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애석해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내용도 “신중국 수립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통증이 심했다. 의사가 진통제를 권하면 마오쩌둥의 약은 먹지 않겠다며 호통을 쳤다. 관우와 장비를 합쳐 놓은 사람이었다. 진실을 얘기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는 등 거의 비슷비슷하다. 맞는 말이다.
마오쩌둥이 등장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흐루쇼프는 죽은 스탈린을 난도질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없어도 레닌이 있다. 신중국은 마오쩌둥 아니면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 펑더화이는 마오의 권위에 도전했다. 비극을 자초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마오쩌둥은 싸움을 즐겼다. 도전을 좋아했고, 누가 도전을 해오면 흔쾌히 받아들였다. 피하기는커녕 얼굴에 생기마저 돌았다. 투쟁철학이 곧 인생철학이었다. “나는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 단 나를 먼저 해치려 하는 자는 상대가 누구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 전략도 복잡하지 않았다. 평생 ‘상대가 찧고 까불게 내버려 두고 잠복해 있던 적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느지막하게 나서서 일거에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한 가지만 구사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다들 나가떨어졌다. 여산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9년 7월 14일, 펑더화이가 놓고 간 편지를 본 마오쩌둥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얘기”라며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 기간 동안 펑더화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내버려뒀다. “실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 동지를 포함해 책임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인민공사 운동을 너무 일찍 시작했다. 밥은 돈을 내고 먹어야 한다. 하루 세끼를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먹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헝가리 공산당을 봐라, 매달 한 사람에게 고기를 600g씩 나눠줬지만 폭동이 일어났다.” “자연은 원래 모습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수천 년간 형성된 물줄기를 억지로 바꾸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인공호수 같은 건 천천히 해도 된다.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이 정도는 용납이 가능했다.
“중국인들에게 마오 주석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전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단 남용해서는 안 된다. 지난 일 년을 돌이켜 보자. 주석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따르다 보니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잘못된 것은 반대해야 한다.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숭배는 위험하다.” 이건 좀 곤란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우경 기회주의자의 반당 행위로 규정했다.
방 안에 칩거하던 마오쩌둥은 사흘이 지나서야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주더(朱德·주덕)를 불렀다. 펑더화이의 서신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세 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펑더화이답다”며 웃어넘겼다.
마오의 생각은 이들과 달랐다. “토론에 부치자.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들 하라고 해라. 편지의 성격이 궁금하다.” 세 사람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싸움이건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게 마련이다. 성질 급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돌발행동에 분노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불만을 토로했다. “주석에게 참고하라며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다. 토론에 부치자고 요구한 적도 없다. 내 의견이라는 표제까지 달아서 모두에게 토론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펑더화이의 편지가 조별 토론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다. 펑더화이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많았다. 동북조는 한 명도 빠짐없이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밖에 얼씬도 안 하며 회의 내용을 보고받던 마오쩌둥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국내보다 소련 측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후일 중공 선전부장을 지낸 덩리쥔(鄧力群·등력군)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중국의 대약진 운동 관련 기사를 보내왔다. 펑더화이의 의견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베이징을 지키고 있던 부총리 천이(陳毅·진의)의 전화 보고도 심상치 않았다. “방금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를 만났습니다. 농담조로 정변을 일으킬 생각이 있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웃어넘기기에는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보고드립니다.”
소련과의 관계를 놓고 충성도를 가늠하던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계속)
1954년 9월, 국방위원회 1차 회의를 마친 마오쩌둥(앞줄 왼쪽 여덟째)과 펑더화이(앞줄 왼쪽 아홉째). 이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진 김명호] |
1535년 7월 초, 런던 탑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전 대법관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 앞에 섰다. 두 눈이 가려지는 순간 초승달 모양의 섬나라, 유토피아가 눈앞에 출현했다. 청년시절, 이 냉철한 몽상가는 사유재산이 없고 섬 전체가 행복하고 유쾌한 생활을 영위하는 허무의 고향, 유토피아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인류가 수천 년간 꾸어온 꿈이다 보니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1824년, 맨체스터의 부유한 공장주 로버트 오웬이 미국 인디애나주의 이민구 한 곳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 사람의 힘에 의존해 곡식을 경작하는 농업공동체, 뉴하모니타운을 건설했다. 오웬이 만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장은 5년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한 독일계 유대인이 대영박물관을 노크했다. 도서실에 틀어박힌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시체 표본 취급했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해부해 보니 토머스 모어의 이상과 인류의 꿈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자칫하면 곡해할 소지가 많았지만, 몽상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과학적으로 천명(闡明)했다. 한동안 잠복해 있던 유토피아의 유령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국도 공구(孔丘)와 묵적(墨翟)을 시발로 진시황에게 최초의 도전장을 던진 진승(陳勝), 오두미도(五斗米道)의 3대 교주 장노(張魯),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 시인으로 더 알려진 당(唐)대 최고의 검객 이백(李白), 청(淸)제국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 등 면면히 내려오는 이상사회의 계보가 있었다.
