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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욱입니다.
서울에 있는 벗들과는 가끔 E-Mail로 소식과 좋은 글들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곳의 친구들은 마음뿐 늘 궁금하기도 했는데, 오늘 마산의 정광수 동문에게
주소록을 얻게 되어 그리운 벗에게 첫 편지를 보냅니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 이제 고향과 벗들에 대한 생각은 가을풍경 처럼 깊어집니다.
그래서 지난 주 서울 동기들 모임에서 나누었던 고향다녀온 얘기들을 정리하여 재경친구
몇몇에게 보낸 메일과 제가 고향에 대한 단상을 스케치한 '잡글'한편을 덧 붙였습니다.
삼가 오랫만의 안부로 보냅니다. 어떻게 사시는지 때론 궁금합니다.
청명 한식을 지나 4월 초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도착해서 석전동 木瓜堂( 은사 양재인 선생님의 호) 어른을 먼저 찾아뵙고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일흔 다섯의 연세에도 愛酒豪飮의 호방함은 예와 다름 없었습니다. 그만큼 건강하신게지요.
나중의 우리도 그러하겠지만 다만 노년의 외로움을 정원의 꽃과 나무, 토끼기르기로 달래시는 듯
하였습니다. 제가 35년전 선생님께 배운 도연명의 '飮酒' 5편의 첫귀절을 읊었더니 당신은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전장을 유장하게 낭송하시는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주셨습니다.'결려재인경...'으로
시작되는 유명한 詩이지요
.
저녁에는 오랜 고향지기의 벗들과 늦은 시간까지 세월과 인생을 희롱하며 술잔을 기울였지요.
이틑날엔 고교시절 다니던 성당과 퇴역한 노신부님을 찾아뵙고 큰 절을 드리고,이미 고인이 되신
주교님과 본당신부님의 고성 묘역도 참배하고 돌아 왔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이제 우리의 나이에
고향을 찾아보고 돌아 오는 길은 예와 달리 흉중이 무겁고 깊은 상념에 젖습니다.
귀경길 차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모아 수필 한편을 써 월간 문예지 원고 청탁에 부쳤습니다.
살아온 족적을 소개해 달라는 주제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 횡설수설입니다.아래에 붙여 봅니다.
객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동문들의 고향에 대한 생각은 여러가지 느낌일 것입니다.
모천회귀(母川回歸)
노 화 욱
오십의 나이를 넘어서야 깨달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릴때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이라는 것. 지금껏 국내외 출장여행도 다니며 별별 산해진미를 맛보았으나 이제와서 알게된 것이 당신이 해주시던 고향음식만 못하다는 결론이다. 엄마가 만든 장맛과 손맛의 조화는 평생의 전설이다. 망각의 나이,다른것들은 하나 둘 잊혀져만 가는데 가장 오래되고 편안한 이 '참맛'의 기억은 세월이 갈수록 대뇌의 심층부에서 생생히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진정 아름다운 경치가 바로 '고향의 산하'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대문을 나서면 언제나 눈앞에 펼쳐지던 앞산과 뒷산의 모습과 부드러운 스카이라인ㅡ이 유려한 선과 색조는 미처 깨닫지 못한 운명처럼 나의 정서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뿐만아니라 집앞의 작은 개울과 푸른 바닷가에 펼쳐지던 사계절의 정경들은 비록 빼어난 승경이 아닐지라도 아직 내 마음속에 살아 설레는 첫사랑같은 그림이자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품이다.
모천회귀(母川回歸) ㅡ 성(聖)스러운 말이다.
그리고 요즘 내가 붇들고 고심하는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남대천에서 부화된 연어새끼는 동해바다를 헤엄쳐 멀고 먼 알래스카의 북양에 까지 가서 산다. 그러나 그 기나긴 여로의 마감은 정확하다. 자기가 태어난 지점이다. 또한 그곳은 제 어미의 무덤이기도하다. 섬진강 민물장어의 일생 또한 필리핀 남쪽의 심연(深淵)까지 이어지는 긴 여행이다. 종착역은 역시 고향의 강이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도 성스러운 자연의 법칙인가? 이 불가사의한 '생명의 윤회'앞에 숙연함을 느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아직 실행에 못 옮기고 있다. 혼탁한 도시의 삶에 오염되어 한낱 물고기만도 못한 미물이 되버린 것이다.
