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지는 사람 1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인사(人事)가 아닐세.
남궁두와 전우치가 정휴를 위로했다.
그러나 정휴의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주인에게 전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든 귀신의조화이든,
어쨌든 정휴 자신의 잘못이었다.
정휴는 용서를 구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더서글펐다.
화담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함은 그사실을 모르는 채
지금 어느 지방을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년 삼월이나 되어야 지함을만날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정휴는 계룡산 고청봉 용화사로 돌아왔다.
전우치와남궁두는 신원사 계곡으로 떠나갔다.
용화사 주지 혜명(慧明)은 마침내
정휴의 행자생활을 면제시켜주었다.
벌써 오래 전에 명초에게서받아두었던 도첩을
이제야 인정하였던 것이다.
절 살림은 전보다 훨씬 넉넉해져 있었다.
윤원형의누이로서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보호한 덕분에
산골구석의 사찰까지도
그 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휴는 오랜만에 아침 저녁 예불에도 참석하며
중다운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으로 두번에 나누어
참선 수행에도 힘을 썼다.
그러는 중에도 불에 타버린 <진결>이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흔들리곤 했으나 애써 물리쳤다.
그래도 정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에는
명초 방장이 읽던
벽암록(碧巖錄)>이나 <조주록(趙州錄)>,
<선문염송>
같은 화두집(話頭集)을 펴놓고 읽었다.
울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철에 중들이 한 곳에 모여서 수행을 하는
동안거,
정휴는 정식으로 중이 된 이후
처음으로참여하게 되었다.
이 동안거 기간인 음력 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15일까지 중들은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좌선하면서수행만 했다.
정식으로 중이 된 정휴는 연일 지게를지고
고청봉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울력에서 아주 빠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목하니시절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동안거가 끝났다.
석 달이 삼십 년이나 되는 듯 긴
시간이 지난 것이다.
화담이 말한 임자년(壬子年, 1552) 삼월 여드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결>이야 불에 타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지함을 만나 그런 사실이있었다는 말만이라도
전해야 했다.
전우치, 남궁두도 계룡산 생활을 정리하고,
지함의문하에 들어가기 위해 용화사로 왔다.
삼월 초하루가 되어 세 사람은 마침내
송악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동안 비어 있었을 산방 청소도 하고
지붕도 고치면서 지함을 기다리기로 했다.
화담계곡에 오르니 멀리 산방이 보였다.
"아니, 연기가 오르지 않는가?"
남궁두가 산방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과연 산방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아지랑이가 하늘로 오르듯이
하늘거리는 연기에정휴는 봄을 느꼈다.
" 형님이 벌써 돌아오셨나?"
어서 가보세. 아무리 화담이라고 한들
설마 지함이돌아올 날짜까지 정확히 맞출려구?"
전우치가 말했다.
정휴는 연기를 피운 사람이 지함이든 아니든
화담산방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반갑기만 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산방으로 올라갔다.
누구시오?"
산방에 이르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함의목소리는 아니었다.
"정휴라는 중입니다."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박지화였다.
"저는 이지함 선비를 잘 아는
계룡산 용화사의중입니다.
작년 봄에 여기에 들렀다가 화담 선생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아, 정휴 스님. 이야기는 진작 많이 들었소.
그런데 또 그 소리를 듣는군."
"예? 무슨 말씀을..."
"화담 선생님이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을두고 하는 말이오.
내가 추석 때까지 화담 선생님을뫼시고
주유를 다녔는데,
이곳 사람들은 작년 4월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원..."
"아, 그렇다면 지함 형님 하고 함께 다니신
바로 그선비님이시군요."
"그렇소만..."
"그런데 어떻게 혼자서만?"
" 지함은 아직 안 돌아왔소.
나는 돌림병에 걸려몸이 쇠약해져서
개마산(蓋馬山)까지 갔다가 중도에돌아왔고,
지함은 계속 주유를 더 하기로 하여 길을갈랐소."
"그랬군요..."
"그건 그렇고,
도대체 화담 선생님이 어떻게되었다는 건지
속 시원히 말 좀 해보시오."
"제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지요."
"안으로들 드시오.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박지화는 정휴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야기를 다시 재촉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요?
화담 선생님이 봄에돌아가셨다니...?"
"선생님은 여기 송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작년사월 초닷새 청명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청명일이면 화담 선생님은
우리와 한양 가회동 이지번 선비 댁에 있었는데..."
박지화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을 이었다.
"그 후로도 화담 선생님은 우리와 내내 같이 여행을하셨소.
화담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은팔월이었소.
경주 박 진사 집에 머물고 있을때였지요.
기력이 쇠하여 더이상 함께 주유를 할 수없다는
서찰을 남겨두시고 종적없이 사라지셨지요.
그런데 그 화담 선생님이 청명일에 이미
돌아가셨다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려.
분명 팔월까지는 우리와 함께 다니셨단 말이오.
그런데 청명일에 돌아가셨다니,
그렇다면 우리가
귀신하고 같이 돌아다녔단 말인가요?
도대체 선생님이 돌아오신 때가 언제였소?"
"작년 이맘 때였습니다.
세 분이 여행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오셨습니다."
"추석 지나고 돌아오신 게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박지화가 한번 더 물었다.
"그렇습니다. 삼월 열흘인가 열하룻날인가,
그때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정말 화담 선생님께서
여기 돌아오신 게 그때였는가...?"
"그렇다니까요. 돌아가신 날짜가 분명
청명일이었다니까요."
박지화는 넋을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수 없었다.
정휴가 거짓말을 할 리도 만무했다.
그렇다면...?
박지화는 지난 봄과 여름 내내 함께 여행을 한
그화담이란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더럭 의심이 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음식을 잘 드시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박지화는 화담과 함께 여행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걸음도 우리보다 날래셨고...