20세기 초, 후난(湖南)성의 키 크고 삐쩍 마른 농민의 아들, 마오쩌둥이 창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 인근을 답사했다. 목적은 단 하나, 중국형 신촌(新村) 부지의 물색이었다.
청년 마오쩌둥이 구상한 신촌은 유아원과 양로원, 상점, 학교, 농장 등이 공동으로 운영되는 표준형 유토피아였다. 실현만 된다면 400년 전 런던 브리지에 효수된 토머스 모어의 영혼을 위로하고도 남았다.
후난은 중국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수많은 영웅과 강도들의 고향다웠다. 골목마다 크고 작은 도둑투성이였다. 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너나 할 것 없이 혁명을 노래하던 시대였다. 마오쩌둥도 혁명에 몸을 던졌다. 마르크스의 이론과 중국의 현실을 결합시킨 지 40년 만에 정권 탈취에 성공했다. 960만㎢의 대지 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상사회 건설의 꿈이 되살아났다. 권위와 기백과 열정으로 6억5000만 명을 몰아붙였다.
철강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작은 용광로가 마을마다 들어섰다. 한군데 모여 공짜 밥을 먹다 보니 솥, 수저, 냄비 등은 쓸모가 없었다. 눈만 뜨면 일터로 향하고,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앞치마를 둘러야 했던 남자들은 환호했다. 굴러다니는 쇠붙이를 몽땅 들고 용광로로 향했다. 용광로 땔감으로 쓰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도 모조리 베어냈다. 철 생산량이 유토피아의 발원지 영국을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민공사처럼 희한한 곳도 없었다. 일을 열심히 한 사람과 빈둥거리며 눈치만 보던 사람의 배당량이 똑같았다.
이성적인 미몽(美夢)이 하루아침에 비이성적인 악몽으로 둔갑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상하이의 경우 연료가 일주일분밖에 남지 않았다. 지방 간부들은 과장된 보고서 작성에 머리를 싸맸다.
20세기 중엽에 시작된 거대한 드라마는 1987년 10월, 중공 13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이 채택되면서 막을 내렸다. 1959년 7월 23일 오전, 여산회의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던 펑더화이의 주장이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휴지조각으로 변한 지 28년 만이었다.
펑더화이와 함께 쫓겨났던 전 중공 선전부 부부장 리루이(李銳)는 ‘여산회의 실록’에서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간부들의 성향을 “관료주의에 빠져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헛소리만 해대는 간부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며 거짓 보고만 일삼는 뺀질뺀질한 간부들. 허위인 줄 뻔히 알면서 진실인 것처럼 늘어놓는 고급 간부들”로 분류하며 “마지막 유형이 가장 나쁜 놈들이었다”고 단정했다. (계속)
마오, 장·펑 싸잡아 비난 … “文武 연합 군사구락부 조직”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2>
김명호 | 제313호 | 20130310 입력
1953년 7월 28일 오전 9시, 한국전쟁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펑더화이. |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있다. 1959년 8월, 여산회의가 끝날 무렵 외교부 부부장 장원텐(張聞天·장문천),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황극성), 후난(湖南)성 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주소주) 등이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함께 몰락했다. 황커청은 펑더화이의 오랜 측근이었고, 저우샤오저우는 마오쩌둥의 비서 시절부터 펑더화이를 잘 따랐다. 동향이기도 했다.
