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의 맛
자주 불합격했다. 모양이 엉성해서. 매무새가 나빠서. 세게 쥐어 짓무르고 버리는 것이 많아서. 과일을 깎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과일을 깎는다는 것은 칼을 쓰는 일이고, 도구와 친숙하면 좋을 일이었으나 주변 누구도 내가
함부로 칼을 만지게 두지 않았다. 식도는 물론이고 날이 한 뼘이나 될까 하는 과도에도 그랬다. 그렇게 숙련이
어려운 환경에 꼼꼼하지 못하고 급한 성질이 거들었다. “아주 반은 버리네.” 과육이 달려 두툼한 껍질을 들어
눈높이에 갖다 대며 놀렸다. 누구는 심각한 얼굴로 “아깝다, 아까워.” 혀를 찼다. 불합격 선언이었다.
점수가 정해지지 않은 일에서 잘하고 못함이란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마는 과일 깎는 일은 더욱 엄격한 데가
있는 것 같다. 쟁반을 둘러싼 모두가 합 불합을 반드시 나눠야 한다는 듯 판단을 하게 된다. 드라마에서도
그러잖아. 과일 깎는 일로 사람 간의 교제를 허락하기도 불허하기도 하고. 그런 가름이 되는 게 이상했다.
과일 깎기가 왜 기본 소양일까? 과일 깎기는 내 보기에 기술이었다. 훈련뿐 아니라 재능이 관여하는 칼잡이 기술.
과일 깎기에 영 재능이 없는 나는 차라리 감자나 양파를 깍둑깍둑 써는 일이 좋았다(채소는 과일보다 얌전한 면이
있다).
과일을 제대로 깎는 일은 무엇일까. 일정한 속도로 칼을 밀어내는 기술은 이해가 쉽다. 그런데 과일의 껍질을 얇게
벗겨 예쁘게 두는 것이 왜 잘 깎는 일이 될까? 예나 지금이나 과일이 귀하고 비싸서 그런가 싶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전부 먹도록 해야 해서. 그래야 아깝지 않으니까. 그러니 나처럼 반이나 버리는 꼴에 탐탁지 않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불합격을 선고받고 여러 번 칼을 빼앗겼다.
엄마는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과일을 몹시 잘 깎았다. 육류를 정형하는 기술자처럼. 요령을 발휘해 순식간에 껍질과
과육을 분리했다. 단단하게 박힌 씨를 도리고 나면 버릴 것이 거의 없었다. 깎아낸 사과의 껍질이 종잇장처럼 얇아
어느 때는 뒤가 비쳐 보이기도 했다. 엄마의 과일은 얇은 여름옷을 입은 것 같아. 물론 내 과일은 둔한 패딩이었다.
숙련된 기술이 주는 안정은 놀라워서, 엄마의 과일 깎기를 멍하니 보고 있곤 했다. 엄마의 과일은 어디를 가도
누구에게 보여도 합격이었다.
과일에는 나름의 부위가 있다. 생선은 머리와 꼬리가 맛있다는데 과일은 영 그렇지 못하다.
꼭지와 배꼽보다 몸통 중앙이 맛이 좋다. 물론, 모든 과일의 특성을 고려한 이야기는 아니다.
과일의 당도를 재는 방법은, 과일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투과한 빛의 굴절된 정도로 당도를 측정한다.
꼭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같다.
머리와 꼬리, 꼭지와 배꼽, 껍질과 씨 부근처럼 나에게도 부위가 있다. 곤충처럼 머리, 가슴, 배로 몸을 나누는
이야기는 아니고… 영혼이나 마음의 부위다. 몸보다 더 안쪽에 나의 좋은 성질과 덜 좋은 성질이 있다. 온순하고
부드러운 감상과 딱딱한 냉담이 있다. 깊은 사려가 있고 얕은수도 있다. 다정이 많지만, 나의 다정은 측정이 가능한
당도가 있다. 덜 달고 더 달기도 하다. 나는 내 마음의 부위를 약삭빠르게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 앞에서는 겉치레를
하고 적당히 나쁘지 않은 인정을 건넨다. 어느 때에는 아주 특수하고 적은 속을 꺼낸다. 가장 중심의 것은 잘 내어주지
않는다.
마음도 과일도 중심을 내어주는 것은 사랑 앞에서다. 잴 것 없이, 대어볼 것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랬다. 어느 날
놀러 온 친구에게 대접하려 여러 과일을 깎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은 일이 있다. 평소보다 칼을 깊게 넣어 깎은
과일의 가장 달콤한 부분을 친구의 그릇에 담았다. 맛이 덜하고 딱딱한 가장자리는 내 그릇으로 슬그머니 옮기거나
친구가 보지 않는 틈에 재빨리 집어 입에 넣었다.
“너희 집에서 먹는 과일은 늘 맛이 좋아. 어디서 사? 나도 좀 알려줘.”
친구의 볼이 동그랗게 불러 있었다.
‘바보야, 그건 내가 제일 맛있는 부분을 너한테 주기 때문이야.’
속으로 새침하게 핀잔하다 떠오르고 말았다.
엄마가 쥐여 준 수박 조각이 빠짐없이 붉었던 것이. 오직 나에게만 미숙하던 불합격의 달콤한 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