오염된 삶의 기억은 진부하나 이제 달관한 고통이다.
분단과 냉전의 역사는 현실의 삶에서 나에게도 불행한 운명으로 다가왔다. 몰락한 집안의 생업을 위해 많은 고통의 인내와 희생을 필요로 했다. 한때는 예술가와 성직자의 길 사이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과 방황도 있었다.
군 제대 후 현대그룹의 입사는 꿈을 접은 현실과의 타협이자 사투(死鬪)의 시작이었다.
일년에 두번의 국경일, 격주에 한번 쉬는 일요일마저도 달력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사내식당에서 밥먹고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잠자며 밤낮을 잊고 일에 매진했다. 알고보니 아예 출퇴근이 없는 놈은 나와 경비견 뿐이었다. 그때는 참 '개'처럼 일했다. 이 미련한 승부욕 때문에 동료들 중에 언제나 먼저 승진을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조국근대화'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도무지 피로를 모르는 '야근중독증'이 미련한 집단에 급속히 전염되어 나의 인사부서 조직 뿐만이 아니라 현대중공업은 '중노동 저임금'을 무기로 마침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 듯하다.
울산의 조선소 근무 7년만에 기를 쓰고 이천의 창업하는 반도체 회사로 옮겨 왔다. 그러나 내 인생은 그야말로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졸지에 경박단소(輕薄短小)해졌다. 반도체 회로처럼 미세한 기업문화를 내 뜻으로 창조하고 내 손으로 개척해 나갔다.보람도 있었다.
'현대전자'와 오늘의 '하이닉스'시절 21년은 얼음장같은 현실에 활화산같은 열정으로 살아온 인생의 전반생이었다.쥐도 뿔도 없는 마흔 다섯나이에 이사가 되었고 그룹내 유일하게 20년 무분규 산업평화의 기록으로 '산업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이것도 가문의 명예회복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니 28년의 직장생활 중 노사관계가 가장 어렵고도 가장 쉬웠다.
인간적으로 행복했던 기억은 스승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이었고, 힘들었던 고통의 기억은 '엘지반도체'와의 빅딜 합병후 찾아온 긴 불황의 충격과 연속된 시련이었다.
회사의 해외 매각압력 앞에서는 인생의 공든탑이 다 무너지는듯 했다. 대통령을 위시한 국내여론에 맞서 자존심과 생존을 위해 저항했던 나와 노조의 공동투쟁은 그 후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급기야 회사는 현대그룹과 결별하고 금융권의 새주인을 맞았다. 이듬해엔 오래동안 모셨던 정몽헌회장이 투신했다. 어이없고 부질없는 인생의 허무함 앞에서 난생 처음 많이도 울었다.
처절했던 시련의 전쟁이 끝나고 작년 6월 완전한 경영정상화를 이룬 시점에 나는 일어나 스스로 퇴임을 선언했다. 힘들었던 시절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던 '버리고 떠나기'를 실행에 옮기고 나니 삶의 무게는 가벼웠고 새벽이면 불현듯 시를 쓰고 싶어졌다. 법정의 <<무소유>>만을 품고 지리산 국사암으로 들어가 행자승같은 여름 석달을 보냈다.
인생의 후반생을 준비하는 길은 즐겁다.
전원으로 돌아가 인간성과 자유를 경작할 것이다.
준비할 몇가지 씨앗과 농기구, 그리고 농사법이 필요해서 문향(文香)의 가게에도 들리게 되었다. 자연으로 돌아갈 놈에게 '등단'이란 허례고 사치다. 회사문을 나서는 순간 오랫동안 걸쳤던 무거운 외투와 가슴의 훈장은 모두 벗어 던져 버렸다. 산으로 가는 길엔 한자루 호미와 한귀절 반야심경이면 족한 것을...
