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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세계를 이땅에 실현하는 그날까지
이홍규 김현숙 가정
1)내고향 율대리
서울에서 통일호 열차를11시간타면 밀양 삼랑진에 도착하고 다시일반 열차를 갈아타 30분가면 마산에 도착하게된다.마산
월남동에서 남쪽으로 긴굴 을 통과하면 배둔이나오고 10k를 남쪽으로 달려오면 고성읍이 눈앞에 보인다.
경남 고성군(固城郡)은 우리나라에서 공룡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2억3천만년전 중생대 초 지구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가, 그로 부터 1억6,500만년간 지구를 지배하다가 백악기가 끝남과 동시에 멸종하여 지구에서 흔적을 완전히 감춘 공룡이지만 고성에는 흔적이남아있다
경남 고성군 전역에 약 5천여점의 다양한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가득한 이곳 고성의 해안가에 위치한 거류산과 벽방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류산과 벽방산!
한려수도의 쪽빛 바다에 떠있는 170여개의 올망졸망한 섬과 인간의 흔적이 가득한 도심지가 한폭의 동양화를 산꾼에게 제공합니다.수억년 전 공룡의 천국이었을 산아래 저 넓은 벌판과 해안을 내려다 보며, 혹시나 들리는가 공룡의 울음소리를 상상해본다.
거류산(巨流山, 571.7m)은 한국의 마터호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옛날 어떤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다가 밖에 나와 보니 산이 하나 걸어가고 있어 '게 섯거라'하고 소리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췄다는 산이라고 한다.
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거류산 안내판에는 소가야(小伽倻)의 산성(山城)이라 하여 태조산(太祖山)이라고
불렀고, 세종 때의 지리지에는 가라산(加羅山)으로 적혀 있다.
읍에서 통영방향 으로 말티고개를 넘어서면 우리동리 율대리
가 보인다. (난 율대리524번지 에서 태어났다) 고성교회는 60년 초 개척교회가 생긴후 많은 지도자들이 거쳐 가셨으며 특히 조우억만 (오야마상)전 일본협회 제2사업부장 사업가가 일본에서 전도되시어 고성복귀에 많은 협조를 해주셨다.늘고성을 아끼셨고 내가 상리교회 개척때에는 일본에서 목수까지 동원하시어 땅을 매입 하시어 건축해 주시기도 하셨다.
2)출생
난 1954,4,15일생(음)이곳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께서는 건축일을 하셨고 어머님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어머님 건강을 위해 대한고성천리교를 나가시며 정성을 드려었고 아버님께서는 무보수로 천리교 신축에 2년
가까이 다른일꾼과 함께 노동 봉사를 해주시기도 하셨다.큰대목으로 목수일을 해주셨다. 그리고 절에 들어가셔도 2년
이고 3년이고 무보수로 일해 주시고 집에오실땐 나무 한 구러마 정도 얻어 오시면 끝이었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말씀 이면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그대로 따르셨다. 난 초등학교땐 절간에가서 놀기도 좋아 하였으며 방학이되면 도라지 등 약초도캐고
산 짐승도 쫒아 다니고 굉장이 활동력이 많은 소년이었다. 등교때 태풍이 불고 소나기가 몰아치면 등교길은 들판길을 지나가다 보니 물이넘쳐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께선 학교까지 오셔서 허리춤까지 물이 차 올라온 길을 저희 어린것들을 몇명씩 안고 물을 건너게 해 주셨다. 초등학교는 부모님의 보호아래 잘 졸업하게 되었고 중학교도 시골길을 2k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등교했다.중학시절 친구건유에 따라 대한예수교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부활절 날에는 달걀 에그림도그려넣고 햇님얼굴도 그려넣고 잼 있게 즐겼다. 중2 학년때 68년도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고성읍 남산 도서관 바로밑에 시집을 간곳은 넓은 텃밭이 있는 공간인데 바로 대문맞은편에 양옥집이 한채 있었는데 그 집이 고성통일교 건물이었다.누나가 시집가서 1주일에 만에 전도가 되셨고(당시 지역장 윤덕명777가정) 나에게도 권유 했지만 난 아버님 어머님
께서 절에 나가시기 때문 나갈수 없다고 거부했다.
