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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생애와 대표시
1. 생애(음력 1904.4.4~1944.1.16)
(1) 출생
이육사 선생(본명 이원록, 1904. 4. 4(음력)~1944. 1. 16)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아은처사인 부친 이가호와 모친 허길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의 상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고 한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이 숙장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하였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 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이육사(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 ‘이활(李活)’과 ‘육사(戮史)’, ‘육사(肉瀉)’를 거쳐 ‘육사(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육사(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육사(陸史)’를 쓰라” 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육사(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의 ‘육사(肉瀉)’라는 이름은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활(李活, 1926-1939),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1930), 육사(戮史, 1930), 육사(肉瀉, 1932), 육사(陸史, 1932-1944)와 같으며 이원록이 ‘육사(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2) 의열 활동과 투옥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 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맹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에서 북경으로 이동하여 의열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고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 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 되어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3) 무장투쟁 위해 군관학교에 입학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루쉰을 만나게 되어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후일 루쉰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 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이 곳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하여 설치한 한국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조선군관학교는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 배양에 중점을 두고 총기 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으로 편성하였으며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하여 6개월간으로 하였다. 교관은 한국인 20여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지원부서에 약간의 중국 군인이 파견되었다. 교생 전원은 합숙, 수용되고 교내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토록 하였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하여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 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서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4) 작품 활동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 활동을 하여 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 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 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 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한편 선생은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으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 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하였으나 동년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5) 죽음
무슨 일로 붙잡혔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은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갑작스럽게 들었으며, 막내 동생 원창이 북경으로 달려갔으나 선생의 유해는 이미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줌의 재로 변하여 조그마한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60년 봄에는 선생의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되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이 잠들게 되었다.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무한한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난 선생의 시문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며 이 민족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였다.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 투쟁 대열에 앞장섰으며, 육신이 쇠약해지자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 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작품 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 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명하였다.
2. 작품
▶ 광야(1945)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청포도(1939)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절정(1940)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자야곡(子野曲, 1941)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느라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