규암 수북정 인연 - 2025.09.30.
수북정 마루에 걸터앉아 댓돌 위 신발을 신으며 집에 가자고 아내를 재촉하는 중에, 멋진 수염을 가진 건장한 사내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자신을 서각사 진원 불일 스님이라 소개한다.
자온대는 백마강으로 소중한 생명을 포기하는 아픈 곳이라며 세월호와 이태원과 무안 공항의 안쓰러운 영혼을 위해 백일 기도했다는데, 괜스레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 눈을 피하게 된다.
뜬금없이 매향을 아느냐고 묻기에 해남에서 인연을 맺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했더니 매향차 한 잔을 주겠다는데, 설마하니 그 귀한 걸 공짜로 줄 리가 있을까 하여 일정한 거리로 애를 쓰는 중이다.
아내가 대뜸 고맙다면서 따라나선다. 스님과 동행인 변강쇠 기운의 처사는 청양 사람으로 매향 나무의 주인인데, 스님의 활동에 감동하여 바닷물에 천년을 인고한 향나무 향을 대접하려고 왔다고 한다.
대패로 깎아 낸 매향을 뜨거운 물에 우린 차를 열 잔이나 쉼 없이 마셨다. 짙은 향은 향나무 진액의 것이고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은 물이 가진 그 맛뿐인데, 익히 들었던 신비한 기운과 효능은 모르겠다.
매향차의 대가는 시간이었다. 스님이 예견한 일들과 걸어 온 세월을 경청하는 것이었는데, 더불어 투신하는 어리석은 중생을 행정력으로 구제하자는 유튜브 선언문을 모두 시청하고야 끝이 났다.
스님은 첫눈에 내 직업을 어림짐작하고 매향과 매향비 사연을 꺼내면서 인연을 이야기했다. 청양 처사를 미륵이라 부르며 매향의 진가를 아주 높이 평가하는데,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