3)경남 제1회 수련회에 참여 입교
1년을보내게되고 그 다음해 69, 여름방학때 꼭 한번만 참석해달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 지구수련회에 참석 하게 되었다.
(고성성화학생5명 참석) 그 당시 마산지구장은 임규문 지구장이 계셨고 첫날 강의는 권우삼 강사님의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를 들었을때 눈에서 눈물이 한두방울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한맺힌 사연들은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여름방학은 그렇게 보내고 겨울방학때 다시 마산 지구에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날씨는 몹시춥게 느껴졌고 마산시 월남동 지구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불며 약간씩 눈이 내리기시작했는데 모두 밖으로 나오라는 지시가 있어 밖에 나갔는데 그때 문선생님께서 순회길에 오르시어 마산 지구를 찿아 오신 것이었다. 도로를 양쪽으로 갈라 50m쯤 줄을서 고개 인사를 하며 문선명 선생님을 환영했다. 처음 대면이라 넘 좋고 기분도 좋았다. 이후 하나씩 배워가며 1969,11,13일
정식으로 입회원서를 쓰내고 협회원이 되었다.
4)공기총 판매하다
낮에는 틈나는대로 총포사(예화 산탄공기총)에 들러 총도 판매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토욜 도산면 갈망개에서 총이 고장났다는 연락이 왔다. 고성읍에서 통영군 도산면까지는 12km이고 도산면에서 산길로 두 시간을 더 걸어가야 갈망개인데 그 길을 혼자 나섰다. 도산면까지는 버스로, 나머지는 걸어서 산길을 두 시간 정도 걸려서 고장난 총을 받아 다시 걸어서 도산면까지 오니 막차는 이미 떠났고 주의는 깜깜해졌다. 그러나 나는 고성 집을 향해 걸었다. 집까지 찻길이긴 하지만 산을 세 개씩이나 넘어야 했고 곳곳에 무덤도 보이는 곳이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도산면에서 고성방향4k쯤 오면 솔고개가 있는데 한 맺힌 귀신이 나타나 전화를 빌려달라 해 전화를 걸었다는 곳도 무서움 없이 지나왔다. 동산의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정신없이 걸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걷는 느낌이었다. 새벽 4 시쯤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5)봉사할동
입교후 부터가 문제였다. 아버님 과 어머님께서는 교회 다니는것 을 허락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담을 넘어
교회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후에도몰래 교회에 나가 공부보다 교회에 머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 방학때가 되면 사업활동을해 학생들 전도용으로 탁구다이도구입했고 성화학생회장이 되고부터는 책임감도 들고 반대하는
학생들을 대응 하는 대책도 세우는 중이었는데 성화학생 부모들이 찿아오기 시작했다.그당시 신윤숙 여학생 아버님께서 찿
아 오시었다 난 그학생과 뒷문으로 도망을 가기 시작하여(그 당시 교회는구 골프연습장 을 매입해 이사해 좀넓은 편이었다. )
언덕 위에서 우리둘은 5m아래로 뛰어내렸는데 윤숙 학생은 어딜 다쳤는지 몰라도 난 허리를 다쳐 걷기도힘든 시간을 보내 기도 했었다. 방학때가 되면 성미사업도 해서 전투경찰 위문도가게 되고 표창장도 전해오기도 했었고 봉사 할동은 계속이어 졌는데 학교수업시간 윤리선생이 나를 일어서게 한후 저학생 홍규가 이상한교 통일교회 나간다고 공개 적으로 공격 하기도 했었다.그후 교무실에 나를불러 통일교 나가지 마라고 막대기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몇번이고 죄인 다루는 식으로 호통치기도 했었다. 난 어린마음에 꾹 참고 있다가 집에와서 한없이 울기도 했었다.