장원텐은 경우가 달랐다. 학자와 문인들을 줄줄이 배출한 장쑤(江蘇)성 우시(無錫) 출신으로 학생 시절엔 창작과 외국문학에 심취한 문학청년이었다. 일본과 미국·소련 유학을 거친 후 혁명의 한복판에 뛰어들었지만 총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펑더화이와는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단둘이 밥 한 끼 먹은 적도 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성격도 판이했다. 펑더화이는 급하고 표현도 거칠었다.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하급 부하와 애들에게만 인자했다.
장원텐은 사람 됨됨이가 겸손했다. 1935년 1월부터 3년간 중공의 최고지도자였지만 무슨 일이건 멋대로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한 사람이 돌출행동을 하는 조직은 활력이 없다”며 집단지도체제를 견지했다.
1976년 봄, 고향 우시에서 부인과 함께 꽃구경 나온 장원텐. 같은 해 7월 세상을 떠났다. | |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북부 준이(遵義)에서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당권과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돼버렸지만, 전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마오쩌둥은 장원텐을 정점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의 한 사람이었다. “총서기가 공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여기는 당원들이 많다. 원인은 단 하나, 장원텐 동지의 겸손 때문이다. 1935년 1월, 준이에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사상이나 이론 면에서 당의 책임자로 장원텐 동지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총서기에 선출됐지만 재삼 사양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정 그렇다면 군대는 내가 맡겠다고 스스로 나서자 수락했다. 마오쩌둥 동지가 군사문제를 전담할 3인 소조를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장원텐은 마오쩌둥을 신뢰했다. 훗날 본인은 부인했지만, 마오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에게 “그간 우리 당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느라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가 있어야 장정을 승리로 이끌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런 장원텐을 마오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뭐든지 첫째, 둘째, 셋째 하며 조목조목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들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다. 시골 중학교 선생이나 하면 알맞을 사람이 혁명에 뛰어든 것이 대견하다. 미국 경험도 있고 하니 훗날 국제 무대에 나가면 합리적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을 사람이다”
마오쩌둥의 말대로 장원텐은 지식을 중요시하고 인재를 존중했다. 부패한 사람을 보면 부모 죽인 원수처럼 대했다고 한다. 단, 아무리 태평성세라도 중국에 적합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전쟁시대였다.
신중국 수립 후 장원텐은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소련 주재 대사와 제네바회담 대표를 거치며 국제무대를 누볐다. 1959년 7월, 여산회의 무렵에는 외교부 상무부부장으로 중국 외교를 전담하고 있었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의견서를 놓고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됐다. 펑더화이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였지만 거의가 동조하는 눈치였다. 7월 21일 장원텐의 발언이 시작되자 다들 숨을 죽였다.
장원텐은 자타가 인정하는 이론가다웠다. 발언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회의 개막 20일 만에 가장 엄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산 위에서 오랫동안 회의를 연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고 입을 뗀 후 무려 3시간 동안 대약진 운동의 성과와 결점을 체계적으로 나열했다. 펑더화이의 의견과 거의 일치했다. 발언 내용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그놈에 첫째, 둘째, 셋째 또 시작했다”며 “흥” 하고 코를 확 풀어버렸다.
그날 밤, 바람 쐬러 나온 장원텐은 산책 중인 펑더화이를 발견하자 먼저 다가갔다. “네 주장이 맞다. 오늘 너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펑더화이는 “지원 같은 건 필요 없다”며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래도 궁금했던지 헤어질 무렵 발언 내용을 물었다.
펑더화이는 자신의 주장이 장원텐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았다. 마오로부터 문무(文武)가 연합해 “군사구락부”를 조직했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마오, 펑더화이 제거 작심하고 3시간 자아비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3>
김명호 | 제314호 | 20130317 입력
1951년 겨울, 한국전쟁 참전군 사령관 시절 전선을 시찰하는 펑더화이. 장소 미상이다. |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 도중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편지는 별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펑더화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정권을 탈취한 혁명가였다. 권력기반이 군대이다 보니 군을 가장 중요시했다. 인민은 다음이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가 열렸던 여산인민극장. [사진 김명호] | |
펑더화이는 중공 정권의 창출에 공이 큰 개국원수였다. 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펑더화이가 산으로 들어갈 결심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 올라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고 “노동자가 아니라면 농민이라도 좋다. 홍군 복장을 입힐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말도 평소 자주 했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 “펑더화이 편지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며 마오쩌둥을 불편하게 했다.
