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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문화관광해설사
 
 
 
카페 게시글
내지역 행사 & 축제홍보 스크랩 자신의 무덤자리까지 친구 부친에게 내어준 우정이 깃든 영천 광릉
전민욱 추천 0 조회 22 10.08.31 15:5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운영진이 팝업,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당신은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이런내용의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경북영천 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묘 광릉에서  700년전 광주이씨 이집과 영천최씨

        최간도  두사람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간직된 곳을 방문 하였습니다.

 

        유안진의 <지란지겨를 꿈꾸며 >,

        다정한 벗을 찾기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멀지 않다  (톨스토이)

        친구란 두 신체로 겹쳐진 하나의 영혼이다(아리스토텔레스)

        친구를 갖는 다는 것은 또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그라시안) 

        이렇게 친구란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사람부터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까지

       진정한 친구를 갖는것을 원한다.   


 

        오늘  그 진정한 친구에 대해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사연을 남기고 있는 실제 장소를 여행하고 왔다.

        그곳이 바로 경북 영천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묘인 광릉이었다.

 

        영천시내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들어서니 수백년된 송림으로 둘러쌓인 명당자리가 

        나타나고 2기의 분묘가 나타났다, 그아래에는 제향을 올리는 추원재가 고즈녁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친구, 우정에 대하여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야기중에 이런사연을 가진 이야기는 처음인것 같아

         많은사람들이 읽고 , 이곳을 방문하여 참 친구가 어떤것인지를 느끼게했으면 하고 적어봅니다.

                                  

      

       광주 이씨 족보에 있는 내용을 스토리 텔링 형식으로 리모델링하여 써보면 다음과 같이 될것이다.

,

      광주 이씨 조상들은 신라 칠원(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일종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칠원성의 이자성 후손들은 신라-고려 전환기에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하여 끝까지 항거하였다.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칠원성을 함락시키고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재의 경기도 광주)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묘소아래 추원재와 관리사무소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 지방의 노비 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었 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 중에 이당(李唐)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후손들이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사간 최원도 어머니 묘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이당(李唐)이 주인인 원님의 딸과 혼사를 맺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택일을 하고 혼수준비를 하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고 말을 하니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 원님에게 알렸고

      원님은 용꿈의 신통함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살면서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어려서부터 주위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

         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중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 에게 까지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몇 달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 날 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 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 할 것을 다짐하였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되었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금도 지내준다고 한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었다.

 

            생사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그 후손들 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조선 왕조 선조 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 한일이 있었고 이때 조상을 구해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해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둔촌에게 드린다.     (사간 최원도)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여 눈물로 옷깃 적셨는데

                         유리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까지 달했노라.

                        한산은 멀고 멀어 운연만 아득한데

                        나현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도 그윽하구나

                        앞뒤의 그대와 나 두사람의 마음을 알것인가

                        바라건데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이 이단금 토록 하자구나.    

             

 

 

                                                                              추원재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하나의 인생을 갖은 것이다.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은 우정이다라고 느껴본다.

 

 

            여행정보

           1. 위치: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

            2. 전화: 영천시문화관광과 054-330-606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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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8.31 20:41

    첫댓글 영천방에 그득하게 지식이 쌓였네요...
    이케 쌓이도록 뭇들여봤네요........

  • 11.05.03 11:31

    요즈음보기드문글임니다 친구참좋은인연이지요 충북단양군 문화해설사로서잘읽고 감니다
    꼭한번 가보고십습니다 단양오시면 물론잘안내도 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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