그이후 부터 나를 따르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고 고3 학기 후반기때는 친구들이 협조해서 학급 실장까지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73년9월 학업도 중단하고 기동대에 합류했다.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졸업이 40년지난 지금 며칠전 그 윤리 선생 전화번호를 묻고 또물어 알게되어 집에 전화를 했더니
나 보청기를 끼워 잘 안들린다고 변명만 털어 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6)기동대 합류
경남 2차 기동대에 합류했다. 경남 기동대장은 김관해 대장님께서 하셨는데 경남 촌촌 마을을 누비면서 침낭 하나만
메고 영하9도에도 아랑곶 없이 동리동리를 누비고 다녔다. 낮에는 이동해서 면장을 만나 마을 회관 등 장소를 만들어
놓고 저녁엔 계속적으로 안보강의및 계몽활동으로 이어 갔다. 잠자리는 마루 바닥에 침낭 속으로 들어가 누우면 그만 이었다.
영하 9도가 되어도 피곤하고 지친 몸이라 금새 잠들었다. 활동중 눈바람 사잇길을 뚫고 지리산 등반을 하면서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는 용기와 힘을 받기도 했었다.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도착하니 눈물이 주르럭 흘려 내렸고 연달아 참부모님 만세를 외치고 또외쳤다. 김관해 기동대장님께서는 끊어지지 않는 지도력과 힘을 하나로묶어 역사의 한장한장을 만들어 증인으로 남길 사료를 함께 만들어 내자고도 하셨다. 그리고 수료전 짧은보름동안 군청등 기관을 방문 성금을 모아 40개 창문이 있는 성전을 신축해서 하늘 앞에 봉헌하기도 했었다.기동대를 수료하고 밀양단장면 개척 교회로 향했다.가는 곳곳
마다 기도정성은 이어졌다.단칸방 하나를 구해 동리 가가 호를방문 하길 시작한지 6개월 만에 한 딸을 찿았으니 지금 6500쌍
한일가정 으로 오늘도 일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조영순가정) ,이후 김해교회 사무국장을 했었다.그당시 방에 연탄 보일러
를 사용했는데 밤에 머리가 아파 일어나니 연탄 까스가 센 모양이었다. 바로 옆방 목사님 방에도 보니 까스냄새가 자욱하고
이정섭 목사님 께서 쓰러져 계셨다. 바로 등에업고 밖에 나가 택시를 타 병원으로 옮겼는데 가까스로 깨어나셨다.
그 이후 경남 고성상리교회로 이동 작은 단칸방을 빌려 개척에 나섰는데 처음 사람들을 모울수가
없어 주산을 가르키며 초등 중등생을 모우기 시작했다.(저는 중학교때 주산6급자격증을 취득했었다.)
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자 6개월 지난후 동리 감리회 회원 20여명이 밤에 몰려왔다.이단교회는 이곳에서 수용할수 없다고
문을 차고 들어 왔었다. 난 홀로 코너에 몰렸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악몽같은 저녁밤을 보내고 3일동안 입맛이 없어 밥도 못먹고 지났는데 초등학생들이 고구마와 먹을것을 엄마도 모르게 훔쳐와 드시라고 했다. 왜 이야기하고 갖고오지 훔쳐 왔나 했더니 어머는는 알게 되면 절때 용서 안한다 하며 자기가 아껴 먹던음식 따로 빼 놓았다 갖어 왔다고 했었다.이러던중 재일교포 오야마 (조우억만)일본 제2사업부장께서 고성 고향에 찿아오시어 내가 교회가 없어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더니 땅을 300
평 매입하시어 일본에서 목수2분을 데리고 오셔서 신축해 주시기도 했었다. 그 이후 마산 사무국장 진주 사무국장을
하던중 76년 육군에 입대했다.