펑더화이가 보낸 편지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한 마오쩌둥은 3일간 침묵했다. 펑더화이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안후이(安徽)성 서기 쩡시성(曾希聖·증희성)을 펑더화이에게 파견했다. 장정 시절, 중공의 비밀문건과 정보를 담당한 적이 있는, 마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다.
펑더화이를 찾아간 쩡시성은 “차 한잔 마시러 왔다”며 3가지를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남아있다. “주석에게 편지를 보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펑더화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목적은 무슨 놈의 목적,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럴 때 편지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오랜 습관 아니냐.” “소련 방문 기간 중 흐루쇼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흐루쇼프와는 대약진운동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린뱌오가 부주석이 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쩡시성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단독행동이라고 확신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펑더화이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7월 23일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단상에 오른 마오쩌둥은 “그간 참석자들은 많은 발언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차례”라며 좌중을 한 차례 둘러봤다. “그간 착오를 저지른 동지들이 많았다.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우파가 아니다. 배운 게 많다.”
마오쩌둥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지난 2년간 뭐든지 빨리 이루기 위해 큰소리만 쳤다. 모든 잘못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공자가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멸종했다. 아들 한 놈은 전쟁터에서 죽고, 한 녀석은 미치광이가 됐다. 동생들도 모두 맞아 죽었다. 마르크스도 적지 않은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혁명의 그날이 올 거라고 했지만 서구에 혁명다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을 징조였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모든 신문이 우리의 잘못을 열거하느라 정신이 없다. 전국에 70만 개의 생산대가 있다. 모든 생산대가 한 건만 잘못하면 잘못한 건수가 70만 건이 된다. 일 년 내내 보도해도 불가능할 정도다. 앞으론 내 이름을 직접 거론해라. 꼭 망해야 한다면, 나는 떠나겠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뒤집어엎어 버리겠다. 해방군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해방군을 만들겠다.” 이날 마오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발언을 3시간 동안 했다. 펑더화이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발언이 끝나자 산회했다. 펑더화이는 맨 뒷줄에 있었다. 마오가 부르자 못 들었는지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마오가 달려갔지만 떠난 후였다. 회의장은 언덕 위에 있었다. 마오가 내려가자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나서경)과 상하이 서기 커칭스(柯慶施·가경시) 등이 수행했다. 저만치 앞서가던 펑더화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회의장 쪽으로 올라왔다. 물건을 놓고 온 사람 같았다. 마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시뻘게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더화이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몸을 돌려 펑더화이를 다시 잡았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얘기 좀 하자.” 펑더화이는 막무가내였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수행원들 앞에서 마오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봐서는 안 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뤄루이칭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커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다. 저우언라이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숙소로 불렀다. 8월 2일부터 2주간 여산에서 중공 중앙 전체회의를 열라고 지시했다. (계속)
마오 “펑더화이, 넌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4>
김명호 | 제315호 | 20130324 입력
1957년 11월, 마오쩌둥(앞줄 왼쪽 넷째), 쑹칭링, 덩샤오핑, 리셴녠(李先念) 등과 함께 소련을 방문한 펑더화이(왼쪽 첫째). 마오 오른쪽 흐루쇼프(오른쪽 다섯째) 옆으로 궈모뤄(郭沫若), 리셴녠, 문화부장 마오둔, 양상쿤. [사진 김명호] |
1959년 7월 23일, 마오쩌둥은 3시간 동안 펑더화이의 우경화를 비판했다. 그날 밤 여산의 산책로는 평소보다 북적거렸지만 침울했다. 펑더화이와 마주치면 다들 피해갔다. 원수(元帥) 녜룽전(聶榮臻·섭영진)만은 예외였다. 황혼 무렵 오솔길에서 만난 펑더화이가 “오늘 마오 주석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너는 당과 인민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주석은 원칙을 강조했다. 옳고 그른 것은 세월이 지나야 밝혀진다”며 옛 전우를 위로했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폭풍이 닥쳐 올 것을 예감했다. 펑더화이를 조용히 불렀다. 밥맛이 없다며 저녁도 거른 펑더화이는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는 개의치 않았다. “주석은 너를 대약진운동 실패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 나도 한때 그런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장정 시절부터 저우언라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던 펑더화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표정이 없었다.