그렇지. 호랑이를만났을 때도 그랬지.
그때도 정말 이상했어.
우리에겐금방 잡아먹을 듯 기세등등하게 대들던
그 무서운호랑이가
선생님을 보더니만 슬슬 꽁무니를 빼더란말야..."
박지화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선화(仙化)한 몸으로
우리를인도하신 거로군."
박지화가 눈을 감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이구 선생님! 천수(天壽)를 다 잃고
지수(地壽)로 사신다더니
그마저 끊어지니 영영가셨군요."
박지화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미 몸을 빠져나간 혼(魂)을 잡고
백(魄)으로 다니셨던 것입니다.
저도 오죽하면 화담선생님의 묘까지 파보고
확인했겠습니까."
"그런 일까지 있었소?"
"박 선비님이 지금 화담 선생님의 임종 날짜 때문에
혼란스럽듯이 저도 작년 여름에 제 손으로 파묻었던
화담 선생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묘를 직접 파보고확인까지 했지요."
정휴는 지난해에 겪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화담 선생님께서 지함에게 책을 남기셨다구요?"
정휴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박지화가 물었다.
"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함이 내년 삼월여드레 유시에 돌아올 것이니
그때 이 책을 꼭전하라,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정휴는 화담에게서 전해 받은 <홍연진결>을
지함에게 전하기 위해 겪었던 고초를
박지화에게소상히 말해주었다.
"고생하셨소이다."
"고생을 했으면 보람이 있어야 되는데,
그만 그<진결>이 타버리지 않았습니까?"
"<진결>이 타버렸다구요?"
"저희가 고생고생해서
울진에 있는 어떤 주막에이르러서 보니까
형님은 이미 주막을 떠나고없었습니다.
저희가 형님이 묵었던 방에 들어가니까
바로 그 방안에 있는 화로 안에
그 책이 재로 화해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난 다음에 바로 당도했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걸 형님이 태우셨다니..."
"그 책이 화담 선생님이 쓰신 것이 확실합니까?
책제목이 다르던데...
그 책 제목은 <신서비해>였소."
" 제목이야 뭐로 둔갑했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화담선생님이 쓰신
그 <홍연진결>이었습니다.
저희가 타다남은 종이를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그 책이었습니다."
"어허, 이 노릇을 어쩐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곧 지함 형님께서 돌아오실텐데,
할 말이 없습니다."
정휴가 난감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그걸 왜 태우셨습니까?"
"말도 마시오. 그 책 때문에 나나 이지함 그 사람,
목이 날아갈 뻔했습니다.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아이의부친은
칼에 찔려 죽었지요."
박지화는 울진에서 겪었던 일을 정휴에게
말해주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그걸 불지르셨군요."
"그렇구말구요. 그 책을 계속 지니고 있다 보면
어떤 목숨이 더 사라질지 모르는 판국이니
태워없애야 했지요."
"아이구,
그렇지만 화담 선생님께서 지함 형님께
꼭전하라던 책인데...
그 책을 책 주인이 태워버리다니..."
"주인이 자기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불을 지른셈이군..."
"저는 지함 형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만 사실은사실대로 알려야겠기에..."
잠시 뒤 마음을 가다듬은 정휴는
박지화에게 화담선생의 주유에 관해
하나하나씩 물어갔다.
두륜산에서 왜 다른 길로 빠졌는지,
지리산산천재에는 가지 않겠다고
서찰까지 보냈다가 왜갔는지,
정휴는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면서
정휴는 화담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겪었던
그간의고초를 박지화에게 털어놓고,
박지화는 박지화대로
울진까지 갔던 노정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홍성에서는 왜 갑자기 배를 타고 해남으로
떠나가셨습니까?"
"선생님이 그리 하자고 하셨소.
갑자기 바다로나가자고 하시더니
막무가내로 어선에 올라타셨소.
우리도 어리둥절했지요."
"말씀을 듣고 보니, 일부러 저를 따돌리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를 만날까봐 피하셨던 것같습니다."
"그도 그럴 듯한 해석이군요."
"두륜산을 넘어서는 왜 곧장 오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밤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허탕만 쳤습니다."
"그것도 화담 선생님 때문이오.
두륜산을 넘어 화순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길을바꾸어 해사로 향하셨소.
아마도 스님 일행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신 모양이오."
"그러니 만날 리가... 그래서 저희는 지리산에는
반드시 들르시리라 짐작하고 앞질러 갔더니
화담선생님의 서찰이 와 있습디다.
몸이 불편하여한양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내용이었지요."
"선생님은 내내 우리보다 더 건강하셨소.
한번 아픈적도 없었소.
진지를 한 끼도 안 드셨는데도..."
"그러면 그때도 일부러 저희를 따돌리려고 거짓으로
편지를 쓰신 거로군요."
"그런 것 같소."
"나중에 남명 선생이
화담 선생님의 깊은 뜻을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희는 약 오르고 분해서속이 터졌을 겁니다."
"그래, 남명 선생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 화담 선생님은 현신이었답니다.
이미 육신을잃어버린 혼백이
지기를 받아 돌아다니는 거라구요."
"화담 선생님이 현신하셨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괜찮게요.
울진에서 그 책이잿더미로 변한 것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낙담했는지모릅니다.
선생님이 책을 바꿔놓기까지는 했는데,
지함 형님이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만태워버렸으니..."
"우리는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소."
"화담 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이제 혼백이 다 흩어졌으니
다시 현신해서 책을 지으실 수도 없고...
이를 어쩌면좋습니까?"
첫댓글 오늘도 흥미진진한 글 즐독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할아버지께 듣던 옛날이야기 같은 글입니다.