7) 육군 입대
1976,2,10일 군에 입대하면서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병영생활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난후 부터 협회에서 우편으로 통일세계를
보내 주셨는데 그것을보고 이단교회 나간다고 고참병들의 핍박이 심했다. 밤에 조용히 불러내어 나에게 몽둥이 찜질
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어떤때는 남몰래 화장실 건너편 공터에 가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면서 저
들을 용서 해 달라고 기도했다.기도는 계속 이어졌고 5개월이넘어서 부터는 고참병 마음이 변했는지 더이상 괴롭히지는 않
았다.이후 일등병 진급후 부터는 군종과 몇번이고 만나 대화도나누게 되었고 1달에 한번씩 우리교회 나가는것도허락해 주었다.
군 훈련생활에 있었어는 큰 걱정은 없었다, 사격하면 90점 이상이고 구보때도 항상 자신이 있었다. 10km 구보땐 동료들의 배낭 2개 정도는 거튼이 받아메고 뛰는데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구보 사격을 잘 하다 보니 대대 수색대에 선발 되었고 77년 부터
팀스프리트훈련 모의간첩 활동 대원으로 선발 산업 공장등을 침투 경계 근무하는 예비군들을 따 돌리고 침투하여 공장등지에
폭파 닦지를 붙히며 다녔는데 뚫린그곳은 근무 태만으로 비상 소집등 불편함을 당하기도 한다. 안양 수리산에서 저녁엔 독도법으로 이동하면 아침이 됬어야 상황 종료가 되었다. 오전에는 취침. 오후는 택권도. 10km구보. 밤에는 일종타서 어느 마을 근처에서밥을 준비해 놓고 독도 법으로 침투밑 군사 훈련에 전념했다. 1년에 한번씩 사단에 가서 유격 훈련도 했었는데 매년 사고로 1, 2명씩 사고로 목숨을 잃는분도 있었다. 여기서 저가 배웠다고 하는것은 죽을 각오로 모든것을 집중해서 해 나간다면 이루지 못할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우리 교회에서도 못한다고 뒤로 물러 서지 말고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해 본다면 우리의 이상세계는 우리가 분명 만들어 낼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보게된다.
8)축복의 은사
1982,10,14일 드디어 6000쌍 축복을 받았다. 이 이전 군에 있을때 약혼을 하였으나 잘 이뤄지지 않았다.
82년 구리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서 오전내 기다리며 나의 대상자를 찿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서 있는데
어느 여성이 화장실에 갔다가 바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순간 아버님께서는 그 여성을 가리키며 너 나와 하는 소리가 있어 기다렸더니 그때 저에게 가라고 아버님께서 정해 주셨다. 그때 집사람을 만 나고 보니 어젯밤 꿈에서 본 얼굴과 똑 같았다.
우리의 만남은 영 호남 만남이다. 2세 3세에 가서는 영 호남도 하나되어 이땅을 복귀하여 영 호남, (동 서) 남과 북 모두가
소통되며 하나되어 하늘이 원하시고 이상 하셨던 평화 이상 세계를 지상, 천상 모두가 하나로 만들어 가야만 겠다고 생각해 보게된다. 6천쌍 축복을 받았고 이젠 유친의 아버님 어머님께 더 열심히 효도 하면서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6500쌍 기성 축복을 받게 만들었다. 축복이후 동원 명령이 내려졌을때 아네는 부안 친정으로 향했다. 논두럭에는 벼이삯이 고개를 숙일때쯤 애기셋을 친정에 보내 놓고 혼자 서울로 이동 하려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부안 서외리 들판을 지나 오면서 몇번이고 뒤로 돌아보며
서울로 향했다. 큰 아들과 두 딸은 그곳에서 엄마 고향 종족 복귀에 함께 동참한 셈이다. 중간 중간 처가을 찿았는데 김제 근무소를 통가 할때면 경상도 서투리 음성을 듣고 경상도 남자가 몇번이고 부안을 왜 왔느냐고 물어댓다. 처가집에 간다고 하였더니 부안아가씨는 착한데가 많다고 하며 이사람 여자 복도 많네 라고했다. 3년이 지나 엄마와 자식들은 자랑스런 수료로 서울에 복귀했다.