문우(文友)들이 뭘 자꾸 쓰라고 한다. <자기소개서>라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거라면 적어도 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어본 사람일텐데... 정부나 대기업에서 인사업무만 28년간 해 본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며 일년에 삼천명 이상은 대했으니까 지금까지 10만장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족히 읽어봤을텐데.. 이제는 그걸 내가 써야한다구? 묘한 인연이야...' 긴 세월의 업장을 소멸하는 부적을 그리듯 늦은 밤중에 나는 이걸 쓰고 있다. 아내는 웃다가 들어가서 잠이 들었다.
최근엔 마음을 편케 할 요량으로 <<장자(莊子)>>를 다시 들었는데 응제왕(應帝王)편에 '조탁복박'(雕琢復朴)이란 단어를 재발견했다.
열자(列子)가 스승 호자(壺子)를 업수여기다가 어떤 계기로 스승의 깊은 학문의 경지를 깨닫는다. 그 후 3년을 칩거하며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깨달은 사람 소위 진인(眞人)이 된다. 이런 열자의 변화를 가리켜 장자는 '조탁복박'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장인들이 세공을 할때 끌로 새기거나 칼로 깎으며 손질을 하더라도 결국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듯한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물건이란거다. 사람도 수양을 쌓고 공부를 해야하지만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학문과 수양에 얽매이지 않고 소박하고 평범하면서도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농사도구 중에는 시와 수필 그리고 색소폰외에 서예와 문인화도 있다.
그 분야에 출중한 사표인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학문세계를 들여다 보니, 그는 평생동안 오만한 학문적 자신감으로 인해 제주와 북청의 10년간 유배시절을 비롯해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듯하다.그런 그 역시 67세가 지난 만년의 과천시절에는 뜻밖에 '불계공졸(不計工拙)'이란 낙관을 사용한다.'잘되고(工) 못되고(拙)를 가리지 않는다(不計)'는 이 자호는 예술가에 있어서 달관의 경지에 이른 표현이다.노자는 <<도덕경>>에서 '대교약졸(大巧若拙 큰 재주는 졸해보인다)'이라고 했는데 이는 장자가 말한 '조탁복박'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지극히도 산을 좋아 했다. 국내의 어지간한 산은 다 누비고 다녔다.
좋은 산에는 유서깊은 절이 있다. 절간에는 고건축과 불상, 탱화와 범종, 탑과 부도등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있다. 이것들을 만나 감상하고 학습하다보면 때로는 깊은 삼매에 빠지기도 한다. 불교도는 아니나 하드웨어를 알기위해 소프트웨어(경전)도 접하게 되었다.
불교미술은 그 표현이 오묘하기도 하거니와 역사와 예술의 은은한 향기가 있어 서 좋다.뿐만 아니라 영고성쇄(榮枯盛鎖)의 현장인 폐사지에 서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 사라져버린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그러다 돌아서면 역사의 공허한 바람에 가슴마저 시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절간의 대웅전 바깥 벽면에는 대부분 공통된 벽화 10면이 그려져 있다. 중국의 곽암(廓庵)이라는 사람이 그린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동자(童子)가 소로 상징한 본성(本性) 을 찾아 깨닫음을 얻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그림에는 삼라만상의 일체개공(一切皆空)을 깨달은 스님이 개나리봇짐을 매고 마을로 내려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속에는 입전수수(入廛垂手)라는 글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시장(廛)으로 들어가(入) 손(手)을 드리우다(垂)'는 뜻이다. 지극하고 진정한 깨달음 이후에는 저자거리로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을 말함이니 이 장면은 원효와 경허의 후반생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는 오십의 나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이 말은 '하늘의 뜻을 알고 삶과 죽음에 초연해지는 것' 일진대 나는 아직 죽었다 깨어나도 어림없다 . 지천명을 훌쩍 넘긴 요즘에서야 생명의 법칙과 '모천회귀'를 다시 생각한다.
피나는 수련으로 '조탁복박'의 경지를 터득하고 '불계공졸'의 자각을 넘어서 '입전수수'의 길로 가는 것이야 말로 비로소 자기자신에게 성공한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닐런지? 내 인생의 후반생을 그런 삶의 과정으로 '모천회귀'를 하고 싶다.
미안합니다.나이들면서 줄여야 할 것이 말과 글인데 너무 장황했습니다.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최낙경군과 조재철군의 소식을 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