여산회의 당시 펑더화이의 숙소. 총참모장 황커청 방은 위층에 있었다. | |
저우언라이는 목이 탔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너는 군인이다. 경제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 모두에게 화살을 돌려라. 주석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지만 우리가 집행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국가에 재앙이 닥쳤다고 우리를 비판해라.” 저우언라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펑더화이는 벌떡 일어나 한마디 내뱉고 자리를 떴다. “진작 알고 있었지만, 너야말로 간사하고 교활한 놈이다.” 저우언라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베이징에 있는 펑더화이의 부인에게 급전을 보냈다. “보는 즉시 여산에 와라. 네 남편의 고독을 달래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비슷한 시간에 후난(湖南)성 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주소주)도 상무서기 저우후이(周惠·주혜), 선전부 부부장 리루이(李銳·이예)와 함께 먹을 것을 들고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황극성)을 방문했다. 세 사람은 황커청이 후난성 서기 시절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황커청은 이들을 데리고 같은 건물에 있는 펑더화이의 방을 찾아갔다. 왕양명(王陽明)의 시를 화제 삼아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헤어졌다. 이날 모임이 훗날 반당집단(反黨集團) 활동의 중요한 증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4일 오후부터 회의가 속개됐다. 소조마다 전날 있었던 마오쩌둥의 발언에 대한 입장 표명이 줄을 이었다. 마오쩌둥이 좌경화를 포기할 줄 알고 펑더화이의 의견을 지지했던 사람들일수록 펑더화이의 비판에 열을 올렸다. 펑더화이 의견에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놀고 먹는 회의가 아니라, 열띤 토론의 계기를 만든 것 하나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는 입을 닫아버렸다. 평소 잘하던 하품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하게 될 “펑더화이의 원래 이름이 得華다. 어릴 때부터 중국을 먹을 야심이 없었다면 이런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다”는 말 같지 않은 비판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한때 착오를 범해 혼난 적이 있는 저우언라이와 천윈(陳雲·진운)은 몸 사리느라 말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력이 부족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는 뭐가 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7월 31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마오쩌둥과 펑더화이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마오쩌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31년간 우리는 합작과 모순을 반복했다. 30%만 나를 지지했다.” 펑더화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 우리 사이가 그 정도는 아니다. 반반이 적합하다. 정치와 감정을 한데 엮어서 말하지 마라. 나는 그간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할 시간이 없었다. 주고받은 문건들도 소각해 버렸으니 맘 놓고 말해봐라.”
마오쩌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고 기분이 나쁜가 본데, 그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너는 네 멋대로 처리했지 내게 편지를 보내거나 의논한 적이 없다. 이번 편지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군중을 취합하고, 대오를 정비하려는 게 아니고 뭐냐.”
다음날 회의는 7시간 계속됐다. 주더가 먼저 발언에 나섰다. 주더는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눈치 없이 주책을 떨 때가 많았다. 마오쩌둥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구두 끈이나 똑바로 매라고 면박을 줬다. 주더가 구두를 향해 허리를 숙인 틈을 타 린뱌오(林彪·임표)가 발언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을 구원하기 위해 병상에서 달려온 사람다웠다. 거두절미, 펑더화이를 야심가, 음모가, 군자의 탈을 쓴 소인배로 몰아붙였다. 품위는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철학적으로 비판했다. “너는 경험주의자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당을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하려 했다.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단정은 할 수 없지만, 외국 다니며 지지자를 많이 확보한 것 같다. 나는 너보다 다섯 살이 더 많다. 내가 먼저 죽을 거다. 많은 동지들이 그날을 우려한다.” 펑더화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경호원 중 한 사람의 구술에 의하면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들처럼 상황에 따라 변화가 빠른 동물도 없다. 천년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뭐라고 할까! 어처구니없는 것들끼리 모여서 한바탕 희극을 벌이다 갔다며 조롱할 게 분명하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도 예외일 수 없다.”<계속>
젊은 간부들도 “毛주석, 좌우 다스릴 능력 없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5>
김명호 | 제316호 | 20130331 입력
1957년 7월에 열린 여산회의 전까지만 해도 펑더화이(앞줄 오른쪽)와 류샤오치(앞줄 왼쪽)는 사이가 좋았다. 고향도 같고 생각들도 비슷했다. 53년 5월 7일, 류샤오치·왕광메이 부부와 함께 중난하이(中南海)를 산책하고 있는 펑더화이·푸안슈(浦安修) 부부. [사진 김명호] |
1959년 7월 2일 시작된 여산회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살벌했다. 폐막 1주일을 앞두고 리루이(李銳·이예)를 비롯한 젊은 층들이 마오쩌둥에게 제출할 의견서를 준비할 정도였다. “주석은 스탈린의 만년과 비슷하다. 천하를 통치할 능력은 감히 겨룰 사람이 없지만 좌우를 다스릴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비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말하기가 겁난다. 백 년 후에 태어날 사람들의 의론조차 용납하지 않을 기세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를 불러서 단단히 일렀다. “젊은 수재들은 원래 그런 거다. 지들끼리 방구석에서 나눈 얘기다. 그런 것까지 문제 삼으면 일만 복잡해진다. 리루이를 뺀 나머지는 보호해라.”