9) 7년간 특별정성
축복을 받기전 3년전부터 79년초부터 청파동2가9의1번지 에서 약7년간 철야기도를했다. 처음에는 김재산권사님 기도중에
'식구들이 정성의 탑을 쌓아야한다'. 는 계시를받으시고 식구들에게 권하셨고 나에게도 동참할것을 요청 하셨다.나는 며일을
고민끝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처음부터 기간은 정하지 않았는데 권사님께서 7년은 정성을 드려야 된다.' 고 하셨고 그뒤
로 7년간 매일 철야 기도회에 동참하게 되었다. 0시부터 04시까지는 하늘과 사탄의 싸움이라 하시면서 잡담도 금하셨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만으로 정성을 드려야 된다 하셨기에 그대로 정성의 탑을 쌓아 갔었다. 7년동안 김재산권사님, 홍학실권사님과 저 셋이 함께 기도의 정성을 이어 갔었는데 옥세현 어르신,신옥순 순회사님등 본부교회 권사님께서도 중간 중간 참여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 큰힘이 되었다. 기도하는 깊은 뜻은 하루속히 하늘이 원하시는 이상세계를 꼭 만들어 들이겠다는 깊은 뜻과 참부모님 신변을 지켜 드리겠다는 심정으로 기도로 시작 되었다. 그때부터 마음과 각오를 새로이 하며 기도에 임했다.'신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생각하고 늘 뜻에 대한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에 임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뜻을 받들어 나가시는 교회지도자 모두를 위해 기도의 정성을 이어갔다. 매일같이 철야를 할때면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몸은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은혜가 넘쳐 시간 가는줄 모르고 기도에 임해 갔었다. 때로는 새벽 4시가 훨신 지나는 줄도 모르기가 일쑤였다. 틈 나는 되로 어르신들의 간증으로 교회 초창기의 심정을 느껴 보기도 했었다.
1980년 초에는 김재산 권사님과 전세금을 합해 교회주변 2층단독집을 임대하여 재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낮에는 그
곳에서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로 정성을 모아갔다. 김재산 권사님과 기도할 때면 예수님도 찿아오셨고 참아버님 께서는 늘
영적으로 찿아오시어 앞자리 오른쪽 의자에 앉아 계셨다. 영계에 계신 유효원 전 협회장님도 수시로 찿아 오셨고 통성기도를
할 때는 나의 몸 전체는 불덩어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씩 문이 열리게 되면서 옆사람의 마음 생각도
보여 주셨고 어렵고 힘드신 분들을 위해 기도 해 줄때면 실 타레처럼 하나씩 풀려 가는 현상을 보여 주기도 했었다.7년간의
철야 기도는 6천가정 남자 동원때에도 계속 이어졌다. 낮에는 사업팀에 가서 일을 했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정성으로 이어갔다.
기도를 이어 나가던중 국제연수원 (용산구 한강로의 세계일보사옥에 있었음)매점에서 제일거류민단의 사무총장을 만나서
일본에서 1,000 여 명의 조총련지도자를 초대 하여 교육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사모로부터 1,000여명 정도의 명
단을받아 매일밤 기도하면서 그들이 하늘앞에 협조하고 모두 뜻앞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기도도 했다. 한때는 기도를 통해 안수의 능력을 부여해 주셔서 지병으로 고생하는 식구들이나 정신적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도 손만대면 회복되는 은사의 힘도 보
여 주셨고 어느때는 기도중 몸이 하늘로 치솟는 체험도 하게 하는등 영계에서도 큰 힘을 주는 느낌마져 들었다.
10) 천마산 산산기도회
이후 성전 중심의 기도는 산산기도로 이어졌는데 7일간의 천마산 산산기도는 말 그대로 하늘과 악마가 싸우는 곳이기도 했다.
