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자들만 생각날까?'
저는 어린 시절 기억나는 남자 친구가 거의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5번이나 옮겨 다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두 달 다니고 전학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생각만 해도 반가운 친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참 요상한 일은 여자 애들 몇 명 얼굴은 제 머릿속에 하나씩 콕콕 박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걸까요?' ㅎㅎ
저는 예산초등학교를 졸업했지요. 그땐 붓글씨 잘 쓰는 걸 크게 생각할 때였습니다. 제가 붓글씨를 좀 썼습니다. 공부가 끝나면 커다란 교실에서 붓글씨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예쁜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붓글씨 대회에 나가면 제가 항상 1등을 하고 그 얘는 그 다음을 하고 그랬습니다. ㅋㅋ
붓글씨 연습하다가 선생님이 교무실에 가시면 저는 그 여자 애 옆구리를 쿡 지르고, 그러면 그 예쁜 여자 애는 저를 좇아오고, 그러다가 선생님 오시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고, 햐! 그 재미가 그렇게 쏠쏠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졸업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 그런데 그 여자애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애는 이미 서울중학교로 가버렸습니다. 평소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방학 때가 되면 그 집 앞을 오락가락했습니다. 약국 집 딸이었는데 먼발치에서 그 애가 들랑거리는 흔적이라도 훔쳐보는 날은 그렇게 설레 일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온통 그 애 생각을 하다가 세월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또 한 여학생이 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머리를 양쪽으로 상큼하게 딴 여학생입니다. 살랑거리며 걷는 모습이 기가 막혔습니다.
'눈뜨면 생각나고 눈감으면 보이던 얼굴.'
캬! 내 마음 나도 몰랐습니다. 친구 녀석 누나가 그 여학생을 잘 알고 지냈습니다. 제가 들들 볶았습니다. 날마다 성화를 부렸습니다.
"야, 너 사진 한 장만 구해 줘라."
어느 날 제 손에 그 여학생 사진 한 장이 쥐어졌습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은 화닥닥거리고, 그 사진은 한 동안 제 지갑 속에서 저와 함께 동거(?)했습니다.
그런데 가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여학생은 날라리였습니다. 사귀는 남자애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시집간다는 소문들이 들렸습니다. 그건 확실했습니다. 그 날, 조치원 역전에 하염없이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역 뒷골목에서 저는 지갑 속에 있는 그 애를 꺼냈습니다. 비를 맞으며 사정없이 찢어 버렸습니다. 마음도 찢어 버렸습니다. 으와, 지금 생각해도 비통했습니다. 한동안 그 애 얼굴은 찢어지지 않고 머릿속에 맴돌곤 했습니다. 미쳤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또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여럿이 처음 만났을 때 자기 소개를 하면 악수를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녀는 검은 망사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멋 부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남자와 그냥 악수하면 곰팡이(?) 생기는 줄 알고 망사 장갑을 끼고 나왔던 겁니다. 어쩌면 조선시대에서 막 나온 여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제 눈이 획 돌아가 버렸습니다. 한 번 돌아간 가재미 눈은 회복이 불가능했습니다. 한겨울 일어나 보니 새벽 4시,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고무신 끌고 기타를 들고 그녀 집까지 그냥 갔다 왔습니다. 속이 너무 뜨거워서 마당에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다가? 그리워 그리워?'
손가락이 마비되는 것도 모르고 그런 노래들을 새벽눈 맞으며 불렀습니다. 결국 애를 태우다가 한 여자를 찾는 방황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제를 꺼내 보면 오늘이 행복하고, 오늘을 꺼내 보면 내일이 행복 할 일, 그건?
사랑 이야기뿐입니다. 큰일났습니다. 사랑 꺼내 보다가 봄을 놓칠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