8월 15일 밤, 여산회의 폐막을 하루 앞두고 마오쩌둥은 당 중앙위원들에게 쪽지를 보냈다. “비판은 엄하게 하되 처리는 관대하게 해라. 착오를 저질렀지만 펑더화이와 장원톈, 황커청, 저우샤오저우는 혁명성과 반동성, 양면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있다.”
다음날 마지막 회의에서 ‘군사구락부를 만들고, 외국과 내통한 펑더화이를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펑더화이는 군과 관련된 모든 직무를 정지당했다.
장원톈은 부인에게 “외교관이나 하던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경제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했다. 나라도 화가 났겠다”며 한바탕 야단을 맞았다. 사람들이 물으면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얘기했다. “내가 산에 오른 것은 우연이었다. 여산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발언을 했을 리가 없다. 평소 왕래가 없던 펑더화이와 이웃에 묵었던 것도 우연이다. 의견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 그건 필연이다.” 측근들에게는 “외국의 우수한 대학과 도서관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귀국 후 장정과 전쟁을 거치며 머릿속에 많은 것이 쌓였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의 총서기를 지낸 사람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내 의무”라는 말을 자주 했다.
8월 18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전군의 지휘관 1061명이 베이징에 운집했다. 국방부장 펑더화이와 총참모장 황커청이 도마 위에 올랐다. 당 지도자와 원수들이 개회사 비슷한 걸 했다.
류샤오치는 비유에 능했다. “베이징을 떠난 비행기가 난징을 향했다. 항로는 직선이 아니다. 좌우와 위아래를 반복하며 하늘을 날지만 목적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간 벌렸던 운동의 방향은 정확했다. 점차 좋아질 거다”라며 서두를 떼더니 갑자기 “군사구락부” “외국과 내통” “여산에서 난을 모의했다”며 펑더화이를 가혹하게 비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펑더화이는 들고 있던 연필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저우언라이는 신중했다. “펑더화이 동지는 생각이 깊지 못했다. 우리가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펑더화이 동지가 잘못을 저질렀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는 원래 그런 놈”이라며 냉소를 지었다.
천윈(陳雲·진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입도 벙긋 안 했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에게 가서 일렀다. “천윈은 꼿꼿이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마오쩌둥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건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다. 천윈은 우파로 일관한 사람이다.”
9월 9일,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 “30여 년간 베풀어 준 인내에 감사한다. 베이징을 떠나겠다. 인민공사에 가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다.” 일주일 후,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전인대(全人代) 결정사항이라며 인사명령을 발표했다. “국무원 부총리 린뱌오에게 국방부장 겸직을 명한다.”
국방부장에서 쫓겨난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7년간 살았던 중난하이를 떠날 준비를 했다. 황혼 무렵만 되면 영복당(永福堂) 주변을 산책하며 감회에 젖었다. 하루는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양상곤)이 찾아왔다. “무슨 말이라도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게 해라. 그대로 마오 주석에게 전하겠다.” 평소 친한 사이였지만 펑더화이는 차만 마실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주석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당행위나 자살은 하지 않겠다. 농촌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자력기식하며 살고 싶다.” 이젠 필요없다며 원수 복장도 반납했다.
9월 30일,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펑더화이는 중난하이를 떠났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스산한 가을 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