7일 간의 특별 정성은 악마들과 치열한 싸움의 한판 가운데 무서운 추위에다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도 했었고 추위로 더 이상 기도를 이어갈수 없는 환경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철야를 할 때는 너무추워서 뱃가죽의 감각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냉수욕은 잊지않았다. 힘을다해 쓰러질 것만 같아도 우리의 중심은 하늘에 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했다. 1990년 초에 참 아버님께서 모스크바 대회를 예정하시고 승리를 위해 몸소 심혈을 기울여 기도와 정성을 이어 갈때 김재산 권사님과 나는 한 마음되어 부족함을 채워 드리기 위해 함께 망우리 동민의원에가서 피를 뽑아 통일동에 뿌리며 정성을 이어갔다. 모스크바 대회를 대 승리로 끝내시고 참아버님귀국 하실때 참아버님께서 하사 하신 그금을 김영휘 회장님을 통해 받아 양복과 신발을 사기도 했었다. 철야기도는 매일매일 이어져갔다.
11)원전참배
흥진님 성화후 매년 1월1일 이면 우리가족은 함께 흥진님의 충효열사 정신을 계승 하겠다는 심정으로 파주윈전을 찿았다.
그러나 어느때는 길을 잘못찿아 뱀사골 주변을 한참동안 헤매기도 했었다. 바람추위는 매섭게 불어오고 차안의 스팀(온풍장치)
은 고장나 작동이 잘 안되었다.그래도 우리가족은 개의치 않고세계를 넘어 천주를 향해 몸소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 간다는
심정으로 7년을 멀다않고 원전참배를 다녔다. 진눈개비가 휘날리고 날씨가 유난히 흐리던 어느날에는 다리위 언덕을 지나
가다 미끄러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5인 가족은 태운 우리차는두바퀴를 회전하면서 가까스로 풀뿌리에 걸려 멈추어 섰다.
애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나는 조심조심 밖으로 나와 큰 돌들을 몇개 주어 더 이상 미끄러져 내려 가지 않게 받쳐 놓고
끌어 올릴 방도를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그때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던 군인이 우리들 상황을 목격하고 부대로 갔다가 바로 우리차를 견인해 주려고 조금후 대형차를 끌고 부대원 몇명과 함께 왔다. 또 다른곳에서도 행인이 신고 하였는지 견인차가 바로 도착 하는 중이었다.상업용 견인차가 거의함께 도착했기 때문 군인들은 영업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빨리 부대로 돌아 가야할 상황 이었다. 그러나 선임하사 군인은 견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가정을 알았는지 한참동안 기다리 시다가 상업용 견인차가 떠난 후에야 우리차를 견인해 올려 주었다. 그들에게 큰 도움은 받았지만 그때는 정신이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견인해 준 부대원들이 떠난 한참 후에야 너무나도 감사해서 눈물이 주르럭 흘러 내렸다. 그리고 하늘 부모님 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감사 기도를 올렸다. 순간 떨어졌으면 우리가족 모두는 큰 변을 당할뻔 한 아찔한 순간 이었다. 아래는 30m절벽인데 굴러 떨어 졌다면 우리가족 모두는 큰변을 당할번 했는데 하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실감하게 느낄수 있었다. 하늘앞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파주원전에 도착하게 되면 문훈숙님 께서 꼭 오시었다.
어느때는 캐잌도 사오셨고 먹을것을 사 오시어 나눠 주시기도 하셨다.
12) 사업실패 가정의 수난
교회가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또는 교회의 경사를 앞두고 한 단계씩 정성을 모아 영적인 힘을 보태는 것으로 보람을 찿
았는데 가정 돌보기를 소흘히 하다보니 나중에는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사업에 뛰어 들었다가 실
패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그 무렵 또 청파동에서 지인집에 전세로 살았는데 그집도 일본씩 건물 이고 오래된 집이라 재건
축한다 하여 비워 달라해 그집을 비워주고 개포동 가건물에 와 잠시 살기로 했었다.그러던중 친구가 강남에 건물을 지어자금이 부족해서 내부 인테리어를 못했다며 돈을 빌어주면 완공후 임대라도 받아 준다 하기에 그전세금을 몽땅 빌어 주었다.
그러나 그당시에 IMF가 터지면서 임대도 잘 안되고 친구는 사채까지 끌어당겨 노력해 봤지만 결국 그 건물이 부채를 감당
치 못해 경매로 넘어 갔고 나는 빌어준 돈을 찿지도 못하고 가건물에서 계속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6년정도 거주 했을때
옆집에 불이나서 타들어 가는것을 보고 급히 동네 상황실로가 신고를 하고 돌아와 보니 불은 우리 집까지 옮겨 붙기 시작했고
불길은 더 크게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해 우리 집까지 모두삼켜 버렸다. 애들은 서로 부등겨 안고 펄펄 뛰며 울고있고 내가 모아오던 고서적이며 존영이며 작품으로 만들어 오던 우표작품집등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참혹하기 이루 말할수 없었다. 하지만 4남매 생명을 지켜주신 하늘 앞에 감사를 드리며 한없이 울어 보기도 했었다.
13) 80일 수련
이후로 주야를 가리지않고 여러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심끝에 '내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자'결심하고 청평
수런소를 찿아가서 40일수련 (9차 12차 )이어서 80일을 연장해 수련을 끝내고 마음의 안정을 찿으면서 새롭게 출발 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귀가해서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 하기로 하고 최선을 다하며 나날을 보냈다. 어느 여
름날 저녁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 하는것만 같았다.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느
냐? 돈은 때가 되면 주머니를 채우는법, 돈 찿아가지 말고 쉼 없이 기도하라 모든것을 채워 주실것이다.'하는 암시를 주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입교 초기에는 선친의 남다른 불심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있었지만 그정성의 마음이 모르는 사이 나에게 전수되어 나의 신앙생활에 배어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또 필생의 피나는 정성으로 오늘의 진안마이산탑사(鎭安馬耳山塔寺)를있게 한 이갑룡 선사의 혈통으로서 그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하는 때가 많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내가 겪어 나가는 모든 일에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격려로 하늘이 함께 하심을 실감하게 되었고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참부모님이 계셨기에 뜻에대한 불변의 심정으로 오늘도 앞만 보고 전진 또전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14) 아내의 신앙 입교(김현숙)
76년 3, 25 전북 부안교회에서 강기범목사님의 권유로입교했다. 처음엔 신앙엔 간심 없긴하였으나 끈질긴 상담과 대화속에
서 입교하게 된것이다.신앙을 시작하면서 부터 집에서는 허락지 않으셔서 감나무를 잡고 담을 넘고 다녔다. 반대를 했는데
난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 그당시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신앙을 하면서 전주 일식석재에 다녔다. 친구도 많아지고
차차 재미를 느끼게되니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열심히 일했더니 우수사원으로 선발되어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
그당시 일본교회에서는 화병에 큰 변화가 몰려왔다. 조상이 꿈에 나타나 화병을 사 달라는 분도 계셨고 화병을 사서 동리 가
운데 두라는분도 계셨고 화병에 큰 붐을 이르켰다.일본에서'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서 나도 전도 활동도'열심히
했다. 그러다 82년도 6000쌍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오빠6000쌍 남동생을 전도해 3만가정 축복에 동참시켰다.
가정복귀를 하나씩 해 나가면서 나의 신앙도 키워 나갔다. 축복이후 임지는 부산으로 정해져 처음 으로 부산을 가게되었다. 임지생활중 기동대로 편성되어 사업과 전도를 겸하며 부산토성을 누비고 다녔다. 가는 곳곳마다 쉬운일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범내골 눈물의 바위 잊을수 없다.그곳에서 기도를 하니 두 눈에는 눈물이 번벅이 되었다. 아버님의 한의 역사를 느껴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족 천보입적 완료가정 (4가정)
정옥진(이영성) 기성1800축복받아 큰누나
이순형(이선숙) 777가정 작은누나
니시무라(이두혜) 6500가정 여동생
우만호 (이가진) 2세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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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최경아 )아버지 어머니 기성 6500가정
축복받으시고 사시다가 성화 하심
나 6000가정
우리가족은 이복우 김향지 메느리
자녀 이권기 이가화 사위
우만호 이가진 사위 (코스타리카 협회장)
토미다요시타카 이가원 사위
난 천력2년 천일국주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